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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164화 (164/255)

의무병의 환생 164화

골드리안의 본가는 영지 뒤편에 위치한 산지를 모두 차지하는 상태.

그중 구관과 신관은 길이 뚫려있는 장소에 위치해 있지만, 별채의 경우는 숲 한가운데에 세웠을 정도로 인적이 매우 드문 곳이었다.

그런 장소의 입구에서부터 호위가 깔려 있는 광경이라니, 누가 보더라도 수상하게 보이지 않는가?

'저것도 안주인 아가씨의 지시인 듯한데…….'

엘레오노라의 입을 통해 들은 것은 아니었다.

당초 그 마차에서 내릴 무렵, 그녀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빌헬름의 부축을 받아 저택으로 돌아가 버렸으니까.

'긴 말은 하지 않을게요. 그레이스에겐 관심을 가지지 말아주세요.'

'그건…….'

'모두를 위한 일이에요.'

모두.

첩실들도 받아주는 넓은 아량을 생각하면, 그 모두에는 셰인도 속해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레이스 본인은 어떨까?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녀가 머무르는 별채가 지켜지는 광경을 보는 현재, 셰인은 저 별채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닌 가두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그 안주인 아가씨가 그녀를 상대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한다면?'

가장 늦게 받아들인 첩실이라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테올린도 중요한 이유가 있어 그녀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모두에게 호의적인 엘레오노라가 보였던 반응 역시도…….

흘려 넘기기엔 수상쩍은 부분이 너무나도 많지 않은가?

"범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조사해볼 가치는 있겠지."

그리고 그 과정은 은밀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때로는 최전선보다도 깊은, 적지 한가운데까지 가서 병사를 구출했던 몸.

잠입은 카일이 이끌었던 의무부대에 있어 기본적인 소양이었다.

"저쪽에서 뭔가 소리가 났는데?"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한 번 가봐."

교묘히 던진 조약돌의 소리에 시선이 끌린 한 보초.

셰인은 그 틈을 타, 입구를 지키는 보초의 눈이 들지 않는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인가.'

식품창고.

그것도 꽤나 많은 재료가 보관되어있지만, 본가에서 먹던 음식들과 달리 대부분이 '보존식'으로 분류되는 것이었다.

본가와도 떨어져 있지만, 식사 자체도 이곳에서 처리하는 듯 보였다.

'아주 외부와 철저히 격리시켜 놓았군.'

식량의 양을 보니 몇 사람이 몇 달은 족히 먹을 양이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 별채에 머무르고 있는 사용인과 호위의 숫자가 결코 적지 않다는 걸.

"뭐, 뭐야!?"

마침 창고에 들어온 이가 그것을 바로 증명해 주었다.

집사복을 걸치고 있는 남자.

아마도 이곳에서 일하는 사용인인 듯하였다.

셰인이 바로 그에게로 달려가 입을 틀어막았다.

"으브읍, 으븝!!"

제 몸에 안겨진 채로 발버둥을 치는 집사.

조금이라도 입을 때면 바로 소리를 지를 듯하다.

"쉿, 조용히 해요."

셰인이 그와 얼굴을 맞댄 채 손가락을 제 입가로 가져갔다.

그 행위가 무색하게도 더욱이 달싹이는 남자.

두 눈에 글썽이는 눈물은 그만큼 겁에 질렸음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제 얼굴이 그렇게 무섭게 생겨서인가?

'아, 나 지금 가면 쓰고 있었지.'

얼굴을 숨기기 위해 까마귀 상의 방독면을 쓴 상태.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사신이라도 발을 들인 게 아닐까 겁을 먹으리라.

그나마 제 정체를 들키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이렇게 난동을 치게 둘 수도 없는 노릇.

"으쁘읍! 쁘으으읍!!"

"조용히 하라니까."

-꽈앙!

정수리를 쥐어박기 무섭게 축 늘어진 남자.

눈이 까뒤집힌 것으로 보아 가벼운 뇌진탕에 의식을 잃은 듯하였다.

힘조절은 했으니 괜찮겠지.

그렇게 그의 몸을 창고 한가운데에 쑤셔 박은 후, 셰인이 창고를 벗어나 별채의 복도를 소리 없이 가로질러갔다.

다행히도 감시 자체는 그렇게 엄중하지 않다.

신경을 쓰는 건 입구뿐.

내부는 유령저택이라도 되듯 허하기 그지없었으니…….

'아니, 본래 감시를 서는 인원이 있긴 하다.'

어느 정도 복도를 거니니 방 한가운데에 소란이 이는 것이 들려왔다.

머무르는 이들이 휴식처로 쓴다 추정이 되는 방.

그곳의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이, 손에 쥔 구슬을 가지고 돈 놀음을 하고 있었다.

"홀."

"아깝네, 짝이야~"

"야야, 오늘 처음 하는 녀석한테 이렇게 털리면 어떻게 하냐?"

"시끄러워 이 새끼야."

그들은 문틈을 통해 자신을 지켜보는 자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손에 쥔 구슬을 가지고 홀짝놀이를 하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휴식 중의 가벼운 도박……. 이라고 하기엔 소란이 너무 큰 게 문제다.

자신들이 있는 곳은 물론이고, 이 저택에 머무르는 이의 안위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알리 너 이 새끼. 너 속임수 썼지?"

"혀, 형. 왜 그래요?"

"네가 어떻게 계속 이길 수가 있어? 이 게임 확률이 반반인데."

"아니……."

"야 이 새끼야 이 상황이 말이 안 되잖아 지금!! 너 날 속인 거 맞잖아! 이런 거 해본 적 없다며!!"

"에헤이! 저 멍청이 뭐하는 거야?"

"저 녀석이 이긴다에 건다."

"나는 알리."

도박 중의 분쟁마저도 도박으로 삼는 경비병들.

그들을 보고 있던 셰인이 혀를 차며 자리에서 등을 돌렸다.

"위나 아래나 썩어가는 건 마찬가지군."

본가에서 멀리 떨어진 채 방치되어서 그런 것일까?

그만큼 테올린의 눈이 들지 않는 장소라는 것을 실감했지만, 그렇기에 그레이스라는 인물에 대한 의구심이 더욱 커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그녀는 왜 가문에 들어온 후 단 한 번도 테올린을 마주하려 들지 않은 것인지.'

'그리고 왜 엘레오노라는 그런 그녀를 위해 이 별채를 마련해주고, 아무에게도 이곳에 들어서지 말라 엄금을 한 것인지.'

만약 그것이 그녀의 켕기는 부분을 배려했기 때문이고, 그레이스가 그런 배려를 이용해 수면 아래에서부터 아리엣에게 수작을 부린 것이라면?

"……일단 마주해봐야 알겠지."

이내 도착하게 된 방 문의 앞.

규모가 제일 큰 것으로 보아 그레이스가 머무르는 듯 보였지만, 정작 그곳을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경비병들이 부패했다지만 너무나도 수월한 잠입. 오히려 너무 일이 쉽게 풀려 수상쩍을 정도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도 없지만.'

침을 삼키며 경계심을 곤두세운 셰인이, 곧 방의 입구에 손을 뻗어 그 문을 조심히 열어젖혔다.

-딸칵.

열린 문의 틈을 통해 보이는 건 상당한 크기의 방.

하지만 그 곳곳이 심하게 어질러져 있다.

무언가 난동을 부린 듯 깨진 파편이 널브러지고, 그 사이에 방치된 음식물엔 쥐새끼들이 꼬일 정도다.

오래 방치된 것만 아니었어도 습격이 일어났다 생각될 정도의 난장판.

하지만 그런 장소임에도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저자가, 그레이스……?'

검고 낡은 드레스만을 입은 채 침대에 앉아 있는 여인.

그런 그녀가 제 앞에 있는 창문에서 내리쬐는 달빛을 앞둔 채, 양손을 맞잡으며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주님에게 소망하옵니다."

그래, 분명 기도였다.

그녀는 방에 셰인이 들어왔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한 채, 그저 하늘을 향해 절박한 목소리로 속삭일 뿐.

"주님에게 간청 드리옵니다. 저의 마음이 결코 더럽혀지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소서. 설령 이 삶에 가혹함이 내려질지언정 그 또한 당신이 내려주신 시련으로 받아들이고 참고 견딜 터이니……. 그러니 부디 이 앞날에 빛을 비추어주소서. 이 몸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이 몸이 더럽혀지지 않았음을 증명하게 해주소서."

횡설수설 이어지는 기도.

고개만은 달빛으로 향해져 있지만 목소리가 심히 떨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굉장히 힘이 없고 조용하다.

마치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않은 것처럼……

'아니, 먹긴 했네.'

먹은 것이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니라 문제지.

이런 어두운 방 안에서 썩어간 채 방치된 음식들을 먹고 있으니,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러니 부디 저의 마음을 알아주시고……."

그런 그녀가 왜 이렇게 극한의 상황이 내몰려 있는가.

-부스럭.

그것을 알기 위해선 그녀를 직접 대면할 필요가 있다.

"누, 누구……?"

유리파편이 구둣발에 밟히는 소리.

그와 함께 그레이스의 몸이 크게 경직되었다.

아직 달빛이 들지 않는 어둠 속에 그녀를 응시하니, 인영만을 눈으로 쫓은 그레이스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 주님께서 보내신 사자신가요?"

기도 중에 찾아온 자이니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겠지.

기댈 곳이 없을수록. 궁지에 몰려있을수록, 인간이란 자신들에게 찾아오는 변화가 초월적인 무언가에 의한 것임을 바라고 있으니까.

"주님 제발……."

그래, 지금 당장의 모습만을 보았을 때.

그레이스 골드리안은 그저 가련하고 불쌍한 여인에 불과할 뿐이었다.

어떤 사정이 얽혀있는지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당장의 모습만을 본다면.

"제발, 제 무고를 증명해주세요. 저, 저는 이 마음에 맹세코 죄를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그, 그럼에도 왜 이런 일을…. 제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아무런 설명도 해주시지 않으시고……."

돌아오는 보답이 없는 기도에 서서히 불신을 품고, 원망을 가지는 모습 역시도.

지금의 모습이 너무나도 처참하기에, 사정을 모르는 상황에서도 동정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제발, 하다못해 이유라도 설명을 해주세요. 제가 왜 이런 일을 겪었는지…. 제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서며 셰인이 말했다.

제 얼굴을 감추고 있는 가면마저 벗으며, 그런 행동으로나마 그녀가 자신을 향한 적의를 풀어주기 바라기에.

"딱히 당신에게 해를 끼치러 온 게 아니니까."

일단은…….

그래, 일단은 이 나약한 여인이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주기를 바라보도록 하자.

그녀를 벌할지 말지는 이후 사정을 들어본 후에도 충분할 테니까.

"……테, 테올린?"

그런 이유로 최대한 부드러운 태도를 취하니, 그녀의 입에서 제 형의 이름이 내뱉어졌다.

어디까지나 얼굴이 닮았기에 착각한 것 뿐.

"아, 아아……!!!"

하지만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폭발시키기엔 충분할 것이다.

곧 그레이스가 침대에서 어쩔 줄 몰라 하다, 이내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테올린.제, 제가 감히 당신에게 죽을죄를 저지르고 말았어요. 이런 중대한 일을 당신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숨겨버리다니!"

"죄송하지만 전 형님이…."

"하지만 전 정말로 모르는 일이에요. 왜 저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는데…. 그런데, 왜……. 아아아아아!!"

이윽고 입에서 내뱉어지는 비명은 죄책감이 되어 방 안을 어지럽혀갔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셰인이 주춤거리다, 제 앞에 있는 여인의 몸을 보고 숨통을 멈추고 말았다.

'잠깐, 이 사람 배가…….'

"꺄악!"

상태를 마저 살피려는 것도 잠시.

문득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셰인의 시선이 곤두세워졌다.

이런, 상대한테 너무 집중했다.

다급히 상황을 살피고자 입구를 돌아보니, 입가에 손을 올리고 있는 한 여인이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고 있는 드레스는 사용인이 아닌 귀족이 입을 법한 것.

직접 마주해본 적은 없지만, 셰인은 그녀가 테올린과 맺어진 첩실 중 한 명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다들 이쪽으로 와주세요! 여기 괴한이 침입했어요!!"

그리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는 첩실.

젠장, 상황이 좋지 않다.

다급히 그녀를 뒤따라가 오해를 풀어보려 했지만, 그 전에 누군가가 제 소매를 잡는 것이 먼저였다.

"제발……."

메마른 손가락으로 제 소매를 움켜쥐고 있는 그레이스.

"제발, 제 얘기를 들어 주세요……."

몇 달간 방치된 그 처참한 모습으로, 자신에게서 제 형을 보며 죄의식을 표출하는 여인.

그런 여인을 차마 떨쳐내지 못한 셰인이, 이내 자리에 선 채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상황 참 더럽게 꼬여가네.'

그 시선을 여전히 그녀의 배 쪽으로 향한 채로.

차마 떼어둘 수 없는 그 시선의 너머엔, 이전에 자신에게 경고를 날렸던 이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 * *

"라라티나에게 잠시 그레이스의 안부를 살펴 달라 부탁했어요. 공교롭게도 저는 별채까지 쉬이 갈 수 없는 몸이니."

엘레오노라 골드리안.

정원에서 홀로 티타임을 가지던 그녀가, 곧 자신의 배에 손을 올린 채로 무거운 목소리를 말했다.

그 앞에 서 있는 것은 면목이 없다는 듯 뒷짐을 지고 있는 사제복의 청년.

"그런데 결국 제 경고를 무시하고 그녀를 찾으러 가셨군요."

"……화나셨나요?"

"네, 무척이나."

찻잔이 접시 위에 내려앉는다.

마치 천근의 무게라도 그곳에 내려앉듯.

"그야 테올린에게도 숨기고 있던 비밀을 파헤치신 거니까요."

이후 제 배에 손을 올리는 그녀의 얼굴엔, 한 가문을 지탱하는 안주인의 위엄이 돋보이고 있었다.

가문에 위협이 되는 자를 마주한 것처럼.

"첩이 된 자가 외간남자의 아이를 품은 채로 가문에 들어왔다니. 이 소식이 알려진다면 가문이 발칵 뒤집어지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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