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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217화 (217/255)

의무병의 환생 217화

"셰인. 괜찮으신가요?"

어느덧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겁게 가라앉은 눈이 뜨여지고, 이내 그 시야가 하얀 실루엣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바로잡혀가는 형체는 몇 번이고 회고해왔던…….

하지만 이제는 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얼굴.

"스승……. 님?"

"네, 피오예요."

하얗고 거친 머릿결과 색소 하나 없이 거친 피부.

그런 병약한 몸을 가진 여인이, 유일하게 붉은색을 띠는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의 열망이 만들어낸, 피오 아스클레."

손길은 거칠었지만 목소리는 포근하기 그지없다.

성경에서 나오는 주님의 사자가 이런 느낌일까?

"……난 또, 내가 천당에라도 온 줄 알았네."

실제로 제 스승도 천사와 같다는 말을 종종 들었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녀는 사후세계를 긍정하지 않는 자였다.

죽은 사람에게 영혼 따윈 존재하지 않고, 그들을 인도하는 천사 역시 그 존재가 불분명한 상태.

정녕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는 때에 누군가 마중 나온다면, 그건 주님의 사자가 아닌 사경을 헤매는 중에 마주하는 마지막 환상이리라.

"꽤나 오랜만에 찾아오셨는데……. 무언가 고민이 있으신 건가요?"

"아, 뭐. 있긴 한데……."

그래, 눈앞에 있는 것 역시 그와 같은 존재다.

제 앞에 있는 것에 위안을 가지되, 결코 의존해선 안 될 신기루와 같은 존재.

그 점을 자각한 셰인이 마음의 술렁임을 가라앉히고, 무릎에 기대고 있는 머리에 더욱 힘을 실어 넣었다.

"그건 나중으로 좀 미루고, 좀 피곤해서 그런데 더 누워있어도 될까?"

그래, 그녀에게 바라는 건 그 정도로 충분한 것이다.

볕을 감추는 그늘이자, 등을 기댈 수 있는 기둥으로써.

"얼마든지요."

그 역할을 자처하는 이의 목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진 것을 느낀 그가, 이내 떴던 눈을 도로 감으며 제 몸에서 차차 힘을 풀어갔다.

그 의식이 수면 아래로 다시 가라앉은 순간.

이윽고 그의 시선에서 제 모습이 사라졌을 무렵, 피오가 측은한 얼굴로 자신이 자리한 공간을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지평선 너머까지 뻗어있는……. 본래 있어야 할 뼈와 살마저 풍토 되어, 이제는 전란의 흔적만이 겨우 남아 있는 공간.

하지만 그런 척박함만이 영원히 이어지리라 여긴 공간에, 희미한 녹빛을 띤 풀들이 하나둘씩 자라나고 있다.

그런 식으로나마 이 땅에 색이 입혀지고 있는 것이다.

이 공간이 무엇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하면, 그의 우상이 되고자 하는 입장에선 무척이나 긍정적으로 여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색이라는 것이 언제나 아름다운 건 아니죠.'

쓸쓸한 중얼거림을 뒤로한 그녀가, 이내 자신이 등지고 있는 것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작고 조촐하게 세워진 비석 하나.

이름조차 새겨지지 못한 묘비는, 한때 어긋난 정의관을 추구하던 자가 묻히게 된 장소였다.

그 또한 결국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이라지만, 그녀에겐 그를 기억해야 할 의무가 존재하고 있었다.

"모두 고생하셨어요."

시작은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을지언정.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빛으로부터 희망을 얻었다면, 그 마음에 부흥해야 할 것이 우상이 된 자의 사명일 테니.

"이제, 편히 쉬어주세요."

그 마음에 맞춰 펼쳐진 날개를 이불 삼아 만들어낸 잠자리와 함께, 언덕 너머로 나지막한 자장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정의를 추구한 이들도 이곳에서만은 편안하게…….

그래, 이어지는 것은 고작 그것만이 전부인 시간이었다.

* * *

"무사하셨군요, 메어리."

그것만이 전부인 시간 속에서, 메어리가 곧 자신을 찾아온 이를 스윽 돌아보았다.

자신을 향해 지친 발걸음을 옮겨오는 신도복의 남성.

그 눈을 덮고 있는 두터운 붕대는 메어리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추기경님, 이시군요."

추기경 토머스.

심문관들을 이끄는 수장이자, 배신자의 흔적을 쫓아 이 영지에서 조사를 벌였던 사람.

몸에 묻어난 피는 그 역시 이 영지에 벌어진 전란에서 사력을 다했음을 가르쳐주는 것.

그런 그의 뒤에 어째서 잇따르는 심문관 하나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물어보는 건 나중으로 미뤄도 될 문제이리라.

"그분은……."

"쉿."

물음이 내뱉어지기 무섭게 제 입가에 손을 올리는 메어리.

그 행동에 입을 다물자, 메어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제 측은함을 묻어갔다.

"지금은 쉬게 해주세요. 이 애도 여러모로 고생했으니까."

손끝에 어린 희미한 빛이, 제 무릎에 기대어져 있는 이의 볼을 차차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 현장을 누볐던 그 누구보다도 많은 피를 머금은 몸을 가진 사내의 볼을…….

그런 모습이 꺼림칙하게 느껴질 법함에도, 메어리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애틋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따스한 빛에 눈이 뜨여질 법함에도, 그는 여전히 편안한 얼굴로 그 자리에 머리를 뉘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보다도 신경이 쓰이는 건, 다름 아닌 이 주변을 가득 채우는 인기척들이었다.

"신이시어……."

노을이 질 무렵의 거리에 뒤늦게 정규군이 들어서며 반란군들을 수습했지만, 진압에 성공했다 해도 무너진 거리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죽은 사람들 역시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신성력으로는 무너진 거리도, 죽은 자를 되살릴 수도 없으며, 그렇게 잿더미 위에 남겨진 이들에겐 절망만이 존재했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이곳엔 왜 원성이라 할 것이 들려오지 않는 것일까?

"오오, 주여."

"우리를 구원해주소서……."

자신을 구제하지 못하고, 주를 원망하거나 그 존재를 부정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건만.

정작 이 순간 그들이 표하는 건 절규가 아닌 경의이자, 그를 넘어 경외라고 불러 마땅한 감정이었다.

다름 아닌 메어리의 무릎에 기대어진 한 이단자를 향해.

전란에 휩싸인 이들이, 그 존재로 하여금 서서히 신앙심을 개화시켜가는 것이다.

"부디 저희들의 고통을 사해주소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상처를 보듬어주소서."

"저희들은 언제나 당신의 신하가 될 것임을 맹세하옵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반란군들이 신앙을 연기하며 불신의 씨앗을 틔웠거늘, 정작 그 전란의 현장에서 창공을 가득 채운 빛에 만인이 희망을 찾고 있다니.

하지만 그런 행위가 비합리적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아무런 인과를 따지지 않기에 나약한 이들은 이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절망적인 현실을 바꾸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설령 그렇다 해도 마음을 어지럽히는 혼란을 완화시키며, 올바른 답을 찾아낼 수 있는 '기회' 정도는 거머쥘 수 있게 되니까.

"……무거운 짐을 짊어졌군요."

그러한 희망을 이 제국이 지향하는 것과 전혀 다른 길로 향하는 이가 도맡게 되다니.

"괜찮을 거예요."

그에 걱정마저 들었지만, 정작 이 상황을 마련한 장본인 중 하나인 메어리의 입가엔 안도의 미소만이 그려져 있었다.

"셰인은…….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올곧은 사람이니까."

그래, 이제까지도 잘 해내지 않았는가?

개인이 짊어지기엔 과한 책임일지언정, 분명 그 역경을 견뎌낸 끝에 답을 찾아내리라.

그를 돌보고 있는 여인에겐 그런 확고한 믿음이 존재하고 있었다.

"추기경님."

그러니 그녀는 제 무릎에 기대어진 이를 걱정하진 않는다.

걱정하는 건 자신들과 이 주변을 두르고 있는 사람들.

더욱 나아가 이 땅에 자리한 모든 이들을 향한 것.

"이제 곧, 이겠죠?"

군중은 무지하고 나약하다.

절망적인 현실에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신들의 현실에 아무런 변화조차 주지 않는 미지의 빛에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앞으로 있을 파국의 시발점에 불과할 뿐이다.

'토머스 추기경. 부디 나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소?'

토머스 역시 그러한 미래를 예견하며, 제 품에 들어있는 물건을 굳세게 틀어쥐었다.

'내 동생, 아이작을 만난다면 이것을 내어주길 바라오.'

제국의 상징과 더불어 아인츠바이 가문의 상징이 새겨져 있는 반지.

오롯이 공작령의 후계자에게만 주어지는 물건은,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이 땅의 주인이 된 자가 양도했던 물건이었다.

'그리고, 부디 미안하다 전해주시오. 부족한 나를 대신해, 이후 찾아올 시대를 감당케 한 것에 대해.'

그 유언을 듣게 된 것이 오직.

그 치열한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신뿐이라는 게 야속하기 그지없었으니…….

"네, 곧이겠지요."

그 반지를 움켜쥔 토머스가, 붕대에 감싸인 눈으로 메어리를 조용히 응시하였다.

사명이 있음에도 차마 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발걸음.

마치 말뚝이라도 박힌 듯 뚝 끊어진 발을 응시하던 메어리가 그에게서 관심을 돌리고, 제 무릎에 기대어진 이의 이마에 손을 올려주었다.

"여긴 저에게 맡기시고 가보세요."

폭동은 진압되었으나 민중은 아직도 혼란스러운 상태.

잠잠해진 이곳도 만약의 위험이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여인은 더 이상 풋내기라 할 수 없는 몸이었다.

그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한 치의 앞도 볼 수 없는 몸이지만, 그 몸에서 새어 나오는 빛마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네, 그럼……."

그로부터 미련을 꺼트린 토머스가 등을 돌리고, 이내 공허한 거리를 홀로 거닐어가기 시작하였다.

그 곁을 따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배신자와 이단자들의 숙청에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이 혼란으로부터 신앙을 잃을 위기에 처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한 이단자는, 만인의 희망이 될 초석을 마련하였다.'

그러한 빛이 이후의 전란에 어떤 식으로 다가올지, 그건 공교롭게도 당장 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역시 일개 인간에 불과한 몸. 스스로의 미래를 예견하기엔, 당장의 일조차 감당하기에 벅찬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괴물을 잡으려면 심연으로……."

그러니 이 순간 확신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줄곧 스스로에게 던졌던 물음에 대한 답만을.

"하나, 심연 속에도 빛은 존재할 수 있는가?"

오롯이 그에 대한 깨달음만이.

어둠 속을 거니는 그의 마음에 조촐한 위안을 가져올 뿐이었다.

* * *

그리고, 아인츠바이에서의 전란이 끝나고 1주일이 지났을 무렵.

"더 쉬고 가지 그래?"

아직 동이 트기엔 이른 새벽.

신세를 지던 교회를 떠나가는 셰인을 불러 세운 건, 입구에 삐딱히 기대고 서있는 메어리였다.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눈치로.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따닥.

몸을 지탱하는 두 개의 목발을 이용해 몸을 돌리는 셰인.

다리는 그럭저럭 멀쩡하지만, 허리 쪽에 큰 문제가 생겼기에 마련한 보행 보조품이었다.

신성력만으로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부하가 쌓였으니 당연할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무리를 한 건 메어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에 들어가서 더 자고 있어. 며칠 동안 환자 돌보느라 제대로 잠도 못 잤으면서."

"하하~ 그 환자 중 한 명이 야밤에 탈출하려는 걸 잘도 보고 있으라고?"

"그냥 더 있기 불편하니까 가려는 거지. 누가 들으면 내가 죄라도 지은 줄……. 케헥!"

그대로 허리 쪽을 손가락으로 찔러 넣는 메어리.

순간의 격통에 뒤틀려 주춤거리는 셰인이 비틀거리다, 가까스로 균형을 바로잡으며 메어리를 쏘아보았다.

"야……."

"왜? 때리기라도 하게?"

얄밉게 혓바닥까지 내미는 메어리.

그 행동에 셰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성직자들은 폭력을 쓰면 안 된다 하지 않았던가? 심문관이라 교리를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이단자라고 험하게 다루는 건지……."

"허세 부리는 남자를 한심하게 여기는 여자의 마음이지."

후후, 하고.

그렇게 웃음을 터트린 메어리가 비틀거리는 셰인에게 다가서며, 자신이 찔렀던 장소에 빛이 어린 손을 내세웠다.

"참 바보 같다니까. 신성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괜히 멀쩡한 척을 하고."

빛이 쬐어졌음에도 고통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이제까지 쌓인 피해가 너무나도 많은 나머지 적응의 상태에 돌입했기 때문.

시간을 들여 자연치유력을 발휘한다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부상이라지만, 그 이전에 무리를 한다면 영구적으로 장애가 남을 것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힘에 한계라니."

하지만 성직자가 된 자가 그것을 쉽게 인정하다니.

"사람의 한계지."

제국의 상식적으론 삼가야 할 태도지만, 정작 메어리는 그에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을 하였다.

"주님이 주신 은총도 결국엔 사람이 쓰는 거니까. 자신이 담아낼 그릇만큼의 힘만을 쓸 수 있는데, 그 한계를 주님의 탓으로 돌리는 쪽이 잘못된 거 아니겠어?"

"허허. 그것 참."

당연한 정론에 셰인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만났을 적을 생각하면 정말 상상도 못 할 말.

그건 그녀 역시 셰인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건을 겪고, 여러모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에 안도의 미소를 지은 셰인이 목발을 이용해 제 몸의 균형을 바로잡아갔다.

"걱정 마라. 당분간 무리할 생각은 없으니까."

마냥 예의상으로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대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라도 이 교회를 벗어날 필요가 있었으니까.

'정신을 차린 후부턴 계속 나보고 천사네, 주님의 사자네 떠드는데 답답하지 않고 배기겠어?'

메어리의 신성력이 담긴 총탄이 날개를 생성시킨 건 기억하지만, 그래 봐야 결국 빛이 새어 나오는 날개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 후로 의도적으로 날개를 뽑아내려 해도 뚜렷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 상태이거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일에 괜히 기적 같은 거창한 소릴 들먹이다니.

제 입장에선 여러모로 석연찮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후를 위해선 필요하겠지. 그런 것도…….'

그에 씁쓸함을 느끼며 떠나고자 하는 것도 잠시.

"괜찮아 셰인."

배후에서부터 들려오는 자상한 속삭임.

"분명, 다 괜찮을 거야."

주어를 두지 않은 추상적인 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불안함, 그리고 혼란 속에도 마음을 다잡고자 하는 희망이라고 부를 감정…….

"……몸조심해."

하지만 그런 마음조차 서로를 붙잡지 못했고, 그렇게 두 사람은 조촐한 인사를 마치막으로 작별하게 되었다.

그 후 목발에 의존하며 무너진 거리를 거닐어가는 셰인.

공작령답게도 수습속도는 빨랐지만, 그럼에도 아직 공사의 흔적은 여럿 남아 있었다.

시체만 회수되었을 뿐 혈흔까진 차마 지우지 못한 장소가 수두룩한 상태.

그를 누비던 중, 셰인은 제 앞에 흐릿한 인영 하나가 투영되는 것이 느껴졌다.

총 한 자루를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한 채로, 이 무너진 거리를 쓰레기처럼 나뒹구는 수녀복의 시체를 상상으로나마.

'사실은, 네가 총 같은 걸 쥐지 않았으면 한다고.'

당장에라도 돌아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그녀가 있는 쪽으로 돌리지 못한 건, 그 역시 자신의 한계를 절실히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강자도, 영웅이라 부를 자도 혼자선 버텨낼 수 없는 재해. 혹은 재앙이라고 부를 사태.

그러한 전란에 뛰어들길 선택한 남자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절대를 상정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무언가를 바꾸려는 노력을…. 그것마저 부정할 순 없으니까.'

그녀에겐 그녀의 길이.

그리고 자신에겐 자신의 길이 존재하는 법.

그러한 생각을 뒤로한 셰인이, 이내 도착한 장소에 펼쳐진 광경을 천천히 응시해갔다.

예술가 조합 아인슈페너의 기숙사.

폭발물에 의해 천장과 벽이 크게 무너져 내린 처참한 장소에, 셰인보다도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다.

목탄이 아닌 물감으로.

이미 기름이 떨어져 꺼진 랜턴의 불빛을 대신해, 동틀 녘의 햇살에 의존하며 캔버스에 붓을 대고 있는 한 남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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