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228화
[외전-테라스 내전(完)]
숨겨진 진실을 가르쳐준다.
그로부터 비롯된 혼란이란 그 어떤 단단한 벽에도 큰 균열을 내는 법이며, 에버그린은 그런 식으로 많은 권력자들을 제 밑에 굴복시킨 자였다.
그리고 그녀의 야망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안전이 보장된다면 보다 높은 곳으로.
그 야망은 제 오라비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바였다.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고작 10살 정도밖에 안 된 아이가 어디에서 이단의 지식을 접했을지……."
그런 의미에서 자신들의 배다른 동생은 무척이나 유용한 존재였다.
처음에는 그저 제 아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생각하며 접근했던 자.
하지만 고작 11살의 나이에 자신이 보낸 청부업자들을 제압한 것도 모자라, 그들로 하여금 '의뢰포기'라는 불명예까지 끌어안게 만들었던 녀석이었다.
"고작 14살에 불과한 아이가 재판에서 그렇게 의연한 태도를 취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그 후에 전쟁터로 향한 후에도 사령관의 환심을 사서 책을 출판한 건?"
더군다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의뢰를 포기했던 집단의 수장이 자신에게 무릎까지 꿇고, 자신에게 충성할 것까지 맹세하며 그를 구제해달라고 간청까지 했을 정도.
고작 소년에 불과했던 아이가, 뒷세계의 거물이라 불리는 이조차 매료시켜 제 존재를 바치도록 만든 것이다.
"몇 번이고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는데도 그 모든 위기를 극복할 정도의 강함은……. 그저 라인하르트 가문에서 익혀둔 기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건 아니겠지."
그런 녀석에게 흥미가 생겨 뒷조사를 해보니, 어째서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과거에서 온 존재라니.
이 고착화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가능성을 보유한 자가 제 앞에 나타났는데.
전쟁이 벌어진지 200년이나 지났음에도 그 당시의 과거에 묶여있는 그 후계자가, 무릎까지 꿇으며 간청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않겠는가?
"우리 오라버니도 궁금하겠지. 정치가이자 상인집안인 우리 가문에서, 어떻게 그런 사고뭉치가 나타날 수 있는지……."
그래, 그저 과거를 계승받은 이들이 과거에서 온 존재에게 매료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 제국에서 평생을 보내고, 그 삶을 넘어 계승받아온 가문의 전통과 역사에 자부심을 가진 이 남자에게 과연 어떻게 보일까?
이 제국의 체제를 전면에서부터 잘못되었다 부정하는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제까지처럼 그를 제 혈육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때? 궁금하다면 가르쳐줄……."
"셰인은 내 동생이다."
그러한 상상에 자신만만해 하는 에버그린을 향해 테올린이 단호히 말했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엿보이지 않는 강경한 태도로.
"……어?"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탄성.
그에 답지 않게 당황하며 눈마저 벌려 떴지만, 테올린은 자신의 말을 결코 거두지 않았다.
"그 녀석이 전과를 가졌건, 이단의 길에 들어섰건 그런 건 이후에 다그쳐서 바로잡으면 그만인 문제다."
셰인 골드리안은 테올린 골드리안의 동생이다.
설령 어머니가 다를지언정 아버지가 같고, 테올린은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여전히 갖추고 있었으니.
"그 녀석이 어디에 있건, 무엇을 알고 있건 어떤 길을 거닐건……. 그 녀석이 골드리안에 대한 소속감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가주로서 그를 이끌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를 넘어 선조에서부터 이어져온 피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더욱 나아가 자신과 같은 피를 이어받은 모든 이들이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라 여기고 있었다.
그저 사소한 시작. 혹은 근간.
그에 몰두하고 맹목적으로 발휘하는 신뢰란, 어떤 의미에선 종교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에바. 네가 셰인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말하고 싶다면 이 자리에서 말해도 좋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 않은가.
그 피를 숭배하는 남자에게 있어서, 제 동생의 정체 따윈 정말로 사소한 문제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 마음이 달라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 녀석이 나와 같은 피를 이은 가족이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설령 그 내면에 다른 존재가 있다 할지라도.'
가족이라는 연에서부터 시작된 인연을 자신이 결코 놓지 않는다면, 그 역시 그 신뢰에 부흥해주리란 믿음이 존재하고 있으니.
"……나."
그런 자신의 대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일까?
몸을 벌벌 떠는 에버그린이 한편으론 서글픔마저 느껴지는 눈으로, 제 앞에 있는 오라버니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
"나느으은? 난 오빠 동생 맞지? 응!? 근데 왜 나한테는 맨날 못되게 굴어? 대체 왜!? 왜애애애????"
"닥쳐라."
악연도 연이라 했던가.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가족의 소중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악연 역시 그 색이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의미한다.
하물며 두 사람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좁은 곳에 갇힌 채 부닥쳤던 쌍둥이 남매.
그런 둘이 세상으로 나온 순간부터, 사방에선 탐욕에 찬 이들이 그들을 회유하고자 기를 쓰기까지 하였다.
피와 모략으로 얼룩진 황금의 산.
그러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그 모든 이들을 감당할 정도로 힘을 키우거나, 자신이 그들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타락하는 것뿐이다.
"하하, 그래. 배다른 동생은 동생이고, 15초 늦게 태어난 쌍둥이는 여동생도 아니다 이거지?"
"그런 취급을 받는 게 싫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되는 거다."
그래, 이 자리에 있는 건 그 두 가지 선택을 달리 고른 자.
도리어 피가 이어진 남매이기에, 그러한 선택에서 비롯된 혐오란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다.
"그럴 수야 없지. 우리는 남매이기 이전에 같은 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그런 원수들조차도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지금 이 제국의 상황은 너무나도 열악하기 그지없었으니.
그 정론에 테올린 역시 할 말이 없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가던 길을 걸어갈 뿐.
그 길을 조용히 따라가니,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앞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 테올린 후작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아이작 아인츠바이.
새로이 공작의 자리에 오른 미숙한 지도자이자, 이 예술제의 책임자라 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그 옆에는……. 혹시 에버그린 골드리안 님이십니까?"
"지금은 블러드메리입니다. 남편이 무척이나 신세지고 있네요~"
화사하게 미소를 짓는 에버그린.
누가 보더라도 미인이라 여겨질 외모지만, 정작 그녀가 제 얼굴을 감춘 베일을 거둔 건 근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 얼굴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당황하는 것도 이해가 될 터.
테올린이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무마하며 그를 향해 물었다.
"저에게 용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아. 지금 막 정원에 저희 가문에서 출품한 작품이 전시되었습니다. 공녀님과 변경백님도 함께 감상하시고 계십니다만……. 함께 보시겠습니까?"
예술을 숭배하는 아인츠바이의 주인이 된 자가 선별한 작품.
그 누구라도 흥미가 생기겠지만, 에버그린에게만은 그것이 남다르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궁금하네. 달링이 어떤 그림을 그렸을지."
그를 제 남편에게 보낸 후 1년이 넘게 지난 현재.
그가 바라는 이상은, 과연 제 남편의 손을 빌어 이루어질 수 있을까?
* * *
"……적들이 오고 있군요."
서서히 어두워져 가는 언덕.
노을마저 먹구름에 가려져 가는 시간, 빼곡이 채워진 병력이 지금 이 순간 이곳으로 진군할 준비를 취하고 있었다.
그 숫자에 긴장을 느낀 존이 성벽아래로 내려오며, 그곳에 대기하고 있는 이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괜찮으신 겁니까? 지금이라도 피난길에 합류하셔도……."
"이미 각오는 되었어요."
이름 모를 병사 하나의 대답.
그에 동조하듯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 손에 칼과 총을 쥐며 일사불란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에 조용히 고개를 숙인 존이 군모를 눌러쓰며, 이윽고 성벽 아래에 자리한 연설장에 발을 들였다.
급하게 공수한 보급을 통해 구색을 갖추는 데에 성공한 군대. 부상자와 비전투원도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눈엔 독기가 어려 있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위엄이 존재하는 덕.
"내 그리 길게 말하진 않겠소."
실버레이트 백작.
이 전선의 총 책임자가, 곧 그들의 앞에서 연설을 시작하였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용기있는 자들이오. 공포를 억누르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힘을 써주는 이곳에 있는 모두는 분명 영웅이라 불릴 자요."
이제부터 나아가게 될 곳은 명예도, 숭고함도 끝끝내 싸구려로 전락하는 장소.
하지만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 모든 것은 분명 의미를 발휘할 것 역시 강조하여 말한다.
그러지 않을지언정 그러리라 믿으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는 곳이니, 모두가 그 믿음을 가지며 감정을 다스리고 무기를 다잡아가기 시작했다.
"비록 서로가 거쳐온 삶은 다르겠지만, 운명은 우리를 이 공통된 자리에 불러주었으니……."
나라에 주군의 존엄과 긍지를 욕보였음에도 그 의지를 잇길 각오한 기사도.
생명의 탄생과 존엄에 매료되어 손에 붕대를 감길 희망한 의사의 후계자도.
지도자의 자리에 오를 것을 거부했음에도 그를 보조하길 맹세한 장교와, 태생이 다름에도 그 정체성을 버려진 자들의 어머니에 두고 있는 여인도.
그리고 지옥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구제하고자 총을 쥐길 결심한 성직자와, 그들 모두를 포함해 각기 다른 삶을 거닐어온 이들이 이 순간만은 한 자리에서 한 마음이 되어.
"내 그대들을 이끌어주는 길이 되어줄 테니 부디, 나를 믿고 이 땅을 지키기 위한 힘이 되어주시오."
그렇게 자신들을 이끄는 군주를 따라, 서서히 열려가는 성벽의 밖으로 나아갈 준비를 취한다.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다가오는, 이 시대를 부정하는 무리로부터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모두, 전투 준비!!"
이윽고 이어지는 처절한 함성.
하지만 그것을 동반한 진격만은 그들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 * *
-웅성웅성.
서서히 어두워져 가는 제도의 하늘.
예술제 역시 서서히 막바지에 도달해갈 무렵, 황성의 정원에 배치된 한 장의 그림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흔들렸다 한들 아인츠바이의 이름값이 남아 있어서일까?
황성과 달리 하위귀족은 물론, 평민들 역시 입장이 허락된 황성의 정원.
그곳에 전시된 거대한 액자에 걸린 그림에 많은 이들이 제각각의 반응을 보이는 가운데, 테올린이 에버그린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게 네 남편이 그린 그림인가?"
"그렇지. 우리 동생이 한 의뢰를 통해 그린 그림이야."
셰인 골드리안.
누군가에겐 배다른 동생으로, 혹은 누군가에겐 영원히 곁에 둘 수 없는 일시적인 협력자로 여겨지는 존재.
그런 이의 인생이 담긴 그림을 응시하는 에버그린이, 머지않아 피식 하고 실소를 터트려 보였다.
"웃기지 않아?"
"뭐가 말이지?"
"이 순간에도, 이 그림 하나 지키려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전장이라는 지옥.
고향이라는 낙원.
제 앞에 있는 그림은 두 개의 세계가 교차되는 듯 보이기도 하였다.
혹은 그 외에 다른 의미를 가지기도 하겠지. 그림이란 언어와 달리 어떤 식으로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니까.
지금 느끼고 있는 제 감정이 다른 이들에게도 똑같이 전해진다……. 그렇게 확신을 가지는 건 분명 오만이라 부를 일일 것이다.
'그래, 카일 페터슨. 당신도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러지 못할지언정 기대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알고 있으니까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제 길을 찾아 떠난 걸 거야.'
그 기대 역시도 자신을 대신해 전장에서 싸워주는 이들이 존재하기에, 자신의 이상을 대신 이루어줄 지도자들이 존재하기에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전생은 몰라도 지금의 이 시대엔 그의 이상에 동참해 줄 이들이 여럿 존재하고 있으니…….
'물론 그들에게 일을 맡기고 홀로 떠난 당신은 여전히 고독하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당신에겐 분명 돌아올 곳이 존재하고 있어.'
그래, 이 시대는 분명히 바뀌고 있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이나마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에, 그 역시 포기하지 않고 제 앞에서 빛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잘 하고 와봐. 바보 동생."
그 빛을 회고하는, 이 시대의 어둠을 이해하는 여인이 조촐한 무운을 이 순간을 빌어 빌어주었다.
모쪼록 그가 바라는 이상이 자신이 마련해준 기회를 빌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또 고대하면서.
[외전-테라스 내전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