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212화
연합군.
수 년 전부터 이 제국의 전복이라는 목적 하에 뭉쳐진 거대한 세력으로, 그중에는 제 3제국과 더불어 제 앞에 있는 남자가 거론한 '푸른 화살'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오롯이 제국을 상징하는 붉은 매를 쏘아 떨어트리겠다는 염원 하에, 가장 오랜 세월 동안 반기를 들여온 반란세력이.
"당신이, 푸른 화살의, 수장……?"
하지만 메어리는 그의 말에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푸른화살의 위험도는 제3제국에 비해 적다 하지만, 가장 오래된 반란세력 중 하나인 만큼 그 악명은 널리 퍼져 있는 상태.
그런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 역시 제국 내에선 널리 퍼져 있는 상태다.
"내가 알고 있기로 푸른 화살의 수장은 따로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아, 그는 이미 처형되었어요."
흠칫.
총을 쥔 손에서 일어나는 경련.
그를 눈에 새긴 벨나르가 피식 웃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연합군에 합류하라는 제안을 거절하려 했거든요. 자신이 바라는 건 제국을 무너트리는 게 아닌, 어디까지나 제국의 잘못을 꾸짖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였죠."
"……웃기는 소릴."
가장 오래토록 제국에 반기를 들었던 세력이다.
세력의 확장과 자금의 확보를 위해 인신매매나 강도짓도 서슴지 않고 벌였던 이들이건만, 이제 와서 제국의 붕괴는 원치 않는다니.
"네, 웃기는 소리죠. 그래서 그냥 깔끔하게 제거하고 제가 그 자리에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그런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론 이 제국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어중간한 짓거리.
이제까지 그들이 벌였던 일조차, 눈앞에 있는 자는 그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지금 이 시계탑 아래에 펼쳐진 광경을 본다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새로이 수장이 된 참에 일을 크게 벌렸다 이거야?"
"잘 이해하셨군요~ 역시 젊은 나이에 신앙을 각성하신 분다워요."
메어리가 호흡을 다잡으며, 그를 향해 겨누는 총구의 흔들림을 지워갔다.
벨나르 벨레로프.
심문관들의 사이에 잠입하고, 주교의 자리에까지 올라 내부의 사정을 교묘히 유출한 것도 모자라 동료까지 살해한 남자.
거기에 더해 조직으로 복귀하기 무섭게, 자신이 따르는 조직의 수장마저 죽이고 그 실권을 잡아낸 강경파.
"그래요, 당신의 말대로 이제까지의 활동으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으니, 모든 것을 부수고 다시 세우는 것만이 답이지 않겠습니까?"
그 끝에 연합군을 대표하여 이 공작령의 전복마저 노린 남자가, 지금 이 순간 메어리의 앞에서 자신의 손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 손에 끼워진 '뼈 반지'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빛을 보란 듯이 내세우며.
"자 보시죠, 주님께서도 지금의 제가 옳다고 말씀하고 계시는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릴……!"
"네, 개소리 맞습니다."
터져 나오는 비아냥을 역으로 막아버리는 벨나르.
그에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기 무섭게, 벨나르가 제 어깨를 으쓱이며 제 속내를 토로하였다.
"애초에 이 빛을 다루는 데에 주님의 은총 같은 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신성력이라는 것도, 까놓고 얘기하면 마나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에너지'에 불과한 것을."
다른 신자들이 들었다면 바로 불경하다 격노를 내질렀을 말.
하지만 신앙을 가진 메어리조차도, 제 앞에 있는 남자의 말을 바로 부정하진 못하였다.
그 잠시뿐인 공백이 알려주고 있다.
제 앞에 있는 여인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요, 당신도 심문관이라면 알고 있겠죠. 세상은 볕이 드는 곳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말이죠."
인간의 마음을 빚어 만든 빛이 존재하는 세계.
그러한 세계엔 모종의 수단으로 신성력을 저장하고, 그것을 필요할 때에 방출할 수 있는 수단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수단을 갖추고 있기에 상대는 교묘하게 교단에 잠입하고, 신앙을 증명해야만 들어설 수 있는 심문관들의 사이에서 제 본심을 숨기며 연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손에 끼고 있는 반지와, 그와 같은 도구의 힘을 빌어서.
"이를테면……. 그래요, 보통 상식적으론 인간만이 신앙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라요. 인간 외의 생물 중에도 신앙을 품을 수 있는 생물은 존재하니까요."
"신앙을 품는 동물이라니…."
"그 왜, 몇 년 전에 제국에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한 이단자가 벽외지역을 누비다 찾아온 신의 사자라나 뭐라나……."
셰인 골드리안.
그 자가 심층부를 누비며 데리고 왔던 생물에 대한 이야기다.
백색의 털에 더하여, 신성력을 발휘하며 주변에 빛을 선사하는 아름다운 여우…….
교단에서는 그 신비로운 존재를 정말로 신의 사자라 인정하고, 그 존재를 '성수'라고 명명하였었다.
"……빌어먹을 촌극이죠."
그 숭고한 받아들임조차도 가증스럽다는 듯 비웃음을 흘리는 벨나르.
"당신들이 그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을 때, 누군가는 벽 밖의 존재와 소통하며 그들이 채취한 전리품을 거래하고 있었습니다. 벽 밖의 존재들에겐 그저 쓰기 좋은 치료제일 뿐이지만, 그걸 가공해 얻은 물품은 벽 안쪽에선 천금의 보화보다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벽 밖에 존재하는 사냥꾼들. 그들과 벌인 은밀한 거래…….
그로부터 얻은 물품은 제국에선 신앙을 연기하며, 주변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물품으로 탈바꿈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신성력을 축적하고 필요할 때에 방출할 수 있는 도구라니. 이게 제국에 알려진다면 가히 혁명이라 할 수 있겠죠. 그 소식을 공작령의 테러와 함께 퍼트린다……. 이 정도면 참 그럴싸한 반격이지 않겠습니까?"
'신앙이 근간을 이루는 나라에 신앙의 가치를 하락시킨다.'
그러한 선동의 여파는 터무니없을 터.
이 영지에 자리한 피해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규모는 황실과 교단에서조차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기울어질 것이다.
"물론 심문관인 당신이라면 이렇게 말을 하겠죠. 그런 짓을 벌이는 놈들을 다 죽여 버리면 해결될 거라고……."
그래.
그 모든 혼란과 죄를 짊어질 자를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시키지 않는 한.
-타앙!!
그 추측이 내뱉어지기 무섭게 한 발의 총탄이 발사되었다.
머리의 옆을 정확히 스치고 지나가는 탄환.
하지만 애초에 그 총알은 무의식적인 마나로 몸을 보완하는 그의 머리가 아닌, 배후의 벽에 부착시킨 '최루탄'을 노리고 있었다.
-파앙!
압력이 해방되며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가스.
벨나르가 기침을 토해낸 순간, 메어리가 마스크를 쓴 채 연막 속으로 몸을 굴리며 자신의 치마폭에 손을 올렸다.
'바로 대응은 어려울 거다. 호흡의 방해는 집중력을 감퇴시키니까.'
마나란 의지에 기인하여 반응하는 힘. 호흡 등 정신과 직결되는 활동에 영향을 주면 집중은 크게 흐트러진다.
그 점을 착안한 메어리가 제 허벅지에 매어진 두 자루의 권총을 뽑고, 그 총구를 제 앞에 있는 자에게로 겨누었다.
-타앙, 타앙, 타앙!!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터져나오는 불씨.
쏘아진 총탄이 벨나르의 몸에 부딪치며 불씨를 퍼트린다.
비록 연사력은 기관단총에 비해 떨어질지언정, 강체술을 흩트리기엔 부족함이 없을 터.
그리고 그 흐트러진 틈을 노린 메어리가 탄창이 비워진 총을 내던지고, 그의 발밑에 둥그런 물건을 내던졌다.
이미 핀이 뽑혀진 채 던져진 건 스프링 폭탄.
-파앙!
용수철의 압력에 의해 튕겨져 나가는 쇳덩이는 가슴께까지 띄워지고, 1초 채 되지 않은 시간 후 폭발하여 금속파편을 퍼트릴 것이다.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흉측한 무기.
-까앙~!
하지만 그 폭탄이 터지기 직전 그 자리엔 불똥이 튀어 오르고, 이내 튕겨져 나간 폭탄은 시계탑 밖에 나가서야 폭발을 일으켰다.
최종적으로 상대가 입은 피해는 전무.
이를 바득 가는 메어리가 연막을 게워내며 나타난 이를 쏘아보았다.
"대단하군요. 마나에 의존하지 않고도 오롯이 전략과 기술만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기교……. 제가 아니었으면 이전에 던진 폭탄에 온몸이 갈가리 찢겨져 나갔겠죠."
-기이잉.
목소리의 뒤를 잇는 기계음.
그와 함께 그의 배후로부터 튀어나온 그림자가 이윽고 메어리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안타깝군요. 제 몸을 보호하는 건 마나나 방탄복만이 아니거든요."
그의 등에서. 아니, 그 밑의 골반에서부터 튀어나온 것은 마치 전갈의 꼬리와도 같았다.
사이사이에 유동적인 관절을 부착시켜 놓은…….
메어리가 그것을 본 순간 제 눈을 크게 벌려 떴다.
"단순한 기계장치는 아니에요. 동물의 형태를 모사해 만든 것을 제 신체에 붙인 거니까."
그 신체부위는 의식이 아닌 신경에 의해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주변의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즉시 공격을 차단하는 절대적인 방어능력을 보인다.
강체술을 뚫고 들어올 정도의 위험한 공격도 예외는 아닐 터.
하지만 메어리가 가장 분노한 건, 그 장비를 가진 자가 본래에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했던가요? 파이몬이 아주 좋은 걸 선물로 주었어요."
"이, 쓰레기가……!!"
-쩌억!!
빠르게 쏘아진 전갈의 꼬리.
그것이 새로이 꺼내든 권총을 튕겨내고, 이내 메어리의 어깨를 찍어 눌러 벽까지 내몰아버렸다.
어깨에서 왈칵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
그에 신음하는 가운데, 그녀를 찍어 누른 벨나르가 비열한 미소를 지어보이기 시작했다.
"아아, 파이몬~ 당신은 이 장치를 가지고 정말로 많은 이단들을 정벌해왔겠지요. 그 무기가 이제 와서 자신과 같은 신자를 겨냥하다니……. 운명이란 것이 신이 써내려간 것이라면, 신은 참 비극을 좋아하는 분이란 소리겠지요."
-빠드득.
이를 갈며 제 어깨에 처박힌 기계장치를 틀어쥐는 메어리.
하지만 이미 뿌리 깊게 박힌 쇳덩이는, 도리어 그녀의 몸을 자리에서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에 아우성을 쳐도 이상하지 않을 터이건만.
"주교님은……."
그럼에도 메어리는 자신의 고통보다도, 제 몸에 박혀있어야 할 무기가 이단자의 손에 놀아나는 것을 증오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파이몬 주교님은……. 당신을, 믿고 있었다고 했어. 험난한 일을 하는 중에도, 당신을 좋은 친구라고……."
"네, 저도 그에겐 마음이 좀 있었습니다."
반대로 벨나르 역시 지금의 이 순간을 아이러니하게 여기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교단을 배신하기 전, 그래도 심문관들의 사이에서 찾아낸 '동지'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면.
"그가 제가 가는 길에 동참해 주길 바랐어요. 그리고 그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여겼지요."
심문관들은 신앙을 지식의 위에 두는 존재들.
체제에 반하는 것을 무기로 삼으면서도 신앙을 유지해야 하는 그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잠재적 반란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레이스 레펠타리. 불우한 처지에도 고결함을 잃지 않았던 여인을……. 그가 직접 그 손으로 처형했더라면."
그 마지막 쐐기를 박아 넣었을지도 모르는 사건이 한 남자의 손에 저지되었다고.
"그랬다면 그를 제 손으로 죽이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셰인 골드리안, 그가 괜한 수작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그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표정을 구긴 직후, 문득 어깨에 처박은 꼬리의 떨림이 잦아든 것이 느껴졌다.
벽에 처박힌 채 구속된 여인.
어깨에서 흐르는 피해 빈혈이 덮쳐옴에도, 그 얼굴엔 차차 안도감이 어려가고 있었으니.
"아, 그렇군요. 당신도……."
그것을 마주한 순간 벨나르의 눈웃음이 지워지고, 그 빈자리에 서서히 분노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당신도 파이몬처럼 그에게 회유된 거였어요."
하지만 그 분노는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설득을 전제로 나불대는 말이 무색하게도, 그 뒤를 이은 본론이 내뱉어져도 의미가 없다는 걸 이해했으니.
그래, 제 앞에 있는 자 역시 파이몬과 마찬가지로 한 이단자의 고결함에 매료된 자.
이제 와서 제 회유를 들어먹을 리는 만무했다.
"……어쩔 수 없군요. 기껏 찾아왔지만 이렇게 나온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그렇게 타락의 손길을 뻗으려던 남자가, 이내 자신의 꼬리를 조작해 시계탑의 밖으로 그 몸을 빼내었다.
밑바닥에 자리한 천길낭떠러지.
그럼에도 시선이 향한 곳은 제 앞에 자리한 증오스러운 인간이었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당신의 바라는 건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하하, 이제 와서 신의 천벌이란 게 떨어질 거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천벌이라니.
기적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참으로 가증스럽게 여겨질 말이다.
그 본질은 인과를 무시하고, 자신의 뜻에 반하는 이들에게 해가 가해진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
실상을 따지면 '저주'와 다름이 없는 것이니까.
그런 저주가 이루어지는 것을 교단의 사람들이 그저 그럴싸하게 포장했을 뿐.
"천벌이 악인에게 떨어진다면, 지금 이 순간의 악인은 제가 아닌 당신이라는 거겠죠."
가식적인 태도지만, 지금의 말만은 분명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자신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그렇게 모든 이들이 죄인을 양성할 뿐인 사회.
완벽을 추구한다면 그 또한 이상향이 될 수 있겠지만, 그걸 추구하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오만으로 전락할 뿐이다.
그 오만의 말로가 바로 지금의 불타오르는 도시이니, 그러니 자신은 이 일을 저지른 데에 한 점의 후회 없으리라.
"잘 가시지요. 아직은 심연에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존재여."
이윽고 꼬리가 휘둘러지며 메어리의 몸이 시계탑 밖으로 던져졌다.
귓가에 감도는 공기음이 갈수록 거세지고, 몸을 짓누르는 힘 역시 거스를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져 간다.
처음에 바들바들 떨렸던 손조차도 갈수록 체념에 의해 멈춰지니.
'이걸로, 끝……?'
그 손끝에 어린 빛마저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콰창!!!
제 옆을 지나친 무언가가 시계탑의 유리를 깨부수고.
그 뒤를 따르듯 날아든 누군가가 메어리를 끌어안아 깨진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마나를 뭉쳐 쏘아낸 탄환으로 유리를 깨고, 그대로 추락자를 끌어안아 난입하는 구출법.
그 직후 몸이 구르며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그 충격은 땅에 내동댕이쳐졌을 때에 비하면 무척이나 적은 수준이었다.
"메어리, 괜찮아?"
그런 무리한 방식으로나마 제 몸을 구해낸 자가, 이 순간 자신의 이름을 불러오고 있다.
자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편으론 더 없이 익숙한…….
"……셰인."
자신을 동경하는 이가, 지금 이 순간 걱정이 어린 눈으로 자신이 구해낸 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익숙함에 반가움을 느낄 법함에도, 메어리는 차마 그를 향해 그 감정을 진솔히 토로하지 못하였다.
그저 제 몸이 아프기 때문이 아니다.
이단자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무력함 때문도 아니다.
"피가……."
그가 걸치고 있는 순백의 백의를 덮고 있는 붉은 빛.
한 사람의 몸에서 나왔다기엔 지나치게 많은 양이다.
셰인이 그 몸을 스윽 돌아보다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걱정 마, 내 몸에 난 상처는 아니니까."
그래, 그건 결코 그의 상처에서 나온 것들이 아니었다.
제 상처를 응급처지로, 혹은 신성력을 이용해 치료할 수 있는 그가 그만한 양의 피를 흘릴 리가 없다.
애초에 그 정도로 다쳤다면 이곳까지 오지 못했으리라.
"일단 다친 곳을 보여줄…."
그 의미를 이해한 순간 제 상처를 돌봐주려는 손이.
-철썩.
왜인지 모르게.
이 순간만은 너무나도 무섭게 느껴지고 있었다.
"……메어리?"
"미안."
피가 무서운 게 아니다.
그가 자신에게 해를 입힐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믿고 있다.
분명 그럴 터이다.
"미안해, 미안……."
그럼에도 두려움이 느껴진다.
자신을 구하기 전까지 이 전란을 누비던 그가, 차마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한계를 느껴 스스로가 염두에 두었던 '선'을 넘어버렸다는 사실이.
그렇게 스스로가 지키고 있던 선을 어겼음에도, 여전히 손끝에 빛을 거머쥐고 있는 모습이.
사실은 그 손끝에 어린 빛조차도 거짓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애초에 이 빛을 다루는 데에 주님의 은총 같은 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신성력이라는 것도, 까놓고 얘기하면 마나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에너지라 정의할 힘인 것을.'
사실은 자신들이 숭고하다 여겼던 힘이 그저 세계의 일부이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내가, 널 믿지 못할 만큼 약해서……."
그런 불신마저 시련이라 여겼던 여인은.
이 순간 동경하는 자의 더럽혀진 모습에, 제 마음이 부질없이 무너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