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203화
"미안해."
그것이 열차를 타는 몇 주일 내내, 자신에게 온갖 콩요리를 주문해준 자가 뒤늦게 내뱉은 말.
열차에서 내린 메어리가 씩씩거리며 출구로 발을 내디뎠다.
"사과 안 해도 된다니까."
"아니, 네가 그렇게 콩을 싫어할 줄 몰랐지. 싫었다면 차라리 다른 견과류를 추천해 줬을 텐데……."
"콩이 싫은 게 아니라니까!"
채식을 선호할 뿐, 그 범주 내에선 거르는 음식은 없었다.
싫은 건 콩이 아니라 그 뒤에 따라오는 설명이지.
"그래도 콩은 꼬박꼬박 먹어두는 게 좋아. 채식주의자의 특성상 그거라도 안 먹으면 단백질 보충이 어려우니까. 단백질이 너무 적어지면 피부도 건조해지고, 피로감도 심해지는 데다 근손실이 온다니까? 아무리 신성력으로 어느 정도 몸의 허약함이 보충된다지만, 그래도 기초체력이 잘 다져져야 신성력의 소모가 줄어들어서……."
'나는 왜 이런 녀석을…….'
마지막에 그와 어떻게 헤어졌는가.
그 점을 떠올리며 어깨를 부르르 떠는 메어리를 보던 셰인이, 이내 고개를 돌린 채로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 어렵네, 이 맘때의 아가씨들은.'
전생에 여성경험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대체로 몸뿐인 관계였다.
반면 메어리는 소녀시절부터 알고 지내왔던 자.
결코 정욕의 대상으로도 볼 수 없고, 관계적으로도 복잡한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태다.
'이 애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래, 여러모로 곤란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헤어진 후 3년에 가까워지는 현재.
어른이 된 그녀의 마음이 그 때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아직가늠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뭐 하고 있어?"
그런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곤란함을 느낄 무렵, 메어리가 스윽 셰인을 돌아보며 가느다랗게 뜨여진 눈으로 그를 째려보았다.
토라진 듯하면서도 마냥 무시하지 않는 태도.
"같이 오빠 보러가는 거 아니었어? 거기에 멀뚱히 서 있으면 안 되지."
"어, 응……. 그래야지."
심란함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낀 셰인이 그녀의 뒤를 마저 따라가고, 이내 역 밖에 펼쳐진 광활한 도시를 응시하였다.
"여기가 아인츠바이 공작령인가."
아인츠바이 공작령.
이곳이 바로 제국에 퍼진 '녹색 역병'을 해결하기 위한 인재가 자리한 장소였다.
* * *
라인하르트, 키르슈타인.
그리고 아인츠바이.
제국의 3대 공작이라 불리는 세 개의 가문은, 각자의 방식으로 전통과 역사를 수호하며 제국을 지탱하는 기둥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인츠바이가 선택한 수단은 예술로, 이 영지에는 그런 목표를 지향하고자 세워진 흔적들이 무수히 존재하고 있었다.
'사전에 듣긴 했지만, 설마 거리에도 이렇게 예술품들이 즐비했을 줄이야.'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로 이루어진 거리엔, 각양각색으로 이루어진 그림이나 조각 등이 즐비해 있다.
그러한 작품들이 위병들을 통해 엄중히 감시되고 지켜지는 상태. 누구라도 이 거리가 얼마나 미술품에 진심을 담았는지를 알 수 있으리라.
'여기만 보면 정말 평화로운데 말이야.'
그래, 변경지대와 달리 반란군들의 영향이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변경지대의 치안이 체펠리 가문의 몰락 이후 크게 붕괴된 걸 생각하면, 변경과 중심지는 사실상 '다른 나라'라 봐도 무방하다 여겨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 차이는 앞으로 더욱 도드라지겠지.
"공작령이라고 하니까 생각난 건데."
석연찮음을 느끼고 있을 무렵, 옆에서 같이 미술품을 관람하던 메어리가 셰인에게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셰인, 너 라인하르트라는 이름 기억하고 있어?"
라인하르트.
현재 있는 땅의 주인인 아인츠바이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3대 공작가라 불리는 가문.
그리고 셰인의 두 번째 생에선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선 안 될 이름.
"아니, 잊었을 리가 없지. 네가 무슨 이유로 블레이즈에 왔는지를 생각하면."
대답을 하기도 전, 메어리가 홀로 수긍하며 제 고개를 숙여보였다.
메어리의 말대로 셰인에게 있어, 라인하르트 가문은 골드리안보다도 남다르게 여길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소년병이 된 것도 그 가문에서 저지른 부정 때문이고, 자신이 마음을 준 이 역시 그 가문에 속해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메어리는 그런 셰인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가졌던 성직자.
그와 얽힌 이야기는 당사자 본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이 알고 있었다.
"혹시, 세실이랑 만난 거야?"
"응, 마침 블레이즈에 복귀했을 때, 공녀님도 성인식을 마치고 가문으로 돌아갈 준비를 취하고 계셨거든."
그래, 그 위험한 영지에서의 시련도 무사히 끝마쳤구나.
한시름 놓은 셰인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지만, 그것도 결국엔 잠시로 그칠 뿐이었다.
"그리고 베르디는 지금도 공녀님이랑 같이 지내고 있겠지."
-뚝.
하며,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만 셰인.
"…방금 뭐라고?"
"베르디가 공녀님을 따라갔다고 했어."
마찬가지로 자리에 선 메어리가 셰인을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여러모로 복잡한 감정이 어린 눈으로.
"베르디, 기억하고 있지?"
유일교의 수행원 베르디…….
아니, 이제는'베르디 하트리스'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메어리가 신자가 됨으로써 블러드메리의 이름을 버린 것과 반대로, 그녀는 유일교의 신자가 되길 포기한 상태였으니까.
신성력을 뒤틀어 만들어진 윤회력(輪廻力).
그녀가 품고 있는 힘은, 결코 순수한 신성력만을 숭배하는 제국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베르디가, 라인하르트에 신세를 지고 있다고…?"
"나랑 헤어졌을 때엔 그랬다는 거야. 마침 성인식을 끝마치고 돌아가려던 공녀님께서, 베르디의 사정을 듣고 자기 영지에서 지내지 않겠냐 제안을 하셨거든."
그래, 세실의 성격상 베르디의 사정을 안다면 가만히 내버려두진 못했겠지.
본성이 선한 데다, 그녀 역시 어느 정도는 교단에 반감을 가진 몸이니까.
자신과 마찬가지로 교단에 구원받지 못한 그녀를 어떻게든 지켜주고, 가능하다면 그녀가 온전히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도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마냥 좋게 볼 일은 아니겠지. 최근에 라인하르트 가문에 여러모로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으니까."
"……."
"…알고 있지?"
그래, 충분히 알고 있다.
제국으로 돌아온 기간 중 절반 이상을 변경에서 지냈다곤 하지만, 공작가문의 소식조차 접하지 못할 정도로 세상물정을 모르진 않으니까.
'그 날의 재판 이후 군사 양성에 과도하게 힘을 쓰고 있다고 했었지.'
테라스 제국은 대륙을 통일시킨 나라.
뚜렷한 적대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군사의 양성은 절실하지 않으며, 그런 평화의 시대에 있어 군사란 여러모로 성가신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무력이 있는 집단이 존재하는 것 자체로 민중의 불안이 조성되고, 황실 역시도 귀족들이 반기를 들 것을 우려해 군사권의 배분을 신중히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한 흐름 속에서 군사권을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는 건 블레이즈 뿐.
그를 제외하면 반란 진압이나 토벌 등의 문제에만 임시로 군사권을 제공해주지, 그 외엔 용병을 고용하거나 각 작위에 제한된 숫자만큼 사비를 이용한 사병의 양산 정도로 그치게 된다.
'그런 마당에 라인하르트 가문에선 황실에서 허락해준 단위를 초과한 수준으로 사병을 모집하고 있다.'
이에 대해 황실에서 몇 번 경고를 보내었음에도 온갖 명분을 대며 병력을 모집을 강행하고 있으며, 그 소식은 현재 제국 전체에 전해져 민심을 불온히 만들고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마탑에까지 조력을 요청했다고 하는데, 교단에서도 라인하르트가 전쟁이라도 준비하는 게 아니냐 경계를 늦추지 않는 상태야."
확실히 재판 이후 라인하르트 가문은 교단과의 사이가 크게 틀어진 상태였다.
그 덕에 교단 특유의 보수적인 풍조에선 자유로워졌다곤 하나, 문제는 하필이면 지금 시국에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것일 터.
"메어리, 넌 어떻게 생각해?"
반란군들이 변경지대를 기점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상황.
그 정세를 읽어낸 교단의 일원은, 과연 불온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라인하르트 가문을 어찌 받아들일까?
"……그냥 아무 일도 없길 바랄 뿐이야."
메어리는 그 물음에 회피로 응대하며 마저 가던 길을 걸어갈 뿐.
그 뒷모습을 응시하던 셰인이 착잡함을 삼키며 상념에 잠겨갔다.
'질리언, 그 녀석이 절대로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만약.
자신이 그날 그에게 보낸 편지가 무언가를 자극한 것이라면.
그로 인해 이후에 찾아올 거센 혼란에 그 역시 끼어들 각오를 한 것이라면…….
'……일이 마무리 지어지면 한 번 보러 가긴 해야겠네.'
그저 그때가 오기 전까진 아무 일도 없길 바랄 뿐이라고.
그렇게 메어리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기도를 마친 셰인이, 그녀의 뒤를 마저 따라 아인츠바이의 거리를 거닐어갔다.
* * *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
이내 도시의 중심부에 도착한 셰인이, 메어리와 함께 제 앞에 자리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예술가 조합 아인슈페너].
그것이 도착한 건물의 간판에 적힌 글귀로, 주변과 비교했을 때 독보적일 정도의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여기가 오빠가 있는 곳이야?"
"어, 음. 누님이 적은 쪽지대로라면 여기가 맞아."
아인츠바이 공작령엔 무수한 예술가조합이 존재하며, 그중에서도 아인슈페너는 아인츠바이 공작가문에서 대대로 관리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따지자면 골드리안이 이끄는 상회인 골드핸드와 같은 관계.
에버그린의 말에 따르면, 현재 셰인과 메어리가 찾고자 하는 대상은 이 길드에 소속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거, 손님이 오셨군요."
마침 길드에 들어서니 궁전과 같은 홀의 내부가 펼쳐지고, 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양복의 남자가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붓과 조각칼로 만들어가는 창조물이 가득한 이곳, 아인슈페너에 방문하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겠습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웃음이 인상적인 남자.
복장과 분위기를 보아 길드의 안내원으로 추정이 되었다.
"어떤 용무가 있으셔서 찾아오신 겁니까? 길드에 입회를 하고자 한다면 2층으로, 예술가를 고용하거나 작품을 입점하고 싶으신 거라면 1층의 데스크에서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의뢰가 아니라, 사람을 한 명 찾으러 왔습니다."
바로 용건을 설명하는 셰인.
안내원이 의외인 듯 눈을 둥그렇게 뜨며, 두 사람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아, 부부분께서 아이를 잃어버리신 거로군요. 그런 거라면 위병소에서 도움을 구하는 편이……."
""부부 아닙니다.""
사전에 합의라도 한 듯 동시에 말하는 두 사람.
미아 찾기를 친절히 도와주려는 건 고맙지만, 부부라 오해를 받는 건 두 사람에겐 매우 껄끄러운 것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기에 더욱이.
"이런, 죄송합니다. 두 분께서 꽤 잘 어울리시기에, 저도 모르게 젊은 커플이라고 착각해버렸군요."
"……다음부터는 주의해주세요. 저희 그런 거 꽤 민감하니까."
팔짱을 낀 채 그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메어리.
셰인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다시 안내원을 마주하였다.
"오해하신 건 넘어가기로 하고. 저희가 찾고자 하는 건 이 길드에 속해있는 분입니다."
"의뢰가 아닌데도 길드원을 찾아왔다면……. 아아, 저희 길드에 속한 분의 지인이신 거군요!"
바로 이해를 해주니 얘기가 빨라지겠군.
곧 셰인이 단도직입적으로 이곳에 방문한 용건을 얘기했다.
"슈베르트라는 사람을 찾아왔는데, 이 길드에 소속된 게 맞습니까?"
슈베르트 블러드메리.
그 자가 바로 에버그린의 남편이자 메어리의 친남매, 그리고 셰인이 찾고자 하는 자였다.
"……슈베르트?"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며 의문을 표하는 안내원.
몰라서 되물은 건 아니다.
반대로 그 이름을 흘려 넘길 수 없기에 보이는 반응.
"이거, 슈벨을 찾으러 오신 거라면 가벼이 돌려보낼 수는 없겠군요."
"네? 무슨……."
"일단 귀빈실로 모시겠습니다. 따라오시죠."
곧 안내원이 길드의 건물 안으로 셰인과 메어리를 안내해주었다.
의문이 느껴졌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일단 뒤를 따를 필요가 있을 터.
그렇게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두 사람의 배후에서부터 '딸칵'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을 잠근 데에 경계심을 곤두세운 셰인. 안내원이 셰인을 마주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슈벨에 관한 이야기는 남들과 공유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제 눈을 감춘 안경을 거두며 머리를 쓸어올리는 안내원.
단정한 앞머리가 올백으로 쓸어 넘겨지니, 그 밑으로 드러난 냉철한 두 눈에는 카리스마가 돋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귀족 특유의 위엄이.
"만나서 반갑습니다. 슈벨의 지인분들이시여."
그렇게 분위기를 반전시킨 안내원이, 곧 두 사람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건네었다.
"저는 현 예술가 조합인 아인슈페너의 길드장이자, 아인츠바이 가문의 차남인 아이작 아인츠바이라고 합니다."
"……허허."
그 모습을 보던 셰인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공작가의 차남에 길드장…….
그런 터무니없는 사람이 손님을 받는 안내원 행세를 하다니.
취미가 나쁜 것도 정도껏 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