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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186화 (186/255)

의무병의 환생 186화

"죗값도 다 치렀고 가문에서도 안 쫓겨났고……. 적당히 시키는 대로 하다가 돈놀음이나 하며 편하게 지내도 될 텐데, 굳이 저렇게까지 무리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블레이즈라는 험난한 장소에서 구르고, 제대를 한 후에도 로열 나이츠라는 자격을 받아 반란자나 범죄자 등을 처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 몸이다.

자세한 사정을 듣지 못했지만, 이 변경에 온 것도 그런 활동의 연장선일 게 분명할 터.

"안 봐도 뻔하지."

히히, 가면 밑으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

그렇게 홀로 중얼거리며 그의 훈련을 지켜보던 중, 문득 배후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감지하며 스윽 고개를 돌려보았다.

제복을 입은 금발의 남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면을 쓰고 있지만, 시선은 분명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다.

루미네가 삐딱하게 서며 그를 쏘아붙였다.

"뭐야 당신, 왜 그렇게 사람 엉덩이를 빤히 쳐다봐?"

검은 레오타드에 타이즈라는 아슬아슬한 복장.

영지에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호객용으로써 여겨지고 있으며, 루미네도 일단은 제 고용주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입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노출 자체에 거부감이 있다거나 하진 않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감수하기로 한 사람에 한한 이야기다.

"흐응~ 명색의 황도군이라도 남자라 이건가? 변태 같으니~♡"

새침한 약올림.

황실의 대변인을 상대로 하기엔 지나친 장난이지만, 잭은 그에 감정의 흐트러짐 하나 없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확실히 매력적인 골반이긴 하다만……. 공교롭게도 내가 신경을 쓰는 부분은 다른 곳이다."

"어머, 엉덩이가 아니라 가슴 파였어?"

루미네가 제 가슴께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가슴께가 훤히 드러나는 노출도 높은 복장.

잭이 잠시 그곳을 응시하다 다시 루미네와 눈을 마주쳤다.

"이전의 혼잣말을 들어보니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한데…….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이인 건가?"

"어머나~ 여기서 오빠한테 관심을? 사실은 그 쪽 취향이었던 건가?"

"일단은 감시대상이니 관심은 가져야겠지."

"후후, 그러시겠지."

루미네가 가면의 웃음이 그려진 부분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감시만 한다면 오빠만 지켜봐도 될 텐데, 굳이 나와 오빠의 개인적인 사이를 궁금해 하는 이유가 뭘까나~?"

"그건 나 역시 궁금한 부분이다만. 감시를 명령받은 건 그쪽도 피차일반이 아니던가?"

"나야 내 고용주가 오빠의 곁에 있으라 했지, 굳이 감시만 하라고 하지 않았거든."

루미네가 제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장갑 밑으로 교묘히 빠져나오는 비수 한 자루.

그 예리한 끝이 햇빛에 반사되었지만, 잭의 위치에선 보이지 않을 터이다.

"요컨대 오빠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선에선, 내가 뭘 하건 자유라는 거지."

농담을 가장한 경고에도, 잭의 몸에는 한 점의 떨림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가면을 쓴 만큼 감정이 표정으로도 드러나지 않는 상태.

하지만 하나만은 확실하리라.

"당신, 황도군 소속 아니지?"

"……."

침묵하는 잭.

뒤늦게 이어진 건 별다른 내색을 보이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여자의 감이지. 그리고 오빠랑 같은 금발이고……. 아, 혹시 오빠의 숨겨진 형제라거나?"

"…금발은 이 제국에서 가장 흔한 계통의 색이지."

그저 골드리안이 가장 뚜렷할 뿐.

그건 거리에 나가기만 해도 쉽게 알 수 있는, 제국에선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는 것을 보면 속세의 사정에 그다지 밝지 않은 듯한데……."

"에이, 내가? 그럴 리가! 나만큼 이 제국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다고?"

"호오, 정보수집엔 일가견이 있다는 말인가?"

정보에 능한 자가 흔한 정보를 간과한다는 건 드물지 않은 일이다.

도리어 아는 것이 많은 만큼 흔한 정보를 우선적으로 떠올리는 걸 배제하거나, 그 정보의 가치를 낮게 보며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

"못 믿겠어?"

"……설득력은 있다 생각한다. 이전의 은폐는 나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 역시 기척감지엔 전문훈련까지 받았던 몸.

그런 자신의 감지범위 밖에서 기척을 죽인 그녀는, 적어도 양지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잠입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세간에 드러나지 않는 음지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렇기에 한 가지 의문이 드는군."

그래, 그 가능성은 어느 정도 염두에 두었던 일이다.

지금 그들이 있는 땅의 주인이 다름 아닌 골드리안이 낳은 악마였기에 더욱이.

"그대는 어째서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도 에버그린을 따르는 거지?"

"당연히 고용되었으니까 따르는 거지. 실력자가 의뢰를 받는 게 그렇게 이상히 볼 일이야?"

"내 말은, 어째서 그대쯤 되는 인물이 에버그린과 같은 위험한 자를 따르냐는 말이다."

황실의 대변인이 일개 귀족의, 그것도 가주가 아닌 안주인을 상대로 '위험하다'고 말한 것이다.

보통이라면 어폐가 있다 여겨도 이상하지 않은 말.

그럼에도 루미네는 그 말을 얼버무리거나 하진 않았다.

"……황실에서 들은 말이 꽤 되나봐?"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 이 제국에 존재하는 귀족 중 1할을 지워버린 것이 그녀라는 건."

약 20년 전의 일이다.

변경의 귀족들 중 1할 가까이가 재산을 탕진하고, 끝내 몰락하여 이름이 지워지고만 끔찍한 사건…….

그 후 영지를 관리할 이들이 크게 줄어들었고, 일부 귀족이 영지를 흡수해 세력을 키우거나 돈이 많은 상인들이 작위를 사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었다.

그리고 황실에서 그 사태의 내막을 접한 건 그로부터 몇 년 후의 이야기.

그마저도 너무 충격적이었던 만큼, 그녀가 그 사달을 일으켰으리라 믿는 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고작 10세 언저리에 불과한 소녀가.

제국 귀족의 1할에 타격을 주었으리라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아아, 뭔가 했더니 코인 사태를 말한 거구나."

하지만 정작 제 앞에 있는 여인은 그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잭이 의문을 표하며 되물었다.

"코인?"

"업계에서 쓰는 은어야.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잡고 떡락이요~ 떡상이요~ 하며 돈을 꼬라박다 다 날리는 일이 있거든."

그리고 그들의 최후는 대체로 길거리에 나앉거나 행방불명.

뒷세계에서 그런 이들의 행방을 소문으로나마 찾을 수 있긴 하지만, 그 최후는 대부분 좋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일도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웃으며 넘기는 악마 같은 사람인데, 굴복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겠지."

"……요컨대 운이 나빠서 잘못 걸렸다는 건가."

"덕분에 하고 있던 일도 다~ 내팽개치고 평생을 그 여자한테 덜미를 잡히며 살게 되었지, 아이고 내 팔짜야~"

이전까지만 해도 으스대던 태도가 차차 신세한탄으로 바뀌어가는 순간.

그런 루미네의 말을 듣던 잭이 턱을 괴며,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조금 과한 추측이다만, 그 계기를 마련한 것이 그였던 건가?"

과녁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길 반복하는 금발의 청년.

그를 잠시 돌아보던 루미네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넘겨짚었네. 그건."

"그런가? 나는 꽤 정확히 짚었다 생각한다만."

이전까지만 해도 그를 향해 동정 같은 것을 내뱉지 않았던가?

혼잣말이라기엔 그의 사정을 꽤나 잘 아는 듯 보이지만, 셰인이 이 블러드메리에 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에버그린에게 묶여있는 그녀와 만나기란 쉽지 않을 터.

당연히 누구라도 그와 구면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물음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대답해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그리고 루미네는 그 물음을 마냥 흘려듣지 않았다.

도리어 이전의 장난스러움을 던지고, 한껏 진지한 태도로 그를 마주할 뿐.

"굳이  연락책이라면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될 텐데, 어째서 당신쯤 되는 사람이 이 변경까지 찾아온 거야?"

이미 그가 황도군이 아니라는 건 진작 눈치 챈 상태였다.

굳이 따지자면 명령을 듣는 쪽이 아닌 내리는 쪽일 터.

그건 그녀가 가진 정보의 힘이 황실 내에까지 미치기에, 에버그린의 실체를 아는 자가 황실 내에서도 손에 꼽다는 걸 알기에 가지는 확신이었다.

"그의 팬이기 때문이지."

그런 위치에 올랐다 추측되는 남자의 대답은 무척이나 간결한 것이었다.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아니면 진실임에도 과하게 포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 이번에는 내 질문에 답을 할 차례인가?"

애초에 이 자리는 그저 한 인물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진 것에 불과할 뿐.

추측의 여지라면 몰라도 진위를 직접 내뱉기를 바라는 데엔 무리가 있다.

"자네 역시 그와는 어느 정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만……. 그 관계가 다른 이에게 맡겨도 될 일을, 굳이 자신이 자처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그건 잭뿐 아니라 루미네 역시도 마찬가지.

그 소소한 궁금증을 입밖으로 내뱉자, 루미네가 대답을 회피하지 않고 다시 셰인 쪽을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소꿉친구가 반가워서, 라고 답해둘게."

가면 밑에 자리한 호박색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콰앙!!

대지가 전율할 정도의 파공성.

그에 오싹함을 느낀 리나가 수행을 멈추고, 다급히 셰인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도련님, 이건 대체……?"

"별거 아니야."

셰인이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올리고, 그 손을 이용해 노린 표적을 응시하였다.

우뚝 세워져 있던 과녁이 대파된 것도 모자라, 그 뒤에 자리한 벽마저 산산이 붕괴되어 있다.

그것을 일으킨 건 고작 중심지에 박혀 있는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

"그냥 생각난 걸 한 번 해봤을 뿐이지."

아직은 한 번 던지는 게 고작.

하지만 시작 단계에서 이 정도라면, 보강할 경우의 위력과 효율은 상상을 넘어설 것이다.

"좀 더 연습해 봐야겠네."

그 점을 실감하며 손을 틀어쥐기 무섭게 모이는 빛이, 그 손에 어린 부담을 완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복되는 훈련의 끝에 원하는 성과를 거둔 것은 1달이 지난 후.

셰인이 20세가 되었을 무렵의 일이었다.

* * *

"생일 축하해 동생~!"

그런데 그 기념비적인 순간을 축하해 주는 자가 이 여자라니.

이걸 기뻐해야 하나?

"선물이 너무 거창하지 않아?"

"에이, 이 정도면 애교지. 나 때는 이거보다 열 배는 더 큰 드레스를 입고 다녔는데~"

"……그 정도면 커튼 아니야?"

비약이 지나치다, 생각한 셰인이 코웃음을 터트리며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애초에 이 옷, 순수하게 생일선물로 준 것만은 아니지?"

평소 입고 다니는 사제복과는 대조적일 정도로 하얀 가운이었다.

대개 가운이란 건 성직자나 학자들이 입고 다니는 것이지만, 그 경우 양측 모두 흑색을 띠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런 마당에 하얀 가운이라니. 제국의 문화에선 상당히 이질적인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고향의 감상이 느껴진다고 할까.

"꽤 신경 써서 알아보고 만든 거야."

그에 향수를 느낄 무렵, 에버그린이 셰인의 팔에 무언가를 채워주며 말을 이었다.

녹색의 십자가가 새겨진 휘장. 셰인의 조국인 아이헨발트의 국기가 연상되는 물건이었다.

"……이런 건 또 어디에서 알아온 거야?"

"말했잖아? 정보전에서 나를 따라올 사람은 없다고."

그래, 그 정보력으로 블레이즈를 포함한 제국 각지에 있는 것들을 전부 끌어 모아 영지를 부흥시켰었지.

이미 이 시대엔 잊혔으리라 여긴 역사를 발굴하고, 그것을 토대로 한 양식의 의류를 만드는 것도 그녀에겐 아주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어때,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고 자시고……."

하얀 가운에 녹색 십자가가 그려진 휘장.

과거 셰인이 전장에 나갈 때입고 다녔던 전투복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그래, 그 시절의 향수를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는 복장.

"……너무 화려하지 않아?"

그 속내를 숨기며 껄끄러움을 드러냈지만, 에버그린은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조건이 있었잖아? 내가 변경에서의 활동을 도와주길 바란다면 일단 내 장단에 어울려 달라고."

"……이번 건만 잘 넘기면 지원해주겠다는 거, 꼭 지켜."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그쪽과 모쪼록 오랫동안 연을 맺고 싶거든."

이윽고 저택을 빠져나온 에버그린을 마주한 것은 호화스러운 마차.

에버그린이 그 마차를 향해 발을 들이기 전, 셰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 그럼……. 가실까요, 나의 왕자님?"

목적지는 체펠리 후작령.

무도회가 열리는 곳이자, 셰인이 귀족으로서의 첫 데뷔전을 치르게 될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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