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189화 (189/255)

의무병의 환생 189화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심각한데……. 언제 사고라도 난 거야?'

'사고는 무슨. 어렸을 때부터 여러모로 많이 노려졌던 몸이라 그런 거지.'

처음부터 이런 몰골이었던 건 아니다.

사고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벌어진 일이고, 그걸 오래토록 방치하니 신성력으로도 수복할 때가 늦어 상처만이 겨우 아물었을 뿐.

그녀가 태어났던 골드리안이란, 그런 위험이 수시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가문이었다.

제국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가문이란, 그만큼 노리는 이들도 많다는 의미니까.

'……대충 네가 왜 이런 사람이 됐는지 알 것 같네.'

'하하, 그건 무슨 의미일까나?'

'잡설은 그만하고 일 얘기로 돌아가자고.'

물론 셰인은 그녀의 개인사정 따윈 아무래도 좋을 뿐이었다.

애초에 그녀에게 턱을 보여달라고 한 건, 그녀가 앓고 있는 문제를 '의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단 확신을 가져서일 뿐.

앞으로 동맹을 맺게 된 입장이니, 그녀가 이제껏 앓고 있던 문제를 서비스로 처리해주려는 심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래 걸리는 코스랑 빨리 걸리는 코스 중 어떤 걸로 할래?'

'……오래 걸리는 코스는 어느 정도인데?'

'보통 3년 정도지.'

'켁, 너무 길지 않아?'

'긴 게 당연한 거야. 애초에 교정치료는 자연스럽게 고쳐지길 유도하는 거니까.'

그리 말하면서도 셰인이 에버그린의 앞에 제 손을 내세워 보였다.

손끝에 감도는 건 '신성력'이라고 부르는 힘.

어차피 에버그린은 이미 알고 있으니 숨길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론상 신성력을 병행한다면 1달이면 충분하겠지. 물론 마취제를 쓸 수 없으니 엄청 고통스럽겠지만.'

로열 나이츠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 자격으로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무죄가 나올 때까지의 집행 보류일 뿐.

손재주가 필요한 수술은 오롯이 셰인만 가능하니 악용의 여지가 없지만, 약물은 그 레시피나 완전품이 다른 이들에게 넘어갈 우려가 있다.

황실에서의 감시자도 파견된 만큼 몰래 할 수도 없는 일.

그건 에버그린 역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 바로 시작하는 게 좋겠네.'

그럼에도 개의치 않고 수술을 진행하고자 하니, 셰인이 기겁하며 그녀를 향해 손사레를 쳐보았다.

'야야 잠깐,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는 거 아니야?'

산 채로 턱을 가르고, 내부의 뼈를 조밀하게 손을 보는 작업이다.

그런 걸 맨 정신으로 버텨내는 건 평범한 인간에겐 어림도 없는 일일 터.

'가급적 사교회가 시작되기 전에 끝내야 할 이유가 있거든.'

하지만 고통이 따른다는 건 그녀에겐 심각히 여겨지는 문제라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양지와 음지의 사이를 누비는 자.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생사가 갈리는 현장을 누벼온 그녀에게 있어, 육체적인 고통 따윈 무척이나 보잘 것 없는 것이니까.

* * *

"어, 어어……?"

"왜 그러시나요, 엘렉트라 양? 제 얼굴이 뭔가 이상하기라도 하나요?"

경악을 느낀 건 엘렉트라만이 아니었다.

그 뒤에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다른 귀족 여인들 역시도.

그들 모두가 한 마음이 되듯, 제 앞에서 본모습을 드러낸 여인을 보며 입을 쩌억 벌리고 있으니.

"어, 얼굴…. 그, 얼굴이……."

"후후, 이 얼굴 말인가요?"

에버그린이 제 볼에 손을 올리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날카롭고 매서운 눈빛 속의 보석과도 같은 눈동자, 그리고 단정하기 그지없는 턱선.

특유의 금발머리가 베일이 벗겨짐과 함께 흘러내리니, 마치 금빛의 폭포라도 되듯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것은 곧게 정렬되어있는 치열.

"뭐, 남들에게 보이기가 쉽지않은 얼굴이죠. 이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면 여러모로 시선을 사로잡아서, 이래저래 곤란한 일이 많이 일어나거든요."

에버그린이 제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자기 소유의 부채로 볼을 기대어보였다.

늘 습관적으로 감추던 입이 아닌 얼굴의 측면을.

그 행위가 마치 그녀의 입술 사이에 그려진 새하얀 미소를 돋보이는 듯하였다.

"물론 그 또한 저를 향한 호의라지만, 제 남편은 워낙에 질투가 많은 몸이라 그런 일은 피해야겠죠. 그래도 이곳은 외부와 격리되어있으니, 그럴 걱정이 없이 마음 편히 있을 수 있겠네요."

오만하다면 오만하다고 할 수 있는 말.

하지만 귀족이란 그 오만 역시도 자신의 소양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자신이 소속된 가문과 보유한 재산에, 땅과 권리에.

더욱 나아가 그들이 이어받은 피와 유전적으로 이어받은 외형까지.

그 시기가 그저 늦었을 뿐, 본래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건 가문이 물려준 자산을 내버리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앞에 있는 '백작가의 안주인 나부랭이'를 압도할 수 있는 힘을 말이다.

"자, 그럼 베일도 벗었으니……. 슬슬 자리에 앉아도 되겠죠?"

"아, 네에……."

이후 제 자리를 찾아가는 에버그린.

그런 그녀를 힐끗 돌아보는 엘렉트라가 침착함을 유지하면서도, 속으로 비명을 지르길 반복하였다.

'뭐, 뭐야 이거. 내가 받은 정보랑은 전혀 다르잖아!'

분명 신뢰할 수 있다 여긴 정보였건만, 정작 드러낸 얼굴은 마주한 모든 이들을 압도할 만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그런 외모를 무의식적으로 비교하듯 에버그린과 엘렉트라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는 귀족 여인들. 그로부터 위기감을 느낀 엘렉트라가 숨을 멈추며 술잔을 틀어쥐었다.

'아니, 괜찮아. 아직은……. 고작 숨겨놓은 게 드러났다는 것만으론 그녀가 나보다 위라는 게 증명되진 않아.'

그래, 아무리 골드리안의 혈통이 있다 해도, 지금은 그 가문의 지원을 하나도 받을 수 없는 몸이지 않은가?

반대로 이쪽은 변경지대를 백 년 이상 수호해 온 가문의 안주인. 추종자들이 가진 충성도는 급이 다르다.

그러니 이 대화를 어찌 주도하냐에 따라 상대를 농락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일 터.

"그, 그런데 에버그린 양? 실례지만 묻고 싶은 것이……."

그를 위한 수작을 벌이려는 순간 '촤학'하고 울려 퍼지는 소리.

그와 동시에 엘렉트라는, 제 얼굴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어?"

"아, 미안해요."

일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각하지 못한 듯, 엘렉트라가 자신을 향해 사과하는 이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손에 쥐어진 비어있는 술잔에서 뚝뚝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컵의 바닥이 훤히 보이는 건, 에버그린이 자신을 향해 술잔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손이 미끄러졌네요?"

실수?

아니, 분명 고의다.

자리에 앉고, 제 몫의 술잔을 들어 올려 컵의 술을 뿌리기까지.

직접 눈에 새겼던 그 모든 과정에, 그 어디에도 실수라 할 만한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엘렉트라 양. 그 얼굴에 나있는 건 뭔가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닌 결과. 제 얼굴에 '술'이 맞닿았단 것이다.

머리를 염색시킨 녹색의 염료가 술에 의해 기화되고, 그로부터 흘러내린 진한 액체들이 제 얼굴을 두껍게 두른 화장을 지워가고 있다.

에버그린이 그 사이로 보이는 것을 응시하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제 눈엔 검버섯처럼 보이는데……."

"꺄아악!"

비명을 지르는 엘렉트라가 제 얼굴을 움켜쥐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핏줄로 추하게 문드러진 눈동자. 그 안에 내포된 맹렬한 증오가 자신에게 술잔을 내세우는 여인으로 향해졌다.

"이, 이 미친년! 이 미친년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무의식적으로 내뱉어진 욕설.

하지만 그 발언을 실수라 하기엔, 상대가 저지른 짓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다는 게 문제였다.

고귀해야 할 귀족들의 사교자리에서 대놓고 술을 뿌리다니.

"푸흣~"

그럼에도 에버그린은 화를 내는 자신을 상대로 비웃음을 터트릴 뿐.

그에 신경이 거슬리는 것을 느낀 엘렉트라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무,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거야……. 내 말이 말 같지도 않아!? 너, 너 지금……."

"그야 웃기지 않고 배기겠어?"

당황하는 엘렉트라를 마주한 에버그린이 앉혔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진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전까지의 존대마저 거두면서.

"골탕 좀 먹이려고 부른 여자가 얼굴 좀 까니 할 말을 잃은 것도 모자라, 술 좀 맞아서 화장이 지워졌다고 전후사정 안 따지고 다짜고짜 욕설이라니. 그 누가 지금의 당신을 보며 제대로 된 귀족아가씨라 생각할 수 있을까?

"무, 뭐?"

"하기야, 자기가 감추고 있던 추한 모습이 드러났으니 화가 날 법도 하겠지."

베일을 벗어던진 자신과는 다르게.

그런 의도가 다분히 느껴지는 말에, 엘렉트라가 눈이 돌아가며 테이블에 올려둔 술잔을 틀어쥐었다.

"이 정신 나간 년이!"

-촤학!

마찬가지로 술을 면전으로 받아낸 에버그린.

하지만 씩씩대면서도 제 얼굴을 감추는 데에 급급한 엘렉트라에 비해, 에버그린은 여전히 태연함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술로 세수를 해본 적은 없는데……. 이것도 미용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네?"

도리어 자신의 얼굴에 묻어난 술로 얼굴을 문지를 뿐.

하지만 엘렉트라와 달리 화장품을 사용하지 않은 그녀에게, 지금의 반격은 그저 얼굴이 촉촉해지는 정도로 그칠 뿐인 문제였다.

그 차이를 가르쳐주는 것만으로 신경이 긁히는 게 느껴진다.

"이, 이 미친년이……!"

"미친년, 미친년~ 당신이 할 줄 아는 욕은 그거뿐이야?"

그에 대한 불쾌함을 드러냄에도 그녀는 꺾이지 않는다.

"얼마나 아는 단어가 없으면 그렇게 앵무새마냥 같은 말만 반복하는 거람? 좀 더 그럴싸하고 제대로 된 욕은 없는 거야? 성깔 더럽다거나, 너 같은 녀석이 귀족인 게 믿기지 않는다거나~"

여전히 천진한 분위기로 도발을 이어가는 에버그린.

그 말엔 한 점의 가식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에둘러 말해 상대를 희롱하는 것조차도 아니다.

"아하, 너무 귀하게 자라서 이런 식으로 욕을 하는 건 익숙하지 않은 건가?"

직설적이고 순수하게.

그 태도가 마치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처럼 보이면서도, 악마와 같은 악랄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늘 그렇듯 일러바치러 가지 그래? 그 왜~ 당신만 보며 좋아죽는 남편 말이야~"

빠드득.

엘렉트라가 이를 갈며 에버그린을 쏘아보았다.

'이 여자,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자신이 뒷세계의 조직원을 이용하여 제 약점을 파헤치려 했다는 것을 아는 것도 모자라, 그들을 회유하여 거짓정보를 퍼트린 것이다.

거기에 더해 자신이 화장으로 제 외모의 흠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까지…….

애초에 이 사교회에 대한 초대를 받아들인 것도, 지금처럼 자신을 면전에서 조롱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내가 자신보다 아래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실제로 다른 귀족 여인들은 에버그린과 자신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는 상태.

가벼운 조롱에 근엄했던 모습이 무너지니, 그녀들의 얼굴에도 차차 혼란이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이제껏 사교회를 주도해온 자신의 권위가, 지금 이 순간 귀족답지 않은 태도로 도발을 하는 여자에게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감히, 네가 뭐라고……."

하지만 의도가 확연히 보이는 쇼보다 더 화가 나는 건, 지금 그녀의 입에서 제 남편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감히 너 따위가 뭐라고 백작님을 능멸하려는 것이냐!!!"

벨라트릭스 백작.

그는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제국을 지켜온 백작가문을 이어받은 자였다.

그 삶은 오롯이 영지와 가문의 발전을 위한 것이며, 그에게 간택되어 아내가 되었다는 건 엘렉트라에겐 큰 자부심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고작 벼락출세한 계집년 주제에, 감히 그 분이 누구인 줄 알고 입에 담는 거야! 제 분수도, 주제도 모르는 년이!!"

그리고 블러드메리 역시 그 가문의 녹을 받아먹은 존재.

하지만 단시간에 너무나도 빨리 커져서일까?

거기에 경의와 감사를 느껴도 모자랄 판에, 자신과 같은 백작가로 승격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식의 추태를 부리다니.

"오늘 일은 빠짐없이 백작님에게 보고할 줄 알아…….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 사실을 만천하에 알려서 네 가문을 지워버릴 거라고!!"

지금의 죗값은 천 번을 씹어 죽여도 풀리지 않으리라.

그러한 증오에 어깨가 짓눌릴 법 함에도, 정작 에버그린은 그 조롱마저 우스운 듯 입가에 웃음을 그릴 뿐이었다.

'그래~ 이렇게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떠들어대는 녀석을 찍어 누르는 것만큼 재밌는 일도 없는 법이지.'

그녀는 알고 있을까?

약점을 캐라고 의뢰를 했던 이들이, 사실은 자신에게 종속되어있는 뒷세계의 인간들이었다는 걸.

아니, 알 리가 없을 것이다.

자신이 그녀보다도 훨씬 더 권위적인 사람들에게 초대를 받았음에도, 굳이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온 건방진 녀석을 벌하고자 이곳에 직접 행차했다는 걸.

'자기 남편이 나의 신발도 핥아본 경험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면 좋아 죽을지도 모르겠네~'

그래, 에버그린에게 있어 눈앞의 여자는 그저 우물 안 개구리로 여겨질 뿐이었다.

실제로 변경지대엔 그녀의 마수가 닿은 가문들이 적지 않은 상태.

말 몇 마디면 자신의 재산이건 땅이건 내어주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수 있는 녀석들도 한가득 존재한다.

그녀가 가진 힘은, 뒷세계를 누비며 얻은 정보란 그 모든 걸 가능케 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굴복하는 이들을 가학적으로 대하는 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

높은 자리에 오른 이의 콧대를 꺾어 누르는 건, 에버그린이란 여자에게 있어선 '취미'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몇 번 구슬리다 자기 분수를 가르쳐줄 생각이었다만…….'

그 속내를 알지 못하고 자신을 향해 욕과 협박을 반복하는 엘렉트라.

에버그린이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스윽 돌리고, 배후에 자리한 방의 입구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읽었던 공기가 이상했던 걸 생각하면…….'

여성회는 권위자가 여는 모임.

그만큼 중대히 여겨져 외부와는 완전히 격리되어 있지만, 에버그린은 이 방에 들어서기 전에 느꼈던 불온한 기운을 기억하는 상태였다.

"에버그린! 내 말이 말 같지도 않은……. 커헉!!"

마저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멱살을 잡아채는 에버그린.

이후 에버그린이 엘렉트라의 몸을 테이블 밑으로 내던지고, 자신 역시도 그 안으로 몸을 굴렸다.

'지금은 이게 정답이겠지.'

그래, 지금의 판단은 분명 옳았다고.

그 직후 문의 틈이 열리며 난입한 이들을 본 순간, 그에 확신을 가졌다.

-쿠궁!

이윽고 문이 대차게 열리며 울려 퍼지는 굉음.

에버그린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테이블 밑에서부터 상황을 살펴가기 시작하였다.

-투타타타타!!

귀를 찢듯 울려 퍼지는 맹렬한 소음의 연속.

그와 함께 천장과 벽이 갈라지고, 사방으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에 섬뜩함을 느낀 엘렉트라가 몸을 달싹이며 제 입을 벌렸다.

"뭐, 뭔가요 당신들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온……."

-투타타타타!!

위엄도, 그 이후 터져나온 비명소리마저 맹렬한 총성에 삼켜져간다.

제 옆에 있는 여인도 본래라면 그렇게 되었어야 할 터.

그럼에도 엘렉트라는 발버둥만 칠 뿐, 차마 테이블 밖으로 뛰쳐나가 제 권위를 드러낼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 철부지."

제 배후에 자리한 에버그린이, 테이블 밑으로 몸을 숨긴 후 그녀의 입을 찢어버릴 기세로 움켜쥐고 있었으니까.

"이제까지 자기 면전에 시비가 붙어본 적이 없으니 가증스럽다 여길 법도 한데, 저 놈들이 든 무기 앞에선 고귀하신 황제폐하도 그냥 살아 있는 과녁일 뿐이거든?"

-투타타타타!!

다시금 들려오는 총성과 함께 귀족 여인들이 차례차례 쓰러져간다.

그 중 한 시체와 눈이 마주친 엘렉트라가 숨을 죽이는 가운데, 에버그린이 그녀의 입에서 손을 놓아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니까 아가리 닥치고 있어. 내가 그 쪽 남편한테 덕 본 게 많아서 '딱 한 번만' 살려주는 거니까."

"……."

엘렉트라가 눈물을 글썽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라면 이런 몰골로 추태를 부리는 걸 보며 깔깔 웃어줄 생각이었건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이후 에버그린이 고개를 스윽 들어 올리자, 숨어있는 테이블보를 걷어내는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검은 복면을 쓰고 있는 남자.

손에 쥐고 있는 건 분명 총이라고 부르는 무기였다.

내장형이 아닌 외장형으로 탄창을 달고, 난사를 가능케 하는 무기.

"저항하지 않는다면 목숨은 살려주마. 얌전히 따라오도록."

"……투항하라면 투항해야죠."

에버그린이 잠시 무기를 응시하다, 이내 조용히 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재산이 얼마나 되건, 권력이 얼마나 되건, 제 앞에 당면한 압도적인 폭력 앞에선 모든 게 무용지물인 법.

그렇게 엘렉트라와 함께 테이블을 빠져나온 에버그린이, 귀족 여인들의 시체로 가득찬 현장을 벗어나 복면들의 뒤를 따라나섰다.

'자 그럼, 이걸 어쩐다.'

하지만 참극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철저한 방음으로 격리된 방을 벗어나자 눈에 들어온 건 피와 시체로 가득한 현장.

그곳을 차차 응시하는 에버그린이, 자신의 교정된 턱을 쓰다듬으며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우리 동생님은 과연 이 사태를 어떻게 정리하려나?'

지금과 같은, 감히 자신이 상정조차 하지 못한 사태를 대비해 데리고 온 조커카드를.

* * *

같은 시각, 체펠리 성의 측면 성벽.

폭발에 의해 대차게 무너져내린 그곳엔 파편에 깔린 무수한 시체가, 그리고 그 현장에서 도망치는 귀족들의 비명소리가 가득해 있었다.

그 사달을 일으킨 건 기관단총을 손에 쥐고 있는 다수의 습격자들…….

하지만 지금 갈라진 벽을 통해 들어선 건, 어디까지나 일이 저질러진 후에 들어선 '후속부대'일 뿐이었다.

"……선발대는 전멸."

이 벽을 부수고 난입한 제 동료들이 바닥에 널브러져있다.

그 위에 서 있는 것은 하얀 가운에 녹색 십자가 그려진 휘장을 걸친 금발의 남자.

"…네 놈, 혼자인가?"

이곳에 있는 이들을 전멸시킨 건.

그 물음에 남자가 제 주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 아직 독신이야."

혼란 따윈 느끼지 않는다.

갑작스러웠다 할지언정, 유혈과 비명이 가득한 현장이란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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