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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180화 (180/255)

의무병의 환생 180화

비록 가문에 대한 소속감이 희미한 몸이라지만, 셰인에게 있어 '에버그린'이란 이름만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블레이즈에 가기 전에 치렀던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해주었던 변호사, 제네릭 얀데르센을 고용했던 것이 다름 아닌 그녀였으니까.

반대로 셰인이 그녀에 대해 아는 거라곤 그게 전부다.

그저 테올린을 대적하기 위한 후계자 싸움에 자신을 이용했다는 것 하나.

"블러드메리는, 현재 에버그린 님께서 안주인으로 계신 가문입니다."

"아, 뭐……. 후계자 싸움에서 졌다면 다른 가문에 시집을 가셨겠지."

"그렇게 간단히 볼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목적지가 이전 가문의 일원이었던 자다?

애초에 그 정도에 불과한 문제였다면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도련님. 블러드메리 가문은 현재 백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지만, 고작 2년 전까지만 해도 남작가에 불과했던 곳입니다."

"남작……?"

"그마저도 소위 '이름 없는 가문'이라 불리는, 머지않아 몰락이 예정된 곳이었죠."

그런 가문이 지금은 백작의 작위에 오른 것이다.

에버그린.

그녀가 블러드메리의 이름을 짊어진지 단 2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분께서 가문의 안주인으로 들어선 후, 블러드메리는 고작 2년 만에 변경지대의 시장 점유율을 독차지하는 상회를 조성하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그 위업과 영향력을 인정받았기에 가세가 기울었던 남작가문이 백작령으로 승격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상회는 현재에 이르러, 변경지대를 넘어 제도를 포함한 중심지대까지 마수를 뻗는 중이었다.

다름 아닌 제국의 경제를 주름잡다시피 한 골드리안의 본거지까지.

"어, 음……."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

이내 셰인이 제 나름대로 납득한 것을 정리해 입 밖으로 내뱉었다.

"요컨대 형님이랑 누님이 남매싸움을 하는 중에 내가 난입하게 되었다, 이런 건가?"

"……그 스케일이 전쟁 수준인 게 문제인 거죠."

그런 마당에 아직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은 서자가, 여전히 가문에 대한 충성을 잃지 않은 시종과 함께 적대하는 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간다니.

"아니, 이거 가지고 뭐라 듣는 건 좀 억울한데."

곧 셰인이 리나를 향해 곤란한 투로 말했다.

"애초에 이 추천장을 준 건 안주인님인데. 따지려면 안주인님에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남편의 숙적에게 추천장을 쓰다니.

대체 엘레오노라는 무슨 생각인 것일까?

* * *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블레이즈를 벗어나 제국으로 복귀하기 전, 제네릭은 자신이 배웅했던 이에게 그런 질문을 건넨 적이 있었다.

후속재판을 벌이기 위한 재판장까지 가는 데에만 1달이 넘게 소요되는 거리.

여유시간이 많은 만큼, 잡담을 방자한 경고 정도는 던져주어도 되리라.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자, 말인가요?'

'모르시다면 일단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니, 반드시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제네릭은 그가 자신처럼 그녀의 마수에 휘둘리길 바라지 않으니까.

그리고 셰인은 그의 말에 무언가 짐작이 가는 게 있는 듯, 곰곰이 턱을 괸 끝에 거리낌 없이 답을 하였다.

'일라이 덴 맞죠?'

'…일라이?'

'변경의 단두대라는 별명을 가지고 계신 분인데, 혹시 모르시나요?'

야만족 태생의 소년병이자, 라인하르트 가문에서 10년이 넘게 근무를 한 시종.

셰인은 그녀의 손에 척추가 역으로 접혀버리는 둥, 몇 번이고 사경을 헤맬 정도의 부상을 입은 전적이 있었다.

무력만 따진다면 전생에 겨루었던 제국의 검과도 동급이라 볼 자.

전성기의 자신이라도 전면전에선 승산이 없으리라, 그것이 당시의 셰인이 그녀를 마주하며 느껴본 것이었다.

'…크흠.'

그리고 제네릭은 그의 말을 부정하지 못하였다.

변경 굴지의 단두대.

그 명성은 제네릭 역시도 여러모로 들어본 바가 있었으니까.

'셰인 씨. 현재 귀족의 자격을 가진 여인 중 가장 위험한 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건 제네릭이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아무리 무력을 가졌다곤 하지만, 위험이라는 건 결코 물리적인 힘에서만 기인하는 게 아니니까.

그래, 진정 사회에서의 위험은 무력이 아닌 권력에서 나오는 법.

그 물음에 셰인이 손뼉을 탁 치며 대답했다.

'사샤 블레이즈 맞죠? 블레이즈의 사령관이요.'

'…….'

'……아닌가요?'

이단의 땅 블레이즈.

그곳을 관장하는 변경백은, 설령 주군인 황제의 명조차도 거부하며 영지의 수호에 힘을 쓸 권리가 있다.

그리고 지금은 화해했을지언정, 그 이전에 셰인은 그녀에게 죽도록 얻어터진 적이 있던 몸.

당시 피부로 느껴졌던 그녀의 무력은 일라이와 비등하다 여길 정도였다.

'네, 뭐……. 틀린 말은 아니군요.'

그리고 제네릭은 그 말에 마지못해 수긍하며 화제를 마무리 짓고 말았다.

일라이 덴, 사샤 블레이즈.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온 그라면 누구를 만나건 버텨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반대로 그 당시 거론하려 했던 사람은, 그 두 사람에게 견줄 정도로 위험하단 의미이기도 했다.

제네릭이 섬기는 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다른 이들이 그렇듯, 그녀의 밑에서 복종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 * *

"그러고 보니 동생은 잘 지내고 있었어?"

그런 사람과 단둘이 귀빈실에서 체스를 두는 상황은, 숙련된 변호사라 할지라도 긴장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특유의 표독스러운 눈빛조차 이 순간만은 누그러진 상태.

제네릭이 눈을 덮은 안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의외로군요, 당신이 그 분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그야 당연한 거지. 귀여운 동생인데."

귀엽다니.

애초에 가문에 있었을 적엔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던 테올린과 달리, 에버그린은 단 한 번도 그 소년에게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서자란 그런 존재였다.

이용가치도 없고, 괜히 테올린을 방해하고자 부추길 도구로도 쓸 수 없는…….

기껏 해봐야 후계자 싸움에서 제 아비의 환심을 사기 위한 도구로 써먹었을 뿐인 존재.

"방금 실례되는 생각 했지?"

흠칫.

체스말을 쥔 제네릭의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피식 웃는 에버그린.

곧 그녀가 제 얼굴을 감추는 베일의 밑으로 부채를 밀어 넣었다.

"제국 최고의 변호사가 된 양반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서야 쓰나? 이거 다른 사람을 고용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놀리지 마시지요."

차라리 자신을 내버려 두었으면 하건만.

제네릭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저 체스말을 움직였다.

"시키실 일이 있어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지금은 아니고, 이후에 왠지 그럴 느낌이 들어서."

"느낌, 입니까?"

"느낌만으로 부르는 건 실례인가?"

마치 간을 보듯 체스말을 쥔 손을 멈추는 에버그린.

이미 어디에 놓을지 수는 정해졌겠지만, 그럼에도 대답을 기다리듯 손에 쥔 체스말이 그 자리에 뚝 멈춰 세워져 있다.

잠시 머뭇거리던 제네릭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뇨, 당신의 예감은 틀린 적이 없으니."

거짓말이 아니다.

실제로 그녀의 판단력은 감히 자신이 엄두를 낼 만한 것이 못되었으니까.

에버그린이 만족스레 웃으며 체스말을 움직였다.

"자, 체크메이트."

"뭣……!?"

갑작스러운 선언에 눈을 부릅뜨는 제네릭.

실제로 외곽에 몰린 왕은 세 개의 말로부터 표적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말이 분명 그녀의 말보다 훨씬 많은 상황이거늘.

설마 그 남아있는 말들을 교묘히 사용하여 자신의 왕을 노리다니.

"이걸로 체스는 내 승리~! 지는 사람이 판을 정리하기로 했었지?"

대체 어디까지 수를 읽은 건지.

특유의 천진한 목소리에 섬뜩함이 느껴지는 가운데, 제네릭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체스판을 마저 정리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에버그린이 부채를 펼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대답은?"

"대답이라니, 뭘 말이죠?"

"아까 물었잖아? 내 동생 잘 지내고 있냐고."

그냥 예의상 물은 것이라 여겨 대답을 회피했건만, 그걸 번복해 묻는다는 건 그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단 것이었다.

'좋지 않아.'

제네릭으로썬 결코 환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에버그린 블러드메리.

그녀는 제네릭이 마주해온 사람 중, 제국에서 가장 위험하다 평가가 되는 여자였다.

정식 작위는 백작가의 안주인 정도지만, 그 어떤 악당이나 귀족은 물론, 황실의 일원조차도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가장 위험한 건 그녀가 가진 사상.

그건 이 제국의 체재와는 여러모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이단자라고 할 수 없되, 그 지식과 문화를 이용하고 내버릴 줄 아는 모략가절 기질을 가진 자.

'셰인 골드리안. 그 분 역시 이단자라곤 하지만, 각 이단의 문화란 결코 통일되지 않는 법이죠.'

오히려 제국보다도 눈앞의 여자를 더 혐오할지도 모를 일.

그런 불안함을 느낀 제네릭이 목에 힘을 주며 물었다.

"혹시나 싶어 묻는 거지만, 그 분을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 생각입니까?"

이제까지 그녀가 눈독을 들인 인재들을 마주했을 때처럼.

그에 에버그린이 베일에 가려진 시선을 창밖으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무리야 그건."

"무리라니, 무슨 말씀이시죠?"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긴 한데, 상대가 너무 나쁘거든."

"……."

"어머, 왜 이렇게 표정이 굳었어? 내가 이상한 말을 했나?"

자각 정도는 있나 보군.

실제로 그녀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였을 때, 그자를 회유하는 데에 '무리'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었다.

그건 그녀의 적수라고 불렸던 테올린 역시 예외가 아닌 상태.

도리어 변경에까지 영향력을 펼쳐 견제하는 중에도, 그녀는 느긋하게 골드리안으로 복귀한 후 테올린에게 직접 중심지대의 영업권을 따내는 강단과 재치를 보였었다.

"솔직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생각하거든. 그 아이는 어떤 의미에선 오라버니보다도 훨씬 위험한 존재니까."

테올린 골드리안.

현 골드리안의 가주이자, 가주에 오른 4년 간 역대 가주 중 최고의 성과를 거둔 인물.

섣불리 판단을 하자면 역대 가주 중 최고라 평해지고 있지만, 에버그린은 그런 그 조차 자신의 편으로 회유하고자 기회를 노리는 자였다.

그런 사람이 황실 공인의 권력을 지녔다곤 하지만, 일개 이단자를 상대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말하다니.

'셰인 골드리안. 당신은 대체 뭘 감추고 있는 겁니까.'

무엇인지는 몰라도, 무언가 그녀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을 갖추고 있다.

그건 마냥 좋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회유할 수 없는 성가신 적으로 여겨지고, 이는 즉 그 대상을 '제거해야 할 적'으로 여겨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니까.

이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자라 평해지는 여인을 적으로 둔다니.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지만, 그렇기에 그의 신변이 더 걱정될 수밖에 없군요.'

어떻게 하면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체스판을 정리한 끝에 그에 대한 궁리를 하려는 것도 잠시.

-쿠웅!

땅울림과 함께 저택의 밑에서부터 들려오는 진동음.

단순 지진 같은 게 아닌, 저택에서 누군가가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 안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스, 습격자가!! 지금 저택에 습격자가 처들어왔어요!!"

"저택을 지키는 기사들이 전부 쓰러졌어요! 안주인님! 빨리 대피하셔야 합니다!!"

부리나케 달려온 저택의 사용인들의 외침.

그 반응을 보고 무언가 짐작한 듯 에버그린이 제 턱에 손을 얹었다.

"어머나, 노라에게 기회가 되면 여행이라도 제안해 보라 했지만……. 설마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노라?"

그게 누구지?

"에버그린 당장 나와아아!!"

의문을 느낀 직후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

그와 함께 누군가가 그들이 있는 곳에 발을 들였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난입한 건 사제복을 입은 금발의 청년.

제네릭에겐 무척이나 낯익은 얼굴이었다.

"셰인 씨?"

그래, 분명 이전까지 염두에 두고 있던 사내다.

그런 사내가 왜 자신을 말리는  사용인과 경비병들을 질질 끌며, 이 집무실에까지 쳐들어왔단 말인가?

"으아아!!! 죽어!! 죽어버려 이 개년아!!!"

"도련님! 일단 진정하세요! 마음은 이해하지만 제발!!"

언제나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리나조차, 그의 다리를 붙잡은 채 애타게 외치고 있었다.

괜히 힘을 주면 애꿎은 호위병들과 제 시종까지 피해를 볼 터.

그럼에도 차마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셰인은 제 배다른 누이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으아아아!! 아아아아악!!!"

아주 처절한 비명까지 지르며.

영문을 알 수 없는 난입에, 에버그린이 제 옆에 선 제네릭을 돌아보며 물었다.

"쟤 왜 저래?"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스윽, 제네릭이 안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어떤 이유가 나와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머나. 내 동생을 그렇게나 마음에 들어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그것보다도 에버그린 쪽이 더 문제가 있단 말이었다.

그녀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만 해도 이 제국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까.

'하지만 셰인 씨께서 그녀를 상대로 살의를 발휘하시다니.'

자신을 이단으로 취급한 제국마저 존중하고자 하는 사람이건만.

도대체 이 영지에 와서 무슨 일을 겪었으면, 저런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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