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220화 (220/255)

의무병의 환생 220화

[외전-테라스 내전(2)]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겨울이 다가옴을 알려주듯 차가운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

'세실리아.'

그 한기가 창문을 타고 전해져오던 때, 이 땅의 주인이자 제 아비 된 자가 자신의 이름을 무거운 목소리로 불러왔다.

'너는, 이 아비가 잘못된 길을 거닐고 있다 생각하느냐?'

잘못된 길이라니,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그 날의 재판 이후 교단과 척을 지게 된 것?

영지를 관리하는 데에 써야 할 세금으로 사병의 양산에 힘을 썼던 것?

그것도 아니면……. 황실에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 계획'을 추진했던 것?

'……그것이 아버님의 뜻이라면 따를 뿐입니다.'

세실은 그저 대답할 뿐이었다.

이 땅의 지도자는 다름 아닌 제 아비이니,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엔 감히 자신이 간섭해선 안 될 일이라고.

'가주가 아닌 아버지로서의 결정을 말하는 거다.'

하지만 그 역시 가주이기 이전엔 한 명의 인간이자, 한 딸의 아버지가 되는 자였다.

이른 시기에 병으로 아내를 잃어, 홀로 남게 된 딸에게 많은 애정을 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사람.

'세실, 너는 이 제국이 원망스럽지 않느냐?'

그런 입장만을 본다면 제 아내와 더불어 제 딸마저 저주받은 존재라 취급한, 이 제국은 원망스럽기 그지없는 나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증오 역시 전체에 비하면 극히 사소한 문제.

아무리 숨기고 억눌러도 잔재는 남는 법이며, 이 시대의 사람들은 그 잔재를 너무나도 많이 받아들인 상태였다.

'라인하르트 공작은 부름에 응하시오!!'

그에 대한 대응을 제 나름대로 준비했건만. 이 나라는 그에 대한 존중조차도 없이 집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거야 이미 예상했던 일.

그렇기에 라인하르트 공작은 제 성에 찾아온 자에게 겁을 먹지 않고, 의연한 태도를 취하며 그를 마주하게 되었다.

'……알베르트 공자.'

'지금은 공작입니다.'

알베르트 키르슈타인.

병든 아비를 대신하여 새로이 키르슈타인을 이어받은 청년.

가주의 자리에 오른 시기는 20여 년 전의 자신과 비슷한 나이일까?

'먼 길을 오셨으니 차라도 한 잔 내어드리도록 하죠.'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지금 이곳에 온 건 손님이 아닌, 황명을 수행하는 집행자로서 온 거니까요.'

그 주변에 자리한 병력은 키르슈타인을 보조하는 집행관들.

두터운 갑옷에서 오는 풍채와 사슬과 이어진 도끼창은, 라인하르트를 따르는 기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위협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대동한 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

그렇게나 키르슈타인 공작은 제 앞에 있는 자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죠. 라인하르트 공작, 지금 당신에겐 반란 의혹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시대에는 군대란 도리어 혼란과 자원의 낭비만을 야기할 뿐.

블레이즈처럼 특수한 이유가 없다면 모든 귀족들은 최소한의 치안유지를 제외하고, 황실의 허락 없이 군사권을 확장해선 안 된다는 법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라인하르트는 지난 8년 간 사병의 양산에 대대적인 투자를 벌여온 상태.

이제까진 공작가의 위상과 이런저런 명분을 대며 그를 묵인해 주었지만, 반란군들이 변경을 기점으로 기승을 부리는 현재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해체시켰습니다.'

'……해체?'

'영지를 지킬 최소한의 전력을 제외하곤, 훈련시켰던 병력을 모두 해체시켰다 말씀드렸습니다. 지금쯤이면 모두가 이 영지를 벗어나 제 길을 찾으러 갔겠죠.'

'…….'

질리언의 말에 눈을 꿈뻑이는 알베르트.

하지만 질리언은 여전히 의연함을 잃지 않고 그의 반응을 기다릴 뿐이었다.

반란군들이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반란을 꾸미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되는 자.

그런 마당에 8년 가까이 길들였던 군대를 해체해 이 영지 밖으로 뿔뿔이 내쫓았다는 말을 이 젊은 지도자가 어찌 받아들일지.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이게 당연한 반응이지.

질리언이 쓰게 웃으며 마저 대답했다.

'믿건 말건 그건 공작님의 자유겠지요.'

'지금 이곳에 찾아온 건 비단 저의 의지만이 아닙니다. 엄연히 황명으로 온 것이니 당신을 구속하는 것도…….'

'그 말씀대로, 폐하께서 지시하신 일이라면 이 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란 그다지 큰 의미를 가지지 않겠지요.'

그리 말하곤 스윽 손을 내미는 라인하르트 공작.

그 손은 수갑을 쥐고 서 있는 집행관에게 내세워져 있었다.

'데려가시지요.'

조사도, 심문도, 처분도 처벌도……. 그 모든 것은 적어도 이 영지 밖으로 나가서 이루어질 일이리라.

그에 알베르트가 욱한 심정에 뭐라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며 집행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공작의 양손에 수갑이 채워진 순간.

'아버지.'

비가 내리는 정원에 발을 들인 자신의 딸.

제 아비가 구속되는 순간에도 검을 뽑지 않는 것이, 아비이자 가문의 가주로서 참으로 기쁘기 그지없게 느껴졌다.

'세실.'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일까.

잠시 발걸음을 멈춘 그가, 제 머리를 적시며 흐르는 빗물을 삼키며 냉정을 찾아갔다.

'내가 없는 동안 가문을 잘 부탁하마.'

그 말을 끝으로 아비는 영지를 벗어나게 되었고, 현재엔 조사대상자란 신분으로 키르슈타인의 감옥에 투옥된 상태.

심문에 대한 비협조적인 태도에 해체된 병력의 행방 조사 등등, 따져야 할 부분들이 많기에 이렇다 할 처분 없이 지금까지도 구속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날과 마찬가지로 내리는 비가, 서서히 눈으로 바뀌어가는 날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도착했습니다, 공녀님."

젖어있는 길목을 누비는 마차가 멈춰서고, 이윽고 우산을 쥔 사용인이 쏟아져 내리는 눈을 막아내며 세실을 맞이해주었다.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선 순간 맞이하게 된 건 거대한 성벽.

그리고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두 명의 장성.

"이름과 신분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제식 군복을 걸친 가면의 사내들은 황실을 수호하는 '황도군'이라 부르는 이들.

세실 역시 한때 그들에게 신세를 졌던 바가 있던 몸이었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한때로 그칠 뿐이었다.

"세실리아 라인하르트."

곧 그녀가 긴장을 추스르며 그들을 향해 신분을 얘기했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현 가주, 질리언 라인하르트 공작 전하님의 대리로써 예술제에 출두하였습니다."

이내 발을 들이게 된 곳은 제도 아스토라의 황성.

황실의 본거지이자, 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사교회가 열리는 장소였다.

* * *

예술제.

황실에서 직접 개최하는 사교회로, 그 취지는 제국의 각지에 존재하는 문화를 한데 모아 공유하는 데에 존재하고 있었다.

문화의 교류는 그 자체로 좋은 사교의 수단이 되어주는 법.

하물며 일부 전시품은 귀족 뿐 아니라 평민들에게까지 관람이 허락되는 만큼, 그 인지도와 위상을 높이기엔 가장 좋은 수단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라인하르트 가문은 그 주인이 된 자가 구속되어, 이 중대한 행사에 작품을 출품하지 못한 상태였으니…….

"세실리아 공녀님이십니까?"

그럼에도 가문의 일원들은 예술제에 참여할 권리와 책임이 있는 상태.

그 대상이 계승권을 쥐었다면 만인의 관심이 잇따르는 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같이 이곳을 돌아보시겠습니까?"

"아뇨, 괜찮다면 저와……."

사방에서 몰려드는 동행요구.

이 행사의 본질이 사교회의 일종임을 생각하면, 지금의 제안은 사실상 구혼의 청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미성년부터 혼약을 치르는 귀족사회에서 아직까지도 뚜렷한 상대를 찾지 못한 공작가의 숙녀라니.

누구라도 한 번쯤 관심을 가져볼 법 한 상대가 아니겠는가?

"죄송합니다. 공교롭게도 이번 사교회에서는 가급적 혼자 다니고자 하기에……."

"푸핫!"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려는 순간 돌연히 들려오는 웃음소리.

세실이 흠칫 놀라며 소리가 들려온 곳을 슬쩍 돌아보았다.

예술품이 가득한 홀의 중심을 또각또각, 선명한 구둣소리가 날 정도로 당당히 거닐고 있는 화려한 복장의 귀족 여인.

메르세데스 가문의 에리아 후작 영애였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웃음이 나와 버렸군요. 세실 공녀님의 사정이 너무 딱하기에 그만……."

아니, 이제는 영애가 아닌 안주인이라 불러야 할까.

하지만 아무리 영애의 신분을 벗어났다 한들 공작가보단 격이 낮은 가문의 일원.

절대적인 신분의 차이가 분명 존재함에도, 정작 그녀의 태도엔 세실을 향한 정중함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세실이 내색하지 않고 되물었다.

"딱하다니, 제가 말인가요?"

"그야 그럴 수밖에 없지요. 가장 꽃다운 시기임에도 아직까지도 반려를 들이지 않으셨으니……."

팔짱을 끼며 턱을 치켜세우는 모습은 오만함 그 자체.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녀의 태도에 지적을 하진 않았다.

당연한 것이다.

공작가에 소속되었다곤 하지만, 그 가주가 구속되어 있다는 소식은 이미 제국 전체에 널리 퍼져있는 상태였으니까.

예부터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긴 입장에서 기회라 여기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건 가문의 방침을 따른 결과일 뿐입니다."

"네~ 혼약결투 말이죠? 그에 대해서는 저도 뭐라고 할 의향은 없어요."

가문의 규율이나 방식을 두고 뭐라 왈가왈부할 순 없는 노릇.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사교의 장으로, 라인하르트와 같은 검술가만을 위한 장소라고는 할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공녀님께선 뭐랄까…….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자신이 귀족영애라는 자각이 없으신 것 같더군요. 복장부터가 그래서야 다른 분들에겐 본보기가 되지 않을 텐데 말이죠."

화려한 장식과 드레스로 치장한 에리아와 달리, 현 세실의 복장은 남성이나 입을 법한 양복에 가까운 것이었다.

각지고 딱딱하기론 황도군조차 저리가라 할 수준.

그 또한 라인하르트 가문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통복이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주의 자리'에 앉은 자가 입을 옷이다.

"아아~ 그러고 보면 라인하르트 가문의 가주님께서 그런 상황에 처하셨으니, 그 자리를 대신하고자 하는 건 이해를 해드려야겠네요."

웅성웅성.

주변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이 거세져 가는 가운데, 에리아가 부채로 감춘 입가에 더욱이 짙은 미소를 그려갔다.

시시한 도발.

하지만 격이 낮은 가문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만으로, 세실은 자신이 속한 가문의 입지가 상당히 위태로워졌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이미 각오한 일이야.'

가주가 없다 한들 엄연히 라인하르트의 긍지를 가진 몸.

이런 처사 역시 이곳까지 오기 전에 숱하게 각오했던 바다.

"저는……."

"실례하겠습니다."

갈등 끝에 내려진 결론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난입해 오고, 곧 에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불쾌감을 느끼며 표정을 구기는 에리아.

하지만 곧 나타난 이의 모습을 본 순간, 그녀를 포함한 주변인들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그리고 놀란 건 세실 역시 마찬가지.

"당신은……?"

"예전 사교회에서 마주한 적이 있었지요?"

당시에는 가문의 후계자가 아닌 일개 일원으로서.

하지만 현재 그의 손에 걸린 반지는, 오롯이 공작의 자리에 오른 자만이 착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래, 마치 제 아비처럼.

"저의 이름은 아이작 아인츠바이. 새로이 아인츠바이 가문을 이어받게 된 현 아인츠바이의 가주된 몸입니다."

단정하고 기품이 있는 복장과 위엄이 넘치는 눈빛.

그러한 존재감에 압도된 듯, 에리아를 포함한 모든 귀족들이 숨을 죽인 채로 아이작을 응시하였다.

하지만 정작 아이작의 관심이 향해진 곳은 다름 아닌 세실이었으니.

"괜찮다면 재회를 축복하는 기념에서, 저와 함께 이 예술제에서의 시간을 보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제까지 제 주변을 둘러쳤던 귀족들과 같은 멘트임에도, 그에 담겨있는 무게는 남다르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세실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맞잡아주었다.

"예술제에서 아인츠바이의 주인이 된 분께서 동행을 요청해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쪽으로……."

이내 세실과 함께 자리를 벗어나는 아이작.

그렇게 자리를 이탈해 사람이 없는 복도에 들어섰을 무렵, 세실이 아이작을 향해 정중히 감사인사를 전하였다.

"신세를 졌네요."

"별말씀을요. 오히려 메르세데스의 안주인 분께서 너무 과하다 생각했습니다."

스윽, 자신이 거닐어온 길을 돌아보는 아이작.

"아무리 가문에 불온한 일이 있었다곤 하지만, 저런 태도를 묵인한다면…… 위계질서가 크게 무너져 내리겠지요."

고작 한 단계 위라고 하나 후작과 공작가문의 차이란 터무니없는 법.

설령 그 가문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 한들, 대외적으로는 존중과 존경으로 대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인 법이다.

그런 범절을 중시하는 자로써 껄끄럽게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공작님께선 괜찮으신가요?"

하지만 그런 불미스러운 소문에 휩쓸리는 건 비단 라인하르트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아인츠바이 역시도, 1년 전엔 제 가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었으니까.

"이미 각오는 다진 상태입니다."

하지만 제국을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 중 두 개가 무너져 내리다니.

지금과 같은 시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지금과 같은 때에 저 역시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더 이상 작위라는 것이 무의미하게 되겠지요."

그에 대한 책임이 제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지만, 그 또한 제 앞에 있는 여인이 입은 상처에 비할 바는 못 될 것이다.

"……라인하르트 공작님의 일은 유감입니다."

"괜찮아요."

뒤늦은 사과에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 세실.

단순히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다. 그저 가주의 부재로 인한 불온한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아서일 뿐.

"저는 아버지의 선택을 존중하고 있으니까요. 단 한 번도, 아버지께서 틀린 선택을 했다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그래, 이 순간에도 그를 믿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그런 강직한 인내를 발휘하는 여인을 응시하는 아이작의 눈에, 차차 애틋함이 어려가기 시작했다.

그건 제 앞에 있는 여인에게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사교회에서 세실 아가씨를 마주하게 되면 한 가지 여쭙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가문의 가주이자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 대 사람으로서.

"혹시 셰인이라는 이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자신들의 삶에 큰 반향을 만들어준 인물을 만남으로써.

"……셰인, 말씀인가요?"

"기억하고 계시나보군요."

그녀의 반응에 아이작이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줄곧 연이 없던 두 사람의 사이에, 한 인물을 통한 연결고리가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 * *

그리고 같은 시각.

"미겔 단장님. 슬슬 도착입니다."

돌연히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마차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남자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하품을 내뱉었다.

미겔 세르반테스.

그러한 이름을 가진 남자가 제 턱에 자라난 수염을 쓰다듬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벌써 도착이면 좀 곤란한데 말이죠, 잠시 수염을 깎을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만……."

"준비시간은 지금까지 충분히 주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당신을 고용한 제 입장이 곤란해집니다만……."

마차의 천을 걷어내며 난입한 단안경의 여인.

희미한 금색을 띠고 있는 머리카락 밑으로 나타난 삐딱한 눈초리에, 미겔이 애매히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좀 봐주시죠. 고용주 아가씨~ 공녀님께서 추천해주신 책을 안 읽을 수도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중요한 내용이라 한 번만 읽고 팽!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읽고 있는 책의 표지를 대놓고 드러내는 미겔.

그 앞에 적힌 '구급법'이란 글자를 응시하던 단안경의 여인이 뚱한 표정을 짓다, 어쩔 수 없이 납득하듯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사람의 목숨이 달린 기술을 익히는 걸 어찌 대충 넘길 수 있을까?

"채비가 끝나는 대로 나와 주시죠."

"네이~ 의뢰주의 말은 바로 따라야지요~"

이내 손에 쥔 책을 내던지며 마차 밖으로 빠져나오는 미겔.

이후 마주하게 된 것은 숲길의 한복판에 주차된 마차들과, 그 앞에 자리한 20여 명 남짓의 무장한 단원들이었다.

"그럼 다들 준비하자고."

미겔의 지시에 준비된 말의 안장에 오르는 단원들.

그중 부관을 맡은 단원이 깃이 달린 창대를 들어 올리며 미겔에게 물었다.

"깃발은 어떻게 하죠?"

"당연히 들어야지."

그 지시와 함게 탑승한 말에 하나 둘 씩 깃대를 매다는 단원들.

그 안에 새겨진 것은 검을 물고 있는 사자의 얼굴이 그려진 마크…….

라인하르트 공작가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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