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201화
[외전-타락한 천사와 튤립 한 송이(下)]
사고를 당한 재판장을 대신해 재판을 진행한 북쪽 출신의 재판장.
튤립이 지닌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그는 튤립의 알뿌리와 양파의 유사성을 빌어 피고에게 고의가 없다고 판단하였고, 오히려 귀족 본인의 관리미숙을 들먹여 무죄에 가까운 배상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당시에는 많은 논란을 자아내었던 결과.
재판을 빠르게 진행하고자 했던 귀족은 도리어 피가 거꾸로 솟았지만, 이미 내려진 판결을 다시 번복하는 건 법적으론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번복되지 않은 판결은 유행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법.
'이 제국에서 튤립의 알뿌리가 가진 가치는 고작 양파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 인식에 반하는 이들이 많을지언정, 재판에서 내려진 판결은 어느 정도 객관성을 띠는 법이다.
유행에 휘둘리는 이들의 마음에 의구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수순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거품이 설마 이렇게 빨리 꺼질 줄은 몰랐는데."
이내 에버그린이 조금 낡아진 신문을 거두고, 제 옆에 새로이 개간된 신문을 응시하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재판에 대한 기사가 나온 후 6개월이 지난 현재, 제국을 강타하는 유행상품인 튤립의 가치는 95%이상 폭락해 있었다.
95%.
투자한 재산이 20토막이 났딴 것이며, 빚까지 져가며 투자를 한 사람들도 있음을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소문 하나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곤 할 수 없겠지.'
6개월 전의 재판은 그저 이 흐름을 만든 악재 중 하나일 뿐.
실질적인 이유는 튤립이 돈이 된다는 걸 알게 되어 여러 사업가들이 튤립의 재배업에 뛰어들고, 그런 활동에 의해 알뿌리의 공급이 수요를 넘어 튤립증서 역시 그 가치가 크게 하락되고 만 것이다.
이 재판의 결과가 끼친 영향은 그런 가치상승의 기간을 늦추고, 그로 인해 공급이 수요를 넘어선 순간의 가치하락속도를 비약적으로 증가시킨 것뿐.
"조금은 간을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전례가 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처분하는 시간이 빨라질 수 있다니……."
하나의 확실한 근거는 유행의 종식을 크게 앞당긴다.
그 점을 깨달은 에버그린이 피식 웃으며 방과 이어진 테라스로 시선을 향했다.
정확히는 그 밑에 기울어진 그림자로.
"베놈 영감, 당신은 이게 당신이 한 일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믿겨져?"
"허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저는 그저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길가에 가서 돌팔매질을 하며 시간을 때웠을 뿐입니다만."
그 돌이 우연히 재판장이 타고 있던 마차의 말을 놀라게 하여 사고가 났을 뿐.
그 외에는 자신의 동료들과 지인들과 이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소문이 더욱 빨리 퍼지게 만든 것뿐이었다.
"내 말은~ 고작 그 정도의 '우연한 사고'와 입담만으로도 이 정도로 일이 커지는 게 믿겨지냐는 거야."
"허허, 솔직히 저도 이 정도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대륙을 강타한 유행상품이 고작 6개월 만에 망해버리다니. 이런 일은 그 역시 지금껏 살며 듣도 보도 못했었다.
에버그린이 제 얼굴을 감춘 마스크마저 내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보를 쓰기에 따라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다니……. 이거 좀 더 파고들면 주식보다 더 재미를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허허, 재밌다니, 이 상황을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건 당신뿐이겠지요."
"그래? 내가 보기엔 영감도 꽤 들뜬 것 같은데?"
비록 겉부터 속내까지 까만 노인이지만, 몇 년 간 같이 지낸 만큼 그의 감정을 읽는 것도 어렵지 않은 상태였다.
그 점을 지적하니 베놈이 스윽 창문을 열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네, 그렇지요. 이제야 당신에게 투자한 것을 회수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무슨 의미야?"
"이걸로 저와 같은 이들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뚝.
에버그린의 앞에서 멈춰선 베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복면과 두건으로 감춰진 얼굴이지만, 그 눈에 어린 감정만은 분명히 외부로 드러나 있었다.
그래, 그것은 이제껏 그가 줄곧 숨겨왔던 것.
최초의 여인을 유혹한 뱀과 같은 '간교함'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에버그린 아가씨. 당신은 저에게 지시를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파장이 일어날지 가늠하지 못하셨겠지요."
유행상품 하나가 단시간에 파괴되었을 때의 여파란, 주식시장의 변동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법이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건 돈이 없는 평민이건, 보다 많은 돈을 바라는 재산가들도 마찬가지.
특히나 중심지에 감히 이름을 내세울 수 없던 귀족들의 경우, 이번 튤립파동에서 자신이 가진 재산을 크게 늘리며 가문을 부흥시킬 야욕을 태우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단시간에 망하고, 매장될 위기에 처한 상황.
그런 모두가 그들에게 있어선 좋은 고객이자, 사냥감이며, 혹은 상품으로 쓰이는 법이다.
"당신은 영리하지만 아직 세상물정을 알지 못하지요. 아직은 선과 악이 무엇인지, 그리고 윤리와 질서에 대한 개념이 잡히지 않은 상태인 겁니다. 그러니 당신이 하는 발상은 어른들과 달리, 무의식적인 자중 역시도 존재하지 않다 할 수 있겠죠."
미숙한 윤리관에서 비롯된 발상이란 언제나 어른의 상상을 뛰어넘는 법.
그 점을 알기에, 베놈은 처음부터 이 소녀가 자신의 바람을 이루어줄 거라 믿었다.
순수하고 영리한 소녀가 뒷세계라는 끔찍한 세계에 발을 걸치는 순간.
그런 소녀가 다시 양지로 돌아가더라도, 차마 음지에서 보았던 것들을 머릿속에서 떨쳐내지 못할 게 분명하니까.
"…날 이용한 거구나."
"처음부터 말했잖습니까? 엄연히 아가씨에게 투자한 것이라고."
그런 점에서 에버그린 골드리안이란 존재에게 투자를 한 건, 당첨을 넘어선 무언가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었다.
그 역시 이만한 리턴이 돌아오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으니.
"하지만 이런 저의 속내를 밝혔음에도, 당신은 그다지 기분이 나빠 보이질 않는군요."
"뭐, 그렇지."
곧 에버그린이 베놈의 옆을 지나치고는, 테라스 밖에 펼쳐진 저택의 정원을 응시하였다.
"덕분에 마당 한 폭에만 심겨져 있던 튤립이, 이 정원을 가득 채우게 되었으니까."
알뿌리의 공급 폭증에 의해 이 제국에선 머지않아 튤립이 흔해지는 시기가 찾아올 터.
그로 인해 이미 피워진 튤립들 역시 가격이 급락하고 있으며, 그렇게 시장에 처분된 악성재고들을 골드리안에선 대량으로 사들이게 되었다.
그렇게나마 이번 시장에서 발생한 경제족 손실을 완화시키기 위해.
하지만 그런 이유로나마 가문에 들인 흔해빠진 꽃밭이, 지금 이 순간엔 그럭저럭 괜찮은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이제야 좀 봐줄 만 하네."
그래, 이번 사태에서 에버그린이 얻은 보상은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이 사태를 그 정도로 정리하는 소녀의 마음가짐은, 베놈과 같은 이들에겐 경의마저 느껴지는 것이었다.
"네, 그렇죠. 저편에 있는 누군가의 삶이 몰락했다 한들, 그것이 당신을 향한 해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결국엔 한때의 가십거리일 뿐이니."
'순수한 존재를 유혹하는 것만으로 수많은 절망이 생겨나니, 그들을 좀먹고 사는 것이야말로 악마가 인간의 소망을 들어주는 이유이니라.'
어쩌면 그것이 창세기에 등장하는 간교한 존재가 여인을 유혹한 이유일지도 모르지.
이상향이란 우리에 가두어져 있던 순수한 존재가 자유를 가졌기에, 자신과 같은 악마들의 활동 역시 이 세계 전체로 퍼질 수 있었던 것이니까.
"그럼 저는 대가를 받았으니 이만 실례하도록 하죠. 모쪼록 이후에 다시 볼 날이 찾아오길 바라며……."
그런 간교한 뱀을 동경하는 노인이 제 구원에 타락한 천사를 등지려는 것도 잠시.
"아아, 그러고 보면 하나 일러두는 걸 깜빡했군요."
"……또 뭔가 할 말이 있는 거야?"
"그저 노파심에 하는 말입니다만."
베놈이 다시 그녀를 돌아보며 마저 말을 이었다.
"근래에 뒷세계에서 빚증서를 가지고 행하는 도박을 하고 있다더군요."
"빚증서? 돈이 아니라?"
"지는 쪽이 모든 빚을 짊어지는 도박이지요. 그 빚을 모두 짊어진 자의 최후란……. 후후, 제가 말하지 않더라도 대강 짐작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또한 자신과 같은 이들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겠지만.
"뭐, 아가씨야 빚 같은 것에 구애될 사람은 아니겠지만, 돌연히 변사체가 발견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길 바랍니다."
골드리안은 이 제국에서 가장 돈에 구애되는 가문.
설령 그 근간이 양지에 있을지언정, 그 부와 명예를 탐하는 하이에나들은 음지의 존재들마저 이용하려 든다.
언젠가 저 소녀도 그런 존재들을 다시 당면할 터.
그 때가 되면 자신은 수명이 다하여 존재하지 않겠지만, 자신이 남긴 뿌리들은 저 소녀와 연루될 가능성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한 명에게 빚을 몰아준다라……."
그러니 그 때를 대비하고 있으라.
그런 노인의 진심어린 조언을 되새긴 소녀가, 제 책상에 둔 책을 한 권 펼쳐보였다.
성경책.
이 제국에서 가장 많이 유통되고, 또 가장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지식이 기록된 서적.
그 중 에버그린이 펼친 곳은, 현 제국과 교단의 탄생에 일조한 최초의 성자이자 황족의 조상의 최후에 다룬 구간이었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이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주님의 아이를 십자가에 못을 박아 처형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럼에도 그는 말하였노라. 나는 이미 나의 제자들에게 내 할 수 있는 모든 가르침을 전하였으니, 내 나를 향해 부르짖는 가엾은 이들의 죄를 모두 끌어안고 이 땅을 떠나리라고.'
성자 예슈아.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해 살았으나, 끝내 인간의 손에 처형당하면서도 그 죄마저 끌어안고자 했던 인물.
그의 최후를 다룬 구절을 읽던 에버그린이 성경을 덮으며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모든 원죄를 끌어안고 승천한 성자라니, 빚쟁이들의 빚을 모두 끌어안고 죽은 채무자랑 뭐가 다를까?"
돈과 돈이.
탐욕과 탐욕이 충돌하며 남게 된 소수의 승자, 그리고 구렁텅이 속을 구르는 패배자들이 살아남고자 퍼트리는 유혈…….
그 추악한 현장을 지켜보던 소녀는, 차차 이 제국이 무엇을 기반으로 세워졌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고작 10대 초반에 있었던 일이었다.
[외전-타락한 천사와 튤립 한 송이END]
* * *
그리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현재.
"20년 전의 튤립 투기 사건, 기억해?"
에버그린은 자신이 방문한 가문의 저택에서 마주하는 남자와 그 시절의 추억담을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그 사건과 연루되어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에게…….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지금도 튤립들은 골드리안의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까."
그래, 그는 분명 모르고 있을 것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그는 언제나 정직하고 올바른 길만을 걸으며 목표로 한 것을 추구했으니까.
그런 길을 고집하고도 비열하고 더러운 수를 부렸던 자신마저 꺾어낸 그는, 이 제국에 있는 그 어떤 지도자보다도 유능하고 대단한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아버지께서 튤립을 정원에 심었는가……. 어렸을 땐 그냥 제국에 도는 악성재고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경고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리고 그런 사람이니 그 정원에 있는 튤립의 의미도 남다르게 여겨지리라.
20년 전의 튤립파동.
그로 인해 제국의 귀족 중 1할이 재산을 잃고 몰락해버린 사태란, 제국의 경제를 이끌어야 할 자에겐 다시 일어나선 안 되리라 경계를 할 일일 테니까.
"그런데 유행이라는 게 참 묘하다니까~ 하나의 유행이 지고나면 또 새로운 유행이 생겨나니. 그 유행이 언제 꺼질지 모르니, 흐름을 읽어야 하는 상인은 꽤나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겠지."
그래, 눈앞에 있는 자는 그런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주의 자리에 오른 자.
"그걸 잘 아는 사람이 현 제국에서 제일 각광받는 유행상품을 자본박치기로 통제하려 들다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보신다면 통탄하지 않을까?"
에버그린이 그런 그를 추궁하듯, 팔짱을 끼며 제 앞에 있는 자를 쏘아보았다.
테올린 골드리안.
마치 제 역린이라도 자극받은 듯,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에버그린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잡설은 집어치우고 용무를 얘기해라."
에버그린 블러드메리.
이제는 자신의 성을 버리고 다른 가문으로 이적한 (전)골드리안 가문의 장녀.
그런 그녀가 어째서 자신의 영지와는 하등 상관도 없는, 이 레펠타리 남작가에 온 것인가?
"오빠."
그 의문에 에버그린이 대답했다.
직설적이고 단호하게.
"나와 동맹을 맺지 않을래?"
그렇게 그녀 역시 제 배다른 동생과 마찬가지로, 이후에 찾아올 전란을 준비해가고 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