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248화 (248/255)

의무병의 환생 248화

-콰아아앙!!!

창공에 울려 퍼지는 거센 파공성.

그와 함께 탑을 기점으로 생성되었던 거인의.

이 시대를 상징하는 거악의 몸이 크게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무슨…….

머리가 울려온다.

이 대륙을 뒤덮을 기세로 퍼져나가는 먹구름에 맞닿을 정도로 거대한 머리가, 대지에서부터 치솟아 올라온 무언가에 충돌하며 휘청인 것이다.

잿빛의 안구에 서서히 빛무리들이 떠올라 나타난 두 개의 붉은 안광.

그 시선이 사태를 파악하고자 향해진 곳은, 다름 아닌 이 어두운 하늘을 밝히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오, 오오…….

불과 몇 분 전만 하더라도 피투성이나 다름없는 거적을 걸치고 있던 남자.

하지만 그 상처도, 흘렸던 피의 흔적조차 몸에서 새어나오는 광명에 모두 삼켜져 있다.

그런 존재를 수호하듯, 배후에 자리한 빛의 인영이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오오, 그건…….

신앙을 빚어 만든 의지를 가진 존재.

그런 걸 마주한 건 처음이 아니다.

윤회력이라는 힘을 빌어 과거의 흔적을 되새겨, 그를 바탕으로 한 존재를 마주한 건 이단의 방식일지언정 분명 존재하는 행위다.

-내 오래토록 많은 신자들을 보았건만……. 자네와 같은 자는 이제껏 본 적이 없네.

하지만 저런 식으로 신앙을 뒤틀어 만든 힘이 아닌…….

순수한 신성력만으로 의지를 가진 존재를 구축하는 것은, 이제껏 그 누구도 벌인 적이 없는 일이다.

순수한 기도를 빚어 우상을 만들다니.

그 자체로 성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지 않은가?

-고결하구나. 정말로…….

그래, 정말로 밝은 빛이다.

세상에 실망하고, 스스로의 무력함에 실망하여 외도에 들어서길 택하는 자신마저도 동경심이 들 정도로.

-그렇기에 안타까워. 세상 모두가 자네와 같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 또한 결국 한 사람의 각성에 불과할 뿐.

순수한 존재 하나만으로 바뀌기엔,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대는 너무나도 많은 그릇됨을 범하고 있었다.

제 앞의 빛은 누군가를 이끌지언정 세상을 바꾸기엔 역부족이란 것이다.

-어찌 방주의 역할에 어울리는 그대가 나를 적대하고자 이곳에 온 것인가…….

제레프 온슈타인.

그는 이 혼돈에 가득찬 세계를 뒤덮을 해일이 되기를 희망하는 자였다.

태초의 신이 죄악을 안고 태어난 인간들의. 그 추악함을 정화하고자 해일을 일으켰을 때처럼.

그럼에도 이 땅에 여전히 인간이 남아 있을 수 있던 건, 그런 추악한 세계에서나마 사람을 이끌어가는 고결함을 가진 성자가 있었던 덕택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카일 페터슨. 지금이라도 이 밑으로 내려가 재앙이 도래할 세계에 구원받을 이들을 선별하라. 그대라면 분명 이후의 세계를 옳게 이끌어갈 수 있을 테니…….

그래, 제 앞에 있는 자라면.

그나마 덜 더럽혀졌던 시대를 누비며 고결함을 각성한 남자라면, 분명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

그런 바람이 무색하게도, 셰인은 그와 눈을 마주보지 않고 그의 몸체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토머스."

애초에 그가 관심을 둔 건 거인도, 그에 기생하여 제어하는 망령도 아니다.

저 어둠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한 남자.

셰인이 주시하는 건 오롯이 그 존재뿐이다.

"당신, 거기에 있지?"

윤회력은 강대한 미련에 반응하는 에너지.

그러한 미련을 가진 베르디와 마찬가지로, 토머스 역시 그 힘을 다룰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다.

그런 체질을 알고 있기에 제레프는 토머스를 타락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그 힘에 부합되는 자격을 가진 그가, 다름 아닌 자신의 의지로 그 힘을 다루어 원하는 바를 이루게 만들기 위해.

"기다리고 있어. 곧 구하러 갈 테니까."

그래, 저 또한 타인의 부추김에 의한 일.

그 점을 이해한 셰인은 그에게 기회를 주기로 하였다.

처벌이 아닌 기회를.

-구한다니, 무얼 말인가.

그 기회를 주기 위해선.

그의 주변을 두르고 있는 어둠을 모조리 걷어내야만 한다.

-내 그대에게 기회를 주었건만, 그대는 어리석게도 그 기회를 걷어차며 그릇된 길을 가려 하는구나.

그리고 당연히 상대는 그것을 막을 수밖에 없을 터.

-그러나 내 이해한다. 그대와 같은 고결한 심성을 가진 자일수록 당면한 미래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테니…….

그러니 이 싸움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릇된 세계의 존속과 그 파괴를 갈망하는 마음은.

-그러니 주여, 내 당신이 내려주신 이 시련을 달게 받아들이도록 하겠나이다!!

그 운명을 받아들이며 터져나온 절규와 함께, 이윽고 창공을 밝히는 빛을 향해 거대한 손아귀가 뻗어졌다.

존재감을 드러낼지언정, 제 몸을 두르는 어둠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빛.

반대로 거인의 손아귀는 휘둘러지는 것만으로도 일대의 공기가 모조리 밀려날 정도다.

그로부터 비롯된 거센 강풍.

날개의 부유감에 의존하는 상황에, 그러한 압도감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받아들인다.'

-쿠궁!!

이윽고 그의 몸이 거인의 손아귀에 붙잡히고, 세상의 모든 것이 어둠으로 물들어졌다.

그 순간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감각.

물리력이 아닌 정신을 옥죄어오는 충격에 숨이 막히는 것을 느낀 셰인의 시선이, 제 주변으로 향해지기 시작하였다.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무수한 망령들.

그들 하나하나가 붉은 안광을 부라리며 셰인을 향해 손을 뻗어오기 시작했다.

차차 벌어져가는 식탐에 찬 아가리는 그 자체로 산 자에 대한 갈망을 의미하는 것.

그래, 저 거인 역시 이제껏 상대한 것과 다를 바 없다.

그저 무수한 시체와 그들의 원한이 뒤엉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할 뿐.

-콰아앙!!

그저 거대할 뿐인 적 따위.

그런 건 결코 이 순간 주눅이 들 요인 따위가 되지 못한다.

-무슨……!!

제 손끝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감각에 놀라는 제레프.

거대한 손으로 감싸쥔 빛이 상부에서부터 터져나와, 이윽고 주변을 다시 밝혀가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잘려나간 것은 기껏 해봐야 손가락 하나뿐.

하지만 그 정도의 틈새만으로도 탈출은 충분하다.

"좋네, 갈 길을 깔아주는 건."

그 위에 선 것은 두 개의 날개를 뒤로 빼내며, 양손을 틀어쥐고 있는 성자의 모습.

그 양팔에 매어진 두 개의 붕대가 뱀처럼 춤추고.

-파아아앙!!

이윽고 이루어지는 도약과 함께 펄럭이며 나아가는 궤적을 그려가기 시작하였다.

거인의 몸에 비하면 극히 작고 나약한 몸.

하지만 빛이 그려가는 궤적은 빠르게, 전방으로 뻗어졌던 손을 타고 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부질없는 저항을!!!

괴성을 지르며 손을 휘두르는 제레프.

그 거센 풍압과 함께, 셰인이 박차고 달리는 팔의 위에 무수한 장애물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시체와 건물의 파편이, 그리고 윤회력에 침식된 검은 망령들이 해괴한 형태가 되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광경.

-콰가가강!!!

그들 모두가 무자비한 돌격과 함께 바스라 지길 반복하는 순간, 돌연히 나타난 거체가 그를 향해 주먹을 뻗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다.

그저 나아갈 뿐이다.

-지이잉!

제 곁을 지키는 '수호자'를 신뢰하며.

그자가 펼치는 날개에서부터 뻗어지는 섬광에 맞닿은 망령이, 그 빛을 마주하고 정화되기를 바라며.

-쿠구궁!!

그렇게 터져 나온 광명에 밀려 서서히 길을 열어가는 언데드들을 돌파한 셰인이, 이윽고 휘저어지는 팔을 타고 거인의 몸체를 향해 제 몸을 부딪쳤다.

-쿠광!!

붕괴되는 가슴팍.

그 틈을 비집고 파고들어 내부에 난입한 순간, 제 몸에 거센 부유감이 덮쳐오는 것을 자각했다.

착지할 곳 하나 없는 텅빈 장소. 그 안에 들어선 셰인이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걸 이럴 때에 쓰는 말인가?"

그래, 윤회력으로 의지를 발하는 존재를 만들 수 있을지언정, 애초에 윤회력 자체가 물리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압도감을 주기 위해선 제 몸을 부풀리기도 해야 할 터.

그 몸 내부가 바빌론을 중심으로 한 뼈대가 세워진 것을 제외하곤 모두 비워진 것을 자각한 순간, 셰인의 입가에 비릿한 비웃음이 그려졌다.

-카일 페터슨…….

반대로 상대는 그런 셰인을 향한 분노를 감추지 못했으니.

어느덧 공간 전체에 드러난 붉은 안광들이 일제히 셰인에게 쏘아지며, 그와 함께 벌어진 입들이 공간 내에 메아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자네 혼자 이곳에 온다 하여무언가 달라질 거라 생각하는 겐가!?

-혼자서 이 모든 것을 무너트리는 건 불가능해. 무너트린다 해도 그 다음은 어찌할 텐가?

-어찌 자네는 이 추악한 세계를 계속 존속시키려는 거지?

-저항할 수 있을지언정 적대하면 결국 스스로를 죽일 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

-고작 그 몸 하나로 이 재앙을 어찌 막겠다는 것이냐!!

정신을 뒤흔들 듯 울려 퍼지는 굉음.

하지만 그 목소리 어느 것 하나에 강제성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명령이 아닌 설득.

군단을 넘어서 재앙이 되길 희망한 존재가, 지금의 자신으로 하여금 간사한 회유를 번복하는 것이다.

"역시……."

한낱 인간이 맞닥트리기엔 터무니없는 스케일.

"당신도 그 여자처럼 괴물은 못 되는 것 같네."

하지만 그것이 이해할 수 있는 현상임을 알게 될수록 공포는 사그라져 간다.

"괴물이 될 거였으면 애초에 입을 닥치고 있어야지."

그렇게 긴장은 완화되고.

그 빈자리엔 이윽고 호승심이 채워지니.

-콰아앙!!

그 직후 펄럭이는 날개와 함께 휘둘러지는 몸이, 거인의 체내에 자리한 뼈대를 강타하며 균형을 흩뜨리기 시작하였다.

거체를 모두 부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자신이 가진 그릇 이상의 힘을 발한 녀석.

그 부풀린 육체를 지탱하는 뼈대를 붕괴시키는 것으로 급소는 드러날 것이다.

-그만…….

그 붕괴가 가속화될수록 기어오르는 어둠.

-더 이상의 저항은 그만두어라!!

사방에서 몰아치는 시체로 이루어진 촉수무리.

그것을 이루는 시체들이 빨판을 대신하여 뻗어오는 손아귀가, 셰인의 몸을 붙잡고자 사방에서부터 쇄도해오기 시작한다.

-자네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것인가!?

-어찌 다 죽어가는 몸으로!!!

"다 죽어가는 몸이라도 의지 정도는 발휘할 수 있어!!!"

-쿠과강!!

부질없는 저항마저 거센 날개짓과 함께 붕괴되고, 재차 가속화되는 돌진은 무수한 섬광이 되어 맞닿은 모든 것을 바스러트린다.

그런 필사의 저항조차 전체에 의한 티끌만한 붕괴.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아직 꺾이지 않는다.

각오만은 그를 상회할 정도로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계는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 세계.

그러한 세계에 있어, 지금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각오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이 되어주고 있다.

"오히려 분수에 안 맞는 짓을 하는 건 당신이지."

반면 상대는 어떤가.

지금의 이 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보다 높은 이상을 추구하고자 외도에도 서슴없이 손을 뻗고자 하고 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추구하는 건 그저 허영이자 허세에 불과할 뿐.

"신의 대변인을 자처하면서, 신의 위상을 넘보는 빌어먹을 노친네가……!!"

-쿠구궁!!!

뼈대가 부서지고, 그와 함께 거대한 신체가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건 결코 난동에 의한 붕괴만이 아닐지어니.

-그렇게라도…….

그래, 지금의 발언이 그의 역린을 건드리기라도 한 듯.

-설령 내 신이 되지 못할지언정, 그런 식으로라도 연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기를 쓰는 그의 의지에 따라 붕괴되었던 뼈대가 다시 구축되기 시작한다.

위태롭게나마 이 시대의 상징을, 그 압도적인 공포를 다시 곧추세우기 위해.

-그러니 나는 이 탑을 더욱이 높이 세우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재가 되어버린 시대를 살아갈 자들이, 그 이전에 자리했던 혼돈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사력을 다하여, 중심축이 붕괴되어 가는 뼈대를 유지하고자 한다.

뒤틀린 채 형성되었던 건물이 소용돌이치며, 그 압력만으로 육신을 유지시켜간다.

-바빌론이어, 하늘로, 보다 높은 하늘로 날아올라라. 감히 그대를 따라잡으려는 자조차 오르지 못할 곳까지!!

그 힘을 자아내는 건 이제는 세상에 존재치 않는…….

하나 그 의지만은 구축하여 만들어진 망령이 가진 미련에 의한 것.

끝없이 하나의 사명만을 되뇌는 존재는, 그 의지에서 비롯된 힘을 더욱이 확산시키며 필요악으로서의 각성을 준비하고 있다.

"결국 당신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 필사적인 의지도 결국 개인에 한한 것.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대적하는 과거의 존재는, 지금의 제 앞에 있는 존재를 안타까운 존재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글러먹은 시대에서 태어났다는 걸 알았다면, 애초에 그 시대를 살아가는 자기가 가진 사상도 글러먹은 건지는 의심해봐야지."

이윽고 주변을 가득 채우는 소용돌이에 뛰어드는 셰인.

파편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칼날의 폭풍이 제 몸을 깎아내는 것이 느껴졌으나, 온몸에 자리한 빛이 그 상처를 수복시켜가고 있다.

고통을 죽이진 못하지만.

그 고통을 버텨내기만 하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 나는…….

"그러니까, 기왕 잿더미로 만들거면……."

-그, 그만……!!

"먼저 이 따위 잘못된 상징부터 부숴버리자고!!!"

사력을 다한 전진.

그와 함께 용솟음치며 유지되는 뼈대가 거센 빛줄기와 함께 붕괴되고, 그를 기점으로 거인의 육신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쿠과가가가강!!!

바빌론의 탑.

통일된 대륙의, 모든 것을 포요함으로써 생겨난 혼돈을 상징하는 탑이 붕괴되며, 모든 것이 흩어져 사라져간다.

'하지만 하나된 것의 분단이 정녕 멸망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 그저 억지로 뭉쳐둔 것은 조화가 아닌 혼돈이라 말하는 것.

그리고 그 혼돈은 애초부터 이 땅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끝에 찾아온 분단의 시작점은 재앙이 아닌 필연.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버텨내고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순간을 버텨낸다면.

그저 광활하기 그지없는 우물에 불과한 이 땅은, 비로소 그 경계를 허물음으로써 새로운 시대로의 도약을 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쿠과가가강!!!

그 거센 의지에서 비롯된 대찬 붕괴와 함께 균형이 붕괴된 탑.

검은 하늘을 지탱하던 주축이 무너지니, 하늘에서 어둠이 거두어지며 서서히 빛이 도래하기 시작한다.

달빛도, 별빛도 서서히 사그라져가는 세상에,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비춰오는 동틀 녘의 햇살이.

'날개의 힘이 약해진다.'

그 빛을 등에 진 채 잔해 위에 선 셰인이, 제 배후의 날개가 서서히 증발해가는 것을 느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이라 평해질 일일까?

하지만 그렇게나마, 기적적으로 찾아온 기회를 어찌 활용할지는 본인의 몫에 달린 일이다.

-쿠웅!!

당장이라도 기울어질 것 같은 다리에 힘을 실어 넣은 셰인이, 제 시선을 또렷이 뜨며 전방을 응시하였다.

골자가 무너지고 사라진 거인.

그 빈자리에 서서히 도래하는 빛이 비춰가는 가운데, 검은 힘에 잠식되어가는 남자의 모습이 셰인의 눈에 들어왔다.

심문관 토머스.

시대의 상징이, 그 악이 무너진 상황에도 그의 주변엔 아직도 망령의 기운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 아니야……. 아직!!!

그로부터 비롯된 저항을 맞닥트린 순간, 셰인이 자신의 오른손에 매어진 붕대를 펼쳐갔다.

반대쪽 손을 제 가슴팍으로 향하며.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탑이야 다시 세우면 된다. 황족의 피도…….

'혈도개방 8써클.'

그 한계 이상의 경지를 개방시키되, 그럼에도 그 힘의 흐름은 굉장히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허공에 뻗어진 오른팔의.

그로부터 뻗어져 나오는 붕대에 밀집되어가는 피가, 새로운 써클이 되어 체내에 용솟음치는 마나의 흐름을 안정화시켜 가고 있으니.

-주여!! 어찌 내 그대의 시련을 극복하였는데도 이런……!!

"의술의 신이여."

그로부터 서서히 생성되는 피의 칼날에.

"나에게……."

그 몸에 어린 빛이 서서히 밀집되어가며 하나의 빛을 만들어간다.

"한 사람을 더 구할 수 있는 용기를 선사해주소서!!!"

그 기도에 부흥하며 생성된 한 자루의 칼날.

제 팔을 기점으로 생성된 8개의 중첩이, 피에 적셔진 붕대를 기점으로 생성된 추가적인 써클을 빌어 안정화를 이뤄간다.

'중첩 9써클-집도(執刀).'

그것은 인지를 초월한 찬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그 그릇마저도 돌파하며 만들어진.

오롯이 한 남자의 신념과 인생을…….

그리고 그것을 이어받은 계승자의 모든 것이 집약된 상징체.

-서걱!!!

그 칼날은 이윽고 한 줄기의 섬광이 되어, 자신을 저지하고자 하는 검은 장막을 도려내며 지나쳤다.

막대한 물리력이 응축되었음에도, 무엇보다도 예리하게 벼려진 칼날은 닿은 모든 것을 베어 넘기기에 이르니.

하지만 그 칼날에 어린 빛은 베어 넘긴 이를 수복시킨다.

사망의 선고가 떨어지기 전의 출혈 한 방울조차 없이, 체내의 세포 하나하나마저 베였다는 자각이 없도록.

-마, 알도…… 안 돼.

반대로 그에 위배된 모든 것은 베어지고, 부서지며, 이윽고 정화되어 사라져간다.

-필멸, 은… 반드시, 찾아와야 하는…….

이 걷잡을 수 없이 키운 미래의 상징이.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부질없이 무너지는 것만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이 사그라져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 비참한 깨달음이 외도에 들어선 자의 최후에 남은 전부.

"나도, 당신이 틀렸다곤 생각하지 않아."

셰인은 그런 노인이나마 동정을 해주었다.

"세상 제대로 살아가려면 자기 손에 있는 걸 덜어낼 줄도 알아야지."

그릇된 근간을 안고 태어났음에도 올바름을 추구했던……. 적어도 그 마음만은 옳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하지만 이 시대에 그걸 알려주는 건 당신이 아니야."

하지만 그 또한 결국 근간이 그릇되었던 결정.

하나의 길만을 추구한 그는 또 다른 가능성을 상정하지 못하였고, 그로부터 비롯된 이상은 그 누구의 이해도 받지 못하는 법이다.

그저 스스로의 억울함에서 비롯된 투정으로 전락할 뿐.

이제는 존재치 않는 이에게 내려줄 답이란 그것뿐이었으니.

"…일어나, 환자양반. 진찰시간 다 됐으니까."

하지만 그 충고는 오롯이 떠나간 이를 향한 것.

제 앞에 있는 남자에겐 아직 기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이 마련해준 기회를 어찌 받아들일지에 따라서.

"상냥하군요, 당신의 칼날은."

"…상냥해야지. 의사인데."

어둠이 거두어지고.

아직 의식을 유지하는 그를 향해, 셰인이 피식 웃으며 제 손에 자리한 칼날을 걷어내었다.

이곳에 온 이유는 그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니까.

그 손에 칼을 쥘 지언정, 그 모든 것은 오롯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철칙은 제 앞에 있는 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바.

셰인의 기준에선 그는 죄인이고 성직자이기 이전에, 그저 자신이 거쳐온 삶의 기억에 고통받는 '스트레스 장애환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도, 나, 진짜…. 이제 힘드니까…."

그러니 칼을 거두어낸 손으로 주먹을 틀어쥔다.

이 망가진 육체에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쥐어 짜내며.

"이 이상의 스트레스 장애 치료는…. 물리치료로 대신할 테니까, 그런 줄 알아."

그렇게 틀어쥔 주먹의 떨림마저 서서히 잦아들어가는 순간, 그를 앞둔 토머스가 희미한 미소를 그리며 제 고개를 숙여갔다.

'한결같군요, 당신은.'

그 한결같음이 지금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인가.

모쪼록 그 이상이 이후의 시대를 밝혀주길 바란다. 그것을 위한 기도를 위해 토머스가 제 양 손을 맞대었다.

그래, 그것이 한 밤에 이루어진 기나긴 싸움의 종막이었다.

-콰앙!!

모두가 무한히 이어지리라 여기고.

모두가 무한히 이어지길 갈망했던 낙원의.

그 거짓된 세계의 붕괴를 알리는 숭전보가, 이 광활한 폐허에 조용히 울려 퍼지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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