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225화 (225/255)

의무병의 환생 225화

[외전-테라스 내전(7)]

그런 막중한 책임에 대한 논의가 최전선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무렵.

"이거, 사교회에 오니 이런 상황도 다 오는군."

예술제가 한창 이어지는 가운데, 그 광장부엔 이제껏 연이 없던 네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는 기회가 마련되게 되었다.

내란을 방지하지 못한 나머지 전쟁의 시발점을 마련한 공작령의 후계자.

유행상품을 통제하여 많은 귀족과 상회로부터 견제를 받는 상회의 주인.

대의를 위해 위법마저 각오하며 구속을 택한 가주의 딸.

그리고 애초에 제국에서 환영받을 수 없는 이단의 군주.

"그 쪽이 골드리안의 주인인가?"

그런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사샤 블레이즈였으며, 그 관심이 향한 곳은 이 중에서 제국 내의 입지가 가장 견고한 사람이었다.

테올린 골드리안.

불명예를 안고 있다고는 하나, 이 중에서 유일하게 제 소신과 자리에 떳떳한 인물.

"제 철 없는 동생이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블레이즈와 블러드메리의 협력관계에 대해선 대강 전해 들었지만, 테올린은 그에 대한 것을 이 자리에서 직접 거론하지 않았다.

일단은 형식상의 인사부터.

귀족간의 대화에선 그런 예의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으니.

"철없는 동생이라, 그러고 보면 자네는 선ㅂ……. 크흠, 그 소년병의 형이 된 자였나?"

헛기침으로 제 말실수를 무마한 사샤.

자신도 나이가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와 닮은꼴에 해당하는 얼굴이 긴장을 완화시켜서일까?

어느 쪽이건 그의 본 정체에 대해선 반드시 함구해야 할 사항이었다.

셰인 골드리안. 그의 본 정체는 결코 이 시대에 드러나선 안 될 것이었으니.

'사샤 블레이즈, 당신이 내 동생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지?'

그래, 어쩔 수 없었다곤 하지만 '그 여자'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반드시 막아야 하리라.

"의외로군. 서자란 대개 귀족사회에선 눈엣가시로 여겨지기 마련이거늘."

"배다른 자식이라 한들 골드리안의 피를 이어받은 녀석입니다. 그에 걸맞는 모습을 보였는지를 우려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죠."

다행히도 테올린은 그의 정체에 대해서 짐작도 못 하고 있는 상태.

그 점이 사샤에겐 위안으로 다가옴과 동시에, 제 앞에 있는 남자의 평가를 높이는 계기를 낳게 되었다.

환영받지 못할 사람마저 환영하는 아량.

모두가 주눅이 들고 보는 제 존재감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속된 곳에 대한 자부심과 충성심도 엿보이는 모습.

이단의 땅을 이끌 자에겐 딱 어울리는 덕목이 아니겠는가?

"내 이번 예술제가 끝이 난 후 본가로 돌아가면 슬슬 은퇴를 준비할 참이라네. 그런 내 뒤를 이어줄 자라 하면 자네와 같은 이들이 좋을 것 같다만……. 내 설마 이곳에 와서 이렇게 아쉬움을 느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군."

"그 평가만은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사샤 나름대로의 평가를 겸허히 수용하는 골드리안.

제국의 상권을 독점한 후작과 군사권을 쥔 변경백의 대화란, 그렇게나 모두의 예상을 깨며 무난하고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반면 그들보다도 위상이 높은 자는 그 곁에 서는 것만으로 주눅이 들기 급급했으니.

"반대로 이쪽에 있는 애송이는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많이 보였는데 말이야."

움찔.

아이작의 몸에서 경련이 일어났지만, 사샤는 제 평가를 무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아무리 급하게 물려받은 자리라고는 하지만 공작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패기도 없고 배짱도 부족하지. 허세를 좀 부릴 줄 알지만 하급자들에게도 꼬박꼬박 존대를 하는 걸 보면 아직도 자기가 공작이라는 자각이 없는 듯한데……."

과거, 블레이즈에 성인식을 치르고자 온 라인하르트의 현 가주도 이 정도로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건만.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공적인 부분만을 따지자면 역시 바람직하다 볼 순 없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건 테올린 역시 실감하는 바.

"감히 말씀드리자면……. 저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테, 테올린 후작님?"

"전하. 저 역시 가문과 상회를 이끄는 몸으로써 책임을 짊어진다는 게 힘겨운 일임은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 부담을 이겨내며 위엄을 보이지 않는다면 저와 같은 하급자들에겐 모범이 되지 않는 법……. 하물며 지금과 같은 시국이라면 더욱이 그 점을 명심해야겠지요."

"폐하께선 현재 몸이 편찮으셔서 요양 중이라고 하셨나? 이번 예술제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신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군. 그랬다면 이 애송이의 한심한 모습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하셨을 테니까."

작위는 몰라도 위상만은 결코 공작에게 꿇리지 않는 후작과 변경백.

두 사람이 양옆에서 퍼붓는 일침에 곤혹을 느낀 아이작이 눈을 굴리다, 이내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세실을 돌아보았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은 애절함이 느껴지는 눈빛.

"저, 저기……!"

그 신호를 보다 못한 세실이 소리를 쳐서 그들의 대화에 난입하였다.

그녀 역시 아이작과 마찬가지로 공작가문에 속해있는 사람.

그런 만큼 지금의 지적은 세실에게도 통용되겠지만, 정작 두 사람이 세실을 대하는 취급은 아이작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계승권을 쥐었다 한들 가주가 될 수 없고, 앞으로도 가주의 자리에 오를 수가 없는 몸이니까.

"잠시 자리를 비우도록 하죠."

"그리하지."

그래, 결코 동생이자 선배가 신경을 쓰는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사샤와 테올린이 아이작을 데리고 자리를 훌쩍 벗어나는 가운데, 홀로 남게 된 세실이 그들이 있는 곳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차마 연기로는 감출 수 없는 아이작의 절망한 얼굴.

'가주라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로군요.'

그를 보며 적잖은 동정이 느껴졌지만, 공교롭게도 그 이상의 공감대를 형성하진 못했다.

그녀가 가진 정체성은 귀족이 아닌 검사에 가까운 것.

평생 검을 연마해 온 그녀에게 있어선 강함만이 전부였고, 하물며 여성의 신분으론 가주의 자리에 오를 수도 없었으니까.

'그래, 애초에 나에겐 지도자의 자리는 어울리지 않겠지.'

이내 세실의 어느 한 곳으로 향해졌다.

황성의 복도에 전시되어있는 그림들 중, 가장 눈에 익어 보이는 그림을 향해.

'어쩌면 나에게 어울리는 곳은 이곳이 아니라…… .'

불모지나 다름없는 땅에 쓰러진 병사의 몸을, 어느 한 병사가 다가와 몸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예술품이 가득한 현장에 그리 많지 않은 '비참함'이 느껴지는 그림.

하지만 빛과 같은 성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음에도, 붕대를 감아주는 손길엔 인간이 인간을 향해 발휘하는 자애가 느껴지고 있었다.

블레이즈에서 지냈던 1년간 숱하게 보았던 광경.

그것을 빌어 전장에서의 삶을 회고하는 것도 잠시.

"이런 걸 보면 이 나라도 변해가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군요."

어느덧 제 옆에 선 자가 내뱉은 말에, 세실의 고개가 자연스레 측면으로 향해졌다.

녹발을 길게 기르고 있는 아름다운 외모의 여인.

그 몸에 두르고 있는 건 신부복으로, 목에 걸린 보석이 박힌 십자목걸이는 그자가 그만한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주교, 그를 넘어선 추기경의 자리에 오른…….

"변하고 있다니, 무엇이 말인가요?"

"인식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 제 앞에 있는 아름다운 사람은 분명 추기경이었다.

주교보다도 높고, 차기 교황 후보 중 한 명으로 추진될 정도의 높이에 오른 인물.

그런 그의 눈에 이 그림은 어떤 식으로 여겨질까?

"본래라면 이곳에 걸려있어야 할 그림은 붕대가 아닌, 신성력을 이용해 병자를 치료하는 그림이어야겠죠. 그 소년병이 오기 전엔 신성력으로 치료를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었으니."

그 소년병.

그것이 제 앞에 있는 추기경이, 붕대를 감는 병사의 그림을 보며 떠올린 것이었다.

'이 사람도…….'

이전에 마주했던 세 사람처럼.

"그러고 보면 이렇게 마주한 건 처음이었던가요?"

그 점을 서서히 깨달아가는 가운데, 추기경이 제 가슴에 손을 올리며 세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반가워요 세실리아 공녀님. 유일교 소속의 신자, 크리스틴이라고 합니다."

추기경 크리스틴.

그것이 제 앞에 있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인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소개였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정말로 매력적인 사람이…….

'……같은 여자?'

아니, 어째서인지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괜스레 위화감이 덮쳐오는 게 느껴졌다.

그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남성과 여성의 몸에도 차이가 있는 건가요?'

그건 제 과거에.

자신이 연모하는 이에게 교육을 받았을 무렵, 전해 들었던 지식을 통해 어렴풋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아무래도 여러모로 역할에 차이가 있다 보니까 구조가 크게 다를 수밖에 없지. 가슴을 지탱하기 위해 갈비뼈나 쇄골이 그에 맞춰 변화할 수밖에 없고……. 하지만 가장 큰 차이가 있는 부분이라 한다면 역시 골반이겠지.'

'골반, 이요?'

'아이를 가지고 낳아야 하니까 변화가 가장 뚜렷하거든. 뼈를 보는 법을 익힌다면, 다른 부분은 몰라도 골반만큼은 육안으로도 구분이 가능할 정도지.'

하물며 검술가라면 뼈와 근육에 대해선 더욱 적극적으로 알아둬야 할 터.

그런 이유로 셰인은 세실에게 뼈에 대한 지식을 틈틈이 주입시켜 주었고, 그로부터 비롯된 식견은 제 앞에 있는 자의 성별을 가늠케 만들어주었다.

"나, 남자……!"

"쉿."

그 지식을 빌어 정체를 눈치 채고 소리를 치려는 순간, 크리스틴이 세실의 입가에 손가락을 올려 그 행동에 제지를 가하였다.

다행히도 주변 사람들은 세실의 말 자체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이 예술제는 교단의 사람들은 물론 평민들까지 참석이 가능할 정도로 자유롭게 열린 장소.

이목을 끌어 모은다 한다면 공작가의 일원과 교단의 권위자가 만난 것을 신기하게 여기는 정도일 뿐.

"제 정체를 알아차리시고 놀라신 건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제 몸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주셨으면 해요. 한창 모두가 즐기는 참에 혼란이 일어나면 공녀님도 곤란하시겠죠?"

"……."

"……보는 눈이 많으니 잠시 자리를 이동하도록 할까요?"

입에서 서서히 손가락을 떼어내는 크리스틴.

이후 그의 자상한 미소를 마주한 세실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 * *

"놀라시는 것도 당연하겠죠. 제 앞의 사람이 성별을 숨기고 있다면, 그 누구라도 공녀님과 같은 반응을 보일 거예요."

황성의 외곽에 자리한 테라스에 도착하고서야 제 정체를 토로하는 크리스틴.

보는 눈이 없다곤 하나, 그 태도엔 한 점의 거리낌 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그건 제 정체를 알아차린 자신이 비밀을 토로하지 않으리란 믿음에서 비롯된 것일까?

"저, 그래도 되는 건가요?"

하지만 비밀이란 공유하는 자가 함구한다 해도, 성직자들에게 있어선 무척이나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권위란 신성력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스스로가 떳떳하지 않다면 빛이란 그 힘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니까.

"교리에선 자신의 태생을 부정해선 안 된다고……. 그렇게 알고 있는데……."

"후훗, 저를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크리스틴이 희미한 미소를 그리고는, 곧 제 손을 들어올리며 힘을 집중하였다.

그 손끝에 어린 것은 분명 빛이라고 부를 힘.

비밀을 간직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신자로써의 자격을 갖추고 있는 상태였다.

"빛이란 언제나 스스로에게 떳떳한 자에게 따르는 법. 외도에 들어선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이 세운 규율에 불과할 뿐이지, 주님을 거슬렀다곤 할 수 없는 일이죠."

교리라는 것도 결국에는 '정석'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까.

그 정석을 벗어난 방식으로 신앙을 각성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권장되지 않는 것이지 불가능하다고 할 순 없는 것이다.

그래, 그 소년병처럼.

그 역시도 이단의 길을 거님에도, 그 끝에 신성력을 거머쥐지 않았던가?

"……왜."

하지만 신성력을 가진 그는 결코 교단에 속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자 하고 있었다.

"왜 그런 식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면서까지 교단에 몸을 담고 계신 건가요?"

그런데 근간을 이단에 둠에도 교단에 몸을 담는다니.

조금이라도 잘못되는 순간 바로 처형당할 정도로 위험한 줄타기가 아닌가?

그 물음에 크리스틴이 세실에게 찬찬히 답을 해주었다.

"시작만은 당신과 같은 이유였죠."

"저와, 같다니……."

"평범한 귀족 아가씨였다면."

살짝 펼쳐진 손이 세실의 짧은 머리로 향해지다, 그 밑으로 서서히 내려가게 되었다.

"머리를 기르고, 몸을 단장하고……. 순결을 중시하는 교단의 사람보다는, 권위와 자산을 갖춘 귀족가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이려 할 테니까요."

군복을 연상케 할 정도로 각지고 딱딱한 옷.

그 또한 귀족의 격식에 걸맞는다곤 하지만, 귀족 영애가 입는 것이라곤 결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으로부터 크리스틴은 자신의 과거를 엿보고 있었다.

굳이 입이 아프도록 사연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와 같은 처지에 속한 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흔해빠진 사연'에 불과한 과거를.

"마찬가지예요. 저 역시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반항을 하다, 이윽고 소명을 개화시킨 거였죠."

남성과 여성…….

그건 사소한 차이일 뿐이다.

평민과 귀족이라는 태생의 한계, 각 영지의 문화와 전통, 그로부터 고착화되는 숙명…….

그러한 굴레로부터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있어, 이 제국의 체제란 무척이나 버겁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세태와 야합하지 못하는 이들 역시, 교단에서 흔히 말하는 '고통 받는 사람'에 속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세상 모두가 그들을 미워한다 해도, 누군가는 그들을 포용할 줄 알아야만 한다……. 저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여, 이러한 몸으로나마 교단에 몸을 담고 있는 것뿐이에요."

권위를 가지게 된다면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한 믿음에 확신을 가지고자 이단의 땅에서 오래토록 봉사했던 것이건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깨달음에 쐐기를 박아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한 소년병이었다.

이런 자신이라도 차별 없이 대해준……. 고결한 심성을 가진 한 이단자로부터.

"그런 그에게 여러모로 감사를 느끼고 있지만, 공교롭게도 입장이란 게 있다 보니 직접적으로 지원해 주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네요."

측은히 웃는 그를 말없이 마주하는 세실.

비록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바로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에겐 적지 않은 유대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 제 앞에 있는 사람도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구나, 하며.

"저…… 추기경님."

그런 인연을 빌어, 곧 세실이 크리스틴을 향해 조심스레 질문을 건네었다.

"혹시, 지금 셰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계시나요?"

"글쎄요, 저 역시 그 날의 후속재판 이후로는 마주해본 적이 없네요."

로열나이츠의 자격을 부여하는 데에 일조한 자라면 무언가 알지도 모른다 생각했건만.

그에 아쉬움을 느끼는 가운데, 크리스틴이 세실을 다독이듯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추구하고,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낼 만한 강함을 갖추고 있으니까."

블레이즈에서의 4년간 그를 마주하고, 그가 제국으로 복귀한 후에 있었던 일들 역시도 여럿 전해 들었었다.

그로부터 개화된 신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굳건히 다져지는 상태.

그러한 위로와 유대를 마지막으로 세실의 곁을 벗어난 크리스틴이, 홀로 황성의 복도를 거닐며 주변에 전시된 예술품들을 감상해갔다.

'그래요, 지금의 그는 저희와는 다른 곳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겠죠.'

황성과 그 내부를 가득 채우는 예술품들.

그 어디를 가더라도 아름다움만이 남아 있는 현장을 둘러보는 그의 눈이, 서서히 착잡한 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 사람처럼……. 어느 시대에나 천당으로 향할 걸 거부하는 자는 존재하는 법이니까."

그 씁쓸한 중얼거림은 오롯이 혼자만이 되새기는 것.

설령 그 소리가 주변에 전해졌다 하더라도, 그 말을 이해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말을 이해할 사람들은 이미 이곳을 벗어나 전장으로 향했을 터이니.

* * *

그리고…….

"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이오!!"

아레이스타 자작령 인근에 임시로 세워진 주둔구역.

그곳에서 회의가 이루어지는 캠프에서 들려오는 고함에, 곧 주변에서 일사불란하게 전선을 다듬어가는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그건 마침 정찰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일라이 역시 마찬가지.

그녀가 축 늘어져 있는 자의 뒷덜미를 잡아끌며, 텐트의 앞에 대기 중인 존을 향해 다가서며 물었다.

"존, 정찰 중에 조우한 주둔구역의 책임자를 사로잡아왔습니다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넌 정찰 중에 적장을 사로잡아오는 게 겸사겸사 할 일이라 생각하냐?"

적장을 산 채로 잡아올 정도면 그 지역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것일 터.

정찰병이라기엔 여러모로 할 말이 많은 일처리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신경을 써야 할 문제가 따로 있었다.

"뭐겠어. 블레이즈에서도 흔하게 있었던 마찰이지."

이내 텐트를 걷어내어 내부의 현장을 공유해주는 존.

그를 따라 텐트 안을 응시하자, 존의 말대로 익숙한 분위기가 제 앞에 펼쳐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일단 진정해 주시오, 주교님.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 전장의 사정상……."

"사정!?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그런 걸로 용납이 될 거라 생각하는 것이오!?"

텐트에서 실버레이트 백작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자의 이름은 주교 헤럴드.

교단에서 보낸 지원부대의 책임자인 그에게 있어, 현 주둔구역의 상황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였다.

전력을 보강하고자 이단의 땅에서 공수해온 무기들로 무장하다니.

그것이 정녕 이 제국에서 허락될 일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