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227화 (227/255)

의무병의 환생 227화

[외전-테라스 내전(9)]

'……꿈을 꾸었습니다.'

'어떤 꿈을 말이죠?'

'매일 밤, 같은 꿈을 꾸고 있습니다.'

어제도, 그 이전에도, 그 이전 날에도…….

과거 한때에 있었던 일이, 그 일을 겪고 난 후에도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한 이단자를 향한 찬송가를 외우고, 그렇게나마 그의 숭고한 정신에 존중을 표함으로써 잃어가던 신앙을 바로잡았던 순간.

그리고 그 구원의 순간에 다다르지 못한 채로, 그 구원마저 거부하며 비참히 죽어갔던 성직자들의 모습이…….

'크리스틴 추기경님. 당시에 금기를 범했던 성직자들은……. 분명 지옥에 떨어졌겠지요?'

고해실에 울려 퍼지는 비통한 속삭임.

하지만 거기엔 금기를 범한 성직자들을 향한 원망은 물론, 모멸이라 부를 감정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건 동정과 자학뿐이었다.

타의에 의해 죄를 범할 수밖에 없던 죄인들을 향한 동정.

그리고 당시 신앙을 잃는 것이 두려워, 차마 그들에게 동참하지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던 무기력한 자신을 향한 자학.

'아무리 기도를 하더라도……. 그들이 구원받을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요?'

그 또한 시련이라면 자신이 찾아야 할 답이란 무엇인가.

금기를 범한 이들을 이단으로 취급하며 그들의 죽음을 욕되게 하는 것인가?

그렇게라도 거머쥐어야 할 정도로 빛이란 매력적인 힘인 것인가?

'아뇨,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분명 그들은 천당에 가지 못할 겁니다. 네……. 교리를 따른다면 분명 그렇겠지요. 금기를 범한 대가로, 그들은 지옥 속에서 평생을 고통 받으며 살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그랬다면 그들을 구원하겠단 말을 감히 입에 담지도 못했으리라.

교리에 따른다면 금기를 범한 자는 지옥에 향하여 영원히 고통 받게 되고, 오롯이 회개한 이들만이 그런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하니.

그러니 그런 회개의 순간조차 주어지지 못한 그들은 한때의 선택에 모든 걸 그르치고, 그 사후는 영원한 고통의 굴레 속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분명 그럴 테지만…….

'하지만 그들이 지켜낸 이들은 다시 빛을 거머쥐었습니다.'

그래, 그 당시 살아남았던 이들의 손에 쥐어진 빛은.

그들이 영원히 지옥 속에서 고통 받을 것을 각오하였기에, 그 희생을 통해 다시금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이었다.

방관과 침묵이라는 죄를 범했음에도, 누군가가 희생을 함으로써 생긴 여유를 빌어 이 손에 다시금 빛을 거머쥔 것이다.

'그렇게나마 구원받는 이들이 생기는 것을…….'

그 빛이 누군가의 죄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이제까지처럼 순수하게 빛을 섬길 수가 없게 되었다.

빛은 선명할지언정, 그 근간은 피와 죄악으로 얼룩진 채로 세워진 것이니.

'지옥으로 향하리란 걸 알면서도, 이 빛을 지키고자 한 이들을 어찌 죄인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런 운명을 증오가 존재하지 않는 건, 그러한 흐름 역시도 하나의 깨달음으로써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 깨달음이야말로 자신이 제국에서 등을 돌리고자 하는 이유였다.

낙원이란 이상향의 동경으로 세워진 나라에서부터, 그 누구라도 지옥이라 입을 모아 부르는 현장으로.

설령 모두가 죄라고 부르는 일조차도, 그로부터 이끌려지는 자가 있다면 그 또한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이라 여기기에…….

'정말로, 그 길을 감당하실 생각인가요?'

그 또한 고결함을 빚어 만든 마음이 아닌가.

그로부터 비롯된 빛을 응시하는 크리스틴은 차마 그를 말리지 못하고, 그저 마지막으로 조용히 물어볼 뿐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 빛을 거머쥐며 천당으로 향할 자격을 손에 넣었음에도, 정녕 그 권리를 내치며 지옥으로 향할 것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존재하는지.

'세상은 오롯이 빛이 드는 곳만 존재하는 게 아닌 법…….'

그는 그 물음에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죄를 지은 자가 천당에 향하지 못하듯, 고결하기만 한 자는 지옥으로 향할 수 없는 법이니.

'그리고 진정 빛이 필요한 것은 볕이 드는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닌,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이들이 아니겠습니까?'

빛이 흔하고 당연한 세계에서.

한 신자는 그들이 외면한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이 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 * *

"헤럴드 주교. 지금의 내 모습에 할 말이 많겠지."

그리고 그건 오롯이 자신 혼자만이 감당하고자 하는 길.

그는 단 한순간도,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을 다른 신자들이 감당하길 바라지 않았다.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니 혼란스럽고, 모든 게 잘못되었다 여겨질 법도 할 거야."

평화의 시대이지 않은가.

이제까지 그런 시대를 살아왔던 그들은 전쟁이란 걸 모르고, 그런 걸 알 필요도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

이 대륙에 다시 한 번 200년 전과 같은 난세(亂世)가 펼쳐지는 것은, 그 누구도 바라선 안 될 일이다.

그러한 일을 강요해야 하는 때가 찾아온다면, 비로소 그 시기를 혼돈이라 부르는 것일 테니.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나만큼은 자네를 나무라지 않을걸세. 이곳에 있는 이들이 이 물건을 쥘 것이 강제된다 한들, 우리가 살아오고, 살아갈 세상엔 이런 물건은 전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 혼돈의 때라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 하여 모두가 그 광기에 휩쓸려서는 안 되는 법이다.

절망적인 상황이기에 오히려 희망이란 존재해야 하는 법.

그로부터 비롯된 빛이란 그 무엇보다도 순수하고 고결해야만, 병들고 고통 받은 이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나에게 동참해 달라곤 하지 않겠네. 그저…… 부디 나를 대신하여 이 후방에 오는 병자들을 치료해주었으면 하네."

금기에 손을 뻗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있기에 비로소 자신들의 터전이 지켜진 것이 아닌가?

차차 지옥이 확장되어가는 중에도, 그 지옥에 발을 들이며 혼란을 막고자 하는 이들이 있기에 그들의 고향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거늘.

"핀들레이 주교!!"

그 점을 헤아려 주길 바라는 신자가 이윽고 등을 돌리는 그 순간, 그를 멍하니 마주하고 있던 헤럴드 주교가 다급히 그를 향해 외쳤다.

"자네는…… 정말로 그래도 되는 것이오?"

여전히 많은 신자들이 따르는 자신과 달리, 아무도 감내하고 싶어 하지 않는 길을 거닐고자 하는 신자에게로.

"자네는 심문관이 아니오. 성기사도 아니고…… 그런데도 자네는……."

지옥이라 부르는 장소를 향해 외롭고 고독하게 발을 내딛고자 하는, 총을 짊어진 성직자에게로.

"자네는 만인의 우상이 되어야 할 그 빛을 더럽히고 있는 거야! 이제까지 당신이 믿어온 모든 것을 내치면서…… 그, 그런 짓을 저지르면 당신은 그 생이 다 하는 순간에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해. 결코 천당에 갈 수 없을 거라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가 거머쥔 빛으로 이 낙원을 함께 밝혀주기를 바라고, 또 진심으로 바라거늘.

"하지만 내가 지켜낸 누군가는 천당에 갈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그는 천당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아닌, 지옥에서의 희망이 되고자 한다.

누군가의 희망이 되어주고, 그 빛에 이끌린 그들이 또 다른 누군가의 희망이 되어주길 바라며.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총을 쥐는 것이 죄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죄를 범하고 지옥에 들어가겠네."

그 신념을 안고 전장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윽고 현장에 은밀히 겨누어졌던 총구들이 하나둘씩 거두어지기 시작하였다.

민중이 가진 지도층을 향한 증오가 잠시 가라앉은 순간.

"참모님."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미겔이, 그를 향한 복잡함이 드러난 얼굴로 존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저분은, 정말로 성직자입니까?"

스스로를 더럽히고, 더러운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다스리며 빛을 거머쥔 성직자라니.

제국에선 그런 이들조차도 이단이라 부르겠지만, 정작 그가 발하는 빛은 그 어떤 성직자보다도 눈부시고 밝아 보였다.

존이 피식 웃으며 그의 뒷모습을 뒤쫓았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총을 쥔 성직자를 진정 주님의 증인이라 할 수 있는지……."

주교 핀들레이.

누구보다도 원리와 원칙을 중시해온 신자는, 아이러니하게도 한 소년병과 같은 시기에 영지에 들어옴으로써 그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만약 그 소년병이 없었다면 그는 어떤 운명을 거닐었을까?

분명 이 순간 헤럴드와 같은 반응을 보였겠지.

그 이전에 목숨을 잃어 천당의 존재를 긍정하며 죽었을지도 모른다.

신앙이라는 진통제를 통해 아무런 고통도 없는, 그런 안락사의 운명을 모두가 순응해야 한다 주장하면서.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다 생각합니다."

그렇게 어긋난 길을 걷게 된 이는, 이 순간에 와선 제 원수마저 사랑할 줄 아는 아량을 가지게 되었다.

"블레이즈의 차기 사령관의 자리에 어울리는 건 저 같은 겁쟁이가 아닌, 저 사람처럼 제 원수조차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그래, 바뀌고 있는 것이다.

제국 전체에 비하면 아주 희박한 수준에 불과하겠지만 아주 조금은…….

아주 조금씩이나마,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지만 이 제국은 분명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 실낱같지만 확고한 사실이, 이 순간 제국에 대한 불신을 가진 이들에게 자그마한 희망으로써 다가오고 있었다.

* * *

그리고…….

"오라버니이이이~~~"

황성의 정원.

그곳에 홀로 발을 들이기 무섭게, 테올린의 귀에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에겐 그저 교태가 어린 여인의 목소리로.

그래, 그 목소리를 살벌히 여기는 건 오롯이 테올린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아이 참~ 오라버니! 사랑스러운 동생의 얼굴을 봐놓고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 거야?"

"꺼져라."

주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고개를 홱 돌리며 한 마디만을 툭 내뱉는 테올린.

그럼에도 자신에게 다가온 여인은 아양을 떠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 동안 잘 지냈어? 노라는 뭐하고 지내? 얼마 전에 편지를 받았는데 넷째를 임신했다고 했는데……. 어머어머~ 이제 보면 서자들까지 합쳐서 자식만 스물 정도 생긴 건가?"

"닥쳐라."

"아이 참~ 거의 1년 만에 보는 동생에게 왜 그리 날이 선 거람? 매번 편지를 보내도 '알겠다', '이거 해라', '할 일은 끝났다' 정도로 짧게짧게 보내기만 하고."

"그 입 다물어라."

"영지에서부터 간식을 가져왔는데 먹어볼래? 박하와 카카오를 섞어서 만든 민트초코 쉐이크인데……."

-철썩.

재잘거리는 동생의 손등에 손찌검을 하는 테올린.

그 손에 쥔 컵이 정원의 타일에 떨어지고, 그 밑으로 해괴한 색의 액체가 바닥을 더럽혀갔다.

그를 내려다보던 에버그린이 멍하니 테올린을 올려다보았다.

"사춘기야?"

"……쯧."

테올린이 혀를 차며 근처를 지나는 황성의 사용인에게 손짓을 했다.

그 제스처를 보고 바로 청소에 나서는 사용인.

테올린이 그 옆을 지나치며 정원을 거니는 가운데에도, 에버그린은 여전히 그 옆에 자리하며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 마~ 우리가 남매간의 정이라곤 쥐뿔도 없다지만 일단은 협력관계인데."

"……변경에 있어야 할 네가 왜 이곳에 온 것이냐?"

"신생 백작가의 대표로써 황성에 인사 좀 올 수 있는 거지 뭐~"

변경지대가 반란군들의 손에 넘어가 '연합국'이란 세력이 되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변경지대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상태다.

2년 전 사교회의 습격 이후로 블러드메리는 체펠리 후작가를 완벽히 대체하게 된 상태.

그를 기점으로 모인 귀족령들은 방비를 단단히 굳혔으며, 반란군들도 쉬이 습격을 하지 못하기에 이른 상태였다.

그리고 그건 테올린 역시 알고 있는 바.

블러드메리 상회와 협력하여 전쟁의 보급로개척에 힘을 쓴 건, 그런 블러드메리의 수완과 영향력을 인정하기에 내린 결정이라 할 수 있었다.

"편지로도 얘기했지만 블레이즈의 사령관과의 거래는 무사히 성사되었어. 병력은 몰라도 장비공장에 대해서 지원을 해주겠다 하니 바로 수긍해주더라고. 마음 같아선 우리 쪽 영지에도 공장을 몇 개 세워서 공급을 원활히 하고 싶긴 한데……. 사실 오라버니랑 만나면 그거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고 싶었거든. 어떻게, 그쪽에 대해서 허락을 좀 받아주는 건……."

"큰 소리로 떠들지 마라. 보는 눈이 많지 않으니."

표정을 구기며 냉정히 말하는 테올린.

그제야 에버그린이 입을 다물고 주변으로 차차 시선을 향했다.

귀족들의 관심이 자신과 테올린에게 집중된 상태.

골드리안이 현재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얼굴에 그려진 건 감탄에 가까운 것이었다.

에버그린이 다듬어진 제 턱을 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거 참 다들 너무 빤히 쳐다보네~ 오빠가 너무 예쁘고 깜찍해서 그런 건가?"

"……닥쳐라."

"참 예쁜 것도 고생이 많다니까~ 히히~"

부채로 살짝 입을 감춘 에버그린이 주변 귀족들을 향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에 마음이 가는 듯 얼굴을 붉히는 귀족 남성들.

하지만 이미 가문을 둔 안주인이 그들의 마음에 호응해줄 리는 만무했다.

그저 미모 또한 무기로 쓸 수 있으니 좋게좋게 여길 뿐.

반면 테올린은 자신이 대놓고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도, 별 말 하지 않고 정원을 누빌 뿐이었다.

그 시선을 여전히 예술품의 관람으로 향하며.

예술제에 충실하며 문화를 익혀가는 건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석연치 않을 수밖에 없는 태도였다.

"참 여전한 오빠네. 동생도 그렇고……. 누굴 닮아서 이렇게나 똑 닮은 건지 원~"

뚝.

어느 순간 끊어진 발걸음과 함께 테올린의 시선이 에버그린에게로 향해졌다.

이전까지 지나왔던 곳과 비교하면 상당히 인적이 드문 장소.

"에바."

황성의 뒤뜰에 들어선 테올린이 그녀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셰인의 행방을 알고 있는 것이냐?"

"……."

말없이 그를 쳐다보며 부채를 접는 에버그린.

이후 팔짱을 낀 그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왜 내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데? 마지막으로 소식이 들려왔던 건 아인츠바이 쪽이 아니었던가?"

"그 이후의 행방을 숨길 수 있는 건 너 정도 뿐이겠지."

셰인 골드리안.

현재 제국 내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을 정도다.

출판한 책은 불만이 많을지언정 신성력의 도움을 빌리기 어려운 서민층에게 각광받고 있으며, 일부 귀족들도 그 자료를 유용하게 여기고 있는 참.

더군다나 로열나이츠로서 많은 부정자와 범죄자들을 소탕한 데다, 제 3제국의 수장과 더불어 반란세력의 주축 중 하나인 푸른 화살의 핵심 간부진과 수장을 쓰러트리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날 이후로 그가 주님이 보낸 사자라 칭하며, 성자란 말을 아끼지 않기까지 했으니.

교단에서조차 이단자인 그에게 경의를 가지는 현재, 그의 존재는 어디를 가더라도 눈에 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반 년 전 아인츠바이에서의 치료를 끝낸 후 종적을 감췄으니, 누군가 의도적으로 숨겼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전장으로 향했지."

그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에버그린.

테올린이 그 대답에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내 말은 어느 전장인지……."

"어쩌면 이 대륙에서 가장 험난할지도 모르는 곳으로."

단호히 대답하는 에버그린.

자세한 설명이라곤 할 수 없지만, 테올린의 우려에 확신을 가지게 만들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가 바라는 곳까지 길을 알려주고, 그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뿐이야. 그 이상은 뭔가 해주려고 할 수도 없지. 천성부터가 상인이고 지도자인 우리는 전쟁 같은 일에 깊게 관여해선 안 될 테니까.

"……걱정되진 않는 거냐?"

"걱정할 게 뭐가 있어?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법은 나보다도 군인출신인 그 애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군인이라 해도 소년병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은 준비된 전쟁과는 전혀 다르다는 걸 너 역시 알고 있을 텐데?"

"하하~ 소년병 시절이라니. 그거 참 순수한 말이네."

윽박을 지르는 테올린의 앞에서 여전히 여유를 보이는 에버그린.

이 순간 교차되는 감정은, 한 이단자를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와 관계를 극명히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같은 피를 이었을 뿐인 동생과 진상을 아는 협력자로서.

"오빠, 혹시 궁금해해본 적 없어? 우리 동생의 정체가 뭐기에 이제까지 그만한 일들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이 순간 간사한 뱀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사자의 심장을 먹어치울 준비를 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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