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219화
[외전-테라스 내전(1)]
라인하르트, 아인츠바이, 그리고 키르슈타인.
제국의 세 기둥이라 불리는 세 개의 가문은, 각자의 방식으로 제국을 수호하는 기둥의 역할을 대대로 도맡아 오고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무훈과 병법의 계승을 통해.
아인츠바이는 예술을 통한 문화의 보존으로.
그리고 키르슈타인은 제국에 반기를 든 죄인들을 엄중히 다스리고, 그들에 대한 기록을 보존하는 것을 통해서.
"면회시간이다. 얌전히 따라 나오도록."
그러한 가문의 상징이라 불리는 대감옥 지하 깊숙한 복도.
그 곳에 두 옥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지자, 독방에 가두어져 있던 남자가 제 고개를 스윽 들어 올려보았다.
더러운 옷과 더불어 몸 곳곳에 털이 수북이 자라나 있는 몰골.
그 누가 그 모습을 보며 2년 전, 이 제국의 안보를 위협한 세력의 수장 노릇을 했다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면도를 좀, 하게 해주지 않겠나?"
그러면서도 갈라진 목소리엔 여유라고 할 게 존재하고 있었으니.
"이런 몰골로는 2년 만에 처음으로 찾아온 면회인을 마주하기엔 실례가 될 테니……."
"입 다물어라."
그런 태도마저 같잖게 본 죄수에게 으름장을 놓은 옥졸수들이, 곧 그의 몸을 거칠게 끌고 나와 복도를 거닐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은 투로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서는 죄수.
이내 도착한 곳은 면회실로, 햇빛이 들지 않는 지하의 대감옥 내에서 그나마 발광석을 통한 빛을 볼 수 있는 장소였다.
공간을 격리한 유리의 너머로 보이는 모습을 인지한 죄수가, 상대의 얼굴을 살피고는 이내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외로군. 이런 누추한 곳까지 나를 찾고자 온 사람이 있을 줄이야."
입 밖으로 내뱉어진 솔직한 감탄사.
그를 맞닥트린 남자가, 구릿빛 피부를 덮고 있는 제 금발을 쓸어 넘기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추하다라……. 그거 참 실례되는 말이로구나.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땅의 주인만큼 위상이 높은 자는 이 제국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이건만."
"공작령이라 한들 엄연히 죄인들을 수용하는 장소지. 당신 정도 되는 인물이 이런 불결한 곳에 발을 들인다 한다면 누구라도 놀라지 않겠나?"
대수롭지 않게 받아친 죄수가 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마저 말을 이었다.
"제1 황태자."
알랙산드로스 테라스.
현 제국의 지도층인 황실의 일원이자, 제 1계승권자로서 차기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이 예정된 인물.
지금의 발언은 그런 위상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었지만, 정작 미소가 그려진 알랭의 입꼬리는 미묘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건만, 나를 잘 안다는 듯이 떠드는구나, 죄수 라이히."
"……거북한 칭호로구나. 가급적이면 총통이라고 불러줬으면 한다만."
"현 제국의 정권이 버젓이 남아 있는데도 그런 칭호로 불리길 바라다니. 그 손에 채워진 족쇄로도 자네의 오만함을 모두 억누르진 못한 모양이군."
어디까지나 제 이상을 위해 사용한 칭호이지만, 정부에 사로잡인 수장이란 권력싸움의 패배자이자 전범에 불과할 뿐.
그러한 처지를 실감한 듯, 이스칸다르 라이히가 쓰게 웃으며 제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래, 이 몸은 패배자지. '아직은' 지도자의 자격을 갖춘 자네와 달리."
"……."
도발하듯 이어지는 말에 침묵으로 응대하는 알랭.
라이히가 그 모습을 눈에 새긴 채 이전의 질문을 번복하였다.
"제 1황태자. 자네쯤 되는 자가 어떤 이유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일개 전범을 찾아온 거지?"
상대는 통일대륙의 황태자이자, 머지않아 제국을 이어받을 사람.
누가 보더라도 승리자인 그가 실패한 반란자에게 묻고자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 * *
알랙산드로스 테라스.
머지않아 차기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이 예정된 그의 소소한 취미는, 제 정체를 숨긴 채 은밀히 제국을 시찰하며 다니는 것이었다.
황실 내에서는 국가의 정세를 모두 살필 수 없는 법.
그러니 제 눈을 통해 직접 다스리고자 하는 땅을 살피는 것 역시, 군주 된 자에게 있어선 당연한 소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중이여, 계몽하라!!'
하지만 근래 변경을 누볐을 때 마주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한 영지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그 가문을 상징하는 모든 것이 불태워지는 광경…… 그건 결코 반란군에 의한 것이라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등을 떠밀어준 자가 있었을지언정, 그 난동을 일으켰던 건 엄연히 그 영지에 자리했던 영지민들이었으니.
'그대들은 왜 이 어리석은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인가?'
반대로 스스로의 의지라곤 하나 그들을 선동한 자는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영지의 치안 체제를 붕괴시키고, 그 땅의 주인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민중의 사이에 던져버렸던 자가.
'그저 태어나기를 제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제국의 모든 방침을 잠자코 순응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대들도 이젠 알 것이다. 그렇게 순리라고만 여겨왔던 흐름을 따른 이들의 최후가 어땠는지를!'
그는 말했다.
자신들을 착취한 지도층에 대한 분노는 결코 틀리지 않았고, 그를 제 손으로 처벌하고자 용기를 발휘한 건 분명 옳은 일이었다고.
'그대들은 언제나 말했다. 어째서 병자들이 늘어나고, 병자들이 죽어나가는 현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지를.'
당시 영지에 염료공장이 세워진 후에 일어난 노동자들의 돌연사 사태.
그에 대해 자세한 인과는 몰라도 분명 그들의 죽음이 염료와 관계가 있으리라…….
그것을 거론했음에도 영주는 그 염료를 만드는 대로 상회에서 사들이니, 상인들과 결탁하여 그 염료의 생산에만 미친 듯이 몰두하기에 이르렀다.
'제 목숨이 걸린 일에 위기감을 느꼈음에도, 정작 그 진상의 규명을 바란 이들은 반동분자로 낙인찍히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지.'
'그리고 그대들을 바보 취급하듯, 기적의 힘으로 그 재액을 버텨낼 수 있다는 입 발린 말만을 던지며 이제까지의 방식을 고집할 뿐이었다!'
설령 그들이 갈망하는 물건에 독이 숨겨져 있을지언정.
그로 인한 고통마저 앗아가 줄 힘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하지만 결과는 어떠했는가? 신성력이란 힘을 정녕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누릴 수 있었는가?'
'그 힘을 다루는 데에만 해도 막대한 헌금을 거두어들이니, 결국 기적이란 가진 자들의 전유물로 전락할 뿐이었지.'
그런 부패한 이들을 선별하고자 로열 나이츠라는 직책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 또한 결국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제도를 고스란히 이어온 것에 불과할 뿐이다.
소수의 정예만을 고집하는 낡은 체제만으론, 이 넓은 땅에 자리한 모든 부정을 파헤칠 순 없을 터다.
'이 빛을 보아라.'
그러한 체제에 고통 받는 피해자들의 앞에서, 선동가는 더없이 밝은 빛을 품은 십자가를 내세우며 외쳤다.
'빛이란 결코 가진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무시해 온 우리들 역시도 이와 같은 힘을 손에 넣을 권리가 존재한단 말이다!'
이제껏 기득권의 전유물이라고만 여겨왔던 것을 자신들 역시사용할 수 있다.
그 상징과도 같은 물건은, 그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촉매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깨달아라, 민중이여. 이 나라의 지도층이 부패했다는 걸. 계몽하라, 민중이여! 그들이 말하는 기적이란 허울에 불과하다는 걸!'
'그리고 기억하라, 그대들을 이곳까지 이끌어온 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가르쳐 준 선동가가, 이내 제 위상을 드높이듯 그들의 앞에서 힘껏 외쳤다.
'나의 이름은 게슈츠 라이히. 이 제국을 무너트린 후 이상국가를 세울……. 위대한 존재들의 의지를 계승한 자다!!'
그러한 연설의 너머에서 돌아오는 환호성과 열광.
그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대중은, 부패한 영주를 제 손으로 처벌한 것이야말로 진정 정의의 실현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훗날에 알게 된 바 그러한 광경은 결코 한 영지에서 국한된 게 아니었다.
독을 품은 염료란 제국 전체에 비하면 '극히 사소한 문제' 중 하나에 불과할 뿐.
그렇게 부패한 지도층에 대한 반발심을 가진 민중은 하나 같이 폭동을 일으키며, 변경지대에 자리한 영지들을 빠른 속도로 전복시켜가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러한 현장에서 폭도들을 이끄는 이들은, 예외 없이 '라이히'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으니…….
* * *
"라이히라는 건 개인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이미 몰락한 지도자의 이름이 어떻게 민중을 이끄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
그 물음에 대한 답에 알랭이 의문을 표하며 그에게 되물었다.
"혈통이나 집단 역시 마찬가지지. 그 이름은 일종의 사상을 지칭하는 말이니까."
"……사상?"
"모든 민중은 평등하며, 그 평등을 위해서 민중은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 사상을 이어받은 자라면 누구라도 '라이히'가 될 수 있다는 거지."
혈통도, 계승도 아닌 사상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의의.
그로부터 답을 찾아낸 알랭이, 이제껏 제국 곳곳을 시찰하며 느낀 바를 입 밖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사회주의로군."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나?"
"나쁘다기 보단 도태된 사상이지. 이 대륙이 통일되기 전에나 지향되었던……."
하지만 그것을 지향한 나라들은 결국 멸망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고, 지금에 와서 그 사상을 구현해야 한다는 생각 따윈 추호도 하지 않는다.
민중이란 오롯이 사회만을 위해 존재한다니.
황실이 지도층으로 군림한 시대를 제외하더라도, 그런 사상이 제대로 된 세상을 이끌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제국의 주인이 될 자가 할 말은 아니라 생각한다만."
그럼에도 그 당연한 사실에 라이히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일 뿐.
이어지는 말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제1 황태자. 정해진 레일을 거닌 삶을 살아온 자네라면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겠지. 나라란 오롯이 '소수의 지도계층'을 통해 이끌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고."
인간은 평등하지 않고, 그 우열은 천성에서부터 많은 부분이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우월한 피를 가진 이들의 피를 계승하며,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를 끊임없이 배출하는 것.
그것이 '왕정국가이자 귀족사회(엘리트 우월주의)'에선 당연시 여겨지는 사상이었다.
"그런 지도 체제를 결성한 건 제국도 마찬가지인 것을, 어째서 이 제국은 굳이 제 권위의 일부를 교단과 공유하려 드는 거지?"
"……."
침묵하는 알랭.
라이히가 그를 조롱하듯 조소를 그리며, 제 물음에 대한 답을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다.
"간단한 이유지. 대륙의 통일에 성공했다 한들, 이 대륙을 황실이라는 소수의 지도층만으로 이끌기엔 너무나도 거대하니……."
'그 많은 신도들이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성경에서도 나오는 구절대로, 교단에서 중시하는 자비와 박애 역시 그 근간은 공유와 공존에서 비롯된 것.
종교를 중심으로 한 나라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의 양상을 띌 수밖에 없으며, 이 나라는 그런 식으로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회의 결속을 강조해온 곳이었다.
그 후계자가 된 자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라이히)을 조롱하는 것이 어찌 우습지 않고 배기겠는가?
"하지만 결국엔 종교 역시도 정치에 쓰기엔 불완전한 수단이지. 태초의 땅을 빗대어 말하는 영원한 낙원 역시도, 결국에는 이상론에 불과할 뿐이니까."
그래, 이 제국은 너무나도 오랜 시간 동안 평화에 찌들어 있었다.
외세가 없다는 이유로 하위 지도자들이 가진 전력마저 최소화시켜 반란의 불씨를 막고, 종교에 대한 결속만이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 주장하며 그 외의 의견은 무시하길 반복하며.
그로 인해 생긴 자잘한 문제를 '시련'이란 단어로, 죽음에 대한 공포조차 천당의 존재를 긍정하는 데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이단이요 저주라 치부하며 그들을 배척하기에 급급하니…….
"그런 체제에 불만을 가진 이들을 억압하면 당장은 안정을 이룰 수 있겠다만 글쎄……. 자네가 보았던 제국은 그런 억압을 완전히 수행했었나?"
평화의 시대만이 200년이 넘게 이어졌다지만, 그 억압이란 것도 결국엔 현재에 발생한 문제를 뒤로 미루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완벽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잔재는 쌓일 것이고, 그렇게 쌓인 잔재를 무너트려도 더욱 큰 산이 만들어질 뿐.
그 위험성을 인지하고 억누르고자 하기엔 이 대륙은 너무나도 넓지만, 권력의 독점이란 이유로 황실을 따르는 지도자들에게서도 너무나도 많은 칼과 권리를 앗아갔다.
그 빈자리를 신앙에 의한 결속으로 채운다?
그 신앙조차 연기할 수 있는 수단이 드러났는데, 어찌 그런 것에 의존할 수 있단 말인가?
"반면 사상은 종교보다 민중의 결속을 다지기에 좋은 수단이지. 그 목적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상이라 부를지언정, 그 이상 자체는 추상이 아닌 현실에 기인한 거니까."
인간이란 결국 한 치 앞의 미래를 챙기기도 벅찬 존재.
그런 이들이 상정할 목적이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 아닌, 제 손으로 직접 구축할 수 있는 사회가 더욱이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자는 200년간 전승되어오고, 끝내 제 대에 그 사상을 퍼트리는 데에 성공한 남자.
그에 대한 자각은, 이 순간 유리막으로 격리된 승자와 패자의 관계를 역전시키기에 이르렀다.
"침몰해가는 배에 탑승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는 법이지. 제 1황태자, 이제라도 황실을 버리고 우리와 합류하는 건……."
-쿠웅!
그대로 유리창을 후려치는 알랭의 주먹.
피부가 찢어져 그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로부터 비롯된 붉은 빛에 물들어진 얼굴엔 조소만이 그려질 뿐이었다.
"이런, 너무 자극했나?"
"……듣고 싶은 말은 충분히 들었으니 이만 실례하지."
피가 묻은 손을 거두며 자리에서 등을 돌리는 알랭.
"데리고 가라."
그 명령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옥졸들이 라이히의 몸을 구속하고, 그를 면회실의 밖으로 데려가기 시작하였다.
라이히는 별 다른 저항 없이 그들을 따라나설 뿐.
그 발걸음엔 미련이라 할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한순간만은 앞으로 발을 내딛기를 주저하게 되었다.
순간 저항을 하는 게 아닌가 하여 창대를 고쳐 쥐는 옥졸들.
하지만 정작 멈춰선 라이히에겐 저항의 의사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 전란에서 추락한 비운의 군주가 한 명 더 있었군."
그저 지나가는 길에 맞닥트린,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를 향해 연민을 토해내려는 것뿐.
"질리언 라인하르트. 충성을 맹세했던 나라에 배신당한 기분은 어떠신가?"
"……."
옥 너머에는 고요함만이 되돌아올 뿐.
그를 마주하며 피식, 웃음을 터트린 라이히가 멈추었던 발걸음을 마저 옮겨갔다.
"그래도 자네는 나를 마냥 조롱하지 않았지. 그 호의를 보아서, 모쪼록 이후에 펼쳐질 시대에 그대의 바람이 조금이나마 이루어지길 빌어주겠다."
결국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동정이다.
이제 곧 처할 운명을 예견했기에 더욱이.
"죄수 라이히. 지금부터 그대의 사형식을 거행하도록 하겠다."
끝내 들어서게 된 곳은 감옥의 밖.
우뚝 솟아 있는 벽에 둘러쳐진 장소에 뚫린 곳은 하늘이 보란 듯 보이는 천장뿐이며, 그 야외에는 교수대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집단을 이끌었던 수장의 처형식이라기엔 너무나도 조촐하기 그지없는 처형장.
자신의 포박 여부와 상관없이 날뛰는 반란세력을 보고, 더 이상 살려둘 이유가 없다 판단하여 집행을 서두르려는 것이다.
그래, 본보기의 의미조차도 되지 않는 처형식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게 무슨 상관일까?'
이미 라이히라는 이름은 제국 전체에 퍼지며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고, 자신이 아니더라도 선조들의 이상을 이뤄줄 자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참으로……."
태어나길 반란군으로 태어나, 정해진 레일을 따라 나아갈 뿐이었던 삶.
하지만 그 끝에 교수대로 나아가는 발걸음엔, 한 점의 후회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죽기 딱 좋은 날이로구나."
천당을 긍정하지 않아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게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반란자는, 이 나라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