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171화 (171/255)

의무병의 환생 171화

현 골드리안 내 서열로 치면 2위에 해당하는 자다.

그런 사람의 개인실답게도 무척이나 넓은 공간.

그런 장소에 단둘이 서 있으니, 공허함에서 오는 정적의 무게가 더욱 커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안주인님. 저는……."

"쉿."

그러니 시간 끌 것 없이 본제로 들어가고자 했건만.

정작 셰인을 호출한 엘레오노라는, 자신을 찾아온 셰인을 앞둔 채 입가에 손가락을 올리고 있었다.

마치 그가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제지를 가하는 것마냥.

"쥴라이가 깨겠어요."

"쥴라이……?"

"셋째 말이에요."

방구석에 둔 요람을 향해 스윽 시선을 향하는 엘레오노라.

그곳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아이는, 셰인이 찾아왔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손가락을 빨며 잠들어 있었다.

"직접… 보살피시는 겁니까?"

안주인이라면 유모를 고용하는 것도 가능할 텐데?

"아이들은 엄마의 품에서 커야 하는 법이니까요."

요람의 아이를 내려다보는 얼굴에, 차차 애틋한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얼굴을 보며 누가 꿍꿍이가 있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대화를 나누다 아이를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잠시 자리를 옮겨볼까요?"

그 호의는 아이에게서 셰인에게로 옮겨진 후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 * *

"도련님께선, 아리엣이 살해당하셨다 생각하시는 거죠?"

방과 이어진 넓은 테라스.

그곳의 난간을 앞둔 엘레오노라가 가장 먼저 입에 담은 건, 셰인이 그녀에게 직접 묻고자 했던 것이었다.

말을 돌려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여겼건만 그 화제가 직접 그녀의 입에서 나오다니.

예상치 못한 상황에 숨을 죽이는 가운데, 엘레오노라가 쓰게 웃으며 난간에 손을 올렸다.

"안주인으로 있다 보면, 가문 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많은 말을 듣게 되거든요. 아리엣이 독살 당했다는 말을 면전에서 듣다니, 테올린이 화를 낼 만도 하겠죠."

그래, 그녀는 영주를 대신해 가문을 지키는 자.

당연히 가주가 제 동생을 상대로 폭언을 하는 등의 소란을 놓칠 리는 만무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입에 담은 그녀의 얼굴에 그려진 건 안타까움…….

테올린이 당시에 보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안주인님께선, 저를 책망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셰인이 의문을 느끼며 그녀를 향해 되물었다.

이 제국에서.

시체를 훼손하는 걸 불경히 여기는 이 나라에서, 시체를 헤집어 진상을 파헤친다는 건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이니까.

"책망할 게 뭐가 있을까요? 그 또한 도련님이 아리엣에게 느낀 감사의 표현일 텐데."

그럼에도 테올린과 달리 그녀는 딱히 셰인의 의견을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또한 이해하고 헤아리는 듯, 괘념치 않고 제 의견을 이어갈 뿐.

"자신을 유년기 때부터 보살펴온 유모가 돌연히 세상을 떠났으니, 도련님께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모두 하고 싶겠죠. 그리고 그건 테올린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무슨……."

마저 물어보려는 것도 잠시.

곧 엘레오노라가 제 품에서부터 무언가를 꺼내어, 그것을 셰인을 향해 내어주었다.

이미 밀봉이 뜯긴 편지와 접혀진 종이.

"테올린이 보낸 편지에 동봉된 자료예요. 이걸 읽어보시면, 테올린이 어떤 생각을 품으며 도련님을 내쳤는지를 바로 알게 되실 거라 생각해요."

테올린의 편지라니.

이걸 전해주고자 자신이 먼저 호출을 했다는 것인가?

수상쩍기도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

숨을 죽인 셰인이 그녀에게서 받은 편지와, 그와 동봉된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편지에 적힌 건 가문은 어떤가,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아이는 잘 태어났는가 등등, 안부인사라기엔 너무나도 짧은 단문의 연속…….

'이 자식은 정실한테도 이 모양이냐.'

오히려 배다른 동생에게 4글자를 적어준 것도 용할 정도군.

그런 생각이 다분히 드는 가운데, 셰인의 시선이 편지의 마지막에 붙은 추신으로 향해졌다.

'이 편지에 동봉된 자료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자가 있다면, 그 즉시 성직자들에게 데리고 가도록 하여라. 가급적이면 다른 이들에겐 이 편지에 있는 내용을 언급하지 말도록.'

"……증상?"

의문을 느낀 셰인이 편지에 동봉된 자료를 살펴보았다.

함께 보내진 것은 골드리안과 거리가 있는, 흔히 대륙의 외곽을 통틀어 칭하는 '변경지대'에돌고 있는 기사에 대한 것.

'마을에서의 집단 폐사, 미술관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귀족, 성직자들에게 데려갔지만 끝내 시름시름 앓다 죽은 귀부인….'

하나 같이 변경지대에 있는 사망사고를 다룬 것이었다.

그것도 평민과 귀족 양측을 가리지 않고…….

그 내용을 살피던 중, 이내 셰인의 시선이 기사에 동봉되어 있는 그림 쪽으로 향해졌다.

상당히 정교히 그려진 실물화였다.

그것도 시체를 대상으로 한.

"이건……."

보통의 사람보다 부풀어 오른 눈동자.

드문드문 검게 변색된 피부와 입 밖으로 삐져나온 채 메마른 혓바닥… 분명 본 적이 있는 부류의 시체다.

"도련님."

이내 한 가지 사실을 짐작한 셰인을 향해, 엘레오노라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아리엣이 독살당했다 생각하시는 거라면, 그녀와 같은 증세를 보이는 제국 곳곳에서 나타나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국 곳곳에, 그녀와 같은 증상을 보이며 목숨을 잃는 이들이 발생하고 있다.'

셰인이 생각하지 못했던 제3의 가능성이었다.

* * *

'가만히 있어라. 이건……. 아리엣의 죽음을 조사하는 건 네가 나서선 안 되는 일이다.'

처음에는 그의 측근이나 가문의 일원이 엮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어쩌면 아리엣의 독살을 포함해, 이제껏 가문을 배신한 이들과 같은 부정을 감추기 위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제발 가만히 있어라.'

'네 손으로 전쟁이라도 일으키려는 게 아니라면.'

하지만 실상은 가문 내에서 끝날 문제 따위가 아니었다고.

테올린의 편지는, 셰인으로 하여금 그걸 깨닫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이 내용, 지금 누가 더 알고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테올린이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그걸 저에게만 공유한 것뿐이니까."

편지에 동봉된 그림은 사실적이긴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걸 전부 묘사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설명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림을 그린 이는 물론, 그 그림을 보는 이들도 실제 시체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알지 못할 것이다.

이 시대에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건 오직 셰인뿐이고, 그나마 그 견해를 들은 이들만이 가까스로 파악이 가능할 뿐일 테니까.

"그리고 아마 테올린은 이걸 다른 이에게 알리려 들지 않겠죠."

"그건……. 시체를 구분하는 법이 이단의 지식에서 기인했기 때문입니까?"

"그런 게 아니에요."

엘레오노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도 입가에 그려진 씁쓸한 미소. 분명 회의감이라 부르는 감정이었다.

"도련님께서도 테올린을 따르며 보셨을 거예요. 문제가 발생하면 공론화를 시키기보단, 혼란이 커지지 않도록 일단 묻어두길 택하는 모습을."

그래, 민중은 무지해야 하는 법이다.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든 전염병과 폭동, 독립을 바라는 귀족들이 벌이는 내전과 이단자들의 집회…….

그런 소식이 널리 퍼진다면 민심은 무너지고, 200년간 이어져온 제국의 결속에 큰 해를 불러일으킬 테니까.

그리고 테올린은 이 돌연사 사건을 진작부터 눈치 채고 있었고, 제국에서 그것을 은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에 '전쟁'이란 말까지 입에 담으며 나서선 안 된다 일갈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일수록 그는 더 소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겠죠. 영주로써 많은 것을 책임진 그라면."

흑사병과 같은 역병인지.

아니면 정말로 하늘이 내린 천벌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상황.

그런 와중에 제 동생이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독극물'이라는 증거를 제시했을 때.

그런 확고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름에도 숨겨야 한다는 입장에 처한 그는…….

어쩌면 제 유모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파헤치려는 동생이 어리석게 보이면서도, 차마 그에 동참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환멸을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녀에게 감사를 느끼고 그 죽음을 기리고자 한다면, 그와 협력하여 진상을 파헤치는 것이 인간으로서 분명 옳은 일일 테니까.

"……왜, 이걸 저에게 보여주신 건가요?"

그 당시 전쟁이란 말을 입에 담았던 건 어쩌면 그런 속내가 은연 중 드러난 것일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나마 이 사건을 조사하고자 하는, 그런 남자의 아내된 자가 어째서 그의 편지를 자신에게 보여준 것일까?

분명 테올린이 지시한 건 아닐 것이다.

애초에 자신이 협조하길 바라고 있었다면, 자신에게 보낸 편지에 그 내용을 직접 적었을 테니까.

"테올린은……. 도련님의 말을 단 한 번도 흘려들은 적이 없어요."

그래, 지금 이 편지를 보여준 건 엘레오노라의 독단이다.

"의견이 맞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걸 조율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어요."

그저 마찰을 빚고 있는 형제의 사이가 원만해지길 바라기에.

"그렇게 내려진 결론은 도련님께서 지향하는 방식과는 다르겠죠. 하지만 그 또한 많은 이들을 짊어진 가주로서의 책임 때문이니까……."

"그러니 너무 형님을 미워하지 말라고."

"……."

"……그걸 말씀드리기 위해 저를 부르셨던 겁니까?"

여기까지 불러놓고 무슨 말을 하나 싶었건만.

정말로 맥이 빠지는 결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가문 내의 소란이 사실은 자신의 오해였을 뿐이고, 실상은 꿍꿍이고 뭣도 없었다니.

'하지만 이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

사람이 좋아 첩실들과도 원만히 지내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배었다는 의구심이 있음에도 품어주고자 하는 아량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제 남편이 소중히 여긴 사람을 죽인 범인이라니.

그런 결말 따윈 누구도 환영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형님을 미워해 본 적이 없으니까."

엘레오노라도, 테올린도.

이런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여준 사람들이 아닌가?

도리어 가문에 해가 되는 자신을 굳이 곁에 두고자 하는 그들의 아량에, 몇 번이고 감사를 느꼈을 정도다.

괜한 의심을 가지는 게 미안할 정도로.

"오히려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들죠. 형님께서 저를 곁에 둔다면, 앞으로도 많은 민폐를 끼치게 될 테니까."

같이 지낸 추억도 없고, 서로 가까이 있어야 할 이유조차도 없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연을 길게 이어가는 것이 인연이란 것이라면, 셰인은 그 인연을 이 가문과 함께 이어가고자 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싶었다.

골드리안 후작가.

자신의 몸에 흐르는 이 피가 이어준 연은, 분명 두 번째 생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고향'이 되어줄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으니.

"…이 편지에 있는 증상이 발견된 곳, 변경지대라고 했었죠?"

물론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과 전생의 숙명을 병행하고자 하는 건 지나친 욕심이겠지.

하지만 해야만 한다.

그렇게 결심을 굳힌 셰인을 마주한 엘레오노라의 얼굴이, 차차 근심으로 물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역시, 조사하실 생각이군요."

"이 사건이 가문 내로 국한되지 않는다면, 더욱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지금의 이건 전염병이나 저주 따위가 아니다.

엄연히 '비소'라는 화학성 독극물에 의해 벌어진 일.

그 추측대로라면 누군가의 악의가 깃들었을 가능성이 높단 것이며, 그 조짐이 변경을 넘어 이 제국의 중심부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다.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원인을 제거하는 것.

변경으로 향해야 할 이유는 그걸로 충분하다.

"물론 형님께선 제가 변경에 가는 걸 반기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네, 분명 그렇겠죠."

셰인의 말에 엘레오노라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애초에 테올린 역시 다수의 변사체가 발견되는 것을 통해 사건을 짐작할 뿐, 이 사태 자체가 정말로 누군가의 소행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대대적으로 조사하고자 하면 제국 측에선 사태가 커질 것을 우려하여 전력으로 은폐하려 들 터.

그런 부류의 소동은 로열 나이츠의 권한으로도 어찌 할 수 없으니, 그는 굳이 셰인에게 도움을 빌리지 않고 개인적으로 이 사태를 조사하고 정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의사를 존중한다면 그에게 모든 걸 맡기는 것이 정답이겠지만…….

"하지만 도련님께선 테올린이 곤란해 할만한 일은 하지 않으시겠죠. 진정 도련님께서 제 몸에 흐르는 피에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럼에도 테올린을 위해야 하는 안주인은, 굳이 그가 숨기고자 하는 것을 셰인에게 전해주었다.

아니, 더욱 나아가 그의 등을 떠밀고자 하고 있었다.

제 품에 담긴 또 다른 서신을 그에게 내어준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건……?"

"제 지인에게 보내는 추천장이에요. 테올린이 현재 신세를 지고 있는 레펠타리 가문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변경지대의 사정에 대해선 굉장히 해박한 사람이죠."

변경에서 활동하고자 한다면 그자의 도움을 빌리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

그건 가문의 조력을 빌릴 수 없는 상황에선 큰 도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녀라면 분명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물론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해야겠지만, 도련님이라면 분명 감당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 서신을 받아든 셰인이 멍하니 엘레오노라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자신을 향한 호의적인 미소.

하지만 이전까지 그려졌던 동정은 사라져 있었다.

아무리 외롭다고는 하나, 그 외로움마저도 버텨낼 수 있는 의지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

"왜……."

반대로 셰인은 엘레오노라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당신을 의심한 저에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건가요?"

어쩌면 그녀가 범인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의심 자체를 무례하다 여겨 처벌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째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호의를 표할 수 있는 것일까?

"상대의 불신이 적의를 가져야 할 이유가 되진 않아요."

엘레오노라가 대답했다.

"오히려 아무런 의심 없이 믿는 사람은 경계해야 하는 법이죠. 진실 된 믿음이란, 의심의 끝에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생기는 거니까."

제 가슴에 양손을 얹은 채, 그 어느 때보다도 애틋한 얼굴로.

그런 눈을 한 사람을 셰인은 분명 본 적이 있었다.

'그야 전, 셰인을…….'

'당신을 떠나보내기 전부터, 줄곧 당신을 사모하고 있었으니까요.'

끊임없는 의심. 그 끝에 개화된 진실된 마음…….

그로부터 우러나온 신뢰란, 빛 한 점 동반되지 않음에도 신앙보다 더 굳건해질 수 있다.

엘레오노라 골드리안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을 겨냥한 불신조차도, 자애와 신뢰의 밑거름으로 여길 줄 아는…….

그런 넓은 아량을 가진 사람.

"다녀오세요."

이윽고 묵묵히 떠나려는 셰인을 향해, 엘레오노라가 나지막이 인사를 건네었다.

영원한 작별이 아닌 기약을.

"도련님께서 다시 가문으로 돌아오실 날을,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렇게 떠나는 이의 무운을 빌어주는 것이, 고향의 한 폭이 되어 남겨진 이의 역할이란 것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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