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182화 (182/255)

의무병의 환생 182화

"아하하하하하하하!!"

집무실이 떠나갈 정도로 울려 퍼지는 폭소.

신비주의를 표방하듯 검은 베일에 감싸인 얼굴이지만, 정작 그 너머에선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웃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웃지마!!!!"

쾅! 소리가 날 정도로 테이블을 후려치는 셰인.

그에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집사와 시종들이 조마조마했지만, 접시와 컵은 교묘하게 책상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 위협이나 감탄을 느낄 법 함에도, 정작 분노의 대상이 된 에버그린은 여전히 자지러지기만 할 뿐.

"아, 아아 나 웃겨 죽을 거 같아……. 요새 이렇게 웃어본 경험이 없었는데, 설마 갑자기 찾아오신 우리 귀여운 동생님이 이렇게 나올 줄이야……."

"귀엽기는 개뿔이."

배꼽까지 잡고 웃는 모습을 보니 없던 살의마저 치솟을 지경이다.

열차를 습격했던 강도들을 마주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씨발, 모르핀이랑 클로로폼은 안 되면서 이 거지 같은 폐기물은 왜 유통을 허락하는 거냐고.'

민트야 식용으로도 쓰긴 하지만, 기껏 해봐야 향을 좋게 만들어주는 향신료 정도의 역할에 불과할 뿐. 그것을 메인으로 삼는 요리는 셰인이 알기론 존재하지 않았다.

뭣보다 셰인의 조국에선 민트는 '생활의약품'에나 첨가하던 물건이었다.

피로를 풀어주기 위한 파스, 혹은 치약과 같은 것 등등에.

'파스는 피부에 바르고 치약은 이빨 닦으라고 쓰는 거지, 먹으라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그나마 직접 먹는 거라 해도 박하사탕 정도지만, 그 외엔 민트초코를 주식으로 삼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반대로 제국엔 아직 치약과 같은 것이 보급되지 않은 상태.

셰인이 가진 혐오는, 이런 문화와 사용방식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으음, 이게 그렇게 싫은 건가? 영지에 온 사람들에겐 꽤 인기가 많은데 말이야~"

정작 그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현 시대의 사람은, 접대용으로 내어온 끔찍한 융합체를 대수롭지 않게 퍼먹을 뿐.

셰인이 그 광경을 보며 표정을 왈칵 우그러트리자, 그를 보고 있던 에버그린이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제 옆의 집사에게 손짓을 하였다.

"민트초코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집사, 가서 오렌지 주스 좀 가져와주겠어?"

"꺼져!!!!"

아직도 입안에 치약의 그 찝찝함이 남아있는 마당에 오렌지까지 쑤셔 넣다니.

이단심문관들의 고문도 그 정도로 끔찍하진 않을 것이다.

"누나한테 꺼지라니, 우리 동생 못 본 새에 너무 험악해졌다~ 애기였을 때엔 나한테 눈나~ 눈나~ 하고 불러주곤 했었는데."

"내가 언제 그런 소릴 했다고……."

신생아 시절은 기억할 수 없다고 약이라도 팔아보려는 거겠지만, 공교롭게도 셰인은 신생아였을 적의 기억도 모두 간직하고 있는 몸이었다.

빌어먹을 배다른 누님의 헛소리에 진절머리가 날 무렵, 에버그린이 제 배후에 자리한 제네릭에게 매달려 울기 시작했다.

"흐에엥, 제네에몽~ 아무래도 내 동생이 뒤늦게 사춘기를 겪고 있는 거 같아!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는데 나 너무 슬픈 거 있지?"

"…제네몽은 뭡니까."

그리고 제네릭 역시 민트초코라는 저 간식거린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뭣보다 개인적으로 호감을 가진 건 에버그린이 아닌 셰인 쪽.

대놓고 공감을 하지 못하는 처지에 한숨만이 나오는 가운데, 문득 제네릭이 셰인의 배후에 잠자코 자리한 시종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주변의 다른 사용인들과 달리 시녀복만 입지 않았을 뿐, 엄연히 셰인의 전속 시종임을 자부하는 자였다.

그녀 역시 제네릭과 눈을 마주하곤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생이 많은 것 같군요.'

'네, 당신도…….'

둘 모두 한때엔 서로의 주인이 된 자를 마주한 경험이 있는 몸.

서로의 본모습을 어렴풋이 아는 만큼, 묘하게 공감대가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 * *

그렇게 어찌저찌 영지에서의 헤프닝이 종료된 후.

"그럼, 진지하게 인사를 하도록 하죠."

에버그린이 자신을 찾아온 동생을 받아주듯, 베일이 둘러진 고개를 조심스레 숙여보였다.

"저의 오랜 친구, 엘레오노라 골드리안의 추천을 받아 영지에 방문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겠습니다. 저는 블러드메리 가문의 현 안주인인, 에버그린 블러드메리. 부족한 몸이지만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어머, 내 인사에 좀 이상한 부분이 있었나?"

"아니, 별로."

셰인이 꺼림칙한 표정을 거두듯 고개를 비틀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전의 장난스러움이 무색하게도, 지금의 인사가 너무나도 완벽하단 점이었다.

'연기에 능한 녀석이로군.'

포커페이스가 뛰어난 녀석들은 자신의 말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상대를 속이는 데에 도가 튼 법.

셰인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다.

"뭐, 사실상 이 영지는 내가 관리하다시피 한 곳이라. 용무가 있다면 나에게 말을 하는 게 좋겠지만 말이야."

괜히 입담에 걸렸다간 바로 덜미를 잡히고 이것저것 털리게 되겠지.

말없이 침을 삼키는 셰인이, 곧 테이블에 내려둔 추천장을 보며 물었다.

"안주인님이랑 그 쪽이 친하다는 거 사실이야?"

상식적으로 골드리안의 안주인과, 그 가문의 주인이 된 자의 숙적과 친구라는 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건만. 정작 에버그린은 그와 전혀 관련이 없는 부분에서의 석연찮음을 토로할 뿐.

"우리 동생. 누나한테는 존대하는 법을 모르는 거야? 설마 테올린 오라버니에게도 그렇게 따박따박 반말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그쪽은 이제 우리 가문 사람도 아니잖아."

"누가 들으면 동생은 가문 사람인 줄 알겠네~"

'가문사람 맞아 이 녀석아.'

공식적으론 아직 가문 사람이 맞다.

테올린이 독립할 때가 된다면 제명한다고 말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닌 상태다.

"그리고 애초에 나한테 도움을 받으려고 여기에 온 거 아니었던가? 그럼 최소한의 예의 정도는 차려줘야지."

하지만 이 부분은 정론이라 뭐라 할 말이 없군.

엘레오노라와의 사이가 의심되는 만큼, 추천장 하나만 가지고 그녀가 자신에게 협조해 주리라곤 생각하기도 어려웠으니까.

"…누님께서 안주인님과 친하다는 게 사실입니까?"

"뭐,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고, 사교회에서도 여러모로 친분이 있었으니까. 오히려 그 애가 오라버니와 맺어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고……."

요컨대 먼저 친구를 먹었지만, 이후 테올린과 눈이 맞아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친분을 곧장 없던 셈 칠 수도 없는 노릇.

그 연이 이제까지 이어져온 건 충분히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뭐, 추천장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우리 동생이 변경에서의 여행을 즐기는 동안 내가 편의를 봐주고, 필요하다면 도움도 빌려달라고 하는 건데……."

베일 밑으로 스윽 들어가는 부채.

그 너머로는 실루엣이 겨우 보일 정도이기에 표정을 읽기 어려웠지만, 목소리에선 특유의 능구렁이다움이 다분히 느껴지고 있었다.

"우리 동생은 가문에서 편히 있어도 될 텐데, 굳이 이 머나먼 변경 땅까지 여행을 온 걸까나? 추천장에 적혀 있는 대로 단순한 여행은 아닐 것 같고……."

흐응~ 하는 콧소리를 통해 수상쩍음을 표현하는 에버그린.

거기에 뭐라고 답을 할까 고민을 했지만, 애초에 여기까지 온 시점에서 돌아간다는 건 여러 부분에 실례가 되는 일이었다.

그녀를 추천해준 노라에게도, 그리고 일단은 자신을 영지에 받아들여준 에버그린에게도.

'이 여자에겐 사적으로 누를 끼쳤다는 생각 따윈 하고 싶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귀족의 이름을 가진 자가, 다른 귀족가문에 멋대로 쳐들어와 깽판을 친 부분에 뒤따라올 책임을 우려한 것이다.

자신은 몰라도 가문에 피해가 가는 건 사양하고 싶은 일.

그러니 이 부분에 대해선 일단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설명하기 전에, 잠시 자리 좀 비워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듣는 사람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으리라.

그 물음에 에버그린이 기다렸다는 듯 부채를 접고, 그 끝으로 제 손바닥을 두드렸다.

"집사. 시종아가씨를 동생이 머무를 방까지 안내해 주겠어? 전속 시종이 따라왔으니 그 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

"네, 그럼 이쪽으로."

"그리고 제네릭. 당신은 내 다음 지시가 올 때까지 시종아가씨와 함께 있도록 해."

"저도, 말입니까?"

"뭐, 서로 마음이 맞는 부분이 있어 보이니까. 고용주로써 너무 오지랖을 부린 거라면 사양해도 되지만……."

슬쩍 눈치를 주는 에버그린.

제네릭이 그를 살피다, 이내 고개를 숙이며 집사와 리나를 따라 접대실의 밖으로 떠나갔다.

그렇게 접대실에 남게 된 건 셰인과 에버그린 단 두 사람뿐.

곧 에버그린이 권위를 표하듯 다리를 꼬기 시작했다.

"자 그럼 잡담은 그만하고 슬슬 본론으로……."

"천장이랑 바닥에 있는 사람들도 돌려보내셔야죠."

"……."

말없이 셰인을 쳐다보는 에버그린.

셰인은 그에 어깨를 으쓱이며 에버그린을 마주할 뿐이었다.

"신중한 건 좋지만, 그래도 저 역시 누님에게 도움을 빌리기 위해 온 겁니다. 괜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좋을 거예요."

"……흐음."

신음소리를 흘리며 제 손의 부채로 테이블을 두 번 두드리는 에버그린.

그 신호를 받기 무섭게 천장과 바닥에 숨어있는 이들의 기척이 사라져버렸다.

"이건 놀랍네~ 설마 우리 귀여운 동생이 그 아이들의 기척을 바로 눈치 채다니."

아이들…….

이전까지 몸을 숨기고 있던 녀석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실상은 자객이나 첩보 등으로 분류될 만한 녀석들이거늘.

셰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레 말했다.

"전쟁터에서 구르다 보면 신경이 꽤 날카로워지거든요."

"고작 5년 사이에 그 정도로 감이 날카로워졌다니……. 참 대단한 재능이네."

다시 흐응, 하는 콧소리를 내는 에버그린.

베일 밑에 가려진 눈이 가느다랗게 뜨여졌지만,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하지만 역시 불안하네. 그 아이들을 물린 게 좋은 선택인지 아닌지."

"이전에도 말했다시피 저 역시 누님에게 도움을 빌리고자 이곳에 온 겁니다. 오히려 변경지대에선 의존할 곳이 누님밖에 없기에, 딱히 해를 입힐 생각은 없어요."

굳이 도움을 주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다 여기며 혼자 나름대로 조사하면 그만일 뿐.

그렇게 타이르는 셰인을 보며 에버그린이 코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딱히 우리 동생이 나에게 해를 입힐까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야. 보는 눈이 없으면 내가 조금~ 막나갈지도 모르는 게 불안한 거지."

제 앞에 있는 자가 자신에게 해를 입힐 게 아닌, 자신이 제 앞에 있는 자에게 해를 입힐 것을 우려한다.

셰인으로썬 이해하지 못할 말이었다.

제 앞에 있는 자는 육안으로 보기엔 힘이라곤 쥐뿔도 없어 보였으니까.

'위협을 하더라도 그건 정치적인 측면이나 입담을 이용한 협박, 회유 정도일 거다.'

하지만 그런 수단은 지금의 말처럼 '직접적인 위협'에 비유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었다.

허세인가? 아니면 자신을 불신하기에?

"……뭐, 불안하시다면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도 누님의 말을 잠자코 따르는 것도 방법이겠죠."

어느 쪽이건 일단은 경계를 푸는 것이 우선이리라.

그런 판단 하에 저자세로 나서자, 에버그린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내 말을 들어준다니, 이 영지에서 신세를 지는 동안 내 말을 따라주겠다는 거야?"

"어디까지나 가능한 선으로 한정되겠지만…… 누님의 입장에서도 그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골드리안에 있었을 적에도 온갖 배신자들을 단신으로 처리했던 몸이다.

로열 나이츠의 권한도 남발하지 못할 뿐, 기회를 잘 이용하면 영지에 득이 되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도 있을 터.

"확실히 부탁하고 싶은 일들이 있긴 하지. 누구에게 시키냐가 중요한 거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기회를 그다지 매력적으로 여기지 않는 듯, 심드렁한 태도를 취할 뿐.

셰인이 의문을 느끼며 되물었다.

"누구에게?"

누구에게라니.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지?

자신에게 시킬 일이 있다면 그렇게 말할 것 없이 자신에게 지목하면 될 일이 아닌가?

"……뭐, 좋아. 보는 눈도 없으니 말해도 되겠지."

정작 그녀는 그 의문에 답하지 않고, 스스로 답을 내린 듯 의미심장이 중얼거릴 뿐.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셰인은 여전히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후 벌어진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카일 페터슨."

그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절대로, 결단코.

지금 그녀가 입에 담은 건, 결코 이 자리에선 나와선 안 될 이름이었으니까.

'무슨…….'

셰인이 순간 제 귀를 의심하였다.

그야 이 시대에 와서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건 단 두 사람뿐이고, 그 외의 사람에게선 그 이름이 결코 들려선 안 될 터이니까.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오늘 처음으로 만나다시피 한, 제 배다른 누이가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일을 시키고 싶은 건 그런 이름을 가진 사내인데…."

-쿠웅!

그 이성이 바로잡히기도 전 몸이 움직이고.

이윽고 에버그린이 앉은 소파의 옆에 셰인의 발이 처박혔다.

"너."

가빠오는 호흡과 거세지는 심장의 박동.

쩍 벌어진 눈에 보이는 것은 검은 베일에 드레스로, 그렇게 전신을 흑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한 여인뿐이었다.

"대체 정체가 뭐야, 네가 어떻게 그 이름을……."

"질문이 잘못됐어."

정작 여인은 제 피부에 와닿는 폭력에 노출되고도 냉정함을 유지할 뿐이었다.

이전의 익살스러움은 모두 내버린 채로.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셰인은 바로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 당신이 나에게 물어야 할 건 내가 어떻게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가 아니라, 내가 그 이름을 가진 자에게 뭘 요구할지니까."

지금의 말을 기점으로 자신과 그녀의 관계는 배 다른 남매가 아닌, 그저 같은 피가 이어졌을 뿐인 타인으로 뒤바뀌었다는 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