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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174화 (174/255)

의무병의 환생 174화

제국은 황실의 지도 아래 무수한 영지로 나뉘어 관리되는 나라.

그만큼 넓은 땅을 자랑하고 있지만, 편의적으로는 수도를 필두로 한 중심부와 변경지대로 구분 짓고 있다.

그리고 지금 셰인이 향하는 곳은 변경지대.

중심부에서부터 그곳을 목적으로 나아간다는 건, 애초에 장기여행을 염두에 둔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단하네. 만점이야."

그렇게 변경으로 향하는 상단의 마차 한 대를 빌린 지 대략 보름이 지났을 무렵.

셰인이 제 앞에 내어진 시험지를 채점하며 연신 감탄을 흘렸다.

암기 중심에 객관식 테스트라곤 하지만, 보름 만에 자신이 낸 시험에서 만점을 받는 건 충분히 고평가할 부분이었다.

"……과분한 칭찬입니다."

반면 시험을 받은 장본인은 기뻐하긴커녕 석연찮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 시험이 처음 테스트에 비해 난이도가 크게 줄어서일까?

'아니, 문제가 있다며 처음부터 시험을 너무 어렵게 낸 거였겠지.'

이 제국의 사람은 아이헨발트 출신자라면 누구나 가진 '일반상식'조차도 결여되어 있으니까.

폐해는 그 점을 고려하지 않고 전생을 기준으로 문제를 냈다는 것.

그 실책을 떠올린 셰인이 코웃음을 치며 아드리아나를 타일러주었다.

"뭐, 너무 실망할 필요 없어. 애초에 이제껏 접해본 적 없는 지식이고, 조급해하지 않고 차근차근 해나가는 게 너한테도 도움이 될 테니까."

"아뇨, 조급하다거나 한 건 아닙니다."

아드리아나가 셰인의 위로에 고개를 가로젓고는, 자신이 풀었던 시험지를 내려다보며 마저 말을 이어갔다.

"그저 시험을 치를수록, 제가 알고 있는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런 것뿐이죠."

세계가 무너진다…….

셰인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비유였다.

사람의 몸이 이렇게나 복잡하고, 또 어느 부분에 어떤 작용이 이루어지는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어려운 이야기일 테니까.

'그런 걸 알아야만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기피하겠지.'

그렇기에 이 나라의 사람들이 더욱 신앙에 미칠 수밖에 없는 거고.

그런 씁쓸한 생각을 하며 어질러진 교재를 정리할 무렵, 마차가 멈춤과 동시에 창밖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으리~!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 가겠습니다!"

슬슬 해가 저물며 야영을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이내 아드리아나와 함께 마차 밖으로 빠져나오니, 노을 진 호숫가 곁에 기대어진 마차들의 사이로 상단원들이 누비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중 셰인의 관심이 집중된 건 식기와 식자재를 꺼내는 상인들.

오늘 저녁을 담당한 당번들이었다.

"재료 손질하실 거면 저도 도와드릴게요."

"아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제도 그렇게 일하셨는데……."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계속 책만 보고 있으면 손이 굳어서, 마침 손을 풀 소일거리가 필요한 참이었거든요."

곧 셰인이 대야에 들어 있는 식자재를 들고, 자신이 머무르는 마차의 뒤편으로 다가섰다.

스튜에 쓰일 감자를 손질할 시간.

아드리아나 역시 그의 반대편에서 식칼을 이용해, 그 껍질을 하나씩 까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한 거지만 아드리아나는 셰인에게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시종으로써 일을 대신해야 한다 주장하기엔, 제 앞에 있는 자의 손짓이 너무나도 능숙했으니까.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감자 깎는 거 처음 보는 봐?"

"…손으로 감자를 깎는 걸 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죠."

실제로 셰인은 식칼을 손에 쥐지 않고, 제 엄지손가락만을 마나로 벼리며 감자를 깎아내고 있었다.

그것도 껍질에 살이 거의 붙지 않을 정도로 말끔하게.

아드리아나 역시 칼을 다루는 데엔 일가견이 있는 몸이지만, 그의 손재주를 따라할 엄두는 내지 못하였다.

"잘 봐둬. 너도 나중에 해야 하는 거니까."

"……저도 말입니까?"

"절개술은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손을 메스로 대체하는 기술은 아이헨발트의 의술사들이 가장 먼저 익히고, 가장 많이 단련해야 하는 기술이다.

당연히 제 밑에서 의술을 배우는 그녀 역시 예외가 없는 상태.

지금은 어디까지나 이론 위주의 수업뿐이지만, 교육이 심화단계에 들어서면 절개술을 포함한 실전 의술도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마음 같아선 호신술도 가르쳐주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아니, 그건 역시 무리겠지.'

의학을 배우는 것도 벅찬데 몸 쓰는 일까지 시키긴 어렵겠지.

뭣보다 그녀는 의학을 배우고자 함에도, 그 근간은 여전히 시종에 두고 있는 상태였으니.

"도련님."

그런 식으로 궁리를 하는 가운데, 감자를 깎던 아드리아나가 다시 셰인의 이름을 불렀다.

"왜 그래?"

마찬가지로 감자를 손가락으로 능숙히 깎으며 대답하는 셰인.

벌써 도구를 쓰는 자신보다도 세 배는 더 많은 감자를 깎아내었다.

거기에 시선이 빼앗긴 아드리아나가 헛기침을 하며 마저 물었다.

"도련님께선, 의학이라는 학문을 어디에서 접하신 겁니까?"

툭 내뱉은 말에 뚝 끊어지는 손짓.

아주 잠시뿐이었지만, 아드리아나는 그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누구라도 이상하게 여기겠지요. 도련님의 삶을 돌아본다면, 의학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곤 블레이즈 정도니까요.'

하지만 그가 이단의 재판을 받았던 건 14살 때의 이야기이며, 천식약을 제조했던 건 그 재판을 받기 4년 전의 일이었다.

즉 10살 이전부터 이단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제 조모의 관심을 받아온 그가, 언제 어디에서 이단의 지식을 접했는지는 누구라도 이상히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애기였을 때 팍 떠올랐어."

그리고 셰인은 그 물음에 바로 답을 해주었다.

거짓 하나 없이 솔직하게.

"네?"

"세상엔 참 별별 일들이 다 일어나거든."

물론 말해주는 건 거기까지.

공교롭게도 그 이상 자세히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

환생이라니.

아무리 인간이 빛을 거머쥐고, 그 의지로 만물을 조작하는 세계라도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닌가?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을 정도야. 내가 왜 이 시대에 환생했는지에 대해…….'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전 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례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나마 블레이즈의 사령관이 납득을 하긴 했지만, 그녀도 어디까지나 '이 세상엔 별별 일들이 다 일어난다'라는 태도에서 받아들인 것뿐.

셰인조차도 제 앞에 또 다른 환생자가 나타났다 했을 때, 그것을 바로 수긍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거라곤 신성력과 엮여 있다는 점인데…….'

신성력.

세간에는 기적의 힘이라고 하지만, 그 힘의 근본은 '과거의 상태로 되돌린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 육체가 본래 나아가야 할 미래로 향하는 것이지, 실상 그 힘의 능력은 그저 치유로 국한되지 않는 것.

그리고 셰인은 그 순수한 힘을 비틀어, 모종의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였다.

'페니 플레밍……. 그 사람에게 기생했던 옛 폭군의 망령도 그 힘을 통해 언데드를 만들어 냈었지.'

그리고 베르디 역시 그 힘을 통해 상식을 벗어난 존재를 구현한 상태.

둘 모두 정상적으로 신성력을 사용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과거의 무언가를 구현한다는 점에선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육체건, 혹은 기억이건…….

'즉, 과거의 존재의 기억을 계승하는 것도, 그 힘을 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적어도 셰인이 추측하기론 그러했다.

기적의 힘이라는 게 존재하는 시대이니, 자신의 환생 역시도 그 힘과 모종의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저기, 리나."

그리고 힘이란 누군가가 사용해야 의미를 발휘하는 법.

그에 필요한 의문을 해소하고자 제 앞에 있는 이를 부르니, 그녀가 칼짓을 멈추며 셰인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리나라니, 저를 부르신 건가요?"

"아 뭐……. 일일이 부르기엔 좀 길지 않나 싶어서."

아드'리'아'나'니까 리나다.

"……이름 짓는 센스가 좀 안 좋았나?"

"……."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아드리아나.

대답이 들려온 건 멈추었던 손이 다시 움직였을 무렵이었다.

"아뇨, 편하신 대로 불러주시죠."

딱히 불만 없이 고개를 숙이며 감자를 깎는 일에 집중하는 아드리아나.

첫대면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반응은 충분히 긍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리나."

그렇게 새로이 지어준 이름으로 그녀를 부르는 셰인.

리나라고 불린 그녀의 몸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손이 조금이라도 삐끗했다면 손가락이 베였으리라.

"네, 네. 말씀하시죠."

그래,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게 어색하기도 하겠지.

그래도 당장은 묻고자 하는 것에 대해 물어보도록 하자.

"혹시, 내 어머니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

"어머님, 말씀입니까?"

셰인의 어머니는 전대 가주가 노년에 접어들기 전 맺어졌던 사람.

그로부터 태어난 셰인을, 아놀드는 테올린처럼 후계자 싸움에 집중하는 이들보다 더 각별히 여기는 감이 있던 몸이었다.

그런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제 어미와의 관계가 그만큼 끈끈해서 였을 터.

"공교롭게도 아는 것은 없군요. 기껏 해봐야 성함이 '엔델리'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셰인이 태어난 직후 병세가 악화되어 목숨을 잃은 상태.

환생을 했다는 걸 자각한 것도 아놀드의 손에서 아리엣에게 인계되었을 무렵이니, 사실상 셰인은 자신의 친모를 본 적이 없는 상태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어쩌면 그 사람이 제 환생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건만.

'뭐, 급하게 알 필요는 없겠지.'

솔직한 심정을 얘기하자면, 셰인에게 있어 환생의 비밀 따윈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굳이 알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가벼운 호기심 정도.

뭐가 됐건 환생을 하여 이 시대의 오류를 바로잡을 기회가 주어졌다……. 당장의 그에게 중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감자는 이 정도면 되겠군요. 제가 조리사들에게 내어주고 오겠습니다."

이후 감자가 든 대야를 양손으로 쥐는 리나.

셰인이 대신 옮겨주려 했지만, 리나는 거리낌 없이 대야를 제 가슴께까지 들어올렸다.

심지어 걸음걸이도 굉장히 안정적이다. 셰인이 의외인 듯 눈을 벌려 뜨며 중얼거렸다.

"의외네, 키가 작아서 의외로 힘이 없을 줄 알았는데."

찌릿.

작은 중얼거림에 바로 사납게 눈초리를 세우는 리나.

셰인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러트리고 말았다.

"역린이었나?"

"……저는 조리를 돕고 올 테니 선생님께선 잠시 쉬고 계시지요."

그리 말하곤 훌훌 떠나버리는 리나.

상당히 발걸음에 힘이 실린 것으로 보아, 셰인이 생각 없이 한 말을 민감히 받아들인 듯하였다.

'저 날선 성격만 아니면 참 좋을 텐데.'

그 또한 개성이라면 개성이겠지, 생각하며 등을 돌리는 것도 잠시.

"이봐. 괜찮아?"

주변을 둘러보던 중, 문득 근처에서 짐을 나르던 사람이 바닥에 주저앉은 게 셰인의 눈에 들어왔다.

발목을 붙잡은 채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

아마도 길을 지나다 발목을 접지른 듯하였다.

'뭐, 일단 동행하는 사이인데 봐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의사로서의 의무를 다해보자, 생각하며 다가서려는 것도 잠시.

"이리 와봐, 치료해 줄 테니까."

곧 그의 동료 중 한 명이 손에 붕대와 부목을 들고, 쓰러져 있는 이에게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셰인이 자리에 멈춰서며 제 눈을 부릅떴다.

'……구급법?'

자신이 블레이즈에 있었을 적 제국에 출판했던 한 권의 책.

제 앞에서 상인이 행하는 건, 분명 그 책에 적혀 있던 것이었다.

제국을 변화시킨다는 이유로 출판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책으로 인해 제국에 큰 영향이 가해지진 않으리라 여겼건만…….

"아, 나으리. 혹시 어디 아프신 겁니까?"

"아프시다면 잠시 상태를 봐주겠습니다. 이 녀석이 붕대 하나는 진짜 기가 막히게 묶거든요~"

마침 치료 중이던 상인들이 셰인을 발견하며 호의를 비춰왔다.

거금을 들여 마차를 빌렸으니 귀빈으로 여길 만도 할 터.

물론 자신을 치료해 주겠다고 하는 건 용 앞에서 뱀이 주름을 잡는 꼴이지만, 셰인의 눈엔 그 또한 긍정적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뭐가 됐건 제 노력이 제국에 전파되는 기미가 보이는 상황이 아닌가?

물론 신성력을 사용하면 바로 치료할 수 있겠지만, 상행처럼 장기적으로 고된 여정을 하는 곳에선 체력이 약한 사제는 버티기가 어려운 편이다.

'스스로 치료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지.'

구원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셰인이 이 시대에 알려주고자 하는 건 그런 것이었다.

* * *

오스퍼드 자작령.

셰인이 막 도착한 그곳은 변경과 중심지대를 잇는 경유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사실상 편히 오갈 수 있는 마지막 길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변경지대는 고위귀족과 황실의 영향력이 적어, 다듬어지지 않은 길이 상당한 편이었으니까.

그래, 일반적으로는 그랬다.

"오늘은 숙소 안 잡고, 이동하면서 잘 거야."

"이동하면서……?"

상가에서 필요한 물품을 모두 구매한 직후, 리나가 셰인의 말에 의문을 느끼며 그를 되돌아보았다.

"그건, 가는 길에 야영을 한다는 건가요?"

"아니, 안주인님이 주신 티켓으로 탈 수 있는 탈 것은 잠을 자는 중에도 운행된다 하더라고."

셰인이 리나에게 제 품에 들어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에게 향할 수 있는 한 장의 티켓.

그 안에는 [고급실엔 최고의 숙박시설 완비. 밤중에도 운행 가능] 등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

고급 호텔의 홍보에서나 볼 만한 글귀.

리나가 의심의 눈초리로 셰인을 돌아보았다.

"이동하는 고급 숙박시설이라니, 저로선 상상이 되질 않는군요."

"그러게 말이다."

아무리 귀족을 위한 마차라 하더라도, 제대로 된 취침을 위해선 잠시 정차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마당에 잠을 자면서도 편히 수면을 취할 수 있는 탈 것이라니.

상식적으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짜잔~ 아무래도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나보네."

목적지에 도착한 후 놀리듯 말하는 셰인.

하지만 정작 그 대상이 된 리나는 차마 발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도 셰인과 마찬가지로, 제 앞에 자리한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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