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205화
슈베르트 블러드메리.
뒷세계를 주름잡는 여인이 굳이 반려로 받아들인 남자란, 그 자체로 특별한 존재임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달링이 무슨 질환을 앓고 있냐고?'
그런 특별한 사람을 자칫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제 활동에 소개시켜주려 하다니.
그건 그 대상이, 오롯이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앓고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뭐, 확실히 당신이 달링을 치료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긴 하지.'
'그 사람이 앓고 있는 질환이 뭔데?'
'안 알랴줌.'
'……야.'
'농담하는 거 아닌데~'
장난스러운 태도로 그런 말을 해봐야 설득력은 쥐뿔도 없다.
세인이 투덜거리자 그녀가 마저 말을 이었다.
'뭐, 굳이 말하자면 저주라고 해야겠지. 그것도 달링이 하고 싶은 일엔 정말로 치명적인….'
저주.
선천적으로 타고났기에, 신성력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증상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셰인은 이제까지 그런 증상을 앓고 있는 이들을 여럿 마주하고, 그들의 치료를 행했던 몸.
그 자세한 증상을 육안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 역시, 이 시대엔 거의 셰인이 유일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그 증세 정도는 설명해줄 수 있잖아?'
'당신이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거든.'
'……뭐?'
'처음에 말했잖아? 내가 당신의 부탁을 받고 달링을 소개시켜주는 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라고.'
확신이 아닌,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뿐.
그리고 에버그린은 불확실한 일엔 섣불리 접근하지 않는 사람이며, 그 대상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욱이 신중히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를 소개시켜 주는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이유는 하나.
'그래, 당신이 직접 보고 판단해 줘. 그 사람이 당신의 이상에 동참할 자격이 있는지……. 혹은 그를 당신의 계획에 끌어들여도 되는지를.'
신조차 구원하지 못한 이를 구제하는 건, 그만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 * *
"요컨대 색을 구분하질 못하니, 어느 물감을 쓰더라도 흑백으로 보인다는 건가요?"
"네, 그렇죠."
셰인이 그가 그려낸 목탄화들을 차차 돌아보았다.
하나도 예외 없이 전부 흑과 백만으로 이루어진 그림들.
그 중엔 가난한 예술가들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그런 투박한 색의 물감조차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림 자체는 굉장히 정교하긴 하지만, 그런 정교함이 오히려 흑색과 맞물리며 어둡고 음침한 느낌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렇군요, 색을 구분할 수 없기에 목탄화만을 고집한…."
이제까진 그저 예술가 특유의 고집스러운 면모로만 여겼건만, 실상은 자신의 장애를 알리지 않고자 그 사실을 숨겨온 것이었다.
색을 구분할 수 없는 건 예술가들에겐 치명적인 일.
방을 가득 채운 목탄화로 그 시선을 빌린 아이작의 얼굴에, 차차 연기로는 숨길 수 없는 동정이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반면 메어리는 의자에 앉은 오빠를 앞둔 채, 양 손을 모아 그의 앞에서 신성력을 발휘할 뿐.
"메어리……."
"가만히 있어."
타고난 장애라곤 하지만, 그래도 가난한 남작가였을 적엔 신성력을 받을 기회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그런 저주가 들킬까 걱정하기에만 급급했으니.
물론 에버그린과 맺어진 후엔 기회가 여럿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메어리는 그를 향해 신성력을 발휘하였다.
"그……."
슈벨이 그런 제 동생을 보다 애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못 본 새에 많이 자랐네."
"……."
"…신성력, 각성했구나."
"그러라고 교단에 보낸 거잖아."
입을 굳게 다문 메어리가 다시 기도를 속행하니, 그녀의 몸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더욱 밝아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만 해도 신성력을 잃어버려 걱정했건만, 지금의 그녀는 이단자인 셰인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임에도 더욱 거센 빛을 거머쥔 상태였다.
"……그래, 메어리는, 예전부터 똑 부러지는 면이 있었지."
그런 메어리를 볼 면목이 없다는 듯 슈벨이 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가주의 자리에 올랐다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
하지만 이후에는 가문을 제대로 꾸릴 능력조차도 없었고, 그저 그림이나 그리며 시간을 때울 뿐이었다.
목탄화를 고집한 게 색맹 때문이라곤 하지만, 아마 눈이 정상이었더라도 제대로 된 미술도구는 손에 넣지 못했으리라.
만약 에버그린이 없었다면.
자신은 거들떠도 볼 수 없는 수완과 능력을 가진 여자가, 운이 좋게도 자신을 선택해주지 않았다면…….
"차라리 네가 가주의 자리에 앉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멍청아, 애초에 여자는 가주 같은 거 못 돼."
무의식적으로 흘려진 말에 메어리가 욱한 심정을 토로했다.
남자는 가주가 되어 영지를 관리하고, 여자는 안주인이 되어 가문의 내실을 다져가는 것이 이 제국에서 당연시 여겨지는 흐름.
그에 예외 되는 건 기껏 해봐야 블레이즈 정도이며, 에버그린 역시 대외적으로는 안주인으로서 가주 대행을 맡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본 가주가 이런 상태인 걸 숨기고 있다.'
귀족들 중에도 미술을 즐기는 자들이 많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주의 자리에서 밀려난 이들이 선택한 진로일 뿐이다.
가주가 제 정체를 숨기고 이런 먼 땅까지 와서 그림공부를 하다니.
하물며 그렇게 그린 것이 가난한 이들이 연습 삼아 행하는 목탄화라면, 누구라도 한심하게 볼 일이 아니겠는가?
"눈은 어때? 괜찮아?"
메어리가 그 속내를 숨기며 마저 그를 향해 물었다.
슈벨이 우물쭈물하다, 제 눈가에 손을 올리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다지 자신감이 느껴지지 않는 눈빛.
"…조금 더 해볼게."
메어리가 다시 그의 앞에서 양손을 맞잡고 신성력을 발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의미 없는 짓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그리고 셰인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존중한다.
그녀가 신앙을 단련한 이유에는 제 오빠를 치료하기 위한 것도 있었을 테니.
"아이작 씨, 잠시 자리를 비워주죠."
그래, 10년 만에 만난 남매이지 않은가?
자신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할 갈등도 있는 만큼, 당장은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그녀를 위한 일이리라.
* * *
슈벨의 방을 벗어난 후, 아이작은 셰인을 데리고 길드 곳곳에 전시된 예술품들을 구경시켜 주고 있었다.
예술가로써의 소양과 역사, 그리고 현 시대가 가진 풍조의 설명 역시 동반하며.
"색이란 세상의 축복……. 예술가라면 누구나 공감할 의견이겠지만, 정작 예술가들의 사이에선 물감을 섞는 행위가 금기시 여겨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보여준 그림들 중 물감이 뒤섞이거나, 거기에 덧칠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하나가 순수한 물감의 색을 그대로 표현한 것.
덧칠을 하며 굵어진 부분은 존재하되, 물감을 뒤섞을 시 희미하게 나타나는 특유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정말로 완벽하게, 재료 본연이 발휘하는 순수한 색만을 써가며 그려낸 그림들.
"색이 축복이라 한들, 축복이란 순수한 그대로여야만 가치를 가진다 여기기 때문이죠. 조화란 서로 다른 것이 공존하는 것이지, 형체조차 남지 않도록 뒤섞는 것은'혼돈'이라 부를 일이니까요."
그 흔적을 교묘하게 감춘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티가 나기 마련이다…….
그저 견해일 뿐인데 왜 이렇게 남다르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마저 그 말에 귀를 기울이던 중, 셰인이 이제까지 되새겨온 그림들을 돌아보며 떠오른 의문점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그러고 보면, 그림에 녹색이 거의 보이질 않는군요."
"샬레 그린, 이라는 염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바로 튀어나왔군.
실제로 변경지대에선, 그 어디를 가더라도 그 염료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거리에, 옷에, 심지어 일상품에까지 덕지덕지 발라 쓸 정도.
반면 이 아인츠바이에선 샬레그린을 사용한 품목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분명 제도에 위치한 예술가 길드를 통해 그 도료의 존재가 알려졌음에도.
"셰인 씨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현재 그 도료의 유통을 맡는 것이 다름 아닌 골드리안이라는 걸 말이죠."
실제로 테올린은 셰인보다도 먼저 샬레 그린이 가진 독성을 인지하고, 그 염료를 직접 통제하고자 한 상태.
물량이 풀리더라도 아주 소량이며, 그마저도 특정한 조건을 만족시킨 이들에게만 내어주고 있었다.
당연히 불만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대외적으로 본다면 썩 좋은 일은 아니죠. 제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상품을 통제하고자 나선 거니……. 실제로 아인츠바이 에 자리한 길드 중 상당수가, 현재 골드리안을 상대로 불매운동을 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골드리안이 제국의 경제를 책임진다 하지만, 그 외에도 작은 상회들은 여럿 존재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골드리안을 이용하지 않는 고객들은 좋은 틈새시장으로 여겨질 터.
누군가는 이번의 통제가, 골드리안의 영향력이 악화되는 쪽으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걱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감히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골드리안의 현 방침을 지지하고 싶은 쪽입니다."
"……네?"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벌려 뜨는 셰인.
아이작이 그런 셰인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테올린 전하는 저 역시 몇 번 마주해본 적이 있습니다. 행동에는 날이 서 있을지언정 무척이나 총명하고,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깊은 사람이었죠."
그런 사람이 가문의 명과 재산에 누가 되는 일을 하면서도 추진하고자 하는 일이다.
그 행동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누가 자신해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개인적인 이유로는, 저는 모든 색이 평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생각하기 대문이죠."
"평등……. 입니까?"
"하늘에 뜬 무지개가 7개로 평등하게 나눠지지만, 그 어느 색 하나 특별히 두각을 보이지 않는 법이죠."
오히려 그 색 중 하나만 빠지더라도 색의 불균형이 일어나게 될 테니. 무지개야말로 예술가들이 중시하는 '조화'를 가장 잘 표현한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있는 모든 색은 저마다의 개성과 독립된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 가치는 어느 것 하나 무의미하다고 할 수 없겠죠. 개인의 취향이 있을지언정 그 외의 것이 가진 가치 역시 인정해야만, 그 색을 조합해 만드는 조화에 의미가 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윽고 아이작의 발걸음이 어느 한 곳에서 멈춰졌다.
그의 앞에 펼쳐진 건 길드의 가장 깊숙한 곳에 배치된 방.
"하물며 저희들이 사는 곳은 숲이 아닌 도시잖습니까?"
그 안에는 오롯이 한 장의 그림만이.
그가 입에 담았던 '도시'를 표현한 그림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캔버스가 하얀 이유는 백색이야말로 모든 색을 포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도시란 숲과 달리 다양한 사람이 모이고, 그들이 펼치는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장소……. 그런 곳을 하나의 색으로 통일시켜 꾸미는 것만큼 아까운 이야기도 없는 법이겠죠."
일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도화지이지만, 그 안을 표현한 건 오롯이 흑과 백색뿐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명암뿐.
목탄화로 이루어진 그림이란 대개 그런 식이다.
셰인이 제 앞에 펼쳐진 그림을 보며 작은 감탄을 흘렸다.
"슈벨 씨가 그린 그림입니까?"
"영지의 시계탑에서 내려다본 광경이지요. 어때요, 멋지지 않습니까?"
공감을 구하며 마찬가지로 그림을 감상하는 아이작.
함께 그 그림을 응시하는 아이작의 얼굴에 차차 만족감이 그려져 갔다.
"대부분은, 이 그림을 언뜻 보고 지나칠 뿐이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그림은 그저 지나치며 보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노력이 깃들어있다는 것을 말이죠."
시계탑에서부터 올려다본 도시의 풍경.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까마득한 산까지 표현된 그림은, 그 광경을 내려다본 인간의 시야를 그대로 모사한 듯하였다.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지상의 끝자락까지.
무수히 뒤엉킨 듯 보이면서도 오류 하나 없이 정교하며, 원근법을 완벽히 살려내었음에도 추상적으로 일그러트린 부분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색이 없을 뿐이지, 이 그림보다 '조화'라는 표현에 적합한 것은 없으리라.
아이작이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것이겠지만…….
"…셰인 씨?"
정작 셰인은 아이작의 부름에도, 그 그림을 훑어보는 행위를 멈추지 않고 몰입을 이어가고 있었다.
단순한 감상을 넘어 '분석'의 단계에 들어간 듯이.
'이 그림, 너무 정교해.'
그래, 묘사의 수준이…….
적어도 자신이 상정에 둔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인간의 기억은 사물을 완벽하게 저장하지 않아. 기억을 쌓아두어도 망각을 반복해서 핵심이 되는 기억만을 쌓아두지.'
그렇기에 망막에 새겨진 광경을 수시로 기억하고, 그 기억을 더듬어가며 묘사하는 '그림'의 경우에는 어떤 부분이건 유동적이고 추상적인 부분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그림은 어느 부분에서도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마치 자신이 내려다본 모든 것을 완벽히 기억하고 묘사한…. 아니, '복사'라도 한 것처럼.
"아이작 씨."
곧 셰인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제 속에 품고 있는 의구심을 차차 입에 담아갔다.
"슈벨 씨의 인간관계가 다른 분들보다도 훨씬 더 열악하다고 하셨죠?"
어쩌면 에버그린이 염두에 둔 증상은 색맹이 아닌 다른 쪽일지도 모른다는.
그 하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물음에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 * *
그렇게 그와의 문답을 끝마친 후 다시 슈베르트의 방에 들어온 직후.
"작작 좀 해!!"
셰인을 반겨준 것은 잔뜩 흥분하며, 제 오라비를 향해 소리를 치고 있는 옛 인연의 모습이었다.
10년 만에 만난 가족을 향한 분노.
그 반응을 본 셰인은, 아이작과 나눈 문답을 떠올리며 자신이 떠올린 가능성이 사실이 되어가는 것을 실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