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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222화 (222/255)

의무병의 환생 222화

[외전-테라스 내전(3)]

"보, 보급품 거래……?"

"지역의 특성상 보급은 중심지보단 변경을 기점으로 이루어졌겠죠. 하지만 이 일대의 영지는 대부분 함락되었으니, 당장은 보급을 확보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으신 상태겠지요?"

하나하나가 전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맞는 말.

그런 만큼 영지를 지켜낸다 하더라도 보급로를 어찌 확보할지 고민해야 하는 참에, 그 점을 염두에 둔 골드리안이 이 영지까지 이어진 보급로를 스스로 개척해낸 것이다.

"식량과 의료품이라면 다수 구비해 두었으니 본대에서의 보급이 올 때까진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구매가 여의치 않는다면 빚이 되겠지만……. 당장을 버티는 것을 생각하면 그 또한 싼값에 속하겠죠."

아니, 예산의 경우 군사비를 요청하면 충당할 수 있을 테니 문제가 되진 않는다.

당장 신경 쓰이는 건 하나.

"설마, 골드리안에서 라인하르트의 군대를 고용했다는 것입니까?"

"쉿."

뒤늦은 추측에 미겔이 제 입가에 손가락을 올리며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곳에 있는 건 그저 공작가에서 쫓겨나 실업자가 된 나머지, 용병일이라도 하며 밥벌이를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골드리안은 그런 저희들을 '우연히' 고용했을 뿐이죠."

'해체된 군대를 용병으로!'

그 깨달음과 함께 실버레이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래, 이 제국은 이제까지 외세의 침략이 전무했던 나라.

지도층의 반란을 방지하고자 군사권의 취급을 엄중히 관리하고 있으며, 그러한 체제는 지금과 같은 내란에서도 변치 않고 이어지는 상태였다.

경솔히 증원을 보낸 영지가 독립을 선언해 연합군에 합류한 적도 있는 만큼, 그 취급은 더욱 엄중하고 신중히 이루어질 필요가 있을 터.

하지만 용병의 형태라면 그런 절차에 구애되지 않으니, 영주의 재량만 받쳐준다면 기용하는 데엔 어느 정도 자유가 보장되게 된다.

'뭣보다 라인하르트 가문은 이 시대까지 실전을 염두에 둔 비전과 병법을 계승해 온 가문……. 그를 계승한 기사들을 각 전장에 소수만 파견한다 해도 효율은 높아질 거다.'

그 혜안에 감탄이 절로 나왔지만,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의문 역시 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용병의 고용이라 한들 라인하르트가 해체시킨 군대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은 편.

그들을 고용하는 데에도 상당한 예산이 들어가는 만큼, 골드리안 측에서도 적지 않은 부담을 짊어질 것이 분명하다.

'보급을 준비한 것도 그렇고, 골드리안과 라인하르트가 사전에 합의를 봤던 것이었나?'

그에 대해 질문을 하려는 것도 잠시.

골드리안의 대표인 아드리아나가 실버레이트의 곁을 벗어나, 곧 쓰러진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부상자들이 꽤 많군요. 바로 치료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치료라니……."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리는 실버레이트 백작.

이 제국의 상식선에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자네, 혹시 성직자인 건가?"

"저는 성직자가 아닙니다."

단호한 부정과 함께 그 손에 매어진 붕대가 풀리고, 이윽고 그녀의 양손이 마나로 벼려지기 시작했다.

미겔과 같은 기사에 비해 부족하나, 그 예리함만은 그 어떤 명검보다도 날카롭다.

그리고 그 검이 겨누어질 곳은 그 어떤 전장보다도 치열하다고 할 수 있는 '수술대'라는 이름의 전장.

"그저 기적이 없어도, 사람이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죠."

사람을 살리는 자란 전장의 그 누구보다도 강해야 한다.

그녀는 이 시대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의사의 유일한 제자로서, 그 가르침을 깊게 새겨들은 상태였다.

* * *

그리고 같은 시각, 제도 황성의 예술제가 벌어지는 현장의 중심.

"라인하르트와 아인츠바이. 두 가문의 후계자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옵니다."

세실과 아이작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돌연히 찾아온 누군가가 두 사람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어왔다.

그를 먼저 알아본 것은 다름 아닌 아이작…….

"셰인?"

……이 아닌 세실 쪽.

그 물음과 함께 상대의 몸에서 경련이 일어나는 가운데, 세실이 의아함을 느끼며 제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셰인, 맞나요?"

"……그는 제 동생입니다."

"아, 조, 죄송합니다! 너무 닮아서 그만……."

"크흠."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무마시키는 금발의 남자.

세실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테올린 후작님, 맞으시죠?"

테올린 골드리안.

골드리안의 현 가주된 몸이지만, 위치상 그리 많이 마주한 사람은 아니었다.

귀족 대 귀족으로서 마주한다 하더라도 제 아비와의 만남이었을 테니.

"네, 공녀님과 마지막으로 봤던 건 7년 전이었죠."

그리고 테올린 역시 세실을 직접 마주한 건 과거의 사교회가 유일했었다.

혼약 결투를 선언했던 사교회.

그 날 이후 세실은 검술의 훈련에만 매진하며 모든 사교회를 거부하였고, 당시 테올린 역시 막 가주의 자리에 오른 후엔 이단자를 배출했단 오명을 씻고자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 계기를 마련했던 라인하르트 가문과는 척을 진다 오인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세간의 인식에 불과할 뿐이다.

"아버지에게 얘기는 들었어요."

그래, 모종의 이유로 두 가문은 현재 협력관계에 있는 상태.

그 관계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세실이 불온함을 담아 되물었다.

"일은, 잘되었나요?"

"……용병이란 형태이니 전부를 포용할 순 없었습니다만, 일단 상회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의도대로는 되었다.

그 대답엔 여유라고 할 건 존재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불안함 역시 엿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언제 어느 때에나 자신이 맡은 바 일에 진지하게 임하고, 언제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강구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군요, 이 분이 셰인의….'

그 투철한 모습에 세실이 안도의 미소를 짓는 것도 잠시.

"크흠."

이전까지 함께 했던 동행자가 헛기침을 내뱉어 두 사람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아이작 아인츠바이.

갑작스러운 만남과 대화에 소외감을 느낄 법함에도, 그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굳이 캐묻고자 하지 않았다.

예술제란 일종의 사교의 장이며, 사교에 있어 타인의 관계에 해를 끼치는 건 그 자체로 실례가 되는 일이니.

"두 분께서 쌓인 이야기가 많은 듯하니, 저는 잠시 다른 곳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아, 네. 그럼 나중에……."

이내 아이작이 자리를 벗어난 후, 세실이 테올린과 단둘이 황성의 복도를 거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사라진 후에도 주변의 불미스러운 시선은 꺼지지 않는 상황.

그에 괜히 주눅 들지 않고 걸음걸이를 단정히 하려던 때, 테올린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며 그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곳에 직접 와서 해라."

이후 수군거리는 귀족들에게 다가서며 입을 여는 테올린.

그의 으름장에 놀란 하위귀족가의 일원들이 흠칫, 놀라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 네?"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조차 실례가 되는 행동이란 걸 꼭 말로 해야 하는 것이냐?"

서서히 가느다랗게 뜨여지는 두 눈.

날이 선 감정은 그저 주눅이 들지 않는 것으로 그친 세실과는 비교를 거부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그래, 마치 제 앞에 있는 자들에게 불쾌함을 넘어 '경멸'마저 느낀 것처럼.

"그, 그게……."

그 눈빛에 어쩔 줄 몰라 몸을 떠는 귀족들.

테올린이 그들에게 정이 떨어졌다는 듯 쯧, 혀를 차며 자리에서 등을 돌려버렸다.

이후 침묵이 오가는 현장을 뒤로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그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세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걱정스레 되물었다.

"고, 괜찮으신 건가요?"

"괜찮지 않습니다."

테올린이 세실의 물음에 바로 대답했다.

아직까지도 화가 삭혀지지 않은 듯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이 지나온 자리를 힐끗 쏘아볼 뿐.

"괜찮을 리가 없지요. 아무리 사교회가 소문에 민감한 자리라고는 하지만, 공녀님을 상대로 저런 태도를 보이다니……."

"아뇨, 그게 아니라."

애초에 제 아비의 독단으로 벌어진 일이니 취급이야 이미 각오했던 바.

걱정이 드는 건 그가 속해있는 골드리안 가문이었다.

그들 역시 라인하르트와 아인츠바이와 마찬가지로, 현 제국 귀족들의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가문 중 하나였으니까.

'샬레 그린, 이라고 했었죠. 아버지도 그 녹색 물질에 대해선 일단 경계하라고 하셨고…….'

비록 세실은 그 이유를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제 아비가 경계할 정도라면 분명 민감한 사항일 게 분명할 터.

그런 마당에 테올린이 샬레그린의 통제를 하지 않았다면, 이번 예술제는 모든 곳이 녹색으로 뒤덮였을지도 모른다.

제국에 존재하는 핵심 지도층을 넘어 서민층까지 한데 모이는 장소에 녹색이 창궐하다니…….

'하지만 그걸 막을 수 있는 것도 이번 예술제가 마지막이겠죠.'

그래, 지금 이 순간에도 샬레 그린은 생산되고 있고, 그 매입은 예외 없이 골드리안이 도맡고 있는 상태다.

독점도 예산과 여유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

이 예술제 이후로 무언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는 민중과 지도층의 압박에 의해 줄곧 통제하던 상품을 시장에 퍼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걱정을 짐작한 테올린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처럼 귀족의 위엄을 잃지 않은 태도로.

"골드리안은, 그 정도의 일로 무너질 만큼 호락호락한 가문이 아니니까요."

그것만은 분명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라인하르트나 아인츠바이, 키르슈타인처럼 500년 이상 제국을 수호해 오진 않았지만,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 제국의 시장을 책임져온 가문이 아니었던가.

제국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는 시국에도, 그로부터 비롯된 충성심과 자부심은 여전히 변치 않고 유지되는 상태였다.

"오히려 근 몇 년 사이 성가신 일이었다고 한다면……. 그 녀석이 저희 영지에서 일으킨 일이겠지요."

"……네?"

"그러고 보면 공녀님을 만나게 되면 여쭈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만……."

이내 테올린이 이전의 화제를 거두며 세실을 마주했다.

그래, 애초에 가문의 정식 계승자도 아닌 그녀와 정치적인 얘기를 할 수는 없는 법.

사실상 이쪽이야말로 그녀와 나누고 싶은 본제라 할 수 있었다.

"혹시 공녀님께선 그 자식……. 아니, 제 동생의 행방에 대해 무언가 알고 계신 것이 있으십니까?"

그 자식.

결코 자신의 가족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테올린의 말에 눈을 껌뻑인 세실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건, 셰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2년 반입니다."

"……네?"

"그 녀석, 변경으로 여행을 떠난 후 벌써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문에 얼굴도 들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반 년 전까지 아인츠바이에 머물렀다고 하지만, 공작님께서도 아시는 바가 없는 듯하고……."

블레이즈에서 형량을 마치고 돌아온지 3년이 넘어가거늘, 정작 셰인이 골드리안에 머물러 있던 것은 고작 반년 밖에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리 할 일이 있어 변경으로 떠났다곤 하지만, 하다못해 자신의 사정에 대해 설명해 둔 편지 정도는 전해줄 수 있는 법일 터.

하지만 반 년 전을 끝으로 그 행방이 묘연해지다니, 그를 이끌어야 할 사명을 가진 가주로썬 부아가 치밀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직 해야 할 교육들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건만, 아무리 로열나이츠의 자격이 있다곤 해도 여기저기 쏘다니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자칫 일을 그르쳐서 가문에 먹칠을 하기라도 하면…."

셰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가는 테올린.

답지 않게 침착함을 잃고 흥분하는 그를 보던 세실이, 저도 모르게 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말았다.

'걱정해주시는 거군요. 셰인을.'

서자에 이단자, 거기에 전과자에 불과한 자라 해도 돌아갈 장소는 존재하고 있다.

여전히 그를 향한 연모를 품은 자로써 안도를 느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 * *

하지만 반대로 지금의 상황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 역시 존재했으니…….

"전쟁의 영광, 이라는 작품인가."

각 귀족들과 어울리고 다닐 무렵, 아이작은 우연히 한 그림을 바라보는 늙은 여인과 나란히 서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곁에 서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주눅이 드는 노인이었다.

이미 오십의 나이를 넘어 노화가 크게 진행된 몸임에도, 그림을 응시하는 시선에선 희미한 독기가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가증스러운 그림이군."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늙은 여귀족의 말에 의문을 표하는 아이작.

그녀와 달리 아이작은 제 앞에 있는 그림을 굉장히 고평가하고 있었다.

먹구름이 갈라진 하늘 아래에서 비추는 광명, 그 밑에 펼쳐진 전장의 위에서 깃발을 쥐고 군중을 이끄는 기사의 모습.

그림의 기법은 물론 소재도, 심지어 말하고자 하는 이미지도 잘 녹아내려 있다.

누가 보더라도 '영웅'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그림.

변경지대를 기점으로 벌어지는 전쟁의 소식을 접한 귀족들이라면, 누구라도 이 그림을 보며 그곳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갈 것이다.

어디까지나 소식으로만 접한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내가 봐왔던 곳엔 이런 그림으로 그린 듯한 영웅 따윈 존재하지 않았네. 있다고 한다면……. 그건 불모지 위에 남은 패배자에게 주어지는 동정의 흔적일 뿐이겠지."

처절한 함성과 피비린내, 지평선 너머까지 뻗어진 묘비들의 연속…….

그러한 장소에 선 이들의 열망이란 증오와 승리가 아닌, 그저 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향수에 불과한 것이었다.

훈장이란 업적이 아닌 효수된 적의 목을 교환해 거머쥔 상징이며, 명예란 그런 슬픔을 감추기 위한 효율적인 수단일 뿐.

"그래도 예술을 섬기는 가문이라면 눈앞의 환상에 현혹되지 않으리라 여겼건만,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야."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늙은 여인이, 곧 제 옆에 선 아이작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응시하며 툭 내뱉었다.

"아니면 그런 입 발린 말을 입에 담아가면서까지 잊고 싶은 게 있는 건가?"

"……."

침묵하며 제 손에 쥔 반지를 움켜쥐는 아이작.

차마 그녀의 말에 반론하지 못한 건,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이 사실로써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자신이 대피했던 현장에 남았던 건 시체와 시체…….

그리고 자신과 같은 패배자라 부를 이들뿐이었으니.

"그러고 보면 이렇게 직접 마주한 건 처음이로군요."

그에 부족하게나마 공감대를 느낀 아이작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블레이즈 변경백님."

사샤 블레이즈.

이단의 군주라는 이명을 가진 그녀는, 이 제국에서 누구보다도 전쟁을 잘 이해하고 있는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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