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168화 (168/255)

의무병의 환생 168화

"신고를 한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오셨군요."

"확실한 증거가 있는 마당에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죠."

저택을 대표하듯 나선 라라티나와 마찬가지로, 마차에서 내려온 신자들 중 대표격에 해당하는 자가 그녀를 마주하였다.

하나 같이 십자가에 말뚝이 박힌 목걸이를 걸고 있는 신자들.

그 중 대표격에 해당하는 자는, 주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목걸이를 함께 걸고 있었다.

"이미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확인차 다시 묻겠습니다."

창백한 피부와 눈 밑으로 그려진 다크써클.

도저히 신자답지 않은 분위기의 소유자다.

"이곳에 악마의 아이를 품은……. 아니, 악마의 꾀임에 넘어간 신도가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주교 파이몬.

세간에서 '악마 사냥꾼'이라고 불리는 심문관.

그를 마주한 라라티나가 부채 뒤에서 조용히 침을 삼켰다.

'이 자가 파이몬…….'

연락만을 주고받았을 뿐, 직접 마주한 건 오늘이 처음이다.

그런데 설마 이 정도로 상상과 동떨어진 자가 올 줄이야.

'…아니, 겉으로는 판단해선 안 될 일이겠죠.'

귀족이라면 언제나 기품 있게.

비록 본가에선 천한 취급을 받았던 몸이지만, 이 가문에서만큼은 그녀 역시 골드리안에 걸맞는 일원이 될 수 있다.

크흠. 헛기침을 한 라라티나가 파이몬을 마저 마주하였다.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만…. 신도라는 부분은 전달 과정에서 생긴 오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가 신고를 한 것은 어디까지나 의심이 드는 가문의 일원일 뿐……."

"그러고 보면 설명을 드리는 걸 잊어버렸군요."

딱딱한 분위기의 신자들.

그들을 대표하는 초췌한 인상의 남자가, 곧 라라티나를 향해 단호히 말했다.

"저는 그레이스와는 구면인 몸입니다."

"네? 그레이스와 구면이라니……."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변경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니까요. 그런 와중에 그레이스가 머무르고 있는 레펠타리 가문에도 종종 신세를 지고는 했었죠."

레펠타리.

골드리안이 없었다면 이름조차 유지하지 못했을 정도로 비참한 가문이다.

그런 곳에 주교의 자리에 오른 심문관이 신세를 진 이유는 하나.

"워낙에 외진데다 척박한 곳이다 보니, 제가 노리는 이들 역시 그곳으로 자주 도망을 쳤으니까요."

심문관인 그가 추적하는 자라면 뻔 한 일이다.

하물며 파이몬에겐 '악마 사냥꾼'이라는 이명까지 존재하는 상태.

그 이명을 가지기까지에 얼마나 많은 이단을…….

그 중에서도 얼마나 악랄한 이들을 처형해 왔을까?

'그런 거물이 설마 호출에 응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만….'

라라티나에겐 썩 좋게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본래부터 그녀는 그레이스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고, 가문의 기생충마냥 붙어있던 그레이스를 언젠가 배제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그런 상황에 '외간 남자의 아이를 잉태했다'는 증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상태.

혹시나 엘레오노라에게 언질을 줬지만, 엘레오노라는 그저 그레이스가 모든 것을 실토하기만을 기다려 달라 말할 뿐이었다.

'안일한 소리를.'

가문의 안주인이 된 자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걸 알면서도 방치하는 꼴이라니.

다른 첩실들도 화합을 위해 침묵하고 있지만,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소리인지를 바로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심으로 테올린을 사랑하여 이 가문에 들어왔음에도, 가문에 온 후 단 한 번도 자신들과 얘기조차 나누지 않다니.

그것만 해도 건방진데 불륜까지 저지른 자가 가문의 녹을 받아먹는 건, 골드리안의 일원이란 점에 자부심을 가진 자로썬 결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어디에 있죠?"

"아, 네. 제가 직접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곧 라라티나가 파이몬을 포함한 심문관들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길을 안내를 하려는 것도 잠시.

라라티나의 주변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사용인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 안주인님에겐……."

"나중에 제가 일러두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선 마저 용무를 보시지요."

엘레오노라는 심문관들이 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

출산도 출산이지만 그녀에 대한 배신감이 더 크게 들었기 때문이다.

'너무 원망하진 마세요. 엘레오노라. 저 또한 당신을 존중하고 존경하지만, 그레이스에 대해 숨긴 건 지나치게 도를 넘어선 일이니까요.'

산후의 조리가 끝날 때쯤엔 모든 일이 정리되었으리라.

그렇게 심문관들을 이끌고 나아가는 가운데, 라라티나의 시선이 힐끗 하고 제 배후로 향해졌다.

자신의 뒤를 따르는 주교 파이몬. 그리고 그 뒤를 일렬로 따르는 심문관들.

최대한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자 사람을 부르지 않긴 했지만, 역시 심문관들을 이끌고 나아가는 건 긴장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분위기를 누그러트리고자 말이라도 던져보는 게 좋을까?

"저, 심문관님은……."

"그레이스."

돌연히 이어진 말에 흠칫 몸을 떠는 라라티나.

파이몬은 그녀의 안색을 살피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제 얘기를 이어갈 뿐이었다.

"그레이스는, 본가에 있었을 적부터 굉장히 독실한 모습을 보였던 아이였습니다."

"아, 네. 그러고 보니 신자라고, 했었죠……."

라라티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레이스는 이 가문에 들어온 후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긴커녕, 안주인을 제외한 누구와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으니까.

"가문이 기울어지는 와중에도 결코 타인에게 험한 소리를 하지 않고, 언제 어느 때에나 사려 깊은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저와 같이 남들에게 신세를 지기 어려운 처지의 신자조차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주었지요."

"신세를 지기 어려운 처지라면……."

"심문관이란 게 그런 일이니까요."

절그럭.

걸음걸이 중에 들려오는 쇠의 마찰음. 그러고 보면 입고 있는 옷이 꽤나 두터워 보인다.

안쪽에 무엇이 있는 것일까?

라라티나는 상상조차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그런 저희들조차도 자상히 받아들였지요. 궁핍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을 다스리며 선행을 베푸는 행위……. 아직 신앙을 개화하지 못했지만, 언제 신앙을 각성해도 이상하지 않다 여겼었습니다."

파이몬은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신세를 졌을 적, 이제는 형체만이 겨우 남은 교회에서 함께 기도를 드렸던 그 가녀린 소녀의 모습을.

"그런 그녀가 골드리안에 거두어졌을 때만 해도 선행에 보답을 받았다 여겼건만……."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고, 그와 함께 라라티나의 발걸음이 잠시 멈춰졌다.

그럼에도 파이몬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결국 그 가문에 들어서기 무섭게 악마에 쓰이게 되다니. 운명이란 참으로 잔혹하군요."

"어, 그……."

행여나 선두가 빼앗길까 걱정한 라라티나가, 황급히 앞장서며 말을 더듬거렸다.

"저, 저기 불러놓고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아, 아닐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저, 제가 확인한 건 그저 배가 부풀어 오른 것뿐이고, 그…. 가문에 들어오기 전에, 다른 분과 관계를 맺어서……."

그저 그녀의 불륜을 밝혀주기만 하면 된다고.

그런 이유로 심문관들을 호출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바뀌고 있다.

"그레이스는 결코 타인의 마음을 배신할 만한 아이가 아닙니다."

자신이 내건 상식적인 답마저 부정하며.

그래, 그건 자신이 보아온 순수한 소녀이자, 이제는 어엿한 여인이 된 이를 향한 강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제가 보았던 그레이스는 그 누구보다도 순수한 아이였습니다. 타인에게 자신이 짊어진 책임을 떠넘기는 일을 할까 두려워할 정도로……. 그런 그녀가 미래를 약조한 이를 두고 다른 남자와의 동침을 허락했겠습니까?"

"그, 그건……."

"혹은 그런 일이 일어났더라도 스스로의 입으로 그 죄를 실토했겠지요. 비록 증거라 할 건 저의 믿음뿐이지만, 그래도 저는 그녀가 자의로 부정을 저질렀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품에서 꺼내어진 손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인다.

신성력.

그 자가 가진 고결함의 상징.

그 힘은 오롯이 제 마음에 한 점의 그릇됨이 없는 자만이 거머쥘 수 있으며, 그 힘을 가진 자가 누군가를 지지하는 건 그 자체로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빛이란 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심증을, 시각적인 증거로 바꿔낸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리고 제가 이곳에 온 것 역시 그저 기우에 불과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사례가 한 번만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더욱이."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만큼, 도리어 믿음의 대상이 배신을 했을 때의 실망감과 증오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것이 타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더더욱.

"한, 번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10년 전, 한 산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 이 순간 그의 입에서 내뱉어진 건 심문관으로 활동하며 겪어온 실화.

파이몬 개인의 경험담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당시 속세에 정이 떨어졌던 사냥꾼은 자신의 딸아이와 함께 산골의 오두막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몸이 좋지 않아져 딸아이에게 수발을 맡겼지만……. 그렇게 요양이 필요한 몸임에도, 그는 어느 날 도시로 내려와 교단의 사람들에게 간곡히 도움을 요청하였죠."

그건 결코 자신의 몸을 보살피기 위함이 아니었다.

애초에 헌금을 지불할 여력조차도 없던 몸.

병약한 몸으로 온다 하여도, 교회에서 치료를 받으려면 시간이 오래 소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처지에 다른 신도들도 아닌'심문관들'을 불렀던 이유는 하나. 자신의 딸에게 생긴 이변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변……. 이라뇨?"

"이상한 일이지요. 평생을 병든 아비와 함께 살고 있던 소녀가 아이를 품고 있다니."

"……."

라라티나가 숨을 죽인 채 파이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뒤를 돌아보거나 하진 않았다.

첫 인상부터가 도저히 신자같지 않았던 남자.

지금의 이야기를 어떤 얼굴로 하고 있는지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많은 추측이 오고갔습니다. 누군가 모르는 새에 그녀를 겁탈하였다, 혹은 가족 간에 말로 뭐라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등등……."

산골의 오두막에서 거의 평생을 살아온 여인의 배가 갑자기 부풀어 오른 일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인 만큼,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조리 검토했을 것이다.

설령 부정한 일이라 할지언정.

그 부정한 일 역시 일단은 상식선에서 가능한 범주 내에 속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태어난 아이를 보자마자 바로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결코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걸."

파이몬이 장갑을 쓴 양 손을 스윽 들어올렸다.

그러한 상태로 말했다.

"크기는 이 정도였을 겁니다. 무게는 대략 500g정도……. 식성이 많은 자라면 한 끼에 모두 처리할 수 있을 정도겠죠."

마치 인간이 아닌 고깃덩어리를 묘사하듯…….

그래, 당시 그가 보았던 건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분명 갓 태어난 존재임에도 온 몸이 털로 수북하게 덮여 있었습니다. 그 털을 걷어내며 얼굴을 보았을 때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인간의 몸을 뒤엉키게 만든 무언가.

"입이 있어야 할 위치에 눈이 있고, 귀가 있어야 할 위치에 팔이 있는……. 더군다나 뒤통수엔 또 다른 얼굴이 붙어있기까지 했습니다."

차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생각나는 것만을 늘어놓아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존재.

하지만 파이몬은 거기에 혐오를 표하지 않았다.

그저 분노할 뿐이다.

"네, 그건……. 그건 인간이 아니었어요. 제 어미의 숨마저 앗아가며 태어난 건, 순결한 여인의 몸을 농락한 악마가 남긴 피조물이었지요."

그들에게 있어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런 식으로 새로이 태어날 생명을 망가트려가면서까지, 악마란 인간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한 것인가.

공교롭게도 그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려지지 않은 답이었다.

그러니 그 현장을 본 이는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을 파악할 뿐이었다.

"마, 만약…. 그레이스 양이 악마에게 쓰인 게 사실이라면……."

"처형입니다."

신의 분신.

신이 만들어낸 완벽한 피조물의, 그 균형을 깨트린 존재를…….

그 자가 만들어내 결과물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린다.

그것이 당시 파이몬이 내렸던 결정이었다.

당시 한 여인의 목숨을 제물로 삼아 태어난 존재가, 다시는 이 세상에 나타나선 안된다 여겼기에.

"처형……. 오직 그것만이 그녀를 구제하는 방법이겠죠."

"저, 저기……."

"악마의 농간에 끝내 더럽혀진 것이라면……. 그녀 역시 스스로가 부정한 존재라는 걸 자각하게 될 겁니다. 고결한 심성을 가진 그녀 역시도 그 부정을 정화하고자 자신에게 내려지는 처벌을 감내하게 될 겁니다. 제 몸을 불사르는 고통마저 참고 견디며……. 그래요, 가문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참고 견디니 끝내 구원이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괴롭더라도 그 불길을 견뎌낸다면 육신은 몰라도, 그 영혼만은 분명히 구제받을 수 있겠지요……."

불길만이 구원의 수단.

그것을 횡설수설하며 번복해 말하는 파이몬을, 뒤따르는 심문관들은 말없이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심문관들이 가진 이단을 향한 증오는, 마찬가지로 악마라 불리는 이들에게도 적용되는 바였으니.

-꿀꺽.

그를 이해하지 못한 라라티나가 침을 삼키다, 이내 별채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러갔다.

'나, 난 모르는 일이야.'

자신이 상정한 범주 외의 일을 감당할 필요는 없다.

라라티나는 그에 강한 확신을 가진 자였다.

설령 처음 의도와는 달리 흘러간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레이스가 맞이할 운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리라.

그래, 그 또한 신의 뜻일 테니…….

"도,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그레이스 양이 머무르는 별채예요."

이내 도착하기 무섭게 라라티나가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 이상은 자신이 간섭하고 싶지 않다.

심문관들이 저택에 들어가고 나면 바로 자리에서 등을 돌리리라.

그런 생각이 다분한 가운데, 별채에 주둔해 있던 위병들이 라라티나와 심문관들을 향해 달려왔다.

"라라티나 님! 크, 큰일났습니다!"

"무슨……."

막 빠지려는 순간 자신을 부르짖는 사용인들.

그 행동에 당황한 라라티나에게 그들이 횡설수설하며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게, 돌연히 도련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레이스 님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엘레오노라 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이걸 어떻게 해야 하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이 멍청이들아.'

이 이상 책임을 지는 건 사양이다.

어찌할까 눈치를 살피는 라라티나의 시선이 이윽고 파이몬에게 미쳤다.

이전까지만 해도 죽은 생선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던……

사용인들의 실랑이를 보고 있던 그의 두 눈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셰인, 골드리안."

그건 라라티나도 알고 있는 이름이다.

알 수밖에 없다. 이전에 그레이스의 이상을 확인했을 때, 그녀의 곁에 있었던 것이 다름 아닌 그였으니까.

그런 그가 별채에서 그레이스와 함께 있다면…….

"자, 잠깐……."

일이 점점 커지고 있다.

라라티나가 다급히 말리려 했지만, 그 때에 파이몬은 이미 별채에 발을 들인 상태였다.

그를 막아 세울지 말지 고민하는 경비병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다.

"비키십시오. 그대들이 이단자가 아니라면."

창백한 얼굴이 들어 올려지고, 이윽고 그들을 향한 충혈된 눈동자가 드러난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시체와도 같은 몰골.

그로부터 비롯된 위압감을 견디지 못한 경비병들이 이내 차례차례 몸을 물렸다.

주군을 지켜야 할 이들이 너무나도 쉬이 길을 비켜주고 있다.

그만큼 속세와 연이 없는 곳에서 방탕히 지냈다는 거겠지만, 공교롭게도 심문관이란 그런 게으른 자들을 처형하는 직책이 아니다.

'셰인 골드리안. 당신도 그녀의 이변을 감지한 것이군요.'

파이몬은 기억하고 있었다.

5년 전의 재판에서 자신이 존경했던 한 신자가 구속되어 떠나갔던 순간을.

그녀는 여전히 죄의 값을 받고자 투옥된 상태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벌하고자 했던 이는 제국으로 복귀하기에 이르렀다.

거기에 더해 로열 나이츠라는 강력한 권한을 손에 넣기까지.

'그 또한 토머스 추기경님의 생각이라면 따를 뿐입니다. 어디까지나 그가 그 기회를 제대로 활용했을 때에 한해.'

그래, 그가 가지고 있는 건 결코 권력 따위가 아니다.

도리어 자신의 숨통을 노리는 칼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는 양날의 검.

그런 그가 지금 악마의 아이를 잉태했을지도 모르는 이의 곁을 지키고 있다면…….

'그 또한 운명이라면 따를 뿐이다.'

신경에 반응하듯 몸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삐걱거림.

그 소리를 뒤로한 파이몬이, 이윽고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그레이스가 자리한 방에 도착하였다.

"셰인 골드리안."

벌어진 문을 통해 드러난 것은 침대에 눕혀있는 한 여인과 사방에 흐르는 핏자국.

그 곁을 당혹스러운 얼굴을 한 채 지키고 있는 작은 시녀.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온 파이몬을 등지고 있는 한 사제복의 남자.

"……참나."

그가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방에 난입한 이를 못마땅한 듯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여기에 있는 것이 서자에 첩실이라지만, 그래도 개인적인 프라이드라는 게 있는데 그렇게 문을 훅훅 걷어차도 되는 겁니까?"

이곳에 있는 이들이 하찮은 자들이기에 예의를 가기지 않은 것인가?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심문관이란 부정을 벌하는 자.

심판에 있어 예의 따윈 정말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그건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만, 예의를 차리기엔 지금이 썩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이 문제로군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지금 당신이 한 짓을 두고 한 말이죠.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심문관 파이몬."

단호히 이어진 자기소개.

그 하나만으로 그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이곳에 발을 들였는지를 모두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악마를 잉태한 자가 있다는 신고를 듣고, 그 진상을 조사하고자 교단에서 파견된 몸입니다."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이제까지 그렇듯 등을 돌린 채로, 불청객이 오기 전부터 끌어안고 있던 이를 더욱 거세게 끌어안을 뿐.

"셰인 골드리안. 심문관으로서 당신에게 청하겠습니다."

그 행동을 눈에 새긴 파이몬이 제 손에 힘을 실어 넣으며 말했다.

"이쪽으로 몸을 돌려주시죠. 그 품에 안고 있는 것이 보이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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