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250화
쌀쌀한 겨울철의 거리.
그곳을 누비는 중 커피만큼 마시기 좋은 음료가 어디 있을까?
물론 커피는 제국에선 무척이나 귀한 음료이지만, 그 희소성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교단 역시 어느 정도 일조하고 있었다.
"한때에 야만족들이 마시던 불길한 색의 음료……. 당시엔 독극물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당대 교황성하께서 커피에 세례를 내려 정화했다고 하였죠."
흑색에 쓴맛이 나는 나머지 독극물이라고도 오해를 받았던 악마의 음료.
그것이 세례식을 거친 후 성스러운 음료로 뒤바뀌었으며, 이후 커피는 종교적인 의식에도 종종 기용될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화다.
그 유사품을 노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판국에 악마의 음료라니.
"죄송해요. 기껏 대접해드린 게 민들레 커피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이 편이 부담되지 않고 좋으니까요."
한바탕 눈이 쏟아지는 겨울철.
그건 제국의 수도인 아스토라 역시 예외가 아니었지만, 현재엔 제도의 주민들이 눈을 쓸어 넘김으로써 바퀴 역시 무난히 지나갈 수 있게 되었다.
다리가 불편한 토머스에겐 다행으로 여길 일이었다.
바퀴가 달린 의자를 이용하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거리를 누빌 정도의 여유는 발휘할 수 있으니까.
"오히려 나들이에 어울려주신 데에 감사할 뿐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저도 산책하는 건 좋아하니까."
줄곧 병간호를 맡았기에 실내에만 있던 참.
그의 쾌차와 더불어함께 어울리는 건 메어리 역시 바라는 바였다.
걱정이 드는 건 자신이 아닌 그의 상태일까?
"전치 6개월이라네요."
1달이란 긴 시간 동안 잠들어 있던 데다, 그 육체는 이미 신성력이 제대로 들지 않을 정도로 많은 혹사를 거친 상태였다.
그를 진찰했던 의사 역시 '이제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하다' 평할 정도.
'하지만 반대로 자연회복력은 평범한 사람보다 뛰어나다 했었지.'
진찰한 자의 말에 따른 바, 완치에 6개월을 잡은 것도 상당히 빠른 축이라고 하였다.
육체에 쌓인 부하도 버티고, 버티다보니 그 몸이 고난에마저 적응했단 것일까?
두드릴수록 강해지는 것이 마치 철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많은 상처가 엿보이는…….'
걸치고 있는 옷의 사이로 보이는 피부.
"그는……"
그로부터 드문드문 보이는 상흔을 씁쓸히 쳐다볼 무렵, 토머스가 메어리를 향해 돌연히 질문을 건네었다.
"셰인 씨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셰인 골드리안.
다 죽어가는 몸으로나마 자신을 업고 제국으로 복귀한 남자.
그리고 제 부상을 달래면서도 자신의 진찰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깨어났을 때에 못다 한 이야기를 할 기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것도 의외의 방식으로.
"고향이라면, 골드리안에 말입니까?"
"2년 이상 얼굴을 못 비췄다고 하니까요. 앞으로 몇 년 간은 그곳에서 지낸다고 하네요."
그만한 전란에 휘말리고도, 그리고 진실을 맞닥트리고도 유유히 고향으로 돌아가다니.
그답다면 그 다운 일이지만, 천성이 군인인 그가 전쟁 중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누구나 의외라 여길 일일 것이다.
"만약 휴전선언을 하지 않았다면 바로 전장으로 향했겠죠."
그래, 향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1달 전, 그 전란 속에서 황제를 숙청한 제 1황태자는 그 효수된 목을 반란군에게 제 손으로 넘겼으니까.
반란군들의 입장에선 증오스러운 인물.
설령 그 뒤를 이어받을 자가 같은 피를 이었다 한들, 경계심을 느끼며 한 수 접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과열되었던 전쟁은 휴전에 돌입하고, 그로부터 1달이 지난 현재엔 중심지와 변경을 기점으로 한 휴전선이 중축되고 있는 상태.
하지만 그로부터 거리가 떨어진, 제국의 수도에는 그런 여파가 전혀 엿보이지 않고 있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참혹하더라도, 당면하지 않으면 그 처참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는 것.
"궁금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런 전란의 중심에 설 뻔했던 토머스가 메어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궁금하다니, 무엇이 말인가요?"
"키르슈타인 공작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국을 지탱하는 세 기둥 중 하나가 붕괴되고, 황제와 교황이 태자의 손에 숙청되기까지.
정보의 통제가 엄중히 이루어져 언데드의 대량 부활 같은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알려진 사실만 하더라도 제국에 불온함이 조성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겉으로 티가 나지 않을 뿐.
분명 지도층 중 일부는 태자에게 반발을 느끼며, 반란군과는 별개 된 '제3의 세력'으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요?"
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읽었음에도 메어리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길 뿐이었다.
그녀는 정치가가 아닌 신자이자 심문관.
규율을 어기는 이들을 처리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일이지만, 제국이 분단된 후 벌어지는 일들은 대부분이 규율 밖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 일들도 모두 잘못되었다며 통제와 숙청을 주장한다…….
그것이 허울 좋은 이상론에 불과하다는 건 메어리도 절실히 실감한 바였다.
"때로는 모르는 게 좋은 법도 있는 거고……. 안다고 해도 잠자코 지켜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겠죠."
신자로썬 참으로 유연한 사고가 아닌가.
그래, 어쩌면……. 이후의 시대엔 교리에만 집착하는 사고를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메어리 양."
하지만 그걸 권장하는 건 기존의 세력을 붕괴시키는 거나 다름없는 일.
"메어리 양은 앞으로 어찌하실 겁니까?"
설령 교단이 명맥을 유지한들 영향력은 축소될 것이며, 정치나 군사에 대한 강제력 역시 행사하지 못할 것이다.
공무에 간섭하는 심문관 역시 예외는 아닐 터.
"글쎄요, 저는 일단 교단에 남아야겠죠."
하지만 신앙을 각성한 이들 중 권력을 바라는 자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있더라도 그건 대의를 위해서일 뿐.
올바름의 기준이 달라진다면 반발은 있을지언정, 언젠가 모두가 그 상황에 순응하며 받아들일 것이다.
적어도 메어리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그렇게라도 만들겠다는 사명이 존재하기에, 그녀는 여전히 교단에 남아 있길 택하고자 하고 있었다.
"추기경님께선……."
반면 제 앞에 있는 자는 어떨까?
오랜 시간 이단의 숙청을 업으로 삼아온 남자는.
그러한 과정에서 세상에 실망하며, 타락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갔던 남자는 앞으로도 교단에 남길 희망할까?
"아……."
그에 대해 물어보려는 가운데, 문득 메어리가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휠체어를 잡아끌던 손 역시 도중에 멈추어지니. 의문을 느낀 토머스가 메어리가 멈춰선 장소를 스윽 응시하였다.
"무언가 신경 쓰이는 게 있으신 겁니까?"
"아, 그게……. 마침 전시관이 보여서요."
전시관.
각 시대를 대표하는 제국의 예술품들이 모이는 장소로, 제국의 중요 행사인 예술제의 예술품 중 고점을 받은 작품들이 이곳에 전시가 된다.
사실상 각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
그건 전쟁이 벌어지는 중에 개최되었던 예술품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 번 들려볼까요?"
공교롭게도 둘 모두 당시 일 때문에 예술제에 참여하지 못한 상태.
전시관의 경우 귀족이나 막대한 입장료가 있어야만 입장허락을 받을 수 있으나, 추기경 정도라면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더라도 충분히 입장할 수 있다.
그럼에도 토머스는 제 눈에 감긴 붕대에 손을 올리며 안쓰러움을 토해낼 뿐.
"신경 써주신 건 고마우나 삼가도록 하겠습니다. 공교롭게도 전 그림을 감상할 수 없는 몸이니까요."
그가 볼 수 있는 건 오롯이 과거의 잔상, 그로부터 비롯된 악몽과 같은 것…….
이전에 의식을 잃었을 때엔 부드러운 무언가를 마주한 듯 했지만, 그 또한 한때에 불과할 뿐이다.
"…어쩔 수 없네요."
그 점을 이해한 메어리가 휠체어를 돌리고, 다시 거리를 거닐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서로가 말없이 나아가길 몇 분이 지났을까?
사두었던 커피도 모두 마시고, 그로부터 데워졌던 몸에 서서히 한기가 덮쳐오기 시작했다.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나. 생각할 무렵, 토머스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고 보면, 메어리 양의 가족 분께서도 예술제에 그림을 출품했다고 하셨죠."
긴 시간에 걸친 고심 끝에 내뱉어진 대답이었다.
슈베르트 블러드메리.
그에게 이단 혐의가 있음을 알게 된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신자가 교단에 귀의하며 자신의 성을 반납한다곤 하지만, 그 몸에 흐르는 피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하물며 아인츠바이의 테러사건을 조사하기도 했으니, 그들의 장부를 조사할 기회는 여럿 접할 수가 있었다.
"네, 그랬죠."
그리고 그건 토머스의 독자적인 조사였을 뿐.
다른 심문관들은 물론, 메어리 역시 자신의 오라비에게 그런 혐의가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테러 사건 이후, 그녀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심문관의 사명에만 충실했으니까.
"그 그림은 어찌 되었습니까?"
"공교롭게도 전시관엔 전시되지 않았어요."
물론 예술제에 전시되었다면 그 그림에 대해 알 기회도 넘쳐났을 테지만, 정작 그녀는 제 불온한 물음을 짧은 대답으로 일축할 뿐이었다.
불안함보단 실망감이 드러난 목소리로.
"전시되지 못했다니……. 아인츠바이 공작가에서 출품한 작품이 말입니까?"
"확실히 모두가 의외라고 여기긴 했지만, 아무래도 권장되지 않은 방식으로 그려져서인지 채점에서도 열외 되었다 하네요."
순수하게 녹색을 띠는 염료가 아닌, 직접적으로 색을 혼합하여 그림을 그린다.
위법이라곤 할 순 없으나, 이 제국의 예술계에선 결코 권장되지 않는 일이다.
그런 걸 중요 행사에서 강행한 건 그 자체로 반란의혹이 생기기에 충분한 일.
그런 마당에 자신이 없는 현장에선 그런 의혹이 재기되지 않고, 그저 채점에서 열외 되는 정도로 그친 것이다.
"그 후엔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되긴요.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고향으로 돌아갔죠. 공교롭게도 저도 1달간은 바쁘게 뛰어다니느라, 오빠의 얼굴을 볼 겨를도 없었고요."
그래, 아무도.
그 현장에 있던 누구도, 그가 그렸던 그림에 대해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은 것이다.
굳이 자신이 아니라도 그런 의혹이 재기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터인데.
"그래도 예술을 숭배하는 가문에서 출품한 작품이어서인지, 전시관 말고 다른 곳에나마 전시해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고 하네요."
"다른 곳이라니……?"
"아, 마침 저기 있네요."
귀가하기 전, 메어리가 거리의 한복판에 시끌벅적한 곳으로 휠체어를 움직였다.
제도 아스토라의 광장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이곳은 평민도, 귀족도 예외 없이 오고갈 수 있는 장소다.
고액의 입장료나 권리가 없다면 들어가기 어려운 전시관과 달리.
-웅성웅성.
광장에 모인 군중의 재잘거림.
당장만 해도 수백이 넘는 사람들이 그곳에 거대한 캔버스를 둘러치고, 저마다 한 마디씩 던지거나 각자의 의견을 설토하고 있었다.
그저 지나치듯 가는 사람들 역시도 한 번쯤 멈춰서며 그림을 눈에 새길 정도.
다름 아닌 공작가문을 대표하는 그림이란 소식이 들린 만큼, 누구라도 한 번쯤은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옛날엔 잘 몰랐는데, 오빠가 그림을 참 잘 그리긴 하나 보네요. 사람들의 발길을 이렇게 많이 끌어 모으고……."
진상을 알게 된 후엔 혐오보단 동정이 느껴졌지만, 정작 그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를 인정하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그 또한 기적으로는 이루지 못한 기술에 의한 것일까?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그 소소한 첫사랑의 흔적을 되새긴 그녀가 쓴웃음을 짓는 것도 잠시.
"어떤……."
자신과 함께 그림을 마주한.
"어떤, 그림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 그림을 감상할 수 없는 남자의 물음에, 메어리가 애석함을 느끼며 되물었다.
"……궁금하신 건가요?"
"네, 무척이나……."
전시관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볼 수 없다 해도 군중의 기척 정도는 감지할 수 있는 몸이다.
그에 흥미가 생긴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뭐가 됐건 그를 배려한다면 설명을 해야 하리라.
"녹색……."
곧 메어리가 그에게 자신의 눈에 새겨진 광경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녹색으로 물들어진 파도가……. 왼쪽에서부터 중앙으로 모이고 있네요."
"녹색의, 파도가 말입니까?"
"네, 순수한 녹색을 띠는……. 아마 샬레 그린이라 불렸던 도료가 저런 색이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무척이나 순수한 색을 띠기에 많은 이들에게 각광을 받은…….
설령 독을 품었다는 의혹이 존재한다 해도, 모두가 한결 같이 묵인하며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각광을 받는 색.
"물론 애초에 물감을 섞어서 그렸다고 하니 샬레 그린은 아니겠죠. 애초에 그 도료는 골드리안에서 관리하고 있어서 돈이 있어도 구하기 쉽지 않은데…."
"계속."
아직 진상을 알지 못하는.
"계속,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 어린 심문관의 말을 끊어낸 토머스가, 그녀에게 마저 설명을 요구하였다.
여전히 제 앞에 보이는 건 어둠뿐이지만, 그녀의 말로나마 제 앞에 있는 그림을 상상할 순 있으니까.
"……오른쪽에는, 왼쪽과 달리 두 개의 강이 흐르고 있네요."
이윽고 메어리의 시선이 그 반대편으로 향해졌다.
"강, 말입니까?"
"네,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물들어진……."
메어리의 두 눈이 게슴츠레 뜨여졌다.
"그런 두 가지의 색으로 물들어진 물줄기가 섞이고……. 그렇게 범람하는 파도가, 마찬가지로 녹색을 만들고 있어요."
왼쪽과 심히 유사한 색.
아니, 무척이나 같은 색이다.
그저 과정을 보여주는가, 결과만을 보여주냐의 차이일 뿐.
이 그림에 나타난 녹색은 그 본질이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계속 설명해도 될까요?"
"네. 물론……."
그런 식으로.
메어리는 그저 제 눈에 보이는 광경을 그저 되는 대로 설명해주었다.
주관적인 감상을 최대한 배제하고, 최대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둘씩 입에 담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두 개의 파도가 중앙에 모이고, 그렇게 여성의 몸을 물들이고 있어요."
"여성……?"
"네, 기도를 드리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 파도가 어우러져서 옷처럼 변해가는데……. 왼쪽은, 오른쪽과 달리 뼈만 존재하고 있어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살이 없이 뼈만 남아있네요."
"……."
"또 그 뒤에 날개가 펼쳐져 있는데, 한쪽은 환한 색을 띠고 있지만, 다른 쪽은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고……. 아, 밑에는 점이 가득하네요. 점이 아니라 사람……. 네,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그 밑에 잔뜩 있는데…… 저 멀리서는 칼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횡설수설 이어가는 설명.
그렇게 설명을 해주는 중에도, 메어리는 드문드문 토머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제 말에 호응 없이 침묵을 유지하는 그에게로.
마치 자신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자신이 본 것이 그에게 와닿는지를 불안해하는 것처럼.
"메어리는, 저 그림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그래, 토머스가 가능한 건 그저 상상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상상은 분명 그녀가 마주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이리라.
"글쎄요. 저는 예술에 대해선 정이 없는 편이라……."
그 상상에 당장이라도 몸서리가 쳐질 것 같은 자신과 달리.
"그래도 굳이 말하자며……. 마냥 보기 좋은 그림이란 생각은 안 들어요."
정작 제 눈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그녀의 입에서 내뱉어지는 건 무덤덤함에 불과할 뿐.
"잘 그리긴 했지만 너무 추상적이고,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네요. 뭔가를 설명하는 것 같지만 와닿지 않는다고 할까."
아름답지만은 않다니.
미를 숭상하는 제국의 예술계에선 뼈가 아픈 평가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평가가 마냥 부정적이었다면 군중이 몰려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심오하다, 혹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평가를 내릴지언정, 저 그림을 경계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추기경님?"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알지 못하는.
행여나 모두가 놓치고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그런 막연한 상상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토머스가, 휠체어에서 벗어나 서서히 앞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나마 위태롭게, 하지만 필사적으로.
"아무도……."
그럼에도 어째서일까.
제 속에서부터 느껴지는 이 응어리는, 그저 제 앞에 있는 미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만이라곤 할 수 없었다.
"아무도 이 그림을 치우지 않았군요."
조금이지만.
아주 조금이지만, 혹시나 싶은, 그런 기대감이.
"황실도. 그리고 교단도……."
지금의 시대에, 어쩌면 만에 하나라도 불온한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하며 두려워 마지않았던 것이.
사실은 그저 잘 그려진 한 장의 그림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있기에.
"하지만 만약……. 저와 같은 이들이, 이 그림을 향해 죄를 묻는다면, 이 그림을 그린 자는 분명 죄인이 되었겠지요."
줄곧 그래오지 않았는가.
변치 않는 한 권에 적힌 규율만이 정의였고, 진리였고, 지켜야 할 사명이자 모든 것이었기에 그에 위배되는 모든 걸 배제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모두가 깨달아가고 있다.
연기된 평화 속에서 전쟁이란 게 와닿지 않는다 한들.
지금부터 펼쳐질 시대는, 그런 규율에 수용될 정도로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걸.
"그런 자각조차도 없이, 우리들은……. 너무나도 오래토록 멀리 돌아왔군요."
아니, 어쩌면 진작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이야 옛적부터 찾아온 것이다.
그저 책에 적힌 구절을 따라 죄라고 부르면 죄라고 부르는, 그저 변화에 대한 두려움만을 느꼈던 시대로부터 탈피하려던 기회가.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래, 이 순간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런 변화를 자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평민도, 귀족도, 그리고 자신과 같은 교단원 역시도…….
"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어요."
하지만 자신은 어떤가.
그저 한때의 처참함에 절망하고, 그런 추한 세상에서 눈을 돌리고자 스스로의 판단과 주관마저 내버린 그는.
모두가 변화를 무의식적으로 수용하는 현재에도, 눈을 잃기 전에 마주했던 잔혹한 현실만을 끝없이 되뇌고 있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요……. 모두가 인정하고 받아들인 세상마저, 이 눈으로 볼 수가 없게 되었어요."
타락을 두려워한 나머지 기적마저도 거부해 버리고 만 비참한 꼬락서니…….
하지만 그런 그를 누가 죄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 역시 타의에 밀려 죄를 범하고, 그릇된 근간을 이어받을 수밖에 없던 안타까운 피해자일 뿐이거늘.
"그런 저는…….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 걸까요?"
그런 애통함이 이윽고 군중이 보는 앞에서 흐르기 시작하고, 줄곧 마음의 상징으로 여겨온 목주마저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들의…….
차마 이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해, 비참히 목숨을 잃어간 동료들의 추억을 안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듯.
"앞으로 어찌해야……."
"추기경님."
그 옆을 지키는 유일한 신자.
메어리가 차디찬 바닥에 맞닿은 그의 손을 포개어주며, 그를 향해 나지막이 속삭여 말했다.
"그 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이젠……."
그래, 때가 찾아온 것이다.
낡은 사상을 접고, 줄곧 맡아온 역할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이들에게 전해야 할 때가.
"이제는 저희들에게 맡기고 편히 쉬어주세요."
겨울날의 한때.
제도의 광장에선, 한 신자의 은퇴식이 무척이나 조촐하고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