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204화
"귀족에게 있어 예의범절은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소양 중 하나인 법이죠."
테이블에 오른 주전자에서 쏟아지는 붉은 액체가, 이윽고 제 앞에 자리한 두 개의 컵에 쪼르르 쏟아져 내렸다.
엄연히 손님을 받고자 아이작 본인이 우려낸 차.
그 손놀림은 리나와 같은 유능한 시종이 생각될 정도의 능숙함이 엿보이고 있었다.
공작가의 차남에 길드장임에도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예의라는 것도 엄연히 연기의 일종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야 상대가 누구인지, 어떤 사이인지를 고려하지 않고 제 행동에 절제를 두는 것이니까요."
두 개의 잔을 마련한 아이작이 선명한 미소를 짓고는, 이내 두 사람을 향해 각각 찻잔을 내어주었다.
"철없던 시절의 생각이라곤 하지만, 그 시절의 부끄러운 추억 역시 누군가에겐 계기가 될 수 있는 법이죠. 그런 이유로 연마해 온 한때의 진심은, 어른이 된 지금의 저에겐 소소한 취미로써 여겨지고 있습니다."
"……연기하는 걸 꽤나 좋아하시나보군요."
"좋아하고말고요. 만약 저에게 가문의 일원으로써 부여받은 사명이 없었다면 극단을 꾸렸을 겁니다."
하기야, 그러런 열망이 있으니 길드장의 신분으로 안내원을 자처하는 거겠지.
피식 웃은 셰인이 그가 내어준 차를 마시며, 그로부터 퍼진 향을 무의식적으로 쫓듯 시선을 주변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귀빈실의 벽을 가득 채우는 그림들은 아인슈페너의 길드원들이 그려낸 작품.
어느 그림은 화려하고, 또 어느 그림은 수수하지만 정교하고, 밋밋한 색을 가지고 있지만 표현이 뚜렷하기도 하다.
각자의 개성이 확실하게 살아있는 작품들.
그런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한 방에서, 메어리는 어느 한 그림을 유심히 주시하고 있었다.
왼손에는 천칭을.
오른손에는 검을 쥐고 서 있는 눈을 가린 여인의 형상을.
"주님을 본떠 만들었다기엔 굉장히 이질적인 그림들이지요?"
두 사람의 시선이 그 그림으로 향해지니, 아이작이 설명을 덧붙이듯 말했다.
"하기야 묘사가 전부 다르니 이상할 법도 하겠지요. 이곳에 있는 그림 모두가 교단에서 섬기는 '신'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죠."
작가도, 화풍도, 그려진 시기도 모두 제각각.
같은 대상을 두고 그린다 하더라도, 그 대상이 추상적이라면 그림 자체가 달라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그림의 묘사는 여성으로, 혹은 남성으로…….
누군가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 하여 중성적인 외모를 띠게 만들고, 또 누군가는 영생을 산 존재라 하여 노인으로 묘사하고 있으니.
"그런 차이 역시도 각 시대상을 표현한 것이라곤 하지만, 교리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한 이들의 입장에서 그 차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신앙을 각성한 분들의 앞에선 실례가 되는 일이겠지요."
쓴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는 아이작.
확실히 통일성이 없는 작품은 그 대상을 숭배하는 자에겐 불쾌해 보일 우려가 있지만, 정작 메어리는 그림 자체에 대해선 별 불만을 품지 않고 있었다.
'당연한 거겠지. 외모가 다르더라도 근간은 같으니까.'
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묘사함에도, 그 무엇 하나 '인간의 틀'에서 벗어난 것이 없었다.
교단이 주시하는 '인간 중심의 사상'은 시대와 인간을 불문하고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
그 조건만을 지킨다면 이 제국의 예술은 어느 정도 자유를 보장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 틀을 벗어난 작품은 인정받지 못한다는 거지만……. 뭐, 예술가도 아닌 내가 거기에 왈가왈부할 순 없는 노릇이겠지.'
"요컨대, 지금의 대화에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런 겁니다."
대강 대화를 이어가던 중 화제를 전환하고자 운을 띄우는 아이작.
"예술품이란 그 시대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 중 하나인 법. 하지만 후세에 이름과 작품을 남기는 경우는 소수로 그치니, 저와 같은 이들은 그를 관리하는 데에 더욱 신경을 기울여야 하겠지요."
그 손에 쥔 차를 응시하는 그윽한 눈길은 연기가 아닌 진심에러 비롯된 것이리라.
그래, 이 길드를 가득 채운 예술품이 바로 그런 노력의 결과물.
셰인이 찾고자 하는 인물은, 그런 노력을 빚어 꾸려낸 길드에 속해있는 자였다.
"즉, 슈벨 씨께선 그런 자격을 충족한 인재이니, 길드장님께서 직접 저희를 상대하고 있다는 건가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일단?"
"그래요, 일단은 말이죠."
눈여겨보고 있긴 하지만, 그 재능을 순수하게 다루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자세히 얘기를 나누기 전, 먼저 두 분에 대한 것을 먼저 듣도록 하지요. 두 분께선 어떤 목적으로 슈벨을 찾으러 오신 것이죠?"
입가는 웃고 있지만 눈동자는 그렇지 못하고 있다.
그 안에 희미하게 보이는 적개심은 진심일까, 아니면 단순 시험해보는 것일까?
"저의 이름은 메어리 블러드메리."
어느 쪽이건 일단 그에게 장단을 맞출 필요가 있으리라.
곧 메어리가 셰인보다도 먼저 자신을 소개하였다.
"한때 그런 이름을 썼던 신자입니다. 지금은 보시는 바와 같이 가문을 벗어나 교단에 몸을 담고 있는 상태죠. 현 가문의 가주를 맡고 있는 슈벨 오라버니와 달리 말이죠."
"블러드메리……?"
거론된 이름에 살짝 찌푸려지는 눈살.
"슈벨이, 블러드메리의 후계자라는 겁니까?"
"…블러드메리를 알고 계신 건가요?"
아이작의 반응에 메어리가 의외인 듯 되물었다.
슈벨이 블러드메리에 소속된 것보다, 가문의 존재 자체를 알고 있다는 점을 의외로 여기는 듯 한 반응.
가문이 위치한 곳이 변경인 데다, 몇 년 전까지 남작가였으니 당연할 것이다.
"변경의 귀족이라곤 하나 정세에 관심이 있다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이름이죠. 그런데 설마 슈벨이 블러드메리였을 줄이야…."
"…오빠에게 들으신 적이 없으신 건가요?"
저희 길드에선 딱히 출신자들의 과거를 캐묻지 않습니다. 인물과 작품은 별개로 둬야 하는 법이니까요."
그러니 어지간해선 정체를 알아도 그러려니 하고 넘기건만.
그 대상이 현 제국에 떠도는 가문의 소속이라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면 블러드메리의 현 안주인은……. 그렇군요. 당신이 셰인 골드리안이로군요."
"…누님에 대해 알고 계시나 보군요."
"근래 셰인 님께서 신세를 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요."
에버그린 블러드메리.
그녀에 대해 안다면 자신의 정체를 추측하는 것도 어렵진 않을 것이다.
셰인 역시 라이히 총통을 산 채로 포박하며, 제국 내에서 여러모로 이름을 날리는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당신뿐 아니라 슈벨까지 그녀에게 엮여있을 줄이야."
심각한 표정을 짓는 아이작.
반응을 보면 변경의 귀족들과 달리, 에버그린이 어떤 인물인지를 대략 짐작한 듯 보였다.
그래,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이야기겠지.
그녀가 이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중 하나라는 건.
"……무슨 이야기야?"
"그런 게 있어."
정작 그 내막을 모르는 메어리만이 공감하지 못하고 물음표를 띄울 뿐.
대충 얼버무린 셰인이 아이작의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턱을 괴던 그가 생각을 정리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 사정을 이해했으니, 바로 슈벨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도록 하죠."
"네? 아직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당신이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생각합니다. 에버그린 양이 슈벨과 맺어졌다는 부분은 조금 껄끄럽지만, 그래도 당신이 이제껏 해온 일들을 생각한다면 믿고 맡겨도 되겠죠."
이윽고 입가에 그려지는 호의적인 미소.
그 틀에박힌 미소가 가식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것이 진심에서 비롯되었음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예전부터 셰인 씨의 팬이었거든요."
"네?"
"구급법에 대해 저술한 책. 지금도 제 책장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습니다."
공작가의 차남이 애독자라니.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지 않은가?
* * *
"앞서 말씀을 드리자면, 슈벨은 저를 제외한 다른 분들과의 관계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닙니다."
길드의 건물과 이어진 숙소.
그 복도를 거니는 중, 아이작은 셰인과 메어리에게 슈벨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히 설명해주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대개 예술가들은 폐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길드의 건물에선 그들을 위한 모임의 장을 마련하는 데에도 힘을 쓰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길드의 건물 후편엔 그런 분들을 배려해 주점과 식당을 운영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여기까지 오기 전의 거리를 보니, 술집이 꽤 많은 것 같더군요."
"압생트와 연초는 예술가들의 활동에 결코 빠질 수 없는 물건이죠."
술과 담배.
집중과 정신안정엔 도움이 된다지만, 건강적으로는 양측 모두 추천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에서 예술가들은 폐쇄적인 성향이 짙은 편이지만, 그 중에서도 슈벨은 그 성향이 무척이나 도드라지는 편입니다. 그림을 한 번 그리기 시작하면 사흘 밤낮에 걸쳐 거기에만 몰두할 정도죠."
'알콜에 니코틴, 거기에 수면부족 추가…….'
하나하나가 건강에 치명적인 요소들.
유능한 예술가일수록 빨리 단명하는 이유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두 분이 찾아오신 걸 진심으로 반갑게 여기고 있어요. 주점에도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는 슈벨의 지인이 이제야 찾아온 것이니까요."
이내 도착한 방의 문에 선 슈벨이 제 손에 쥔 열쇠꾸러미로 잠금을 풀어갔다.
딸칵, 소리와 함께 기울어지는 문.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하고 멈춰서게 되었다.
문이 열리는 방향에 물건이 쌓여있기 때문.
그것이 쓰러질까 조심스럽게 힘을 주는 아이작이, 이내 뒤편에 배치된 캔버스가 넘어지지 않게 문을 여는 데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고난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정작 방 안에는 그와 같은 것들이 즐비하여 통행을 막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이 냄새는 잿가루인가?'
나무를 태워 만든 잿가루.
오래 노출되면 폐와 관련된 질환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며, 의학적 견해가 없더라도 불쾌감을 크게 자아내는 물질이다.
"환기를 좀 시켜야겠군요."
방을 가로지른 아이작이 곧 창문의 커튼을 걷어내었다.
어두웠던 방에 빛이 드리워지는 순간, 그 창문을 등지고 앉아 있는 이의 모습이 셰인의 눈에 들어왔다.
천으로 감싼 목탄을 쥔 채로 캔버스를 휘적이고 있는 남자.
세 사람이 인기척을 드러내었음에도, 그의 관심은 여전히 캔버스로 향해져 있었다.
그가 바로 에버그린의 남편.
곧장 그에게 다가서려는 것도 잠시.
"이 바보 오빠가 사람이 왔는데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셰인보다 앞서 뛰쳐나간 메어리가, 곧 등을 돌려앉은 슈벨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당황할 새도 없이 쿠당탕, 나자빠지는 슈벨의 몸.
그와 함께 캔버스가 우르르 쓰러졌을 무렵, 아직 상황파악을 하지 못한 슈벨이 멍한 얼굴을 힘겨이 들어올렸다.
"어, 으……. 에?"
삐뚤어진 안경을 바로잡는 멍한 인상의 남성.
메어리와 같은 붉은 머리지만 얼굴엔 검댕이가 가득하며, 그 사이로 비추는 어벙함은 감정표현이 뚜렷한 메어리와 대조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기, 길드장 님?"
그런 그의 관심이 향한 곳은 자신의 몸을 넘어트린 메어리가 아닌, 창문에서 가장 많은 빛을 받아들이는 아이작의 모습.
"죄, 죄, 죄송합니다! 그, 그게……. 지금 열중하고 있어서 길드장, 님이 오신 것도 알아보질 못했어요."
"아뇨, 딱히 그 부분을 나무랄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림을 그리는 중에 방해하는 건 실례가 되는 일이니까요."
그래, 슈벨의 관심은 오롯이 제 앞에 있는 아이작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자신을 지켜보는 셰인과 메어리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옛날부터 저랬어."
메어리가 그런 슈벨을 쏘아보며 셰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신경질적인 모습은 평소의 그녀답지만, 오랜만에 만난 가족에게 보일만한 감정이라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기가 집중하는 거 외엔 전혀 관심이 없어서 옆에 누가 있건 자각이 없는 경우가 많아. 그런 사람이 가문을 이어받았다곤 들었지만……. 역시 예상했던 대로네. 옛날이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자신이 아는 오빠는 결코 가문을 부흥시킬 만한 능력이 없다고.
그런 기대라곤 쥐뿔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 지금의 메어리에게서 여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10년 전이라 들었는데, 그 평가가 여전하다면 여러모로 글러먹은 사람이란 뜻이겠지.'
하물며 자비와 박애를 아는 성직자가 그런 평가를 내리다니.
"그, 혹시 저에게 의뢰가 온 건가요?"
"공교롭게도 그건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 평가가 내려졌는지, 셰인은 아이작과 그의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대략 가늠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아이작의 표정에 드러난 답답함에서.
"슈벨…… 이전에도 몇 번 얘기했지만, 당신에게 의뢰를 맡길 만한 사람은 적어도 저희 길드를 이용하시는 분 중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그, 그게……."
슈벨의 시선이 힐끗, 하고 제 배후의 캔버스로 향해졌다.
이전까지 그리고 있던 목탄화.
그리고 그런 류의 그림은 지금 이 순간 뿐 아니라, 언제 어느 때에나 그의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목탄화가 물감을 살 돈도 없는 이들이 연습 삼아 행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최고의 예술가를 배출하는 걸 목표로 하는 아인슈페너에선 결코 권장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슈벨, 확실히 저는 당신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작품이란 그저 잘 만들기만 해선 안 되는 겁니다. 사후에 인정을 받는 작가들도 있다지만, 그 생애는 무척이나 고단하고 궁핍한 경우가 많았죠."
아이작이 제 옆구리에 낀 물감케이스를 내려놓으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기껏 찾아오자마자 훈계를 하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의 훈계는 손님을 소개시켜 주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귀족으로서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이고.
위치에 걸맞지 않는 모습으로 손님을 받는 건, 그 자체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니까.
"당신이 목탄화에 대해 집착하는 건 저 역시 뭐라고 할 순 없습니다만, 저희 길드의 방침상 해줄 수 있는 지원도 어느 정도 성과를 낸 경우에 한한 겁니다. 형평성을 고려해서라도 당신을 계속 내버려 둘 수 없는 제 처지도 생각해주었으면 합니다."
하다못해 작품을 만드는 자는 시대의 흐름을 맞춘다는, 그런 기본적인 소양이라도 길러주길 바란다고.
그런 정론에 슈벨은 별 반박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며 몸을 떨어대었다.
"그, 그게……."
소심한 모습이지만, 뚜렷한 답이 없다는 건 지금의 방침을 꺾지 않는다는 무언의 시위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 힘없고 고집스러운 모습이 제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는 것으로도 이어지니.
아이작의 입장에선 그저 안타깝고, 안쓰럽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니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이라도 좋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물감을 다루는 법을 연습하고, 무엇이건 작품을 내어주세요. 그리한다면 제가 어떻게든 당신의 작품에 가치를 느껴줄 분을 찾을 테니……."
"그건 무리일 거예요."
진심어린 설득이 누군가의 말에 단호히 부정되는 순간.
아이작이 제 말을 끊고, 그 말을 내뱉은 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교단의 수녀인 메어리.
그녀가 슈벨과 아이작의 옆을 지나치고, 이전까지 그려지고 있던 캔버스를 응시하며 착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리라니, 무슨 의미죠?"
역시 모르고 있는 건가.
하기야, 안다면 그를 몰아붙이진 않았겠지.
곧 메어리가 바닥에 주저앉은 오라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사람, 애초에 색을 구분할 수 없으니까. 색을 구분 짓지 못하는데, 물감 같은 걸 쓸 수 있을 리가 없죠."
"무슨 말이죠? 색을 구분할 수 없다니……."
"그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이 그림들과 같다는 겁니다."
메어리의 물음에 장단을 맞춘 건 셰인.
방에 들어온 후부터 어느 정도 들었던 의심은, 지금 이 순간 메어리가 내뱉은 말과 함께 사실로써 다가오고 있었다.
'색약도 아닌 색맹……. 그것도 적이나 녹에 국한되지 않은 전색맹인가.'
세상의 모든 것이 흑과 백의 스펙트럼만으로 구분 지어진다.
그 질환을 치료하는 것이 바로 에버그린이 셰인에게 내세운 조건 중 하나였다.
……아마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