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173화 (173/255)

의무병의 환생 173화

[외전-민들레 커피]

녹색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색.

풀도, 나무도…….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모든 곳엔 울창한 녹빛이 퍼져 있다.

즉, 녹색이란 그 자체로 생명을 상징한다 할 수 있으니.

이러한 이유로 제국에서 녹색이란 무척이나 신성시 여겨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뚜렷한 녹빛을 띄는 물품은 그 가치가 크게 뛰어오르기도 한다.

즉, 그런 물건을 선물하는 건 그 자체로 성의가 깃들었다는 의미.

"이거, 졸지에 귀한 선물을 받아버렸군."

홀로 자택에서 머무르는 가운데 돌연히 집에 도착한 선물함.

그 안을 열어보니 녹색으로 물들어진 잔과 주전자가 한 노파를 반겨주었다.

사이사이에 돋아난 물결무늬와 깃털이 달린 소녀의 그림…….

분명 실력 좋은 예술가의 손에 의해 세공된 물건이니라.

"이런 비싼 선물을 보내오다니, 너무 무리를 시킨 게 아닌가 걱정이 드는군요."

과거 골드리안의 본가에서 근무했을 적, 저택에서 근무했던 옛 부하가 보내온 선물이었다.

당시엔 엄격하고 모질게 대했거늘, 그럼에도 자신에게 감사를 느끼며 선물을 보내온 걸 보니 괜스레 뿌듯함과 미안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기왕 좋은 선물을 받았으니 소중히 써야겠지요.'

후후, 미소를 지은 아리엣이 탁자에 주전자와 컵을 올려놓았다.

다시 보더라도 정말로 예쁜 색이다.

이 안에 차를 담아 마셔도 되는 걸까, 걱정이 들 정도로…….

아쉬운 건 이 좋은 찻잔을 이용해 같이 마실 사람이 없다는 것일까?

유일한 가족인 손녀조차도 제 본분에 충실하고 있는 상태.

평생 충성을 맹세한 시종의 은퇴란 그렇게나 적적하기 그지없지만, 그렇기에 집에 누군가가 찾아올 때면 괜스레 마음이 들뜨는 걸 느끼고는 한다.

"그러고 보면 오늘 도련님께서 들린다 하셨죠."

셰인 골드리안.

과거 자신이 직접 보살폈던 소년…….

아무리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곤 하나 골드리안의 자식이며, 어미를 대신하여 키운 아이인 만큼 애틋함도 가지고 있다.

그런 아이를 변경으로 보내는 선택지밖에 없었을 때엔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던가.

'도련님께선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역시 석연치 않군요.'

이제 곧 그가 제 손녀와 함께 자택에 방문하게 될 것이다.

이런 늙은 몸을 보고자 행차하는 게 송구하기도 하지만, 이런 식으로나마 마주하는 것이 한편으론 기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손님용으로 마련해 둔 차가 있는데…….'

그런 사람에게 아무거나 대접할 순 없는 노릇.

비록 늙은 몸이지만 손님 대접하나 못 할 정도로 몸이 무뎌지진 않았다.

그렇게 지팡이를 짚으며 집안을 누비던 중, 차를 보관하는 선반을 둘러보는 아리엣이 어느 한 곳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커피가 들어있는 통.

아리엣이 가장 즐겨 마시는 물건이었다.

"이런, 아직 커피가 남아 있었나 보군요."

물론 진짜 커피는 아니다.

길가에도 흔히 보이는 민들레의 뿌리를 갈아 가루로 만들고, 그걸 볶아서 커피와 비슷한 향이 나도록 만들었을 뿐.

하지만 소재가 흔하여 가격이 싸기에, 커피가 어떤지를 체험하고 싶은 서민들에겐 안성맞춤의 대용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특유의 맛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하지만요.'

커피라는 게 그런 것이다.

아무리 귀하다 해도 음미하는 법을 모르면 그저 쓴 물에 불과할 뿐.

그 점을 떠올린 아리엣이 쓴웃음을 지으며, 민들레 커피가 든 통을 꺼내들었다.

"이런 걸 도련님에게 대접해드릴 순 없겠죠."

하지만 그가 오기 전에 시간을 보내고자 마시는 것 정돈 괜찮으리라.

그렇게 선물받은 주전자에 물을 우리니 구수한 향이 아리엣의 코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오는 씁쓸한 맛.

벌써 맛본 지도 50년에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 * *

그래, 벌써 반백 년 전의 일이다.

실피어스 가문의 일원으로서 시녀장의 자리를 이어받아, 저택의 사용인들을 통솔하는 일을 맡았던 시기.

비록 갓 성인이 되자마자 주책을 맡은 것이었지만, 태어나고 자라길 시종으로 교육받아 온 그녀에겐 별문제가 되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당시 곤란했던 일은 하나.

새로이 가주의 자리에 오른 자가 너무나도 자유분방하단 점이었다.

'예전에는 커피를 싫어했었지.'

하루는 티타임을 가졌을 무렵, 자신이 타준 커피를 마시며 시답잖은 잡담을 던져왔다.

찾아온 손님도, 높으신 분도 아닌 시종과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지금은 좋아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시엔 여유가 없었던 게지. 여유가 없다면 그저 쓴 물에 불과하니까.'

가주가 되기 전.

골드리안의 어린 후계자들은, 가문의 지분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계승서열이 높은 맏아들조차 자격이 부합되지 않으면 뒤처지고, 같은 형제들은 물론 계승서열이 낮은 서자들조차도 제 이익을 위해 훼방을 놓는다.

가문의 추종자들은 그런 이들에게 빌붙으며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모략을 꾸미기까지.

그때와 비교하면, 가주의 자리에 오른 당시는 정말 한적하다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리엣도 한 잔 마셔보겠나?"

그런 가벼운 마음에서 비롯된 제안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아리엣은 그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런 귀한 음료를 감히 제가 마셔선 안 된다 생각합니다.'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커피를 잘 타는 법을 익히기 위해선, 자신이 직접 탄 커피들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가끔씩 한두 모금 정도에 불과하며, 그 방법을 파악한 후엔 정해진 방식에 따라 커피를 우리기만 할 뿐.

설령 탐이 나더라도 주인을 위해 절조를 지키는 것 역시, 시종이 된 자에겐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충직한 모습을 보이는 아리엣을 만족스레 쳐다본 아놀드가 미리 준비해 둔 통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럴 줄 알고 자네를 위해 선물을 하나 준비했지.'

'……이건 무엇이죠?'

'민들레 커피라고 하네. 얘기를 들어보니 변방지대에서 커피의 대용품으로 쓰인다 하더군.'

귀족들이 쓰는 사치품을 흉내낸 제품.

그중에는 서민들의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끄는 경우가 있으며, 골드리안은 제국에서 거래되는 대부분의 물품을 유통하는 상회를 운영하는 가문이다.

사치품은 물론 그 모조품 역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마침 이걸 상회에서 대량으로 생산하고 유통할 예정인데……. 이거라면 자네도 부담 없이 나와 함께 티타임을 가질 수 있겠지.'

대외적으로는 새로운 사업을 위해.

하지만 실제 속내는 고작 시종과의 티타임을 가지고자, 감히 귀족의 문화를 따라하려는 평민들의 문화를 적극 도입하려 한 것이었다.

아놀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부하와도 솔선수범하게 어울려 지낼 수 있는 사람.

'그것이 가주님의 명령이라면 기꺼이 따를 뿐입니다.'

하지만 주군으로써의 격은 떨어질지언정 같은 인간으로써는, 그런 그가 마냥 싫다고 여겨지진 않았다.

만약 신분의 차이가 없었다면, 좀 더 좋은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

'아리엣. 나는 그대를 무척이나 총애하고 있다네.'

하지만 그런 다정함 역시 결국에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기인되었던 것.

그것을 어렴풋이 짐작하는 가운데, 어느 날 아놀드가 그녀를 앞두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기 시작하였다.

'네, 저도 가주님을…….'

'빈말로 하는 게 아니라네. 의례적인 감사도 아니고.'

'……가주님?'

단 둘이 가지는 티타임은, 그 자체로 제 측근과의 독대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오롯이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자와만 가지는 자리.

'가주의 자리에 앉고 난 후 한시도 마음이 편한 적이 없다네. 나를 마주한 모두가 언제든 이 자리를 노릴 것만 같아서……. 그 두려움에 잠을 설치는 날도 적지 않은 편이지.'

'…….'

'…아리엣, 내가 이 자리에 앉기까지에 많은 형제들이 목숨을 잃었다네. 나를 따르던 이들도,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가문의 추종자들 역시도.'

이 자리에 앉은 후부턴 그들의 죽음을 기리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패배자를 기리는 건 그 자체로 지도자의 위엄을 하락시키는 일이니까.

도리어 그런 더러운 사투를 감추기 위해선 성과를 거듭하고, 이 가문에 의지하는 이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런 성공에도 분명 많은 이들이 꼬이겠지. 하지만 가장 두려운 건……. 이제 곧 태어날 나의 자식마저도 그런 미래를 겪으리란 거네.'

언젠가 가문의 미래를 이어받게 될 아이들에게도.

하지만 그 미래가 두렵다 하여 거스를 순 없는 노릇이다.

그는 가주로서의 책임을 짊어져야 하고, 보다 큰 부흥을 위해선 많은 자식을 낳은 후 그들을 경쟁시켜 최고의 후계자를 선출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런 세태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차마 그걸 반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저주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리엣, 자네는 나를 배신하지 않길 바라네. 지금도, 앞으로도……. 그리고 언제까지고.'

그런 나약함을 토로하며, 당장이라도 으스러질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그가 너무나도 가엾게 느껴졌다.

태어나길 시종으로 태어난 여인이, 섬겨야 할 자에게 동정이란 감정을 품게 되는 순간.

'네, 절대로 당신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날 자신을 맞잡은 손이, 이윽고 제 방까지 향하는 것을 차마 거부할 순 없었다.

사랑은 없이, 그저 신뢰와 충성만으로.

그렇게 서로를 신뢰하여 맺어진 결실이, 이후에도 골드리안을 계속 수호하길 바라고 있었으니까.

'설령 이 몸이 늙고 노쇠하여 역할을 다 했다 할지라도, 그 유산은 오래토록 남아 가문을 수호하리라.'

그다음 대에도. 그리고 그다음 대에도…….

그 광경을 보는 건 이 늙은 몸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여겼건만.

* * *

-쨍그랑!!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

제 지인이 준 귀한 선물이 탁자 밑으로 떨어졌지만, 아리엣은 차마 거기에 안타까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커헉……."

어느 순간 숨이 가빠오고, 몸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머리가 깨질 듯 덮쳐오는 두통, 그리고 흐릿해지는 시야.

당장 집밖으로 뛰쳐나가 도움을 청하고 싶음에도, 늙은 몸으로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끝내 꺽꺽대던 아리엣이 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아, 아아……."

시야에 희미하게 보이는 녹색의 잔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거기에 손을 뻗었지만, 끝내 손끝은 닿지 못하고 바닥에 축 늘어지고 말았다.

가슴팍을 틀어쥔 손에서 느껴지는 박동마저 서서히 사그라지는 게 느껴지고 있으니…….

'아놀드, 저도 갈 때가 되었나보네요.'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은 제 옛 주군.

이미 떠나버린 사람과 엮인 추억은, 인생의 종막에도 그녀의 머릿속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이것이 주마등이라는 것일까?

그 의식이 끊어지기 전, 그녀의 머릿속에 두 사람의 인영이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아드리아나.'

제 주군을 기리고자 찾아간 영묘에서 마주했던 자신의 손녀.

그리고 그 곁에 서있던 자신의 또 다른 주군.

'도련님….'

어째서 주님은 자신에게 더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일까.

조금만 더…….

두 사람에게 제 마음을 표현할 시간이 주어졌다면 좋았을 텐데.

'부디, 모쪼록 제 손녀를……. 당신과, 같은… 그이의 핏줄을…….'

그 미련조차도 끝내 더 이어가지 못하고, 이내 아리엣의 고개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평생을 한 가문을 섬기는 데에 투자했던 여인.

그 죽음의 순간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고독히 이루어졌다.

그 죽음을 기리는 데에 성대한 장례식이 이루어졌다는 것 역시 알지 못한 채로…….

[외전-민들레 커피 END]

"도련님. 이건 대체……?"

마차 안에 펼쳐진 테이블.

그 위에 쌓인 책을 마주한 아드리아나가 얼떨떨한 얼굴로 제 앞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있는 건 마찬가지로 책을 펼치고, 제 옆의 종이에 펜을 끄적이고 있는 금발 사제복의 남자.

그가 아드리아나와 눈을 마주보지 않은 채 툭 던지듯 말했다.

"사흘 줄 테니까, 그때까지 그 책에 있는 내용 전부 다 암기하도록 해."

"네?"

"의사 되고 싶다며? 그럼 해야지."

현역이었을 적, 셰인은 백과사전 두께의 책을 사흘에 한 번씩 정독했던 몸이다.

그 가르침은 2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잘 외웠는지 시험도 볼 테니까 건성으로 하지 말고. 무슨 말인지 알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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