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252화
'독립을 하겠다면 막아서진 않겠다.'
그것이 새로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자가 제 가신들의 반발에 했던 대답.
그를 섬겨야 할 이들에겐 어이없게 들릴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계승식이 오기도 전에 황좌를 찬탈한 것도 모자라, 전쟁을 벌이는 마당에 자신들의 가신들마저 내쫓겠다니.
'요는 전쟁을 대비해 기존의 체제를 벗어나고자 하는 나의 방침에 불만을 품은 것이 아닌가?'
'그 또한 선조가 내려준 과업인 만큼 저희들이 감내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한데 제국 땅의 절반을 그들에게 내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 와선 이제까지 제국에 충성을 맹세해 온 저희마저 내치려 하다니…….'
'내치는 게 아니다. 불만이 있다면 그대들의 발로 이곳을 벗어나라는 거지.'
이 제국에 반기를 들고, 지금에 와선 휴전협정을 맺어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나라를 구축하고 있는 반란자들처럼.
그 말을 따르는 건 이제껏 일궈온 것과 충성심을 모두 내팽개치라는 것과 다름없으나, 그런 무모한 의견에도 황제처럼 반역을 추구하려는 이는 그 자리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로.
'라인하르트 가문은 현 시간부로, 라인하르트를 지지하는 24개의 가문과 함께 제국에서의 독립을 선언하겠습니다.'
그 회장에선 황제의 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권위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제국을 지탱하는 세 기둥 중 하나. 다름 아닌 귀족들의 대표격에 해당하는 이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제국을 벗어나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 선언을 한 것이다.
줄곧 지켜온 역사와 전통이 무너져 내린 순간.
그에 모두가 할 말을 잃고 허망함만을 표현했으나, 정작 황제는 그의 결정을 보며 씁쓸한 미소만을 지으며 이런 말만을 남길 뿐이었다.
'수도를 옮겨야겠구나.'
모략을 꾸민 키르슈타인에 이어, 이 제국에 대한 충성을 간직한 공작마저도 이 나라를 벗어나길 희망한 상태.
주축이 되는 두 개의 기둥이 뿌리 뽑힌 만큼, 그들에게 지탱되는 대들보의 위치를 바꾸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 * *
그리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현재.
"네, 그럼 이 부분은 이렇게 하기로 하고……."
그 날과 마찬가지로 회담장에 찾아온 질리언이, 마찬가지로 제국의 황제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가신과 주군의 입장이 아닌, 제국의 황제와 외교를 펼치는 한 나라의 국왕이 된 자로서.
"그럼 그쪽의 영토는 그대에게 소유권을 넘기도록 하지."
"매장된 자원을 수출할 생각인데, 그 비율은 어느 정도로 하는 게 좋겠습니까?"
"그건 다음 회담에서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자원을 채취하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릴 테니…."
200년간 이어져 온 통일제국.
외교라는 개념이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회담장에 선 두 사람의 교섭은 무척이나 무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치 이러한 상황이 올 것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것처럼.
"라이덴발트의 국왕이 올 때면 회담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는군요."
"그보다 폐하께서 많이 배려해 주시니 그런 거죠."
비교적 제국에 우호적인 타국의 대표들이 그 광경을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상황.
그렇게 두 사람이 주도하는 회담이 무난하게 끝이 났을 무렵, 황제가 성의 알현실에 질리언만을 따로 불러내었다.
"라인하르트 국왕. 자네 덕에 이번 회담도 무난히 끝이 났군."
"폐하께서 많이 배려해 주신 덕입니다."
아무리 제국이 축소되었다 한들, 애초에 분리되길 희망했던 지역은 라인하르트 가문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변경지대였다.
전쟁 이전에도 황실의 지도력이 극히 희미했던 장소들.
그런 만큼 반역의 파도가 크게 덮쳤던 것이겠지만, 알랭은 휴전협정을 맺은 후엔 그런 이들을 상대로도 많은 관대함을 보였다.
도저히 제국의 지도층을 붕괴시킨 폭군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그렇기에 전쟁의 참혹함을 아는 이들에겐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 황제.
"……아니, 자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그럼에도 황제는 지금의 시대를 만든 것이 자신이 아닌, 제 앞에 있는 타국의 왕이라 여기고 있었다.
"라인하르트 공작, 자네는 10년 전 그 날의 재판에서부터 이미 독립을 생각하고 준비해 왔지 않은가?"
공작이 된 자가 선뜻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독립에 나섰을 뿐 아니라, 그 후 적극적으로 외교에 가담하여 제국 내의 반동세력들을 약화시키는 데에도 일조하였다.
기존에 있던 틀을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많은 책임을 짊어지는 일인지를 몸소 보여줌으로써.
만약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자칫 축소된 제국이 추가로 분리될 뿐 아니라, 외세의 침략을 대비해야 하는 상황에도 제국 내의 결속을 다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해야 할 일이겠지요."
황제의 예상대로, 질리언은 그날의 재판 후로 그러한 미래를 예견했던 몸이었다.
만약, 만에 하나라도 이 제국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면 자신이 그들을 제어하는 역할을 맡을 필요가 있다고.
오롯이 과거에서 온 자의 의지를 잇고, 그의 이상에 감명 받은 자신만이 그런 목적을 이룰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렇기에 독립을 준비하고자 긴 시간에 걸쳐 군사훈련을 펼치고, 교단과의 연결을 최대한 멀리하고자 했던 것이건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예상보다도 앞서 전쟁이 터졌을 뿐 아니라, 제국의 핵심 지도층들은 반란을 넘어 대륙의 전복을 꿈꾸기에 이르렀었다.
"정말, 자네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그런 수모의 끝에 휴전이란 형태로나마 유지된 평화협정.
그 공을 자신이 아닌 다른 이게레 돌리는 건 분명 실례가 되는 일이리라, 생각한 질리언이 정중히 예를 취하며 자리에서 등을 돌렸다.
"슬슬 가보도록 하지요. 자리를 오래 비우면 모두가 걱정할 테니……."
"아아, 떠나기 전에 잠시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다만."
막 자리를 벗어나려는 질리언을 불러 세우는 알랭.
이후 그를 돌아보자 질리언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되물었다.
"외교에 대한 건 아니겠지요?"
그거라면 이전의 회담에서 처리했을 테니까.
"전 가신의 의견을 참고하고 싶은 것뿐이네. 거절해도 상관없다만……."
"가벼운 조언이라면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결별했다 한들 현 대륙 외교의 중심이 되는 자가 아닌가?
국내 사정에 대한 걱정을 해결해 주는 건, 그가 행하는 외교의 윤활제가 되어줄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왕이 되고도 여전하군."
피식, 웃음을 터트린 그가 곧 질리언에게 염두에 두었던 질문을 건네었다.
"뭐, 별 건 아니라네. 새로이 공작의 자리에 어느 가문을 올릴지를 고민하고 있어서 말이네."
"……공작의 자리 말입니까?"
"아무리 체제를 바꾸고 있다곤 하나 기존의 문화를 무시해선 안 되는 법이겠지. 하물며 그 자리가 권위에 엮여 있다면 모두가 불안해하지 않겠나?"
세 개의 공작가문.
그 시작은 제국이 극히 작은 소국이었을 무렵부터, 초대 황족을 지켜온 세 명의 측근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5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세 개의 가문 중 두 가문이 사라진 상태.
그들이 맡은 역할이 역할인 만큼, 그 공석을 채우지 않는다면 정치는 물론 치안과 질서에도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일단은 골드리안을 공작가문에 올리고자 생각 중이다만, 나머지 한 자리는 누구로 채워야 할지 걱정이 되어서 말이네."
"그거라면……."
알랭의 말에 조용히 턱을 괴며 고민을 시작하는 질리언.
그 고민에 대한 답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후에 내려지게 되었다.
"…블레이즈는 어떻습니까?"
"블레이즈, 말인가?"
"그들 역시도 골드리안과 마찬가지로 200년에 걸친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이죠. 하물며 앞으로 이 대륙이 어떤 식으로 변화해 갈지 알 수 없는 만큼, 다양한 문화와 기술을 보유한 블레이즈라면 그 시대에 대응하기에도 용이할 겁니다."
"그렇긴 하다만, 그 영지는 이제까지 '이단의 영지'라고 불리지 않았는가?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라곤 하지만, 그런 기존의 인식에서 탈피하는 것도 쉽지 않을 터이네만."
"그 또한 감수해야 할 일이겠죠. 외세를 대비해야 하는 현 제국에도 최후의 보루는 필요할 테니……."
최전선에서 최후의 방어선으로.
그러한 의견을 들은 알랭이 한껏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네에게 상담하기로 한 게 정답이었던 것 같군."
"어디까지나 참고로 들어주시죠. 지금의 저는 이 제국의 소속이 아니니까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질리언.
그 인사조차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예의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이 나라에 귀속되지 않은 자였으니.
"……좋은 의견 고맙네. 라이덴발트의 국왕이어."
유능한 가신을 잃었다는 건 무척이나 뼈아픈 일이다.
차마 그러한 속내를 감추지 못한 넋두리였다.
* * *
"영지에 도착했습니다, 전하."
"그래, 조금만 더 고생해 주게나."
제국에서부터 자신의 영지로……. 아니, 이제는 영토라고 불러야 할까?
제국에서 독립을 희망한 지도 2년이 흘렀거늘, 정작 이 도시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무척이나 평온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자그마치 10년 전부터 대비를 해왔으니 당연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에 걸쳐 이 땅도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건물의 양식도, 장터의 분위기나 그곳을 누비는 사람들의 장비 역시도…….
"검이 보이질 않는군."
"네? 검이라니요?"
"……아니, 혼잣말이네."
검술가가 이끄는 영지인 만큼,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은 저마다 검 한 자루씩 차고 있던 영지였다.
하지만 이제부터 펼쳐질 시대는 더 이상 냉병기만이 주를 이루진 않을 터.
거리에서 검이 사라진 것 역시, 사실상 그런 시대의 흐름을 탄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검을 쥘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온다…….'
제국을 벗어나고, 줄곧 지켜온 라인하르트의 전통마저도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그 또한 자신이 주도한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그것이 옳은 일인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그것을 넘어 자신이 잘 해낼 수 있을지,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간 미래가 정녕 옳은 것인지…….
"……음?"
성에 도착하기까지 그러한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문득 정원에 대짜로 뻗어있는 그림자가 질리언의 눈에 들어왔다.
정말로 멍하니 그 자리에 쓰러져 있을 뿐.
성을 지키는 기사나 사용인 중 누구도 그에게 간섭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인물이란 의미.
그건 가까이서 확인한 질리언 역시 마찬가지로 느낀 바였다.
"……셰인?"
셰인 골드리안.
자신의 삶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
지금 저곳에 쓰러진 채 하늘을 감상하는 건, 분명 그런 이름을 가진 사내였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건 키르슈타인 영지에서의 사태가 끝난 후였을까?
그때엔 그와 자신 둘 모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고, 이후엔 정치적인 문제나 전쟁 피해의 수습 등의 문제로 서로가 바쁘게 움직였었다.
만날 겨를도 없이 시간이 흐른 지가 벌써 2년…….
그 후에 이루어진 재회는 정말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공작님?"
그를 알아본 건 셰인 역시도 마찬가지.
이후 대짜로 뻗었던 몸을 일으켜 세운 셰인이, 제 몸의 먼지를 털어내며 질리언을 마주하였다.
"아니, 이제는 공작이 아니었죠. 오랜만에 뵙습니다, 라인하르트 국왕전하."
"……허허."
나름 정중하게 예의를 취했다곤 하지만, 역시 회담에서 각국가의 대표를 마주했을 때에 비하면 실로 가볍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그답다면 그다운 일이겠지.
"오랜만에……."
그런 그와의 재회를 축복하려는 것도 잠시.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질리언이, 저도 모르게 대답을 망설이고 말았다.
그저 이곳에서 소년기를 보내었던 청년으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자신을 이러한 길로 이끌어낸 전생자로 여겨야 할지.
"편하게 대해주세요."
그 갈등을 읽은 듯 툭 내뱉는 셰인.
긴장 하나 없는 미소는, 그 역시 자신과의 재회를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다는 걸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래 셰인. 오랜만에 보는구나."
"뭐, 실제로 이렇게 편하게 마주한 건 10년 만이지만요."
벌써 그 날의 재판으로부터 그만한 시간이 흐른 것인가.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재회에 반가움을 나누기보단, 앞서 처리해야 할 의문이 하나 존재하고 있었다.
"한데, 지금 정원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제국을 벗어나 이곳에 온 거야 이해할 수 있다만, 어째서 그는 굳이 성에 들어가지 않고 정원에 대짜로 뻗어있던 것일까?
그가 만나고 싶었던 건 자신만이 아닐 터이건만.
"졌습니다."
"……뭐?"
"세실한테 도전했다가 쪽도 못 쓰고 졌어요."
"……."
* * *
혼약 결투.
셰인이 재판을 통해 변경으로 끌려간 후, 자신의 반려는 오롯이 자신을 꺾어낸 이에게 내어주겠다 결심을 맺은 상태였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가문의 후계자로서의 자부심과 더불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그리고 그가 바라는 이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지만 그 각오가 너무 굳셌던 것일까?
정작 그녀가 가진 무력은 현재의 자신을 넘어, 줄곧 맺어지고 싶던 반려마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세실을 가르친 건 국왕님이셨죠?"
함께 성을 거니는 중, 셰인이 그에 대해 원망스러운 투로 질리언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에 곤란한 듯 미소만을 짓는 질리언.
"……그렇지."
"너무 강하게 키운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선 그 아이가 바라는 걸 이룰 수 없으니 말이다."
공작의 후계자란 많은 책임이 뒤따르는 일.
그 책임을 짊어지면서도 억지스러운 이상을 이루기 위해선, 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위해 그녀는 온갖 수모를 감내하며, 자신의 청춘마저 버려가면서까지 검을 틀어쥐었다.
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가문의 전통이나 평화 같은 이유가 아닌, 오롯이 한 남자를 향한 연심을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가르쳤습니다. 그 아이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았고, 지금도 개인적으로 수행을 이어가는 중이죠."
"국왕님도 더 이상 스승으로 둘 필요 없이 말이죠?"
"……오히려 제가 스승으로 삼아야 할 정도죠."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게 무슨 의미일까?
현 라인하르트 가문은 라이덴발트의 초대 왕가이자, 대륙 내의 외교의 윤활제라는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거늘.
하물며 더 이상 검이 필요치 않은 시대.
검을 연마하는 것도 개인의 열망에서만 비롯돼야 하는 만큼, 지금의 질리언에게 검술을 추구하는 건 사치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그 아이가 셰인 너와……."
"여긴 여전하네요. 다른 곳은 다 바뀌었는데."
그런 딸의 우직함에 아비로서의 아쉬움을 토해낼 무렵.
셰인이 이내 도착한 곳의 주변을 스윽 둘러보곤, 그 안으로 뛰어내려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라인하르트 성의 뒤편에 자리한 연병장.
과거 라인하르트의 밑에서 무검술을 연마할 때에 줄곧 신세를 졌던 장소다.
"그립네요. 예전에 이곳에서 국왕님에게 여러 가질 배웠었죠."
바닥에 널브러진 목검을 스윽 들어 올리는 셰인.
비록 무투에 초점을 둔 몸이기에 무검술을 제외하곤 별로 와닿지 않았지만, 그 또한 지금에 와선 일종의 추억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에 국왕님께서 저를 테스트한다고 이렇게……."
그 기억을 따라 손에 쥔 목검으로 모래바닥에 선을 긋는 셰인.
"이렇게 원을 그리고,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었죠."
이내 그 자리에 하나의 원이 생성되고, 셰인이 그 안에 들어서며 목검을 질리언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 말한다.
"이번 대련에서, 만약 네가 나에게 '한 번이라도 공격을 맞춘다면' 네 뜻을 따르도록 하마."
그 당시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며.
그로부터 기억을 되새긴 질리언이, 곧 제 손에 쥐어진 목검에서 시선을 떼며 다시 그를 마주하였다.
"뭐해? 안 덤비고."
원의 안에 선 채 자세를 잡는 셰인.
무기 하나 쥐지 않았으나, 그 기백은 결코 24살의 청년이라곤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블레이즈에서 드물지 않게 보았던, 온갖 수라장을 거쳐 온 맹장만이 갖추는 분위기.
"……하하."
그를 마주한 순간 질리언은 깨달았다.
이 연병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알던 소년이 아니게 되었다는 걸.
"그럼, 한 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적어도 그를 마주할 때만은 일국의 왕이 아닌.
한 명의 검사로써 검을 쥐어도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