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238화 (238/255)

의무병의 환생 238화

언데드란 생을 갈구하며, 살아있는 자를 끊임없이 추적하고자 하는 존재.

그런 그들의 본능이 이 도시를 빠져나가 생자를 찾으라 말하고 있으나, 힘줄마저 썩은 언데드들에게 있어 성벽을 오르기란 쉽지 않은 상태였다.

일부 힘이 있는 개체들은 성벽을 부술 기세로 몸을 들이받았지만, 그 또한 벽이 단단하여 쉽지 않은 상황.

그나마 성벽 중 유일하게 뚫린 출입문을 노린다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나, 정작 언데드들이 몰려드는 곳은 입구가 아닌 정 반대편에 위치한 구획이었다.

-화르륵, 화륵!

도시 내 건물을 불태우며 치솟는 화마에 언데드들이 떼를 지어 몰려간다.

감각기관이 대부분 상실된 그들에게 있어, 빛과 열이란 길잡이로 여겨지는 것.

그렇게 언데드들이 화마를 통해 몰려드는 가운데, 그들의 위에 또 다른 불덩이가 떨어져 내려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마치 운석과도 같은 위세를 자랑하는 거대한 불덩어리.

그 공격은 성벽 위에 자리를 잡은 한 마법사와 그를 보조하는 이들의 협동마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대, 대단한 범위군요……."

"저게 8써클의 영역이란 건가요?"

보조자들이 성벽 위를 응시하며, 제 옆에 자리를 잡고 있는 여인을 돌아보았다.

후드 밑으로 보이는 창백한 피부와 뾰족귀는, 그녀의 태생이 주변의 제국민들과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저는 8써클이 아닙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보좌하고자 따라붙은 마법사들을 향해 조용히 말하길.

"사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이 8써클에 달할 뿐……. 제국의 마법체계를 기준으로 하면 1써클에 불과하다 할 수 있겠죠."

"그, 무슨 말씀이시죠?"

여인의 말에 이해하지 못하는 마법사들.

이 제국의 체계엔 아직 '마나회로가 혈관을 대체한다'는 걸 알지 못하니, 자신의 말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에 대해선 나중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뭐가 됐건 지금 중요한 건 자신은 8써클에 달하는 마나를 다룰 수 있지만, 각 써클 간의 연계가 불가능하여 순수한 물리력만을 다룰 수 있다는 점.

방대한 힘을 품은 매직미사일을 사출하거나, 혹은 일대의 물체들을 전부 염동력으로 들어 올리는 것만이 가능하지, 불이나 전기와 같은 현상조작을 실현하려면 외부의 조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조금 여유를 부린 사이 언데드들이 새고 있군요. 입구로 몰려들기 전에 다시 시작하도록 하죠."

"아, 네! 바로 지원하겠습니다 코델리아 씨!"

코델리아 덴.

그러한 이름을 지닌 여인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 그 자리의 공간이 크게 일그러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주변 마법사들이 마나를 퍼부운 순간 일그러진 자리에 발생하는 불길.

그것이 공기의 흐름에 따라 증폭되고, 이윽고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 성벽 인근지대로 차례차례 추락해갔다.

* * *

"대단해……."

그리고 성벽의 아래.

유일한 출입문의 앞에 세워둔 임시 주둔구역 내에 자리한 성기사가, 망원경으로 응시되는 광경을 보며 연이어 감탄을 흘렸다.

"부단장님, 정말로 언데드들이 불길이 있는 곳으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그래, 덕분에 교전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한시름 놓게 되었군."

태자가 이끄는 황도군, 그와 합류한 태양기사단의 부단장이 진심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태자를 따라온 참에 도시 전체에 언데드가 들끓는 참사를 마주한 상태.

그런 마당에 언데드들이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유일한 입구에 해당하는 곳을 지킬 것이 강제되는 상황이다.

고작 1천 명 남짓에 불과한 병력만으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마탑에서 차출한 마법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언데드들의 관심을 입구에서 크게 떨어트릴 수 없었을 것이다.

"태자님께서 마탑의 사람들을 불러온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어."

"별거 아니에요. 벽외지역을 누볐던 한 학자가 작성한 논문에서 발췌한 내용이죠."

이윽고 부단장의 시선이 향한 곳에 자리한 여인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얀 가운과 더불어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있는 여인.

쓰고 있는 안경의 렌즈가 너무 두터운 나머지, 그 뒤의 눈동자마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다.

언뜻 보기엔 굉장히 맹해 보이는 인상.

하지만 그 정체는 8써클의 경지를 발휘하는 코델리아의 스승이자, 마탑에서 차출한 '외무활동반'을 이끄는 담당자였다.

"그 논문에 따르면 언데드의 추적능력은 기본적으로 열감지에서 비롯된 거라고 하더군요."

곧 그녀가 제 입에 막대사탕을 물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열감지……?"

"인간이 가진 체온에 반응하고 그것을 추적하는 것인데, 그 외에도 냄새나 시야 등으로도 사물을 파악하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마주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추적은 열이 발생하는 곳을 우선적으로 향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자신들을 인지하지 못한 언데드들에 한해선, 먼 장소에 불을 지피는 것만으로 그들을 쉽게 유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설명을 들은 성기사가 눈을 껌뻑이며 되물었다.

"……블레이즈에선 그런 것도 알아낸 겁니까?"

"아차차~ 이런 분석은 좀 싫어하시려나?"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리는 외무담당자.

실제로 교단에선 언데드들은 불경한 존재이며, 신성력만으로 정화해야 한다 가르치고 있는 상태.

그런 고지식한 방안만을 고려한 그들에게 있어, 제 발언은 실로 오만하다 여겨질 법한 것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에 불안해하며 눈치를 살폈지만, 정작 태양기사단의 부단장은 그에 괘념치 않고 미소를 지어 보일 뿐.

"단장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셨죠. 저희들이 신앙을 다스리는 건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위한 일이니, 그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필요한 행위를 타인에게 강요해선 안 된다고."

신앙이란 스스로의 안정과 타인의 희망이 되어주기 위해 다스리는 것이며, 그런 마음을 고지식하게 강요받으면 반발은 발생할 수밖에 없는 법.

새로이 단장의 자리에 오른 청년은, 그런 자신의 깨달음을 누누이 기사단에 전파하며 학자들을 향해 비교적 열린 마음을 보여 왔었다.

그 영향력을 맞닥트린 외무담당자가 의외인 듯 쳐다보다,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리 동생이 참 좋은 친구를 뒀다니까~"

같은 변경출신자로서의 유대를 입에 담으며.

"단장님께서 바빌론에서 복귀하셨다!"

"모두 사주경계해! 언데드들이 추적해올지도 모른다!"

그 직후 측면에서부터 들려오는 외침과 함께, 주둔구역을 지키는 성기사들이 일사불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도로에서부터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것은 성기사단의 단장.

"오우, 레온 단장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네요."

그가 제 어깨에 메고 있는 두 사람을 바닥에 내려주었을 무렵, 외무담당자가 그에게로 다가서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었다.

"바빌론에 한 소대만 이끌고 간다 했을 때엔 걱정했는데 별로 다친 곳도 없어 보이고……. 역시 언데드들에겐 성기사들이 쥐약이긴 한가 보네요."

"……그것도 수가 한정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든다면 저희들도 힘에 겨울 수밖에 없죠."

지금도 수상쩍은 힘이 이 영지에 퍼져나가 시체들을 깨우고 강화시키는 상황.

대대 단위로 왔다 한들, 지금 이 도시에 자리한 언데드들의 숫자만 해도 '군단'급에 해당하고 있다.

그 숫자가 지하의 시체매립지나 묘지 등을 빌어 더 늘어날 수 있음을 생각하면, 당장은 토벌이 아닌 사태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장님, 현재 언데드들이 타르타로스로 향하고 있습니다. 지하로 향한 황도군을 추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 바빌론의 생존자는 모두 구출했으니, 우리도 슬슬 지원을 가도록 하지."

곧 태세를 갖춘 레온이 무장을 고쳐쥐며 여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케이미 씨."

같은 전장을 누볐던 동기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케이미 씨는 이곳에서 캠프의 사수를 맡아주세요."

"네네~ 현장직은 몸 쓰는 분들에게 맡기도록 할게요~"

그렇게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레온과 성기사들을 배웅하는 케이미.

그들을 만족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그녀가, 곧 주둔구역의 휴식지에 남겨진 두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바빌론에서부터 구출해온 유이한 생존자들을.

"그 쪽이 라인하르트 공작님 맞으시죠?"

"네, 그렇습니다만……. 당신은, 마탑에서 오신 겁니까?"

"마탑 소속의 연금술사이자 외무담당자인 케이미 케미스트리라고 해요."

외무담당.

폐쇄적인 마탑 내에서 그나마 외부와 교류를 맺는 반의 책임자로, 그것이 그녀가 태자의 증원 하에 이 영지까지 올 수 있던 이유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거 드셔보실래요? 민트초코라고 하는데, 근래 우리 마탑에서 엄청 인기 있는 간식이에요~"

"…으, 으음. 고맙게 받지."

그녀의 호의를 받아 막대사탕을 받아드는 질리언.

이후 사탕을 입에 물은 그의 표정이 오묘하게 바뀌어가는 가운데, 케이미의 관심이 그 옆에서 숨을 고르는 안젤라에게로 향해졌다.

상태는 심각하지만 신성력을 이용한 응급처치 덕에 당장의 생명엔 지장이 없는 자에게.

"그리고 이 쪽은……. 안젤라 맞죠?"

"…절 알고 있나요?"

"뭐, 탑주님께서 엄청나게 벼르고 계셨으니까요. 공작님은 극진히 모셔오라고 하는 데 반해, 당신을 만나면 엉덩이를 네 쪽으로 갈라버리라 얼마나 불같이 말씀하셨던지~"

장난조로 말하고 있지만, 아마 당시의 발언은 상당히 살벌했으리라 추측이 되었다.

교단과 마탑의 관계가 좋지 못한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특히나 심문관들은 그들 사이에 이단자가 나올까 벼르고 있으니, 그 경향이 더욱 도드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조금 관심이 있긴 하거든요. 그 아이에게 된통 얻어맞고 주교 작위를 박탈당했다 들었으니까."

"……그 아이?"

"당신을 이 감옥도시에 때려박은 아이 말이에요~"

셰인 골드리안.

그런 이름을 가진 소년병은, 케이미가 블레이즈에 있었을 적 같은 연구동을 사용한 전적이 있던 자였다.

"뭐, 개인적으로 그 아이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는데, 마침 마탑에서도 그 아이를 무척이나 호의적으로 보고 있더라고요."

실제로 그 날의 재판 이후 교단의 입지가 조금 약화되어, 마탑의 활동이 수월해진 감이 있었으니까.

마찬가지로 그 기회를 마련해준 공작도 마탑에선 은사라 부를 존재.

교단의 지속적인 견제로 연결고리를 가지진 못해도, 공작이 가두어진 곳에 병력을 이끌고 간다는 건 적극 참여해야 할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 명분만을 보면 그렇다.

'하지만 정작 질리언과 도련님에게 가진 호의만으론, 지금의 상황은 설명이 되지 않아요.'

지금 이 주둔구역에 상주하는 병력엔 성기사단도 포함된 상태.

제 아무리 기사단장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들을 파견하는 건 교단의 고위 권위자들이 내릴 결정이다.

그런 마당에 마탑의 합류가 결정된 부대에 성기사단을 보내고자 하다니. 블레이즈가 아니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케미스트리, 라고 하셨죠?"

더군다나 외무담당자가 다름 아닌 제 앞에 있는 자가 아닌가?

비록 그 이름을 가진 자를 직접 대면해본 적은 없지만, 안젤라는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을 옛적에 한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어요. 알마게스트를 부정한 천문학자가 이단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다고."

"……알마게스트?"

"'가장 완벽한(Almagest)'이라는 의미의 고대어에서 따온 서적이에요. 제국의 천문학인 '천동설'은 그 책을 기반으로 하고 있죠."

검사인 질리언은 천문학에 대해 모르는 것도 당연할 터.

하지만 제 앞에 있는 자는 그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때 케미스트리란 성을 사용하던 학자는, 그 책에 서술된 천동설에 반대되는 '지동설'을 주장했었죠."

자신들이 있는 이 땅이야말로 세계의 중심이며, 우주란 이 땅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한 '천동설'을 바탕으로 한 알마게스트를 부정한다는 건, 감히 신이 만들어낸 완벽한 세상을 부정하겠다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다.

이 땅의 중심에서 살아갈 것이 허락되는 거룩한 자신들이, 사실은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닌 우주상에 존재하는 한낱 미물에 불과했다니.

그걸 설파하는 건 사실상 '이교도'에 해당하는 짓이며, 제국에서 용인될 리는 만무할 터다.

"그리고 폐쇄적인 마탑에서의 외무를 맡는다는 건……. 필연적으로 마탑을 대표하여 교단과 맞닥트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하늘이 움직이는가.

땅이 움직이는가.

어느 쪽이 진실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 나라가 주장하는 것이 천동설이 권위의 상징 중 하나라는 것이며, 그것을 부정하는 건 명백한 반역행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그 자리를 받아들인 건가요? 당신의 입장에서 교단은 원망스러운 존재가 아닌가요?"

자신 역시도 이단자의 딸이기에, 그리고 심문관으로써 많은 이단자들을 마주해왔기에 알고 있는 것이다.

신앙을 가지며 개심을 하지 않는 한, 이단자의 혈육이란 누구라도 제국의 체제를 증오할 수밖에 없다는 걸.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그것이 이 제국의 현실이다.

그런 마음이, 자신처럼 신자가 아닌 학자의 길을 택한 여인에게 남아 있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퍼엉!!

그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기 무섭게 멀리서부터 울려 퍼지는 폭음.

현 케이미의 제자인 코델리아가, 다시금 성벽 위에서 마나를 모아 도시의 성벽 인근에 불덩어리를 쏘아 보내며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주변과 달리 제 얼굴을 굳히거나 감탄을 흘리지 않았다.

폭음이란 그녀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였으니.

"지금도 그런 마음이 아주 없진 않아요. 어렸을 적만 해도 세상 모든 걸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몇 번이고 상상했었죠."

그래, 화약제조사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였다.

니트로글리세린을 활용한 다이너마이트, 솜화약인 니트로셀룰로스와 점토의 성질을 가진 젤리그 나이트…….

과거 전쟁에서 활용되었거나, 혹은 그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폭탄들은 지금도 블레이즈에서 열렬히 사용하고 있다.

그중 일부는 반란군들이 빼돌려 사용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사실상 그 기술을 고안한 그녀는 지금의 전쟁에 있어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창조자와 사용자는 별개로 쳐야하지만, 당초 창조자에게 악의가 없다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화약 같은 걸 만드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걸 찾았거든요."

그럼에도 그런 현실을 맞닥트린 현재.

그녀의 얼굴에 그려진 건 의도를 이룬 것에 대한 성취감도, 의도에 반하는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죄책감도 아니었다.

지금의 그녀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화약을 만들기 위해서도, 제국에 대한 막연한 증오를 퍼트리기 위해서도 아니었으니까.

"재미있는 거……?"

"받으세요. 교단에선 이미 승인을 받아놨으니 먹어도 별문제는 없을 거예요."

의문을 느끼는 안젤라와 질리언에게, 케이미가 제 손에 쥐어진 것을 스윽 건네주었다.

손에 담긴 것은 하얗고 딱딱한 물질. 질리언이 그를 내려다보다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약, 인가?"

"사방이 시체투성이니까요. 아직까지 뚜렷한 병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대비해서 나쁠 건 없겠죠."

케이미가 제 손에 쥔 알약을 제 입에 하나씩 털어 넣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렇게 꿀꺽 삼킨 그녀의 입가에, 곧 상쾌한 미소가 그려졌다.

"화약도, 약도……. 둘 모두 연금술에서 파생된 화학을 기반으로 시작되는 법이죠. 덕분에 블레이즈에서 진행되었던 연구를 인계받는 건 무척이나 편했어요."

사람을 죽이는 화약과 사람을 살리는 약.

대척점에 서있는 두 가지 분야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근간을 같은 곳에 두고 있는 상태였다.

그 둘 모두가 화학이라는 근간을 두고 있기에, 그저 막연한 증오로 시작했던 진로를 매끄럽게 전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약제조사에서 제국 최초의 약사로.'

그래, 그것이 케이미 케미스트리라는 학자가 가진 정체성.

한 소년병과 4년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가지게 된 정체성이자, 외무담당자가 되어 교단과의 교섭을 이끌어가고자 한 이유였다.

"그러니 이번 교단과의 공투를 잘 이용해서 제국 내에 합법적으로 이 약이 퍼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이 약의 연구에 목숨을 바쳤던 학자분을 위해서라도……."

"케이미 씨."

그에 뿌듯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제 손에 쥔 알약을 내려다보는 안젤라가 제 몸을 떨기 시작하였다.

"이 약……."

그건 약학을 부정하는 신자이기에 그런 것인가?

8년 전 재판에서 그토록 혐오하며 부정했던 약학을, 미약하게나마 교단이 인정을 해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아니, 그런 게 아니다.

그저…….

지금의 경악은 그저, 자신이 이 약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 푸른곰팡이의 추출물로 만든 건가요?"

"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으니까요."

과거 제 전우이자 대외적으로는 연금술을 지망했던 학자.

그리고 남들에겐 비밀로 하여 '이단의 지식'을 연구했던 여인을 기억하기에.

"……예전에, 이걸 만들고자 한 학자를 만난 적이 있으니까."

'페니 플레밍.'

그 약을 연구한 끝에 비참히 죽은 한 학자의 결실이.

지금 이 순간 제국에 편입될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