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230화
"쿨럭!"
벅차오르는 심정에 가빠지는 호흡.
그에 기침을 내뱉기 무섭게, 제레프가 다급히 황제의 곁으로 다가서며 제 손끝에 어린 빛을 주입해주었다.
그 덕에 가빠진 호흡이 가라앉았지만, 이미 노화로 약화된 신체까지는 어찌 수복할 수 없었다.
신성력은 그저 본래의 상태로의 회귀를 유도할 뿐인 힘.
그리고 그 한계야말로, 이곳에 있는 세 사람이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키르슈타인 공작."
치료를 받은 후, 카이네르가 배후를 지키는 알베르트를 돌아보았다.
이미 제 할 일을 마친 그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을 뿐. 카이네르가 그를 응시하며 나직이 말했다.
"내 자네에게 정말로 많은 감사를 느끼고 있네. 전대가 그렇듯, 자네 역시 아인츠바이나 라인하르트와 달리 나의 이상에 동참해 주었으니까."
"주군에게 충의를 가지는 건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요."
정중하고 근엄한 목소리.
노화로 인해 생을 마감한 아비의 뒤를 이었음에도, 그 충성심은 이 순간에도 여전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를 흡족한 눈으로 쳐다본 카이네르가, 그 후 마찬가지로 제 옆을 지키는 제레프를 돌아보았다.
"제레프. 내 오랜 친우이자 가신인 자네에게 마지막으로 묻겠네."
"말씀하십시오, 폐하."
"저 옥좌에 앉는 것으로, 내 머나먼 선조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정녕 사실인가?"
불신이 아닌 확신을 가지고픈 마음에 행한 물음이었다.
이제는 머지않아 땅에 묻히게 될 몸을 이끌며 여기까지 온 상태. 그만큼 이 순간을 신중하고 절박하게 여기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물음에 제레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화두를 던졌다.
"폐하. 아주 먼 옛날, 이 제국에 검은 역병이 돌았을 무렵에 벌어졌던 일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지.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은 수치스런 일이라 한들, 그 또한 위대한 피를 이은 이의 선택이었으니."
350년 전 흑사병이라는 돌림병이 창궐했을 당시.
그로 인해 대륙인 중 3할 가량이 병마에 의해 전멸했으나, 당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자가 행한 건 다름 아닌 대륙 밖으로 도주하는 것이었다.
군주로써의 자질이 의심이 되는 선택.
그럼에도 카이네르를 포함한 역대 황제들은, 그 수치스러운 일족을 마냥 어리석다 조롱할 수만은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 분이 도망쳤다 하더라도 위대한 피는 유지되어야 하는 바……. 남아 있는 황실의 일원들은 그 분의 형제이자 성직자로 전향한 이를 새로이 황제의 자리에 추대하였지요."
현 세대에 와선 구원의 황제라고 불렸던 인물.
그를 기점으로 제국의 모든 이들이 신앙에 의존해 병마를 달래었으며, 그를 시작으로 이 제국은 교국으로의 도약을 크게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교단의 영향력이 커진 데 반해, 그 이후의 계승자들 중 교단에 신변을 귀의한 이는 한 명도 없었으니…….
"그러나 숭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들이 누군가를 숭배하면 위엄이 하락하는 법. 그렇기에 구원의 황제께선 자신의 역할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내려와, 그 권위를 보다 마땅한 이에게 물려주기에 이르렀습니다."
"……도망친 황제의 후손에게, 말이지."
"현 폐하의 선조이기도 한 분이시죠."
그래, 구원의 황제 이후 황권을 계승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수치스럽다 여겨온 도망자의 핏줄이었다.
아비에게 버려진 그는 구원의 황제가 내려준 자비에 황권을 계승…….
그로 인해 그의 피가 지금 이때까지 황실을 수호할 수 있었던 것이며, 그 역사는 오롯이 황실의 정통 후계자에게만 내려오는 극비사항이었다.
나라를 버리고 도망친 지도자란 그 자체로 수치로 여겨질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폐하. 현 제국이 맞닥트린 상황은, 검은 역병이 퍼졌을 그 당시보다도 더욱 위험하다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병마는 물론 시대의 광기가 만들어낸 전쟁도, 결국 인간의 입장에선 재앙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법이니.
그로 인해 나라에 망조가 들고 무고한 피가 범람하게 되는 현재, 황제에게 있어 도망친 선조가 남긴 기록은 그 자체로 '희망'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원대한 이상이란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이지만, 대를 거듭하며 생기는 세대 간의 갈등이란 필연적인 법……. 결국 인간의 사회에 있어 혼란과 분쟁이란 피할 수 없는 일인 것이죠."
신앙에 의존한 평화도 결국 200년 남짓 이어졌을 뿐이지 않은가?
아무리 위대한 존재의 힘에 매달리고 갈망한다 한들, 그 힘을 다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개 인간에 불과한 법.
그 그릇만큼의 힘만을 다룰 수 있는 이상, 결국 신앙을 뒤에 업은 완벽한 통제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결국 그 모든 문제는 힘이 부족해서 생긴 일입니다."
이윽고 제레프가 그 모든 의견을 정리해 말했다.
반발을 억누르는 건 억압이 아닌 약간의 희망이라 하나, 그 또한 결국엔 힘이 부족하여 생긴 변명일 뿐이라고.
"압도적인 힘이야말로 진정 평화를 갖추는 데에 필요한 법……. 그리고 지금 저희들이 준비하고자 하는 건, 바로 그 힘을 손에 넣기 위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내 옥좌로 향해지는 제레프의 시선이 서서히 가느다랗게 뜨여졌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힘이 잠재되어있는 자리를 응시하며.
"불로불사(不老不死)."
그렇게 350년 전 이 대륙을 떠났던 머나먼 선조가.
더욱 나아가 지난 350년간, 그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이 줄곧 찾아오고, 바라오고, 또 이루기를 바라며 후세에 전가했던 염원을 입에 담아 말한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육체를 손에 넣고, 더욱 나아가 그 힘을 모두와 공유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찾아온다면……."
"영원한 이상향은 결코 헛된 망상으로 끝나지 않으리라."
제 말을 이어받는 황제를 보며 흡족히 미소를 짓는 제레프.
그 미소는 분명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의 의식만을 위하여 교단의 반대를 무릅쓰고, 은밀히 그들의 눈을 피하며 지금의 이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었으니.
"다행히도 폐하의 선조께선, 그 가신들로 하여금 이 대륙에 자신의 업적을 전파하는 데에 성공하였지요. 대부분이 사교도로 전락하여 처형되거나 고독한 생을 보내었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만은 이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 파편을 모으고 수집하는 데에만 해도 전쟁 이후 200년이 넘게 흘렀고, 마침내 지금의 대에 와서야 그 모든 것이 모이게 되었다.
인간의 생에 있어선 무척이나 길지만, 불로불사를 통해 실현될 '영원'에 비하면 그 또한 하잘 것 없는 순간에 불과할 뿐.
"그러한 기록을 모아 만들어진 의식의 장이 바로 이곳……. 윤회의 힘을 다루기 위한 옥좌입니다. 그건 그 자료를 이어받고, 수색하며, 지금 대에 와서 조합해 결실을 맺은 폐하께서 더 잘 아시는 일이겠지요."
'윤회력(輪廻力)'
신성력을 뒤틀어 만들어낸 힘은, 주입된 대상에게 오롯이 하나의 순간만을 번복하는 특성을 띠게 만든다.
기억도, 육신도, 그리고 이상 역시도.
그리고 원대한 미련을 가진 자가 그 힘을 손에 넣는다면, 그 힘에 이성을 잃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이어갈 수 있게 된다.
강대한 미련, 그 자체로 열망이자 염원이라 부를 감정…….
그래, 이 땅을 낙원으로 만들겠다는 이상이 진실이라면, 그 힘은 분명 소유자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줄 것이다.
"…석연치 않군."
그럼에도 그 옥좌에 발을 들이길 망설이는 건, 저 옥좌를 만들기까지에 이루어진 과정이 이제껏 익혀온 것에 반해왔기 때문이었다.
"……폐하."
"제레프. 저 옥좌가 만들어지기까지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생이 이루어졌는지를 생각하니, 내 이 자리에서 발이 쉬이 떨어지질 않네."
도주한 황제의 의지는 여전히 이어져 왔으나, 그들 중 대부분은 제국의 적으로써 여겨져 잔혹하게 처형되기에 이르렀다.
반대로 그를 오인하고 공격하던 이들 역시 적잖은 희생을 치렀으며, 그 비밀을 지키는 데에도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게 되었다.
공공연히 드러낸다 하여 이해해줄 자가 없으니 침묵만이 답이라 여길 뿐.
그런 고독을 곱씹는 가운데에도 필연의 순간은 다가오고, 지금에 와선 걷잡을 수 없는 재해가 되어 이 대륙을 혼란케 만들고 있다.
그런 마당에 대의를 위한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게 옳은 일인가?
저 옥좌를 만들기 위해 '이 영지의 죄수와 추종자들마저 모두 죽여 버린' 것이, 정녕 미래를 위해 당연히 거쳐야만 하는 일이란 말인가?
"폐하, 침착하시옵소서."
그에 갈등을 느끼는 카이네르를 향해 제레프가 고개를 조아리며 충언을 올렸다.
"무릇 민중을 굽어 살피기 위해선 상징이란 필요한 것이며, 그 상징이란 흔들림 없이 고고함을 유지해야만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상징에 해당하는 옥좌를 쌓고 유지하는 데에도, 이제까지 많은 피가 흐르지 않았습니까?"
"그건 나 역시도 알고 있네. 내 본래 앉고 있던 자리 역시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유지되었다는 걸……."
"그런 희생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폐하께선 저 옥좌에 앉아 힘을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생명을 좌우하는 힘으로 권력을 쥐었다 한들, 그것만으로는 모든 어둠을 완전히 걷어낼 순 없는 법.
그 힘을 다루는 것이 인간에 불과한 이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기는 필연은 결코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스스로가 변치 않는 존재가 되어 불멸의 상징이 되고, 그렇게 영원한 통치를 이어가 이상향을 세워간다…….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저 두렵다는 이유로 물러서선 안 될 터이다.
'그래, 이것이 나의 숙명.'
위대한 존재의 피를 이은 자신의 사명.
그 이상을 가슴에 새긴 황제가, 곧 부푼 마음을 움켜쥐듯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늙고 노쇠한 몸이나, 안에 자리한 자긍심은 그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도록 외치고 있다.
저 옥좌에 앉아 힘을 받아들이고, 영원불멸의 통치자로서 이상향의 구축을 위한 초석을 세운다는 옛 선조의 소망을, 그 비원을.
"폐하. 마지막으로 한 가지 여쭈어보겠습니다만……."
그 이상을 위해 발을 내딛는 가운데 배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줄곧 잠자코 있던 키르슈타인 공작이 내뱉은 것이다.
비록 고개를 돌릴 힘조차 나지 않는 몸이지만, 그는 분명히 제 무릎을 땅에 박은 채 자신을 향한 충성을 증명하고 있으리라.
"이곳까지 오시는 길에, 아무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은 분명 사실이겠지요?"
그런 그의 물음조차도 카이네르의 발걸음을 멈추진 못했다.
그저 누군가가 이곳에 훼방을 놓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말을 던진 것에 불과하다 여길 뿐이니.
"그래. 내 자네를 신뢰하기에 아무런 호위도……."
-푸칵!!!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기 무섭게 울려 퍼지는 파열음.
그와 함께 유혈이 전방으로 퍼져나가는 순간, 힘을 잃어 축 늘어진 고개가 꼿꼿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쿠하, 악……!!"
내상에 의한 각혈이 목구멍을 비집고 터져 나온 순간.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는 황제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며 제 배후에 있는 이를 힘겨이 돌아보았다.
"키, 키르슈타인… 공작, 대, 체 무슨……."
-파악!
거친 발길질과 함께 칼을 뽑아내는 키르슈타인 공작.
감히 황제를 대하리라곤 생각할 수 없는 행위이나, 이미 그의 앞에 있는 건 경련이 일어날 뿐인 시체로 전락한 상태였다.
제국의 실세, 성자의 직계후손, 대륙의 지배자, 그리고 새로이 펼쳐질 낙원의 군주…….
현 시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 맞이한 최후란, 그렇게나 조촐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제레프 경."
그것을 자신이 직접 저질렀단 자각이 있음에도, 알베르트는 피가 묻어난 검을 제 손에 쥔 채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
"지금 제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보셨습니까?"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응시함에도, 제레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올곧게 서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섬기는 이를 살해했음에도 아무런 감정의 변화 없이.
"폐하를 살해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한 듯 담담히 속삭여 말할 뿐.
그 대답에 알베르트가 큭, 웃으며 시체를 짓밟았다.
"그래요 제레프. 제 손으로 직접, 제가 충성을 맹세한 주군을 살해한 겁니다."
제 발에 밟혀있는 시체는 알고 있었을까.
이 제국이 진정 두려워해야 할 건 외세의 침입도, 반역자들의 잔재가 아닌 먼 예부터 지펴져 온 반역의 불씨였다는 걸.
"고작……. 혈통만으로 이 땅을 다스려온 어리석은 지배자를 말이죠."
아니, 모르니까 자신에게 의존한 것이리라.
이 제국에 반발하여, 끝내 투옥된 이들이 모이는 '쓰레기장의 군주'를.
황실이 영원이라는 이상을 추구하듯, 자신들 역시 그들을 꺾어 누르며 이 제국의 위에 군림하는 순간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왔다는 것을.
"아아, 가엾은 폐하~! 왜 당신의 충성스러운 가신들을 내버리면서까지, 하필이면 저에게 의존하셨던 겁니까!? 저희 가문은 이 제국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부터 당신들의 억압에 따른 희생자들을 사역해 온 가문이었건만……. 그 부정한 이들을 마주해 온 저희가, 정녕 이 제국이 유지되길 바란다 생각하신 겁니까!?"
극악무도한 살인자나 반란자, 이단자 등등…….
이 제국에서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이들은 예외 없이 이 땅으로 모이며, 키르슈타인은 대대로 그런 이들을 상대해올 것을 강요받았다.
그 또한 숙명이라곤 하나, 정작 가문의 수호자들은 세대가 거듭될수록 그러한 현실에 지독한 염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이 제국이 지향하는 것은 태초의 낙원과 같은 이상향인 것을, 그럼에도 이 나라의 체제를 부정하는 이들은 갈수록 늘어가기만 하지 않은가?
죄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줄어들지를 않는다……. 그건 그 자체로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다.
"폐하께선 누누이 변화가 없는 사회야말로 진정 완벽하다 말씀하셨죠. 네, 그거야 저의 아버지도, 그리고 조부님과 조상님들도 공감하는 바였습니다. 어디까지나 토대가 제대로 세워졌을 때에 한해서!!"
-퍼억!
고함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대찬 발길질은 분명 폭력이었다.
이미 제 죽은 아비를 포함해, 키르슈타인 일가가 줄곧 간직해온 분노가 담긴 매몰찬 폭력.
그 끝에 숨을 허덕인 알베르트가 입가에 그린 미소를 일그러트리며, 그 현장을 지켜보는 유일한 관중을 돌아보았다.
"제레프 경……. 제가 원망스럽습니까?"
제레프 온슈타인.
한때엔 사교도의 일원으로써.
그 후 교단에 거두어져 신앙을 각성해 교단 내의 권위자로 승격되고, 이후 황제에 대한 충의로 불로불사의 비원을 이루고자 했던 자.
"오직, 이 날을 위해 충의를 맹세한 이를 살해한 제가 원망스럽습니까?"
알베르트는 그의 충의가 진실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회력이라는 힘의 매개란 구 황제의 피를 이어받는 것…….
즉, 현 황실의 혈통만이 가능한 것이니까.
"이 또한 운명이라면 따를 뿐입니다."
그래, 그 피만 확보할 수 있다면, 제레프는 누가 저 옥좌에 앉더라도 개의치 않고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알베르트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준 것이다.
'저 옥좌를 적실 위대한 피만 확보할 수 있다면, 그 누가 저 옥좌에 앉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을 아주 조용하게.
"……그래요, 제레프. 당신이 계속 방관자의 역할을 자처해 주셔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듣고 반역을 택한 건 오롯이 키르슈타인 공작 개인의 판단이었다.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확실하고 확고한 배반의 순간을 바라고 갈망하며 가증스러운 속내를 숨기며, 그의 배후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알베르트 전하……. 아니, 새로이 군주의 자리에 오를 분이시여."
그 의지를 존중하듯 길을 열어주는 제레프.
"부디, 저 옥좌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손으로 가리킨 곳엔, 오롯이 하나의 조명만이 비춰지는 옥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밑에 황제의 시체를 내던진 알베르트가 옥좌에 자리를 잡고, 그 상태로 눈을 감으며 제 몸에 감도는 힘을 받아들였다.
-우우웅.
피가 바닥에 새겨진 진에 스밈과 동시에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안개.
윤회력이라 불리는 힘이 옥좌에 앉은 몸에 스며든 순간, 알베르트는 제 머릿속이 뒤섞이는 감각에 정신이 고양되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은 영원한 염원을 위하여……."
그 감각에 심취해 입가에 그려지는 비릿한 미소.
"이 땅을 시작으로, 나는 불멸의 군주가 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리라."
그 간절한 비원을 듣던 제레프가 고개를 조아리고, 그의 앞에서 조용한 기도를 올려갔다.
모쪼록, 지금 옥좌에 앉은 이가 바라는 염원이 자신의 이상향이 되어주길 바라면서.
* * *
그리고 그 이변은 제단을 넘어 영지 전체로 퍼져나고 있으니.
-크르륵, 크하아…….
-어어어어어!!
그 도시를 누비던 중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세인이 조용히 제 배후를 향해 고개를 돌려보았다.
살아 있는 간수들이 몰려든 것인가?
"얼씨구, 이건 또 뭔 지랄이람?"
아니, 절반만 맞는 추측이었다.
정확히는 '살아 있는'을 제외한 부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