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170화 (170/255)

의무병의 환생 170화

사태가 일단락된 지도 거진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셰인은 현재 그레이스의 별채로 나아가며, 제 손에 쥔 편지의 내용을 곱씹어가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전에 벌어진 사단에 대해 개인적으로 정리하여 보낸 편지에 대한 답변이었다.

'벌써 1달이 넘게 외부에 나가있으니, 가문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모를 만도 하겠지.'

테올린 골드리안.

영주로써의 공무를 보고자 외부로 나가 있는 그는, 당분간 가문으로 복귀할 수 없다 연락을 보내온 상태였다.

물론 편지로나마 대리인에게 차후의 계획이나 복귀 일정 등을 세세히 전한 상태.

그런 와중에도 제 동생이 보낸 편지에도 답변은 보내져 왔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셰인 개인의 시점에서 보고 판단한 사건에 대한 개요에 대한 답변이.

[수고했다.]

그래, 그것이 답변에 적혀있는 전부였다.

그 외에 숨겨진 내용이 있나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나머지는 전부 공백으로 이루어진 상태였다.

"……이 망할 형님이."

아무리 종이가 흔한 제국이라지만 그걸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건 귀족계층 뿐이다.

이것도 다 돈인데 여백을 이렇게 남겨놓다니.

그런 낭비벽이 짜증나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렇게 세세히 적어 보냈는데 한 문장으로 답변을 하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그 자식답다면 답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만 해도 그리 살벌하게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가?

그 점을 생각하니 이런 식으로라도 답변이 온 게 용할 정도다.

"그래, 형님이야 돌아올 때가 되면 돌아오시겠지."

지금은 그가 없는 곳에서의 뒤처리에 집중하도록 하자.

그렇게 별채에 발을 들이고, 그곳의 사용인들과 경비병들과의 인사를 나눈 셰인이 이내 그레이스의 방에 들어섰다.

무의식적으로 노크도 없이.

"아……!"

입 밖으로 내뱉어진 탄성.

그만큼 놀랐다는 것이지만, 그것이 비명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윗옷을 벗은 채, 제 품에 있는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고 있는 상황임에도…….

"아, 밥 주고 있었나요?"

"네, 에…. 그, 그……."

행여나 아이가 놀랄까 얼굴만을 붉히는 그레이스.

하지만 셰인은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긴커녕, 도리어 턱까지 괴며 그녀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저번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정상적인 임신이 아닌데도 모유가 나오는군.'

그레이스 레펠타리…….

아니, 이제는 골드리안이란 성을 가진 여인은, 아주 희미하긴 하지만 신성력을 각성할 정도의 신앙을 가진 상태였다.

그런 그녀의 배가 약 1년 전부터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건, 제 뱃속에 종양처럼 있던 태아에 신성력이 작용하였기 때문.

적어도 셰인은 그렇게 추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성력이 잠들어있던 태아를 깨우기 시작했다고……. 그것 하나만을 따지기엔 아직 풀리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아.'

정상적인 임신이 아닌 만큼, 태아의 위치가 무조건 대상의 자궁에 안착하리라곤 장담할 수가 없다.

거기에 더해 영양분 공급을 위한 탯줄도 제대로 달려있었고, 심지어 기형 역시도 셰인이 즉각 손볼 수 있을 정도로 경미했던 상태.

덕분에 아이의 상태가 온전해, 당시 몰려왔던 심문관들조차도 어렵지 않게 속여 넘길 수가 있었다.

'하지만 선천적인 장애는 신성력이 적용되지 않는 걸로 아는데…….'

태아 시절의 기형은 엄연히 선천적 장애로 분류되는 게 아니었던가?

그러고 보면 신성력이란 기록을 답습하는 힘.

그로 인한 회복은 '본래 그 존재가 나아가야 할 운명'을 복원하는 것이라 알려져 있다.

그런 복원이라면 쌍생아소실에 의해 사라져야 할 아이가, 그녀의 몸을 빌려 정상적인 태아의 상태가 되었다는 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론 처녀인 그녀가 아이를 받아들이기 적합한 상태가 되리라곤 생각하기 어렵지만…….

"저기, 도련님."

생각을 이어가던 중 들려오는 목소리.

셰인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레이스의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여전히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얼굴은 완전히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 그렇게 보시면 부끄러운데……."

"아, 미안해요.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천성이 학자여서일까.

아무래도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마주하면, 일단 분석부터 하고 볼 수밖에 없는 상태다.

그리고 당연히 거기엔 성적인 욕구는 거의 배제된 상태.

피오의 밑에 있었을 적 해부학 교재를 3일에 하나 씩 정독한 그에게 있어서, 자신이 마음에 두지 않은 여인의 육체는 정욕의 대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 아뇨. 보는 것 자체는 괜찮아요. 오히려 많이 불안한 게 많아서, 도련님께서 곁에 있어주는 게 더 안심이 되고…."

그리고 그레이스 역시 그에게 사심이 없다는 건 느끼는 바였다.

아이를 직접 받아주었을 뿐 아니라 심문관들과도 담판을 짓지 않았는가?

그런 그에게 느끼는 감사가 큰 마당에, 나신을 보이는 것 정도는 부끄러워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저기……."

그래, 순수하게 그런 마음으로. 라고는 하지만…….

"도련님은, 테올린의 동생이 맞으신 거죠?"

역시 신경이 쓰인다.

처음 만남 때에도 정신이 없어 그를 테올린이라 착각하지 않았던가?

자신을 마주한 채 얼굴을 붉히는 그녀를 향해, 셰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형님을 많이 좋아하시나보네요."

"……네, 좋아해요."

그레이스가 요람을 끌어안으며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비록 제 품에 안겨있는 아이는 테올린의 피가 이어져 있지 않지만.

그래도 테올린이 보낸 편지엔, 그녀를 책망하는 내용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그녀의 품에 안겨있는 아이 역시 일단은 제 자식으로 인정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레이스 역시 그 부분에 대해 불안해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

"처음에…… 무도회장에서 만났었어요. 제가 속한 가문보다, 더 굉장하신 분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요. 그때 테올린도 왔고, 많은 분들이 그에게 구애를 했었죠."

"뭐, 형님은 인기가 많으시니 충분히 상상이 되네요."

그레이스를 제외하고도 아내만 5명에, 가문의 이름과 재력은 물론이고 얼굴도 자신만큼 잘생기지 않았는가?

아버지에게 이어받은 모든 것이 그에겐 자랑거리나 다름없는 것. 그에 많은 이들이 매료되었다는 건 결코 비약이 아닐 것이다.

"반면 저는…. 정말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고……."

스윽, 하고 그녀의 시선이 방의 옷장으로 향해졌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자 벗어둔 옷이 보관된 옷장.

골드리안의 일원답게도 화려한 옷들이 가득하지만, 가장 손이 잘 닿는 곳엔 낡은 드레스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녀가 이 저택에 오기 전에 입었던.

그리고 아이를 배고 있었을 무렵에도 걸치고 있었던 그 옷은, 언제 어느 때에나 그녀가 가진 기억을 떠올리는 매개로써 사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무도회장 구석에 있었을 때, 테올린이 갑자기 다가와서 말했어요."

'고개를 숙이지 마라. 가문의 사정이 어떻건 너 역시 귀족인 만큼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 몸이다. 귀족으로써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면 네가 가진 자리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라.'

'……그 자식답네.'

그는 그런 남자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닌, 사람이 자리에 걸맞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여기는 남자.

그런 그에게 있어 그레이스의 자신감 없는 모습은 안쓰럽기보단, 무척이나 화가 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 그런 일은 뭔가 처음이라서……."

그래, 제 앞에 있는 자가 어떤 가문에 속하고, 어떤 미래에 처했는지 따윈 상관하지 않는다.

설령 그 무도회장에 있던 모두가 그녀를 무시하고 따돌렸다 할지라도.

테올린은 그녀를 '몰락한 귀족가의 영애'가 아닌, 엄연히 '같은 무대에 선 귀족'으로써 대할 줄 아는 남자였다.

"그래서 그, 너무 가슴이 두근거린 바람에……. 그래서 고백해버렸어요. 그 자리에서."

"……그 자리에서요?"

"네, 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말하고 나서 뒤늦게 깨달았지만…."

소심한 줄만 알았더니 그런 강단도 있군.

물론 주변에선 그녀가 분수도 모르고 접근한다 비웃었겠지만, 셰인은 테올린이 첩을 받아들이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였다.

"그랬더니 테올린은, '그리 하면 그 마음을 어디 한 번 증명해보아라.' 라고 말하고, 저를 첩으로 받아들였어요."

변경에서의 영향력이 필요하다 해도, 굳이 몰락한 귀족가문의 자재와 맺어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받아들였다.

가문으로 데리고 온 것 뿐 아니라, 가주로써의 공무로 바쁜 자신을 대신해 가장 신뢰하는 이에게 신변을 부탁하면서.

설령 그녀가 무언가를 숨기고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해도,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신뢰까지 발휘하면서.

'그렇게 안 보였는데 로맨틱한 구석도 많은 녀석이라니까.'

알면 알수록 미워할 수가 없는 녀석이다.

그런 생각에 피식, 실소가 나오는 가운데.

"저, 도련님."

그레이스가 제 품에 안겨있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이 아이가 제 오빠나 남동생일지도 모른다는 게 사실인가요?"

"네, 뭐……. 믿기 어렵지만 사실입니다."

그 외에 처녀수태가 가능한 방안은 피오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셰인은 그레이스가 가진 고결함을 목도한 상태.

그녀가 아무하고도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건, 그녀와 구면인 심문관 역시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본래 당신의 어머니께선 쌍둥이를 낳을 예정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형제 쪽이 당신의 몸에 흡수되었던 거죠. 그렇게 당신의 몸에 흡수된 채 멈춰있던 시간이, 당신이 신앙을 개화한 순간부터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게 된 거고요."

"……듣고도 믿기지가 않네요. 그런 일이 저에게 일어났다는 게."

"저도 대략적으로만 알 뿐이지 전부 파악한 건 아닙니다. 진위를 전부 아는 건 주님뿐이겠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전부 다 주님의 뜻으로.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흘려 넘기기엔 참 좋지 않은가?

"그레이스 씨."

하지만 신이란 많은 이들이 의존하는 존재.

제 좋을 대로 편히 써먹고 버리기엔, 너무나도 많은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것이 문제다.

"사태가 정리되었으니 하는 말이지만……. 아마 머지않아 교단에서 당신에게 접근해올 테니 각오를 해두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됩니다."

"교단에서, 말인가요?"

"이 점에 대해선 제가 너무 판을 크게 벌린 것도 있긴 한데……."

거짓말이 들켰다거나 한 건 아니다.

오히려 주교씩이나 되는 심문관조차 이에 대해선 '기적'이라 평하며 순순히 물러났을 정도.

문제는 그 거짓말이 너무나도 잘 먹힌 나머지, 제국에서 그녀에게 과한 기대를 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요컨대, 교단에서 저에게 권위를 내려줄지도 모른다는 거죠?"

죄가 만연한 세계에 강림한 주신의 아들.

그 신성한 피를 이어받은 존재를 잉태한 처녀와 똑같은 신화를 실현시킨 자로서.

"저는 교단 소속이 아니라 교단에서 어떻게 나올지 딱 잘라 말할 수 없지만, 일단 많은 책임을 짊어지는 일을 맡으실 거란 건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곧 상황을 넘기기 위한 거짓말을 계속 이어간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셰인은 그녀에게 얽힌 진상을 알지만, 그 지식은 엄연히 이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지식을 이 제국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걸 받아들이기 위해 종교를 이용했으니, 이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자신이 아닌 그로부터 구제를 받은 그레이스가.

"지금이라도 그게 부담이 되신다면……."

"아뇨, 괜찮아요."

이에 대해선 자신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렇게 말을 하려는 셰인에게, 그레이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비록 도련님께선 저를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지만, 그건 모두가 오해할지도 모르는 일을 바로잡기 위해 그런 거였잖아요? 거기에 보은을 받은 제가 이제 와서 도련님에게 책임을 물을 자격은 없다 생각해요."

"하지만……."

"그리고, 진상조차도 정말 기적적으로 벌어진 일이잖아요."

설령 정말로 주님의 비호가 내려진 게 아닌, 그저 천문학적인 확률로 벌어진 일이라 할지라도.

그 기적을 온전히 보존했다면 그 또한 경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태어난 아이를 이대로 흘러가듯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요."

지금 제 아이를 품에 안은 그녀의 몸에서 새어나오는 광채란, 그런 경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빛이 굉장히 선명하다.

아이를 가지기 전에 품었던 것과는 다른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도리어 자신이 경외를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아는 것처럼.

* * *

그레이스도, 아이도 무사하다는 걸 확인했다.

언뜻 보면 평범한 모자지간.

더 이상 자신이 간섭하지 않더라도, 주변의 사람들이 도와준다면 분명 잘 키워나갈 수 있으리라.

그렇게 안도를 가진 셰인이 별채를 벗어나는 가운데, 숲길 한가운데에서 자신을 찾으러 온 시녀를 마주하게 되었다.

"셰인 도련님."

아드리아나…….

아니, 아드리아나가 아니다.

그녀는 잠시 어수선간 가문 내의 상황을 수습하고자, 임시로 시녀장의 자리에 복귀한 상태였으니까.

"안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엘레오노라의 전속 시종.

그 점을 파악한 셰인이 쓰게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아주 거리낌 없이.

'그레이스가 무고하다는 건 파악했다.'

세상물정 모르고, 고결하고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다.

타인을 상처 입히기보단 그 모든 고통을 자신이 끌어안고 감당하며, 그저 주님에게 답을 구하지 못하는 가녀리고 순한 여인.

그런 사람이 제 유모를 죽여 달라고, 그렇게 암살자까지 고용했으리라곤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숨겼던 여인은 어떨까.'

그녀를 고발한 첩실 라라티나.

그 외에 다른 첩실들은 물론 그녀들과 친목을 다지는 엘레오노라까지…….

아직 그들의 의심까지 모두 지워지진 않은 상태다.

"오셨군요, 도련님."

그리고 이 이상 상황을 더 길게 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안주인 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엘레오노라 골드리안.

그녀의 방에서 독대를 하게 된 상황에서, 셰인이 그녀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리엣의 죽음에 대해 알고 계신 게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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