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195화 (195/255)

의무병의 환생 195화

숲과 산. 그리고 정원…….

생명이 넘치는 곳에는 언제나 청량한 녹빛이 가득하며, 그렇기에 제국에선 녹색을 신성한 색으로써 여기고 있었다.

생명의 가치를 존귀하게 여기는 교단은 물론 귀족들 역시도.

특히나 그들에게 의뢰를 받는 예술가들의 경우 그 색을 직접 다뤄야 하니, 누구보다도 순수한 녹색을 갈망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그 욕구를 버리지 못하고 금기를 범할 정도로.

"질레트. 그대는 현 길드의 일원으로써 결코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길드원으로써의 자격을 3년 간 몰수할 예정이니……."

그런 이유로 금기를 범하고 만 미술가, 질레트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보던 다른 미술가들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타깝게 됐구먼. 저 친구, 재능은 꽤 있었는데 말이야."

"그 재능이 오히려 욕심을 키운 격이지. 얌전히 시키는 대로만 그리면 저런 일은 없었겠다만 그게 쉽겠나?"

선고를 받고 쓸쓸히 길드를 빠져나가는 질레트.

마침 길드에 찾아온 청년이 옆을 지나치다, 옆에서 술을 마시는 이들에게 질문을 건네었다.

"저 친구 왜 쫓겨난 거야?"

"뭐겠어? 길드의 규율을 범했으니까 그런 거지."

"무슨 금기?"

"물감 섞기."

"……아하."

술잔을 입에 대며 툭 내뱉은 말에 탄성을 흘리는 미술가.

이후 합석을 한 그가 내뱉은 건 조롱이 아닌 아쉬움이었다.

"참 안타까운 친구네. 그래도 그림은 잘 그렸는데……."

"오히려 잘 그리니까 그러는 거지. 이거 보라고, 어제 만든 물감 변색된 거 보이지?"

그리 말한 한 예술가가 제 앞에 물감병을 하나 꺼내들었다.

누렇게 변색된 액체.

본래엔 나뭇잎을 갈아 녹색을 띠게 만들었지만, 그런 색도 며칠이 지나면 변색되어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되어버린다.

마치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이 메마르듯 빠른 속도로.

당연히 이런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면 작품이 망가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기껏 물감을 힘들게 만들면 뭐하냐~ 제대로 써먹지도 못해서 원하는 그림이 나오질 않는데."

"보존 마법이야 고위귀족들한테 불려간 놈들이나 쓸 수 있는 거지. 우리 같이 돈 없는 환쟁이들은 뭐 서러워서 살겠냐."

녹색은 모두가 갈망하되, 거머쥐기란 쉽지 않은 색.

그 색에 가까운 소재일수록 가치 역시 크게 높아지며, 대부분의 미술가들은 자본에 여유가 생기면 그러한 소재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것을 소망으로 삼고 있었다.

물론 이런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이런 의문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 노란색과 파란색 물감을 섞어서 쓰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게 가능하면 이런 고민을 하지도 않았지."

사정을 모르는 문외한의 말을 떠올린 미술가가 큭, 웃음을 터트리며 압생트 병의 코르크 마개를 열어젖혔다.

"얼마 전에 어떤 머저리도 그런 일을 겪었지. 귀족의 결혼기념일에 쓰일 초상화를 그리다가 팔레트에 물감 한 방울 떨어트리자마자 바로 면전에서 따귀를 맞고……."

"아, 그래. 나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그런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면 그림이 불순해진다느니 뭐라 하면서."

"교단에서 의뢰한 그림은 뭐 다르겠냐? 순수한 색을 뒤섞는 건 그 자체로 혼란을 의미하니 순수함을 해친다는데……."

"어차피 액자에 걸어두기만 할 텐데 그리는 과정을 왜 그렇게 따져대는지."

예술이란 소재의 선정에서부터 그 가치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행위.

시대에 각광을 받는 방식이나 소재를 사용할수록 작품의 가치 역시 커지지만, 이에 반하는 과정으로 작품을 만들 경우 도리어 창작자 본인의 자격마저 의심을 받게 된다.

그런 풍조는 주요 고객층이 귀족에 몰려있기에 더욱 도드라질 수밖에 없는 법.

추가로 종교적인 이유마저 존재하니, 교국 내에선 어느 정도의 절대성도 보장되게 된다.

"방구석에서 혼자 그리고 살면 모를까, 솔직히 물감 값도 엄청 드는데 팔아먹을 수도 없는 그림을 누가 하려 들겠냐?"

"그렇다곤 하지만 역시 아쉬운 일이지. 기껏 내놓은 작품이 사소한 거 하나에 과하게 트집잡혀서 내려가는 건."

예술가들에게 있어선 아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시대가 금지하더라도, 예술가들이 바라는 건 자신들이 바라는 최선의 작품을 만드는 것.

궁정미술가들조차도 그런 갈등을 느끼는 마당에, 길드의 소속원에 불과한 그들이 마냥 적응할 수 있을 리만은 만무하였다.

그에 안쓰러움을 토로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잠시.

"모두 주모옥!"

길드의 문이 열리며 울려 퍼지는 우레와 같은 외침.

그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길드의 입구 쪽으로 집중되었다.

그곳에 자리한 것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 하지만 콧수염이 크게 돋아난 얼굴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콜키스 맥도웰.

이 길드에선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한 자였다.

"뭐야 저 녀석. 벌써 출입금지령 끝난 거야?"

"그러고 보면 꽤 되긴 했지. 저 양아치 자식."

예술가들이 있는 곳엔 필연적으로 술과 담배가 따르는 법.

그러다 보니 술에 취하여 난동을 부리는 이들도 적지 않으며, 제 앞에 있는 자는 그런 식으로 가장 많은 난동을 부린 전과가 있는 자였다.

실력은 좋지만 걸핏하면 술을 마시며 사고를 치니 금주령과 길드의 출입금지령을 내린 상태.

그런 전과가 있는 만큼, 그의 존재가 예술가들의 사이에선 불쾌히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야야, 술 좀 마시려고 왔나 본데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길드장이 알면 화낼 거라고."

"하하! 지금 길드장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 녀석들아!"

곧 길드의 홀에 배치된 무대에 자리를 잡은 콜키스가, 제 허리춤에 끼고 있던 캔버스를 배치하고 그 천을 걷어내었다.

말보다는 직접 보는 것으로.

그러한 의도로 드러낸 그림을 마주한 이들의 눈이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뭐야 저거……?"

정교하게 그려진 나무 한 그루. 거친 표면은 물론, 그 위에 새겨진 녹색의 나뭇잎들 하나하나의 무늬마저 세세히 표현되어 있다.

당장 바람에 흩날려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래, 참 정교한 그림이다 하며 감탄을 흘려갔지만, 그 뒤를 따르는 의문에 하나둘씩 표정을 구겨가기 시작했다.

"야, 잠깐. 그 그림……."

"이 그림은 놀랍게도 그려진 지 1달이 넘은 물건이다!"

그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를 외치기도 전, 콜키스가 그들의 앞에서 당당히 외쳤다.

통상적으로 쓰는 녹색 염료라면 사흘도 못 가고 변색이 일어나기 마련이건만, 지금 그가 그린 그림은 벌써 그려진 지 1달이 지났다고 하였다.

혹시나 보존마법이 걸려있나 싶었지만, 그렇다 보기엔 마도구 특유의 진동음조차도 전혀 들리지 않고 있다.

"하, 저 자식……. 금주령 떨어졌다고 이젠 훼까닥 해버린 건가?"

"누가 길드장 좀 불러봐.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길드에서 쫓아버리자고."

"에헤이! 이 멍청이들아! 잠깐 가만히 있어봐! 내 말은 끝까지 들어!"

날뛰는 예술가들을 상대로 손사레를 치는 콜키스가, 곧 헛기침을 하며 그들에게 신문뭉치를 하나 던져주었다.

"참나, 이래서 속세의 사정도 모르는 골방 그림쟁이들이란."

"너는 뭐 아닌 줄 아냐?"

"됐으니까 내가 건네준 기사나 대충 읽어봐."

불신이 어린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지만, 이내 미술가들이 마지못해 그가 건네준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까더라도 알고 까기 위해서.

그 내용을 읽어가던 중, 신문을 읽는 이들의 눈이 하나 같이 휘둥그렇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어? 뭐야."

"이런 게 나왔다고? 정말?"

"그래, 이 녀석들아. 내가 출입금지령 떨어진 후 이곳저곳 돌다가 우연히 입수해온 물건이다."

신문에 적혀있는 것은 변경지대에 상주하는 한 연금술사의 발명에 대한 것.

어느 광물에서 추출한 물질을 이용함으로써, 그 어떤 물감도 섞지 않고 자연스러운 녹색을 자아내는 도료를 개발했다는 소식이었다.

'샬레 그린.'

그것이 한 미술가를 통해 중심지대로 유입되고, 이윽고 제국 전체로 뻗어나간 염료의 이름이었다.

* * *

녹색을 신성시하며, 그 색을 보존하는 것을 갈망하는 시대.

그러한 때에 순수한 녹색을 띠는 값싼 염료의 개발은, 그 자체로 혁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일이었다.

그 소식이 변경의 한 구역에서부터 중심지대로 유입되고, 다시 변경지대를 전체를 넘어 제국 전체에 퍼지기까지에 걸린 시간은 고작 2년 안팎.

그 혁명을 일으킨 샬레 그린의 창시자, 파리스 샬레는 현재 한 남자와 거래를 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네, 이걸로……. 파리스 님이 개발하신 '샬레 그린'은 저희 상회에서 관리하고 유통하기로 결정이 되었군요."

"네, 네에.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변경지대에 위치한 한 영지의 호텔방.

그곳에서 계약서를 작성하던 파리스가, 제 앞에 있는 거래대상자를 응시하였다.

화려한 복장을 걸치고 있는 금발의 남자. 그 날카로운 눈매엔 귀족으로서의 카리스마가 더 없이 돋보이고 있었다.

테올린 골드리안.

현 제국에서 가장 높은 시장점유율을 보호한 상인가문의 가주이자, 위상만은 제3공작에 준한다 알려진 인물.

그런 인물이 변변찮은 연금술사와 직접적인 거래를 체결하고자 오다니, 이 상황이 과연 주변에는 어찌 보이겠는가?

"갑작스레 찾아왔음에도 저희 상회와의 거래를 성사시켜주다니. 제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아, 하하…… 아, 아닙니다. 오히려 저야말로 영광이지요, 네, 부, 분명 골드리안이라면 제가 만든 것을 잘 활용해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는 파리스 샬레.

행여나 그것이 눈꼴 시려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테올린은 그에 개의치 않고 제 짐가방에 서류를 집어넣으며 몸을 일으켜 세울 뿐이었다.

"그럼 저는 쌓여있는 일이 많으니 이만 실례하도록 하죠."

"아, 네. 조심히 들어가시는……."

"아니, 잠시."

막 호텔방을 벗어나려는 것도 잠시.

테올린이 자리에 뚝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제 배후에 있는 자를 돌아보며 눈짓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오기 전부터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만……. 파리스 님께선 이 샬레 그린을 만들어내기 전에 무엇을 연구하셨습니까?"

"네, 네?"

"얘기를 들어보니 파리스 님께서 개인적인 연구를 하는 중에 만들어진 부산물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외에 또 다른 유용한 것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

차차 눈썰미를 가느다랗게 만드는 테올린.

그에 긴장을 느낀 파리스가 몸을 움츠리는 가운데, 테올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저 자리에서 등을 돌렸다.

"아니, 이런 걸 묻는 건 그 자체로 실례가 되는 일이겠죠. 학자인 당신을 존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송구합니다만…"

"아, 아뇨. 괘, 괜찮습니다! 네, 네에. 그럴 수도 있는 거죠."

테올린의 사과를 뒤늦게나마 만류하는 파리스.

이후 그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던 파리스가 몸을 부르르 떨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내, 내, 내가 골드리안의 가주에게 감사와 사과를 듣는 날이 오다니.'

이 제국에서 3공작 이상의 영향력을 가진 가문의 가주가, 가문에서도 쫓겨난 변변찮은 연금술사 나부랭이에게 존칭을 취한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샬레 그린이 그만큼 이 제국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

그것이 제 위상과 업적에 대한 자부심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정작 파리스는 이 상황 자체를 즐길 수가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말하기엔 너무 일이 커져 버렸잖아……?'

그래, 골드리안 가문에서까지 접근한 현재, 이 상황을 수습하려 드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상황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와장창!!

그런 혹한 마음을 부정하듯, 그가 있는 호텔방의 창문이 어느 순간 대차게  부서졌다.

호화스러운 방에 난잡히 퍼지는 파편.

그 뒤를 이어 돌연히 난입한 자가 고꾸라지려는 파리스의 멱살을 붙잡았다.

"케헥!!"

그대로 파리스의 몸이 벽에 처박히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수 초.

그와 거리를 좁힌 습격자가 제 손을 파리스를 향해 겨누었다.

"파리스 샬레, 맞지?"

그 손에 쥐어진 것은 말이 그려져 있는 금색의 명패.

명실공히 황실의 관련자임을 알려주는 그 물건을 앞세운 금발의 남자가, 날카롭게 벼려진 눈을 치켜뜨며 그를 향해 낮게 읊조렸다.

"내가 당신이 만든 도료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괜찮다면 얘기 좀 나눕시다. 물론 묵비권 행사랑 변호사 선임 없이."

-꿀꺽.

파리스가 침을 삼키며, 제 앞에 돌연히 나타난 습격자를 마주하였다.

이전까지 마주했었던 골드리안의 가주와 판박이처럼 닮은 남자를.

* * *

그런 남자가 처음 진상을 알아차렸을 때.

-와장창!! 쿵!!

제 방에 있던 모든 것을 뒤집어버렸을 당시.

그 소란을 듣고 찾아왔던 제자의 얼굴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히질 않고 있었다.

'도련님, 괘, 괜찮으신 건가요?'

'……안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었다.

이 제국에서 벌어지는 정체불명의 돌연사 사건의, 그 진상이 그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게 여겨졌으니까.

그 진상에 의해 가족을 잃은 가엾은 동반자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비소.'

하지만 당시의 셰인은 그녀를 배려하고, 에둘러 설명할 만큼의 여유를 발휘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물감에, 비소화합물이 들어있어.'

'…….'

말없이 리나의 시선이 셰인의 앞에 널브러진 병으로 향해졌다.

난동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된 방 내부에서, 유일하게나마 깨지지 않고 보관되어있는 병.

분노로 날뛰는 와중에도, 그는 그 병에 들어있는 녹색의 액체만은 주변에 퍼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치 그 위험성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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