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197화
"……완전 개판이네."
블러드메리 백작령의 대저택.
그 집무실에 한가득 놓인 신문을 읽던 에버그린이 피식 웃으며 제 턱을 괴어보였다.
"오라버니도 참 고생이 많으시겠어. 변경지대만 해도 이렇게 난장판인데,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봇물이 수도까지 넘치지 않게 하려면 얼마나 기를 써야 할지……."
손에 있는 신문이 책상에 오르기 무섭게 신문더미가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
어차피 사방이 서류로 어질러져있는 곳이니 별 개의치는 않는다.
흥행의 가도를 걷는 영지의 주인에게 있어, 방 정리 따윈 무척이나 사소한 문제에 불과할 뿐이니까.
"뭐 어쩌겠어요? 그것도 그 사람이 감내하기로 한 일인데."
그런 그녀의 혼잣말에 대답한 건 창 밖 테라스에 기대고 서있는 여인이었다.
에버그린이 제 호위 겸 심부름꾼이자, 간혹 혼잣말을 할 때에 제 말벗으로 써먹는 최측근.
본인 말로는 외로움을 많이 타서 그리 써먹는다지만 글쎄…….
지금과 같은 시국에까지 그런 시답잖은 명분이 필요한 것일까?
"그건 그렇고 그 주름 아저씨는 괜찮아요? 최근에 영지에서 터지는 문제들 수습하느라 고생하시던데."
"뭐 어때? 이럴 때 쓰려고 옆에 두고 있는 건데."
제네릭 얀데르센.
이단변호라는 활동에 의해 명성이 실추되었지만, 그의 활동은 변경을 기점으로 이전보다 훨씬 늘어난 상태였다.
급격히 성장하는 영지를 이끌다보면 여러 법적인 문제에 부딪치니까. 특히나 지금과 같은 시국에선 국법의 전문가인 그의 도움이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 잠깐 가서 보니까 아주 죽을 맛이던데…."
"나만 하겠어?"
사람은 언제나 부족하다.
음지에 있는 이들은 양지의 활동을 염탐할 뿐, 직접적으로 간섭을 하는 건 누구의 눈에 들지 않을 때뿐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간단한 서류작업조차 제 손으로 직접 하는 이유.
에버그린이 흘러넘친 서류더미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제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아아~ 일은 많은데 사람은 없고, 그걸 나 혼자 처리하자니 체력도 부족하고……. 이거 조금 휴식이 필요하겠는데?"
"쉬고 싶으면 쉬세요. 애초에 이 가문은 당신이 주인인데."
그래, 가문의 실세인데 누가 그녀를 말릴 수 있을까?
그저 뻔히 보이는 속내에 찝찝함이 느껴질 뿐.
에버그린이 그런 루미네를 놀리듯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잠깐 티타임을 가져볼까 하는데 같이 갈래?"
"됐어요."
본래엔 특별한 명령이 없다면 어떤 상황이건 호위를 해야 하지만, 정작 루미네는 그녀와 동행하길 거부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그녀가 사전에 지시했던 '특별한 명령'을 회피할 곳을 찾기 위해서였으니까.
"참, 이제는 어른인데도 수줍음이 많은 아가씨라니까~"
그런 제 지시를 무시함에도 꾸짖지 않는 이유는 하나.
지금부터 함께 티타임을 즐기고자 하는 이가, 그녀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유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이 실의에 빠져있는 모습을 지켜보라니.
그게 고문이랑 무엇이 다르겠는가?
* * *
그렇게 집무실을 벗어난 후 향한 곳은 손님용으로 마련해둔 귀빈실.
그 방의 내부를 살피던 에버그린이 쓰게 웃으며, 자신이 들어선 방문을 조용히 걸어 잠갔다.
"……내가 이러라고 동생에게 방을 마련해준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약간의 회의감, 그리고 아쉬움이 묻어난 목소리.
그 모든 것을 특유의 미소로 감춰낸 에버그린이, 제 발치에 놓인 빈 병을 걷어차며 길을 열어갔다.
사방에 비어있는 술병이 가득한 현장.
방의 중심에 배치된 테이블엔 한 청년이 술잔을 쥐며 고독을 달래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선명한 금발을 가진 청년이.
"수염은 좀 깎지 그래? 기껏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잘생긴 얼굴이 추해지고 있는데."
불 같이 저택을 나간 후 돌아온 지 벌써 보름 째.
그 동안 셰인은 개인적인 연구와 수행마저 집어치운 채, 홀로 술을 마시기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수십 병의 술은 그가 근래에 마신 것들이리라.
셰인이 수염이 돋아난 얼굴을 들어 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밥버러지 쫓아내려고 왔어?"
"그럴 리가 없잖아?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반란군들은 얼씬도 안 하는데."
다름 아닌 제국에서 가장 위협적인 세력의 수장을 산 채로 포박한 자가 아닌가?
그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 제도까지도 전해졌을 정도이며, 반란군들의 사이에도 로열 나이츠 셰인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공작을 벌이더라도 그가 관련된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상태.
변경지대의 치안이 크게 기울어지고 있는 걸 생각하면, 에버그린에게 있어 셰인의 존재는 그 자체로 큰 도움이 된다 할 수 있었다.
"뭐, 반대로 다른 곳은 다 뒤집어지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이 쪽과 연을 맺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거든."
변경지대는 넓고, 하위귀족이라 한들 영지를 관리하는 권력자들의 숫자는 중심지대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상태다.
당연히 그들을 규합시킬 대표자는 필요한 상태.
그 역할을 어느 정도 담당하는 것이 바로 블러드메리 가문과, 그 가문의 성장에 크게 일조했던 벨라트릭스 가문이었다.
벨라트릭스 백작이 사실상 자신의 사람임을 생각하면, 이 블러드메리야말로 사실상 체펠리 후작가를 대체하는 새로운 실세로 군림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체펠리 가문이 건재했을 때에 비하면 당장의 영향력이 무척이나 적다는 거고, 자존심이 강한 귀족들의 고집을 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지."
벼락출세한 귀족을 하등하다 취급하거나, 블러드메리 자체를 근본이 없다며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귀족들 중에도 반란세력에 가세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
그런 이들도 머지않아 위험으로 다가올 수 있는 만큼, 에버그린은 양지에서 활동할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조력자가 제 세력에 있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당신 곁에 있을 생각 없어."
하지만 애초에 상대는 처음부터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거니는 자.
일시적인 협력은 있어도, 완전히 제 사람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도 그녀가 자신을 쫓아내지 않아서 그런 것뿐.
하지만 자신이 여기서 쫓아낸다면 그는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될까?
골드리안으로?
아니면 다시 블레이즈로?
"…그래, 당신도 사람인데 지칠 수 있겠지."
지금의 모습만을 보면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이 시대에 환생한 걸 저주스럽다 여기듯이.
그렇게 술을 들이키는 셰인을 향해, 에버그린이 테이블에 비치된 술잔을 들어 올려 그를 향해 뻗어보였다.
"그리고 나 역시도."
"……."
"…한 잔 받을 수 있을까?"
에버그린 블러드메리.
유전적으론 자신과 배다른 남매, 대외적으로는 서로가 협력하고 이용하는 관계.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완전한 타인이자, 제 목적을 위해선 경계심을 늦춰선 안 되는 암흑계의 거장.
하지만 그 이전엔 둘 모두 같은 인간에 불과했다.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일엔 지칠 수밖에 없는 존재들.
"그다지 좋은 술은 아니야."
"딱 좋네. 지금 우리 처지엔."
그에 대한 자각이 공감을 불러일으킨 듯, 셰인이 그녀의 술잔에 말없이 술을 따라주었다.
-쪼르르.
하얗고 탁한 액체가 쏟아지며 컵을 가득 채워간다.
병 끝에 맺어진 마지막 한 방울이 컵에 떨어지고, 그로 인해 장력이 흐트러진 컵에서 술이 흘러넘칠 때까지.
그런 한 방울의 흘러넘침이 잔을 쥔 손을 적셨을 무렵, 에버그린이 그 잔을 응시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성수라……. 참 이상한 물건이지. 술이라면 대개 금욕적인 성직자들이 멀리해야 할 물건인데, 정작 교단에선 신성한 물로 여겨지고 있으니 말이야."
알코올 도수는 3% 이하.
서민들이 즐겨 마시는 보리 맥주의 반절에 해당하는 도수지만, 엄연히 취기를 유발하기에 법적으로는 주류로 분류되는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성직자들은 기도에 들어가기 전 제 정신을 고양시키는 용도로 쓰는 상태.
보수적인 교단에서 음주를 습관으로 굳힌 건 누구나 의외라 여길 일일 것이다.
"왜 교단에서는 굳이 술을 성수로 지정한 걸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냥 잡담이나 하자는 거지. 술자리에서 그거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맥주보다도 도수가 낮은 물건인데 잘도 술자리가 되겠네.
셰인이 피식 웃으며 새로운 병을 꺼내, 그것을 자신의 컵에 따라내었다.
"아이헨발트에서의 설에 따르면 몸에 좋은 것들을 이것저것 섞어봤는데, 그게 순결함을 상징하는 '하얀 빛'을 띠고 있어서 성수로 지정되었다고 하더군."
"아이헨발트? 거긴 제국이랑 적대했던 나라 아니야? 그런 곳에서 왜 성수에 대한 설이 나오는 건데?"
"신을 섬기는 놈들은 제국이 세워지기 전부터 존재했고, 제국이 세워지기 전에도 의사라는 놈들은 있었으니까."
물론 고대의학은 아이헨발트가 지향하던 것과 비교하면 미개하고 형편없는 것.
하지만 그런 거듭되는 민간요법 역시 원인을 알지 못할 뿐, 반복하다보면 그럴싸한 결과가 종종 나오는 법이다.
의학적으로 보았을 때 성수가 마약과 성분이 비슷할지언정, 그 수치가 매우 미미하여 정신안정제로써의 역할을 충분히 하는 것처럼.
"하하, 성수가 사실은 의학에서 파생된 거라……."
"어디까지나 설이니까 너무 깊게 새겨듣진 마."
그저 술자리에 어울리는 가십거리일 뿐이다.
에버그린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반쯤 남은 술잔을 기울였다.
"역시 당신은 이 시대에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네.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어?"
"……."
마찬가지로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셰인.
혼탁한 눈으로 혼탁한 액을 응시하던 셰인이,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아이헨발트에선 위험물을 표현할 때에 '보라색'을 쓰고 있어."
"보라색?"
"투구꽃이 보라색이니까."
"아아, 그러고 보면 투구꽃도 독약의 재료로 쓰이고 있었지."
비소에 밀려 잘 쓰이지 않을 뿐, 화학에 대한 털끝만한 지식이 없었을 적엔 주력으로 쓰였던 물건이다.
그리고 그만큼 아는 것이 없던 시대였기에, 그 존재의 위험성은 더욱 도드라지고는 했었다.
"꽃이 피기 전의 잎사귀가 미나리 같은 산나물이랑 비슷해서, 혼동해서 캐다 죽는 사람들이 많았거든. 그런 점을 경계해서 독성이 있는 물질이 보관된 병은 언제나 보라색 라벨을 붙이고는 했어."
위험물을 하나의 색으로 통일하고, 그에 대한 위험을 꾸준히 상기시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시각과 기억을 연동시켜 이루는 자극은, 정신의학적으로도 무척이나 효율적인 위험표기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방침이 벌써 200년도 전에 만들어졌건만.
"만약 비소화합물의 위험성이 먼저 돌았다면 녹색을 독을 상징하는 색으로 썼겠지. 그 이전에 어떤 색을 권장했건……. 그런 색의 중요성이 대량학살을 방지하는 것보다 중요하진 않을 테니까."
"……."
"…나도 알아. 수백 년을 이어온 문화라는 게 하루아침에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제 손에 쥐어진 술잔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알콜 중독 따위가 아니었다.
애초에 도수 3%의 알콜에 의한 독기 따위, 약간의 자극을 제외하면 신성력으로도 충분히 배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면…. 중간에 그 방향을 바꿔낼 만한 노력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쩌적.
손에 쥔 컵에서 가해지는 균열.
그 컵을 내려다보는 탁한 눈동자에, 서서히 환멸이란 감정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런 기회가 있는데도 멍청하게 기존의 체제만을 고집하는 게 이 나라야. 이 빌어먹을 나라는……. 그 날의 재판 이후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거라고."
죽을 각오까지 하며, 이 시대의 어리석음을 꾸짖으려고 했었다.
민중이 보는 앞에서 교단에서도 그릇된 인물이 나올 수 있다는 걸, 납에 독이 들어있다는 것 하나 알지 못해 피해를 보는 게 이 시대임을 가르쳐주었다.
그럼에도 이 꼴이다.
자신들이 열광하는 색에 독이 첨가되어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혹은 알면서도 기적이 자신들을 보호해줄 거라 믿으며 이 대륙을 차차 녹색으로…….
그렇게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가면서도 그 잘못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이 제국이 당면한 현실이란 말이다.
"그냥……."
그러니 자신이 바꾸지 못한다면.
"차라리 그냥 전부 다 쓸어버릴까?"
자신이 직접 거악이 돼서라도 이 시대의 잘못을 말해주리라고…….
그 욱한 감정을 홀로 마주한 에버그린이 침묵 속에서 깨달았다.
아니, 잠시 잊고 있던 걸 다시 상기하였다.
애초에 제 앞에 있는 자는.
언제 반란자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해?"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녀는 반란자와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제 앞에 있는 자의 근본이 의사이자 군인인 것처럼, 상인가문에서 태어난 그녀 역시도 그 근본은 장사꾼에 두고 있었다.
뼛속까지 제 실속을 계산하는 데에 치중된 만큼, 이 혼란 속에 동참하기보단 그것을 교묘히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걸 목표로 하는 몸.
기회주의자인 그녀에게 있어선 대의나 분노……. 그 어떤 이유에서든 무작정적인 파괴행위는 멀리해야 할 것이었다.
"뭐, 굳이 말하자면 나는 전쟁을 일으키는 건 반대하는 사람이야. 내가 하는 사업은 무기를 파는 게 아니니까."
평화의 시대이지 않은가.
먹고 사는 것만 충족된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안락한 삶을 추구하고자 유희를 찾는 법이다.
그녀가 양지에서 일군 사업은 그런 유희에 치중된 것. 이제와서 반란군들이 바라는 전쟁을 고려한 사업에 손을 뻗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마당에 지도자들은 잘못을 덮기에만 급급하고, 민심은 계속 혼란스러워지니…….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고 하기엔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가 요지경인 게 문제지."
그리고 그건 어느 시대라도 마찬가지로 따라오는 문제다.
왕정 국가는 전통에 미쳐 발전을 거부하고, 군부 독재국가는 무력을 이용한 탄압에 반발만을 늘리고…….
그렇다고 민중에게 주권을 준다면,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들을 선동하는 사기꾼들이 넘쳐나게 되니.
"그래, 결국 인간사회에 있어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는 건 이상론일 뿐이야."
모두가 행복하지 않은 이상 어떤 식으로든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전쟁을 갈망하는 건 필연적인 일.'
그런 인간의 본능을 억누르기 위해 이 나라는 종교라는 수단을 선택했지만, 그 또한 결국엔 200년 안팎의 평화만을 이룩했을 뿐.
"인간을 가장 완벽하고 지적인 생물이라고 하지만, 그 근본은 결국 야생에서 살아가는 짐승들과 다를 게 없지.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도 그저 벽돌과 나무를 쌓아올려 만들어진 정글이나 다름없는 셈이고."
그리 말하곤 술을 마시는 에버그린.
셰인이 그녀를 무뚝뚝하게 쳐다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답지 않게 약한 소릴 하네."
"나 다운 게 먼데!!"
"……취했어?"
"넝담이지~ 히히!"
술 취한 듯 보이지만, 그 직후 웃음을 거두는 모습은 그 또한 연기임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런 미소 역시 자신이 없었다면 드러낼 수 없었겠지.
셰인이 말없이 비어있는 컵에 술을 따라주니, 에버그린이 쓸쓸한 얼굴로 제 의견을 이야기해갔다.
"당신은 의외겠지만 나도 처음부턴 이런 사람은 아니었어. 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아버지께선 내가 순수하고 꽃다운 아가씨로 자라길 바라고 있었지."
에버그린(상록수)
사철 내내 잎이 저물지 않는 나무란, 그 삶이 오래토록 고결하고 순수하길 바란다는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녹색을 신성시 여기는 나라에서 그런 이름을 지은 것만으로,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기대를 품었는지를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 7살 때만 하더라도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였지."
그 기대를 떠올린 에버그린이, 자연스레 제 생애의 회의감을 흘려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