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165화 (165/255)

의무병의 환생 165화

그나마 다행인 건 현장을 살핀 인원이 극소수라는 것.

당시 소란을 듣고 경비병들이 뒤늦게 몰려오긴 했지만, 셰인이 그들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했기에 사태가 커지는 건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비밀리에 감춰진 인물에 대한 미약한 의구심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

지금 셰인이 불려온 이유 역시 그런 통제의 일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레이스는, 본래 변경에 위치한 가문의 자식이었어요. 흔히 '이름 없는 귀족'이라고 불리는 가문의……."

이름 없는 귀족.

분수에 맞지 않게 가세가 크게 기울어, 몇 년 내에 귀족으로써의 권리가 압수될 처지에 놓인 이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 가문에서 그녀를 첩으로 들이는 것을 대가로, 테올린은 그 가문의 이름이 유지될 정도로 최소한의 지원을 해주기로 했어요."

"형님께선 왜 그녀를 가문에 들이신 거죠?"

"글쎄요, 저는 테올린이 하는 일엔 가급적 간섭하지 않으려 하지만……. 아마 변경 지대에 영향력을 가지고 싶어서라 생각해요."

"영향력?"

"가문이 이끄는 상회인 골드핸드는 제국의 중심부를 기점으로 운영되고 있으니까요. 변경은 중요도가 떨어지니 관심밖에 두는 곳이지만, 몇 년 전부터 그곳을 기점으로 크게 성장 중인 상회를 견제할 필요가 생겼거든요."

요컨대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으로, 그곳에도 골드핸드의 입김이 닿을 필요가 생겼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보다 제대로 된 가문들도 존재할 터인데.

"그런데 왜 굳이 이름도 없는 귀족가에서 사람을 들였는가……."

엘레오노라는 그에 대한 답을 짐작하는 상태였다.

단순 추측이 아닌 확신마저 가질 정도로.

"그건 변경에 있는 귀족들 중, 유일하게 그녀가 테올린이 내건 조건을 충족했기 때문일 거예요."

"조건이라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줄 것."

"……."

잠시 셰인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랑…….

사랑이라니.

그것만큼 정치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또 어디 있을까.

혼약조차도 정치의 수단으로 삼아야 하는 귀족에게 있어, 거기에 사랑을 논하는 것은 누구라도 어리석다 생각할 것이다.

원칙주의자인 테올린이라면 더더욱 그와 거리를 둘 터.

"테올린은 많은 걸 책임진 몸이에요."

하지만 엘레오노라는 그를 대변하듯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진심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고, 제 곁에 둘 사람도 신중히 고려할 수밖에 없죠. 그리고 그렇게 제 곁에 둔 사람에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베풀어주고자 하고요."

시작은 그 역시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지만 과정은 수단일지언정, 자신을 사랑해주는 자에게만은 그만한 보상을 내어준다.

그렇게 보상을 주는 중, 그들을 향한 사랑이 개화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일 터.

"그 또한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가지기 위한 일이라 할 수 있겠죠. 상인은 신뢰를 중시하고, 사랑이란 별다른 증명 없이도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수단이니까."

배신자가 속출하는 마당이다.

후계자 싸움을 했을 적부터 확실한 증거를 거머쥐지 못했을 뿐, 그런 의혹 정도는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하다못해 자신의 손으로 간택한 반려만이라도, 자신을 배신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건으로 사랑을 내건 것이다.

"도련님, 저희들은……. 본가를 벗어나 이 가문에 들어온 모두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그로부터 비롯된 유대가 있기에, 저희들은 다른 가문과 달리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함께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었죠."

서로가 질투 하나 없이 화기애애하게.

그 이상향은 테올린의 결정과, 정실인 엘레오노라의 아량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래, 단순히 권력에 미친 자가 아니라면 이런 방침은 고려할 수 없었겠지.

그것을 자각했기에, 제 앞에 있는 자가 하는 말 역시 그만큼 진지하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테올린이 그레이스를 저택에 데리고 왔을 때, 저는 그녀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녀를 만났을 때 확신을 가졌죠. 그 아이 역시 진심으로 테올린을 사랑하기에 이 가문에 온 것이라고."

그리 말하고 제 배를 쓰다듬는 엘레오노라.

머지않아 태어날 아이를 내려다보는 눈에 묘한 회의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때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을 본 게 저 뿐이었던 게 다행이었죠."

입덧.

생명을 품었을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전조.

그때를 회고하는 엘레오노라가, 이윽고 자신을 향한 원망을 비추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려갔다.

"처음엔 그저 몸이 안 좋다고 여겨 별채로 요양을 보내었죠. 하지만 다음에 찾아갔을 때엔 저만큼이나 배가 부풀어 올라 있었고, 그때가 되니 저도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채게 되었죠."

"……형님과 미리 관계를, 맺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신뢰를 위해서 서로가 보는 앞에서만 관계를 맺기로 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테올린이 저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겠죠."

확실히 모두가 같은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다고 했었다.

그저 문란한 문화가 아닌, 그 때만큼은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을 드러낼 수 있다 굳게 믿고 있으니.

그로부터 신뢰가 생겨난 만큼, 그를 의심한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셰인 도련님."

그래, 지금의 말은.

테올린이 그녀의 사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아직 무지한 그를 신뢰하기에,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이 사태를 숨기기로 판단한 것이다.

"그레이스 역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이곳에 왔던 거겠죠. 하지만 사랑이라는 건 평생에 한 사람만을 향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시기적으로도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이 가문에 오기 직전에 누군가와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면. 이 가문에 왔을 적에 반응이 오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저는, 그 아이가 솔직하게라도 얘기해 주길 바랐어요. 그렇게라도 용서를 빌어주기를."

"용서라니……."

말꼬리를 흐리는 셰인이 뒤이어 말을 이었다.

"설마, 안주인님께선 그레이스 씨를 의심하고 계신 겁니까?"

제 형을 사랑하는 마음을 진심임을 파악한 그녀가.

저택에 오기 전에 다른 남자와 정말로 관계를 맺었다고?

"그럼 악마라도 그녀에게 다녀갔다는 건가요?"

흠칫.

셰인의 몸이 크게 떨렸다.

엘레오노라는 그 반응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도련님. 그 아이가 당신을 마주했을 때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시나요?"

"그건……."

"자신이 무고하다고, 진심으로 테올린만을 사랑했다고 말을 했겠죠. 그리고 죄를 감추기 위한 거짓말은 더 큰 오해로 바뀌는 법이고요."

뒤늦게 셰인은 엘레오노라가 왜 그녀를 숨기려고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녀의 무고가 증명되는 것은, 보다 큰 죄악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일이니까.

"그래요, 도련님. 지금 이 상황은 단순한 불륜이라고 여길 수 없는 상황이에요. 교단의 영향력이 큰 이 나라에선."

엘레오노라 골드리안.

그녀는 그저 사려 깊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출중하기에 분쟁이 예정된 첩실들과도 친목을 다진 것.

그런 그녀의 눈엔 그레이스는 분명 순수하게, 진심으로 테올린을 사랑하겠지만, 이 나라에선 그런 순수함이 도리어 악으로써 다가올 수가 있다.

5년 전의 재판이 그랬다.

공작가의 아이조차도 저주를 받았다 폄하했던 그 현장을, 셰인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현재.

아직 그 풍조가 바뀌었다고, 셰인은 차마 확신을 가지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도련님께선 이 일에서 관심을 거둬주세요. 그 별채에 대한 건 모두 잊고, 가문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해 주셨으면 해요."

이윽고 얘기를 마무리 짓는 엘레오노라가 다시 찻잔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그저 자신에게 사연을 설명해주고 입단속을 시키는 것이 끝.

그 외에 별다른 처리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저를 통제하진 않으시는 겁니까?"

"통제라니, 그런 게 필요할 리가 없잖아요."

고개를 돌린 채로, 정원의 너머에 내려다보이는 영지를 찬찬히 둘러보는 엘레오노라.

"당신이 빛을 거머쥐었다는 게 사실이라면, 이 이상 곤란한 일은 하지 않으려 들지 않을 테니까."

뒷모습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미소는 자신을 향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일까?

* * *

탄생의 저주.

이 제국에선 신성력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증상을 일컫는 말.

그런 저주를 극복하고 성공한 이들을 세간에선 성인으로 취급하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버려진 자들의 반발을 다스리기 위한 희망고문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 벌어진 일은 그것보다도 훨씬 질이 나쁘다.'

단순히 배에 가스가 차거나 한 것도 아니다.

실제로 배를 만졌을 때에 태동은 확실히 느껴졌었다.

분명 아이가 있다는 의미.

누가 보더라도 '첩실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품고 가문데 들어왔다'고 여길 수밖에 없으며, 정치에 민감한 귀족사회에선 사실상 권력의 붕괴로도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

그리고 그건 즉 자택을 관리하던 이가 그 비밀을 알아차렸기에…….

그 입단속을 위해 암살을 사주했다는 가능성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설마 테올린은 그걸 눈치 채고, 일단 덮어두려고 했던 것인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것을 조건으로 걸었던 녀석이 아닌가?

그런 여인이 왜 자신의 충직한 사용인을 살해한 것인지.

그에 대한 흔적을 발견했지만, 역시 혼란스럽기에 이 상황을 어찌 해결할지 감을 잡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묻어두고 결정하자고…….

당장의 상황만을 놓고 본다면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 이것도 결국엔 추측이지.'

결국에는 그레이스가 아리엣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고, 그렇게 억지로 연결 지은 것에 불과한 조잡한 추리.

실제로 별채에서도 제대로 된 물증 하나 발견하지 못했고, 테올린에게 진위를 파악하는 것도 요청하기 여의치 않은 상태다.

아리엣의 죽음에 대해 무언가 눈치를 챘다 한들, 그레이스가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건 그 역시 모르고 있을 테니까.

가문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부분은 엘레오노라의 말대로 침묵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계속, 기도 드렸어요.'

그날 밤.

셰인은 그레이스가 자신을 붙잡아두며 한 이야기를 새겨듣고,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분께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저 시간은 흐르고, 제 배는 계속 부풀어 오르기만 했죠.'

만약.

그때 당시 그레이스가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면…….

'아니, 그건 말이 안 되잖아.'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종교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그녀가 무고를 주장할수록 더욱이 의심이 짙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처량하고 처절하게 무고를 증명할수록.

남자와 관계를 맺지 않고 아이를 배었다는 점이 사실로 다가올수록, 그것이 악마의 소행이라는 설득력이 더욱 커질 테니까.

'셰인.'

하지만 문득 떠오른 한 가지 가능성과 함께, 누군가의 얼굴이 셰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당신을 만나기 전의 저는……. 그저 천천히 죽어갈 뿐인 삶을 살고 있었어요.'

신조차 구제하지 못했지만, 끝내 배교의 길에 들어서고나서야 자신에게 감사를 표했던 소녀.

공허했던 눈에 색이 돌아온 순간은, 셰인에게 있어선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설령 그것이 비약으로 이루어낸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아직까지도 그 때의 일에 대해 확신이 없다 해도…….

'내가 이 손에 빛을 거머쥘 수 있었던 건, 그 아이가 나를 믿어주었기에 가능했던 거야.'

그래, 당시의 자신도 불가능하다 여겼던 것을 인정하지 않았는가?

그 때 했던 일을 한 번 더 못 할 것도 없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존재'와 영접할 수 있는 지금이기에 더욱이.

"콘, 잠깐만 나에게 힘을 빌려줄 수 있을까?"

엘레오노라와 헤어진 후 향한 곳은 저택의 정원.

그곳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콘이 셰인에게로 다가오고는, 조용히 입을 벌리며 제 뿔을 셰인에게 가져다주었다.

-캬우!

긴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엇다.

사지를 누비며 유대를 쌓아온 그들에게 있어, 필요한 건 그저 서로의 감정을 교환하는 것뿐이었으니까.

곧 콘이 제 뿔을 가져가자, 셰인이 그 뿔을 제 손으로 감사며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콘의 뿔은 그 자체로 신성력을 담는 그릇이자, 그 힘을 증폭시켜주는 매개체.

그 빛이 차차 선명해지고, 이윽고 셰인의 시야가 그 광채에 휩싸이며 정신이 아득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 * *

"오랜만이네요, 카일."

낯익은 목소리.

이제까지 살며 몇 번이고 되새겨온 자의 것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현재 새파란 하늘 아래에 펼쳐진 척박한 땅 위에서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셰인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요?"

피오 아스클레.

과거 제 스승을 본 따 만들어진 복제체이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

그녀를 마주함으로써 카일은…….

셰인은 자신이 제 의지를 통해, 자신의 심상에 들어왔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래, 오랜만이야 피오."

셰인이 곧장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비록 제 스승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그녀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은 없을 테니까.

"네. 피오예요. 당신의 열망이 만들어낸 피오 아스클레…."

그 이름을 받아들이듯 그녀가 제 가슴께에 손을 올리며 선명한 미소를 보였다.

처음 마주했을 밝은 미소.

셰인이 그 호의에 기대며 물었다.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어."

"고민상담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할게요. 저는 그걸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

"아니, 이번엔 고민이 아니라 네가 가진 지식을 빌리고 싶은 거야."

제 앞에 있는 자는 그저 피오의 외형과 기억만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다.

의료대국이라 불렸던 아이헨발트에서도 가장 뛰어났던 의사.

환생 후 20년에 가까워지는 현재에도, 셰인은 자신이 그녀를 뛰어넘었다는 생각을 단 한순간도 할 수가 없었다.

"교육이 필요한 거군요."

그리고 피오는 그런 셰인의 말을 적극 환영하고 있었다.

그저 상담을 요청하건, 자신의 지식을 빌리는 것이건.

"제자를 가르치는 건 스승의 덕목이죠. 무엇이 궁금하신 건가요?"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시련에 보필을 해주는 것이, 그의 신앙으로부터 태어난 자신의 사명임을 알고 있으니.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자신의 청을 들어주는 피오에게, 셰인이 곧 자신이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처녀가 임신하는 게 가능해?"

"……네?"

"그러니까 그……."

뭐라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는 셰인이, 이내 헛기침을 하며 그녀를 향해 재차 물었다.

"성관계를 맺지 않고 아이를 가지는 게 가능하냐고 물었어."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