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223화
[외전-테라스 내전(5)]
"내가 이 자리에 왜 있는지가 궁금한가?"
블레이즈를 알고 있는 자라면 누구나 느낄 만한 의문이다.
이 제국의 끝단에 위치한…….
제도에서 벌어지는 사교회와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 이곳에 출석한 걸 안다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품을 테니.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아이작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주변을 지나는 이들 중 대다수가 이곳을 응시하는 상태였지만, 그 관심 중 대부분은 공작인 아이작이 아닌 사샤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대부분이 부정적인 분위기를 띠는 상태로.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피 냄새가 나는군.'
'대체 얼마나 되는 사람을 죽인 거지?'
'세금만 축내는 밥버러지.'
'이단의 군주가 왜 이곳에 온 거야? 이 사교회엔 교단 분들도 참석하시거늘…….'
'왜 폐하께선 저런 여자를 살려두고 계신 건지.'
듣는 것만으로도 심기가 불편해지는 조잘거림의 연속.
그럼에도 그 말의 당사자인 사샤의 얼굴에 그려진 건 의연함뿐이었다.
마치 떠들 테면 떠들어봐라, 하고 말하듯이.
"지금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가 바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지."
도리어 그들이 보는 흉으로 제 물음에 대한 답을 대신할 뿐.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 이런 시국일수록 그녀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일 테니.'
그녀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유일하게 군사권을 허락받았던 사람.
필요악의 존재라곤 하나, 지금과 같은 시국엔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자다.
공작인 라인하르트만 하더라도 반란의혹으로 일시적인 구속 명령이 내려졌는데, 그녀라고 하여 그 취급이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황실도 불안한 거겠지. 그 땅에서 벗어나선 안 될 녀석에게 출석을 요구하며 충성의 증명을 필요로 할 정도로."
그에 대한 불쾌감이 느껴질 법함에도, 주변 예술품들을 둘러보는 사샤의 얼굴엔 의연함만이 그려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과분한 자리를 이어받은 아이작과는 달리.
"불쾌하지 않으신 겁니까?"
"불쾌할 게 뭐가 있겠나? 신하된 자가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을."
사샤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래도 정 불편한 점을 들자면 주군이 아닌 가신들이겠지."
"가신들이라면……?"
"지금도 보게나, 신뢰의 요구로 출석을 요구한 자리에서도 서로를 물어뜯는 데에 집중하고 있지 않나?"
자신을 향한 경계심도 결국 표면적인 것일 뿐.
제국 끝자락에 있는 그녀는 제국의 정세에 간섭하지 않으니, 실질적으로 제 입지를 위협하는 건 주변의 다른 귀족들이라 여겨질 것이다.
그렇게 앞에 버젓이 적을 만들고, 그를 향한 적대를 연기하며 내부에 있는 이들을 견제하는 모습……. 전장을 누벼온 그녀에겐 무척이나 익숙히 여겨지는 것이었다.
"내란도, 정치도 마찬가지지. 뚜렷한 적을 두어야만 결속이 이루어진다 믿고 있지만, 그렇다고 결속이란 게 언제나 좋은 것도 아니야. 때로는 집단에 해를 입힐 반동들을 색출할 줄도 알아야만 하는 법이지."
열정적이지만 미련한 아군.
유능하지만 욕심이 많은 간신.
상부에 대한 불만에 대의를 엮으며 항명을 밥 먹듯 행하는 분란종자……
지도자란 그런 아군들을 제 식구마냥 감싸지 않고, 때로는 엄하게 다스리거나 적으로 돌릴 각오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귀족으로서의 정체성이 결여되데, 그들과 같은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사령관의 지론.
아이작과 같은 이들에겐 석연찮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말이기도 했다.
"마치 지금의 제국이 잘못되었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성경에서도 '내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가르치건만.
"잘못된 부분도 포용할 줄 아는 것이 충성이란 것이지."
하지만 그 사랑이란 것도 결국엔 상대를 '원수'라 인지해야만 성립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을 적대하고, 자신이 적대해야 하는 이를 포용하는 데엔 힘이 필요한 법.
그 힘이 부족한 채로 책임지지 못할 것에 손을 뻗는 건 오만조차도 아닌, 아둔함이라 불러 마땅한 것이다.
그 연륜이 돋보이는 말에 감탄을 느꼈지만, 한편으론 그에 상응하는 불안함이 동반되는 것이 느껴졌다.
"노파심에 여쭈어보는 겁니다만…… 변경백님께서도 이번 내란에 가담하실 생각입니까?"
전쟁이 벌어지기 전만 해도 유일하게 군사권을 거머쥐었던 몸.
그런 영지에 존재한 병력을 기용한다면 전쟁에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공교롭게도 그 주축이 되는 건 이제까지 제국에서 이단이라 여겨지는 것이었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면 사회적으로 많은 혼란이 일어날 터.
"시답잖은 걱정이로군."
그런 걱정스러운 물음에 사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코웃음을 터트렸다.
"내 황실의 명령마저 거스를 수 있다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영지를 지키기 위함일 뿐. 그건 이번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일 예정이지."
벽 밖에서부터 들어오는 외세의 침략을 막는다.
내란이 벌어지는 중에도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변치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 * *
"허억……!"
경사진 숲길을 거니는 중에 들려오는 가쁜 숨소리.
그에 선두로 나아가던 미겔과 리나가, 자신들의 뒤를 따르는 이들을 스윽 돌아보았다.
뒤를 따르는 건 영지군에서 파견된 병사들과 미겔의 기사단에서 차출한 다섯 명의 기사. 그리고 중무장을 한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한 귀족…….
뒷머리를 긁적이던 미겔이 그를 향해 조심스레 말했다.
"백작님,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영지에서의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에도 지휘관은 필요할 텐데……."
"그, 그거야 내 아들에게 말해두었으니 괜찮네. 지금은 자네들을 따라나서는 게 더 중요하니……."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펼치며 뒤를 따르는 실버레이트 백작.
이런 산행이 익숙치 않은 나머지 힘이 부친 듯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두 눈엔 독기가 엿보이고 있었다.
"자네들이 중요한 작전을 맡고 있는데, 책임자인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면 더욱이…. 그들을 이끌어야 하는 자가 솔선수범하게 나서며 모범을 보여야 하는 법인 것을……!"
미겔의 기사단이 합류하지 않았다면 붕괴되었을지도 모를 영지다.
그 정도로 전황이 불리한 상황에 약한 모습까지 보인다면, 이후 자신을 신뢰하며 말을 들어줄 이는 아무도 없어질 터.
"그러니 너무 나를 걱정하진 말게나, 내 나이가 있다곤 하지만 아직 팔팔하니……. 우읍!"
"허허, 이거 참 대단하신 분이네."
무리하는 모습이 우스워 보일지언정, 적어도 기사로선 적잖게 감탄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군주란 경솔히 자리에서 내려와선 안 되지만, 지금과 같은 시국에선 솔선수범하게 앞으로 나와 민중을 주도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
'그래, 이 전쟁에서만은 지지해 줘도 되겠지.'
비록 영지에서 쫓겨났다 한들 여전히 그를 섬기고 있는 기사 된 몸.
그런 자신에게서 이만한 평가를 이끌어낸 것만으로도, 지금의 실버레이트의 방침은 성공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을 느끼며 만족감을 표할 무렵, 실버레이트 백작이 부대장인 미겔과 나란히 걷는 리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괜찮다만, 그 쪽의 아가씨께선 괜찮은 겐가?"
그녀는 골드리안의 사용인이자, 현재엔 상회의 대표로써 최전선으로의 보급담당을 맡은 몸.
역할로 치면 지휘관인 자신 못지않은 상태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영지에 머무르길 거부하며 미겔의 부대에 합류를 결정한 상태였다.
"제 한 몸 지킬 정도의 힘은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지금 저희는 최전선의 너머로 향하는 만큼,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동행할 필요가 있겠죠."
성직자들은 지금과 같은 육체적인 활동은 쉬이 행할 수 없는 입장.
그런 상황에 신성력이 아닌 방식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능력을 보유한 그녀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 가장 필요한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거 참 믿음직스럽군. 아직 어린 소녀인데도……."
-콰득!
막 칭찬을 내뱉은 순간 울려 퍼지는 파괴음.
리나가 제 머리 위의 굵직한 나뭇가지를 꺾어 부러트린 것이다.
"죄송합니다. 앞을 가지가 가로막아서 저도 모르게 힘을 주고 말았군요."
"으, 응? 그 가지는 자네의 머리 위쪽에……."
-콰드득!
손아귀에 쥔 가지가 악력에 의해 다시 쪼개진다.
식겁함마저 느껴지는 가운데, 미겔이 실버레이트의 곁으로 다가서며 조심스레 귓속말을 건네었다.
"주의해 주시죠. 제 고용주님께서 그…… 키에 대해선 꽤 민감하거든요."
"주, 주의하도록 하지."
이후에는 그저 침묵한 채 행군이 이어지기만 할 뿐.
그 끝에 산의 중턱에 도착한 부대가 한숨을 돌리는 가운데, 리나가 실버레이트 백작과 미겔을 이끌며 어느 한 곳을 지목하였다.
"도착했습니다. 이제 곧 저희 상회와 협력하신 분께서, 저 선로를 지날 열차를 통해 무기를 조달해 오실 겁니다."
"아아, 그래. 열차를 통해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리나가 지목한 선로를 응시하는 실버레이트 백작.
비록 제 영지를 경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버레이트와 인접한 영지 중 저 선로를 통해 도착할 열차의 정거장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열차를 만들고, 그와 관련된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가문 역시도 어렴풋하게나마 전해 들었으니.
"그, 블러드메리 상회가 골드리안과 협력을 하고 있다는 게 정말인가?"
블러드메리 상회.
수 년 전부터 변경지대의 시장점유율을 독식한 상회의 주인이자, 골드리안의 일원이 안주인으로 자리했다 알려진 가문.
그 점을 생각하면 블러드메리의 출세와 골드리안의 협력 등을 납득할 수 있겠지만, 정작 그 두 사람을 섬겨온 리나의 표정은 그다지 곱지 못한 상태였다.
"글쎄요. 공교롭게도 저는 그분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지라……."
테올린과 에버그린.
적어도 자신이 알기로 두 사람의 관계는 철천지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비유하자면 물과 기름, 원숭이와 개, 그리고 한 남자가 평하기론 박하와 카카오 같은…….
아무튼 절대로 섞일 수도 없고, 섞여서도 안 될 존재.
'하지만 지금은 믿어보는 수밖에 없겠죠.'
비록 무슨 거래가 오갔는지는 사용인의 입장에선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의 협력은 지금과 같은 상황엔 누구라도 긍정적으로 여길 일이었다.
군사권을 엄중히 다스려야 할 제국군은 이번 내란에서도 예산의 분배를 신중히 해야 하는 상황.
그런 만큼 전장의 보급은 상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정작 골드리안은 입장상 군수업에 손을 대기 쉽지 않는 상태였다.
반면 블러드메리는 규모가 크다곤 하나 황실의 영향력이 적은 지역에 자리한 상회.
군수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유가 보장되는 만큼, 그들과 협력한다면 전력의 보강도 더욱 수월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래요, 일단은 당장을 넘기는 데에만 집중하고…….'
-뿌우우~!!
이윽고 산 너머에서부터 들려오는 증기의 배출음.
블러드메리 상회에서 수송한 무기가 보관된 열차가, 막 산등성이를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저 열차는 산맥의 길을 타고, 그 너머에 자리한 '아레이스타 자작령'에 도착하게 될 터.
-쿠과강!!
모두가 그렇게 예상하던 직후, 열차가 오르는 산의 꼭대기가 폭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며 낙석들이 선로의 앞에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산사태?
아니, 산 위에서 퍼지는 흑연은, 지금의 붕괴가 폭약에 의한 것임을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크하하하하!!"
그 뒤를 이어 들려오는 웃음은 이제껏 마주한 반란군들이 내지른다곤 생각할 수 없는 괴상망측한 것.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에 나타난 건, 낙석이 가로막은 열차를 향해 다가서는 붉은 피부의 거한들이었다.
"저, 저 사람들은 뭔가?"
"금지된 약물이라도 복용한 걸까요?"
"아뇨, 야만족들입니다."
실버레이트와 리나의 당혹에 대답을 한 건 미겔 단장.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분명 라인하르트 공작이 직접 교육을 할 때 들어본 바가 있던 이들이었다.
"벽외지역에 상주하는……. 사실상 블레이즈 영지에 거대한 벽이 세워진 이유 중 하나죠."
직접 마주한 경험은 없지만 공작으로부터 받은 교육에서 접해본 바가 있는 상태다.
반란군들은 벽외지역의 세력과 내통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번 전쟁에서도 그들에게 협력을 요청해 용병으로 기용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하지만 그 소식을 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건 침착함 뿐.
어떤 의미에선 총과 폭탄으로 무장한 반란군보다도 더 위험한 적들이라 할 수 있었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있다간 보급을 빼앗길지도 모르네!"
"걱정 마시죠. 백작님. 그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자 저희가 온 거니까."
그래, 염두에 둔 습격자들이 더 위험한 놈들이 된 것에 불과할 뿐.
그 점을 실감한 미겔이 제 검집에 손을 뻗으려는 그 순간.
-투콰앙!!!
지시를 내리려던 함성마저 열차에서 울려 퍼진 굉음에 삼켜지고, 그 직후 날아든 무언가가 하늘에 포물선을 그리다 숲 한가운데에 추락하였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피보라에 멍하니 탄성을 내지르는 원정대원들.
그런 반응을 보인 건 야만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크, 에……?"
열차의 입구에 서 있던 동료 한 명이 무언가에 의해 날아가 쓰러졌다.
그에 위기감을 느끼며 주춤거리는 가운데, 열차의 무너진 문짝 사이로 그림자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감히 벽외지역이란 가혹한 환경에 적응해 온 이들조차 바로 섣불리 다가설 생각을 하지 못하는, 그런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존재가.
"저, 고용주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습니다만……."
그리고 그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다름 아닌 미겔.
그가 안색을 창백히 물들인 채 리나를 향해 힘겨이 물었다.
"호, 혹시 저 열차, 블레이즈를 경유하고 있습니까?"
"네, 에. 일단 경유한다고는 들었습니다만……."
그래, 이단의 영지라 불리는 곳이니 저런 열차가 깔리는 것도 쉽게 받아들여지겠지.
그리고 저 열차에 있는 자가 그곳에서 온 자라면 분명 괜찮으리라.
"아……."
그것을 직감하며 도로 검집에 검을 집어넣는 가운데, 열차에서 빠져나온 여인이 탄성을 흘리며 제 옷을 슬쩍 돌아보았다.
"기껏 새로 장만한 옷이 더러워졌군요."
어여쁜 형태의 시종복이 피와 살점으로 덮여진 건 정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
그런 흉한 몰골에 여인이 보인 반응은 건조함 그 자체였지만, 그 시선은 분명히 제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야만족들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본능적으로 압도당한 채, 감히 열차를 습격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약자들'을 향해.
하지만 그들이 열차의 앞을 가로막은 건 확실하리라.
"곤란하네요. 존이 이 열차는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 강조하셨던지라……."
그 점을 알아차린 여인이 제 치맛자락을 들춰내고, 그 밑에 들어있는 도끼를 제 손에 힘껏 틀어쥐었다.
"손대중은 못 할 것 같은데."
그저 단단할 뿐인 손도끼.
하지만 그녀의 손에 쥐어진 순간, 그 칼날은 이윽고 '단두대'로 승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