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199화 (199/255)

의무병의 환생 199화

[외전-타락한 천사와 튤립 한 송이(上)]

'이 동산에 자라난 열매는 무엇이든지 먹어도 좋으나, 선과 악을 일깨우는 열매엔 결코 손을 대어선 안 될 지어다. 그것을 먹게 된다면 내 너희들을 이 땅에서 추방시킬 수밖에 없게 되니.'

그러한 가르침을 전해들은 두 사람.

남자와 여자라 이름 지어진 두 생명은 마땅히 따르겠다 하였으나, 제 남편이 잠들어있는 틈을 탄 반려는 선악과가 열리는 나무의 곁을 호기심에 기웃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찾아온 간사한 존재가 말하기를.

'이봐. 저 열매가 탐스러워 보이지 않나? 하나 정도는 슬쩍 먹어도 될 거 같은데.'

영원의 땅을 누비며 온갖 진미를 먹어왔으나, 유일하게 저 열매의 탐스러움만은 누리지 못하였다 하니.

그에 혹한 마음이 든 여성은 갈등을 하며, 자신을 유혹하는 간교한 존재로부터 뒷걸음질을 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주님께선 저걸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어. 저걸 먹게 되면 영생을 잃고,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될 거라고.'

'하하, 그거야말로 지나친 착각이지.'

'착각이라니…….'

'생각을 해보라고. 주님께선 저 열매를 먹으면 이 땅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다고 했지만…. 애초에 당신은 이 땅 밖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잖아?'

'…….'

간사한 존재의 말에 여인의 시선이 언덕의 너머로 향해졌다.

광활하고,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지평선.

그 넓은 땅에 비하면 그들이 있는 곳은 아름다운데 비해, 무척이나 소박하기 그지없는 장소였다.

영원한 삶과 영원한 행복…….

하지만 그녀가 태어난 후 누렸던 세계는, 그런 작은 이상향만이 전부였다.

'저 열매를 먹게 되면 이 세계의 진실을 깨우치게 되겠지.'

뱀은 그런 미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며, 간교한 혓바닥으로 그를 차차 회유하기 시작하였다.

여성이 물었다.

'그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데?'

'자유가 찾아오는 거야.'

'……자유?'

'그래, 그 누구도 너를 억압하지 못해. 저 넓은 땅을 모두 너의 뜻대로 누빌 수 있게 되는 거지.'

그것은 진실이었다.

정확히는 하나의 거짓을 숨기기 위한 무수한 진실.

그를 따르는 순간 위대한 존재는 제 말을 거스른 자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올 수 없다 엄포를 낼 것이다.

'영원히 이곳에서 산다 해도 당신의 세계는 결국 이곳에 한정될 뿐이야. 당신은 정말 그렇게 살아도 되는 거야?'

그러한 미래를 상상하며 두려움에 떠는 여인에게, 그 간교한 존재는 자신의 속삭임을 깨달음으로 포장하며 그녀를 회유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속에 가두어진 채 가축처럼 살만을 찌울 것인지.

아니면 저 광활한 야생으로 나아가 자유를 찾을 것인지를 선택지에 둔 채.

그 자유에 뒤따라올 '고통'이란 책임을 교묘히 숨기면서.

* * *

"아리엣, 당신은 일단 평민출신이지?"

따사로운 햇빛이 오후.

그 날 아리엣은, 자신이 섬기는 가문의 일원 중 한 명을 앞둔 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마스크를 이용하여 제 얼굴을 꽁꽁 감추고 있는 작은 소녀.

키는 작지만 엄연히 귀족이며, 감히 서민가의 출신인 자신이 거슬러선 안 될 존재이다.

"네, 일단은 그렇지요."

"그래,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당신처럼 그럭저럭 부유한 평민들의 경우엔 귀족이 입던 옷을 싸게 매입해서 중고로 입는다고 들었어."

하지만 그녀가 서민에 대한 것을 입에 담은 건, 흔히 악덕귀족이라 불리는 이들처럼 결코 그들을 무시하고 조롱하기 위해서 같은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변명거리'를 위해서였지.

"누군가는 얼마 입지도 않은 옷을 바로 팔아치우는 걸 돈낭비라고, 또 서민들을 무시하는 행위라 여기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야 귀족들의 입장에선 나름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즐길 대로 즐기고, 그걸 원가보다 싸게 처분해서 어느 정도 자금을 회수한 거잖아? 낭비라고 한다면 그 옷을 처분할 새도 없이 내버리는 걸 말하는 거겠지. 새 옷을 살 돈도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중고라도 손에 넣은 것을 감사할 테고 말이야."

요컨대 중고품으로 판다는 건 판매자 본인이 만족을 느낄 대로 느끼고, 그 자금을 회수하는데다 구매자 역시도 약간의 손상을 감내하며 원하는 바를 쟁취한다는 것.

양측 모두 만족을 느끼는 행위이니 결코 비난받을 일이라는 건, 경제적으로 보았을 때엔 아주 틀리다 할 말이 아니었다.

문제가 있다면 지금의 말이 어디까지나 '비유적 표현'이란 거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주식도 마찬가지라는 거지. 내가 잘 가지고 놀다가 반값만 회수해도 손해가 아니라는 거."

"……."

말없이 제 앞에 있는 소녀를 내려다보는 아리엣.

베일과 마크스로 얼굴을 감추고 있어 잘 보이진 않지만, 분명 자신을 보며 웃고 있다는 확신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 이 소녀는 지금의 말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식으로 이번 달 분의 용돈을 모두 날린 게, 아가씨의 입장에선 일종의 유희였다 이겁니까?"

"응!"

-짜악!

제 이마를 격하게 치는 아리엣. 만약 상대가 제 자식이었다면 그 손아귀는 소녀의 볼 쪽으로 날아갔으리라.

'뭘 하다 벌써 그 돈을 다 날리셨나 했더니……!'

에버그린 골드리안.

골드리안 가문의 장녀이자, 제 1계승자인 테올린과 15초 간격으로 태어난 쌍둥이 남매.

그녀 역시 일단은 골드리안의 일원임을 증명하듯 어린시절부터 영리함을 보여왔지만, 정작 그 재능을 표출하는 곳은 다름 아닌 '주식'이었다.

물론 가벼운 호기심으로 했을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제 앞에 있는 소녀가 1주일 간 받는 용돈은 자신의 석 달 치 봉급에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만한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날려버렸는데, 서민출신인 아리엣의 입장에서 어찌 좋게 볼 수 있겠는가?

"아가씨. 제,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아무리 가진 것이 많다 하더라도 그 돈을 함부로 써선 안 되는 법입니다."

"응, 그래서 그 돈을 불려보려고 투자를 한 거잖아?"

"아니……."

"주식만큼 돈을 굴리기에 효율적인 일은 없다고 생각해. 자본만 있으면 굳이 자기가 직접 일하지 않아도, 상회나 조합에 투자를 해서 어느 정도 내 뜻대로 굴릴 수 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애초에 그것을 관리하는 주식 전문 길드를 거치는 자본가가 얼마나 된다 생각하는가?

상회에 투자하는 자본가가 소수라면 모를까, 그런 자본가들 수백, 수천 수 만 명이 무수한 조합의 이름을 보고 돈을 투자하고 회수하기를 반복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미친 듯이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시장은, 결코 가벼운 돈벌이 장소가 될 수 없단 것이다.

"아가씨, 비록 저는 상인이 아니지만, 골드리안에 오래 봉사해온 만큼 그 행위의 위험한 점을 알고 있습니다. 유명하신 학자분도 주식에 대해선 이런 말을 하셨지요. 자신이 주님이 설계하신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할 수 있을지언정,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계산할 수 없었다고……."

"아, 그거 주식에서 돈 잃어서 남긴 말이야. 돈 땄으면 말이 달라졌을걸?"

"잃은 사람이 왜 그렇게까지 자신감이 넘치시는 겁니까!?"

땄다면 딴 대로 문제다.

애초에 그녀는 명문가의 여식.

대개 그녀 또래의 아이들은 예쁜 옷을 사거나, 귀여운 인형을 사는 데에 자신의 용돈을 투자한다. 또 개인적인 시간을 투자해 춤을 배우거나 악기를 다루기도 한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한창 후계자 수업을 진행하는 장남조차 엄두를 안 내는 주식에 손을 뻗고 있으니…….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 시종으로써 답답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돈을 쓰시는 거야 저도 뭐라고 간섭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유희를 즐기실 거라면 좀 더 여자아이다운 것을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이를테면 또래의 아이들과 할 수 있는 소꿉놀이 같은 것을 말입니다."

"소꿉놀이……?"

물끄러미 아리엣을 쳐다보는 에버그린.

곧 베일에 감춰진 그녀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주식놀이하자!"

"안 합니다!!"

이 왈가닥 아가씨에게 휘둘리는 것도 지칠 지경이다.

한숨을 내뱉은 아리엣이 에버그린을 책상에 앉히고, 그녀의 앞에 가정교사가 내어준 숙제들을 내려두었다.

에버그린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책상에 머리를 기대었다.

"어차피 내 처지에 공부 같은 건 전혀 쓸모가 없잖아. 가문은 오빠가 물려받게 될 텐데."

"모르는 소리 하지 마시죠. 아가씨도 언젠가 다른 가문에 시집을 가시게 될 텐데……."

"헹! 시집 같은 소리 하지 마셔! 난 평생 독신으로 살 거니까!"

"……."

"…아리엣, 눈매가 너무 무서워졌어."

당연한 거다.

귀족가의 여식이 평생을 처녀로 살겠다니. 그건 그 자체로 가문의 수치나 다름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말하고 문을 닫고 물러나는 아리엣.

이후 기척이 사라졌음을 느낀 에버그린이, 그제야 자신이 쓴 베일과 마스크를 벗으며 한숨을 내뱉어보았다.

"하아, 얼굴 숨기고 다니는 것도 지치네."

아버지나 오라버니…….

제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야 어디에서건 얼굴을 감추는 걸 허락해주고 있지만, 아리엣과 같은 시종들에게까진 공유를 하진 못하는 상태였다.

설령 누군가의 악의에 의해 어그러졌다 한들 세간에선 결과만이 전부.

얼굴이 망가졌다는 건 그 자체로 귀족사회에서 치명적으로 여겨질 일이다.

"…제대로 된 귀족 아가씨는 이런 걸 배우고 사는 거겠지."

아리엣이 제 앞에 펼쳐진 숙제들을 팔을 이용해 걷어내고, 방의 창문 쪽으로 다가섰다.

철없고 방정맞은 어린아이 행세를 하고 있지만, 평생을 독신으로 살겠다는 말만은 결코 거짓으로 한 게 아니었다.

이미 소녀는 스스로가 제대로 된 귀족아가씨로 살기에 그른 몸임을 알고 있으니까.

"베놈 영감."

"저를 부르셨습니까, 골드리안의 영애님이시어."

부름에 응하는 노인의 목소리. 에버그린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구둣발을 딱딱거렸다.

"……그렇게 일일이 길게 부르는 거 지치지 않아?"

"허허, 이 미천한 노인이 어찌 당신을 함부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 또한 저희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이니 너무 이상히 여기지만은 말아주시지요."

공교롭게도 그 모습은 방 안에선 보이지 않고 있다.

그저 밖에 비춰진 그림자만이 그가 존재함을 가르쳐줄 뿐.

에버그린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향해 물었다.

"저기 베놈 영감. 영감은 나한테 대가를 받기 위해서 곁에 있는 거지?"

몇 년 전 저택을 홀로 빠져나갔을 때에 있던 납치사건.

그 당시 노인은 에버그린과 함께 갇혀 있었고, 탈출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자신과 거래를 하기로 결정을 한 상태였다.

어째서 그곳을 탈출할 정도의 능력이 있는 그가 왜 우리에 갇혀있는지, 공교롭게도 현재의 에버그린은 그걸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턱이 욱신거린다는 것만 떠오를 뿐.

"네, 그렇지요. 아직 대가를 받지 못했으니, 에버그린 아가씨께서 그 대가를 지불하기 전까진 곁에 머물러있을 예정입니다."

"그 대가가 뭔데?"

"저도 모릅니다."

"몰?루?"

"네, 모릅니다."

"아악! 또 그 소리지! 매번 모른다는 말만 하고!!"

악!!

소리를 지른 에버그린이 자신의 침대로 뛰쳐나가 그곳에 몸을 굴렸다.

그대로 이불을 뒤집어쓰며 자신의 속내를 전력으로 표현하는 어린 소녀.

베놈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창문을 열고,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에 스윽 자리를 잡았다.

"에버그린 아가씨. 그리 상심하실 때가 아닙니다. 쌓인 숙제가 아직 많지 않습니까?"

"영감이 신경 쓸 일 아니잖아! 아리엣 같은 시종도 아니면서!"

"허허, 그렇죠. 저는 당신의 사용인이 아니었어요. 이거, 같이 지낸 시간이 길다보니 조금 헷갈렸군요."

"…착각이 아니라 노망이겠지."

이불을 스윽 걷어내 눈만을 보이는 에버그린.

또렷한 눈동자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검게 물들어진 노인이 보이고 있었다.

그래, 정말로 까만 노인이다.

그 속내 역시도.

"베놈. 난 당신에게 여러모로 감사 하고 있어."

하지만 지금 하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그의 꿍꿍이가 어떻건, 그가 없었다면 자신은 이 저택으로 돌아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네, 몇 번이고 들은 이야기죠. 저 역시 아가씨가 그 말을 진심으로 한다는 걸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당신이 뭘 바라는지를 알아야 나도 은혜를 갚을 수 있잖아."

"공교롭게도 그건 제가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가 아가씨를 구해준 이유는 일종의 투자였고, 그것이 회수되길 기다리는 것뿐이니까요."

"……투자?"

"주식과 비슷한 것이지요. 아가씨께서 이후 저에게 무언가 보답을 주실 거라고 여기기에, 저 역시 아가씨의 곁에 머물러있는 거랍니다."

그렇게 비유를 하니 조금 와닿는다.

경솔히 투자했다가 돈을 잃어본 경험도 있기에 더욱이.

"…그럼 내가 당장 뭔가를 해주지 않아도, 당신은 나를 상대로 뭔가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거네?"

"네, 그렇지요."

그것만은 거짓말이 아니다.

애초에 뒷세계의 주민이란 신뢰로 먹고 사는 존재. 거짓을 고한다는 건, 그 자체로 스스로의 존재에 해를 입히는 거나 다름이 없다.

그 점을 어렴풋이 짐작한 에버그린이 그를 향해 물었다.

"그럼 재밌는 이야기 해줘."

"이야기, 말입니까?"

"베놈 영감은 여러모로 제국 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며? 그럼 재미있는 소식도 몇 개 알고 있을 테고."

"허허, 숙제시간에 남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다니……."

"됐으니까 알려줘~~~"

우는 소리를 내는 에버그린.

그를 마주한 베놈이 쓰게 웃으며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본래 정보라고 하면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뭐, 좋습니다. 투자의 연장선으로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지요.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까?"

"주식이야기!"

"……허허."

너털웃음을 지은 베놈이 에버그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 확실히 아가씨라면 투자에 관심을 많이 가지실 법 하죠. 하지만 근래엔 주식보다는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주식 말고 다른 쪽?"

"네, 저희 업계에서 쓰이는 은어로는…. 그래요."

잠시 뜸을 들이는 베놈.

이후 이어지는 목소리는 꽤나 들뜬 듯 보였다.

"'비트코인'이라고 불리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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