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253화
사력을 다한 전투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원에서 나오긴 했네."
깊게 숨을 몰아쉬는 셰인이 굽혔던 허리를 펴며, 제 손목과 어깨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부담을 느끼긴 했지만 그럭저럭 여유가 가득한 상태.
반면 제 반대편에 있는 자는 목검의 끝을 바닥에 처박은 채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비살상을 염두에 둔다 해도 최대한 전력을 발휘했고, 40이 넘은 나이로 전력을 발휘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니까.
몇 년간 검을 쥐지도 않은 만큼, 오히려 여기까지 밀어붙인 것만 해도 용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패배입니다."
그렇게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며 존칭을 취하는 질리언.
당장의 모습을 본다면, 그 누구도 제 앞에 있는 이를 일국의 왕이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모습을 나무랄 법함에도 정작 셰인은 피식 웃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설 뿐.
"수고했다 애송아."
"……하하."
비꼬듯 이어지는 말에도 애매한 웃음만을 터트리는 질리언.
모든 진상을 아는 현재, 지금 제 앞에 있는 자는 그저 소년기의 제자로만 여길 수 없는 상태였다.
"오랜만에 이렇게 대련하니까 옛날 생각나고 좋네."
이후 몸을 일으켜 세우며 연병장에 앉아 노을을 감상하는 두 사람.
모래가 깔린 바닥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엔 소소한 그리움이 그려져 있었다.
"그때는 당신이 여러모로 많이 봐주었었죠."
"봐주긴 무슨. 알맹이가 어떻건 10살짜리 꼬맹이가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된다고."
"그렇다 해도 그 당시 저에게 가했던 일격은 진심이지 않았습니까? 당시엔 정말로 죽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연히 그래야지. 정말로 죽일 생각으로 휘두른 거니까."
그 당시엔 자신의 말을 들어줄 리도 없었고, 뭐가 됐건 자신이 마냥 가소롭지만은 않은 존재임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제 숙적의 후손이지 않은가?
아무리 평화의 시대라곤 해도, 그의 피를 이은 녀석이 한 방에 나가떨어지면 이쪽도 여러모로 실망했을 것이다.
"……이전의 대련, 선조님과 비교하면 어땠습니까?"
그 점을 염두에 두니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볼레로 라인하르트.
200년 전 구국의 영웅이라 불렸던 자이자 당대 황실의 충복, 동시에 성격에도 기록되었을 정도로 이 제국의 방침에 큰 변화를 주었던 자.
비록 검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버려가는 중이라지만, 그래도 일단은 제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상태다.
그 인물의 후손이 된 자로서 직접 겨루었던 자의 평가가 궁금한 건 당연한 수순.
"형편없지."
하지만 그 마음은 이해해도 배려할 마음은 쥐뿔도 없었다.
가차 없는 평가에 '윽' 신음하는 질리언.
셰인이 피식 웃으며 그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기분 나빠 할 거 없어 이 녀석아. 애초에 그 녀석은 누굴 데려와도 비교 자체가 안 되는 놈이니까."
질리언이 아닌 누구를 데리고 오더라도 마찬가지다.
볼레로 라인하르트. 그는 자신이 만난 이들 중 가장 강한 상대였으며, 그 평가는 그의 망령을 상대한 후 2년이 지난 지금도 변치 않은 상태였다.
그 후 수련을 거듭한 현재에도 그를 이긴다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었으니까.
'그런 괴물 같은 녀석이 어쩌다 튀어나온 건지.'
혹시 그 녀석도 자신과 같은 환생자가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 셰인이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아니, 애초에 환생도 아니지. 따지고 보면 나나 이 녀석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질리언이 가문의 전통과 역사를 수용하듯,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 빌려온 기억을 따르는 것에 불과할 뿐.
그 기억으로부터 구시대의 숭고함을 이어받았다 한들, 그런 계승이 제 정체성을 카일 페터슨으로 바꾸진 못하였다.
'나는 셰인 골드리안이야.'
이유가 뭐건 그것만은 앞으로도 결코 변치 않으리라.
그 점을 되새길 무렵,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질리언이 돌연히 셰인에게 새로운 질문을 건네었다.
"그럼, 세실은 어떻습니까?"
"…세실?"
"네, 이곳에 오자마자 한 번 겨뤄보았다 하셨죠?"
"……."
그 물음에 턱을 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셰인.
자신에게 가차 없는 평가를 내릴 때에 비하면, 무척이나 긴 시간에 걸친 고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한계를 돌파하지 않았다 한들 지금의 셰인은 그녀를 이기는 게 불가능했으니까.
"…3년."
그래, 현재 세실리아 라인하르트는 셰인 골드리안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
그리고 그 자질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 중인 상태.
"앞으로 그 정도 지나면 그 녀석도 따라잡겠지. 그보다 좀 더 빠를 수도 있고."
역사상 유례없는 검사의 피를 이었고, 심지어 그자가 다루는 기술을 본능에만 의존해 자력으로 터득할 정도다.
타고난 재능에 더해 선조가 내려준 비전, 그리고 제 목적만을 위해 꾸준히 이루어진 단련 등등.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결과는, 평화의 시대만을 대비해온 질리언과는 터무니없는 격차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단언한다.
적어도 이 시대에, 현재의 그녀를 무력으로 당해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고.
"그런 것치곤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그런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생긴 것이 답답하지는 않은가?
그런 의문이 내포된 물음에, 셰인이 피식 웃으며 제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좋지 않을 리가 있겠어? 내가 치료한 아이가 그 정도로 강해진 건데."
자신이 구하지 못했다면 천식으로 단명했을 아이.
그런 아이에게 기회를 준 것만으로 자신을 넘어서고, 더욱 나아가 제 숙적마저 넘어설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정말로 그 녀석을 넘어선다면……. 다시 녀석과 겨룰 수 있게 된 셈이니까."
그래, 2년 전의 전투도 결국엔 자신의 패배로 끝난 상태.
하지만 다시 찾아오지 않을 그 싸움을 그녀로 하여금 행하고, 그 끝에 그녀를 넘어선다면 자신은 분명 누구보다도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앞으로도 줄곧 이어진다면.
"……물론 그 시기를 네가 기다리지 못한다면 좀 미안한 이야기가 되겠다만."
애석한 미소를 짓는 셰인을 지긋이 바라보는 질리언.
확실히 아비로서 딸아이의 혼기가 한참 지난 건 아쉬운 일이지만, 지금에 와선 그렇게까지 조급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자신들이 있는 이곳은 제국이 아니니까.
"그러고 보면 처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죠. 겨룸에서 승리한다면 제 뜻을 들어주겠다고."
귀족사회에서도 벗어났고, 이제는 라이덴발트만의 문화를 지향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제국에 있을 때와는 달리 여러 부분에서의 제약이 해제되었다는 것.
"당신은 원에서 나오셨고, 몇 번 제 검이 몸에 닿기도 했었죠. 이전 대련의 조건만을 따진다면 제가 당신에게 이겼다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모든 것을 제국과 다르게 갈 순 없었다.
독립 자체가 급진적으로 이루어진 결과. 그만큼 기존의 체제를 어느 정도 유지하며, 그중 긍정적인 부분은 남길 필요가 있다.
"내가 뭘 해주길 바라는 건데?"
그건 정말로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낼 일.
하지만 적어도……
"딱히 바라는 건 없습니다. 그저 제 딸아이와의 관계를 지금보다도 더 편히 여겨달라는 거죠."
적어도 외압에 의해 두 사람의 관계에 해가 가해질 일은 이 나라에 의해선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나라에는 종교적인 구속도, 기존의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설령 그런 조짐이 보인다면 자신이 전력을 다하여 막으리라.
"제 딸아이와의 관계를 어떻게 마무리 짓건, 저는 언제나 당신의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야 할 자신에겐.
그 후계자가 될 이들 역시 돌봐야 할 책임이 있을 테니까.
* * *
세실리아 라인하르트.
제국에 독립한 지금에 와서도, 그녀는 자신의 야성을 널리 떨치고 있는 상태였다.
제국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라이덴발트의 차기국왕 자리 역시 그녀와의 결투에서 승리한 자가 차지하게 될 테니까.
셰인 역시 그 소문을 듣고 이 나라에 방문하여 도전한 것이었건만, 아이러니하게도 결투는 자신의 패배로 돌아가게 되었다.
몇 번이고 도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조금 더 버티는가 아닌가의 차이였을 뿐, 오히려 그녀는 자신과의 겨룸에서도 더욱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물론 한계를 돌파한다면…….
그리한다면 2년 전, 볼레로와 겨루었을 때처럼 밀어붙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거두는 승리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세를 바꾸기 위해선 전생의 기억과 의지를, 그리고 자신의 그릇을 넘어서는 힘조차도 부족하게 여겨지지만, 그녀와 맺어지고 싶다는 건 셰인 스스로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하는 바는 스스로의 손으로 쟁취해야 하는 법.
거기에 사지에서의 결투처럼 무리를 하는 건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셰인."
하지만 만약.
만에 하나라도 평생을 함께하는 것이 아닌, 그저 한 때의 추억을 만들 기회가 주어진다면…….
"셰인, 깨어있나요?"
그런 그녀를 떠올리고 있을 무렵, 문 밖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문을 열자 눈에 들어온 건 선명한 은색을 띠는 머리카락.
그 밑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는 제 아비로부터 이어받은 걸까, 아니면 스스로 그러한 독기를 벼려냈기 때문일까?
"방 안에, 들어가도 될까요?"
하지만 이전의 결투에서처럼 살벌함은 보이지 않고 있다.
한층 누그러진 분위기로.
그렇게 조심스레 물어보는 여인이, 자신이 입고 있는 잠옷의 자락을 움켜쥐며 수줍게 올려다보고 있다.
가운의 아래에 보이는 건 상당히 얇은 잠옷이다.
그 안의 속옷이 비쳐 보일 정도로……. 그녀는 잠을 자기 전엔 이런 옷을 입는 것일까?
"……들어와."
뭐가 됐건 한 나라의 공주된 몸.
이런 차림으로 복도에 세우는 것도 실례되는 일이리라, 생각한 셰인이 자신이 머무르는 방에 세실을 들여보내 주었다.
10년 전 마지막으로 자신이 머무르고 있던 그 방에.
그 방을 둘러보던 세실이, 곧 추억에 잠긴 듯 애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여기서 셰인에게 교육을 받곤 했었죠. 여기, 이쯤에 칠판을 세워두고……."
"기억하고 있구나, 그 때 했던 교육들."
"잊었을 리가 없죠. 셰인과 보낸 추억인데."
대부분은 그 시절의 자신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또한 그와의 추억을 회고하는 단계에선 하나의 지식으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지금에 와선 응급처치를 넘어 가벼운 외과적 처치도 할 수 있는 수준. 그리고 그런 지식은 사람을 상대하는 검에도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된 상태였다.
"몇 번이고 되새겼어요. 당신이 없는 동안 몇 번이고……."
널브러진 책과 화학장비들, 그리고 공책에 적혀있는 알 수 없는 수식 등등…….
그 흔적들을 하나하나 되새겨보던 세실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켜쥘 무렵, 셰인이 그 곁으로 다가서며 손을 잡아주었다.
"손……."
손바닥에 가득한 굳은살과 잔상처.
귀족 아가씨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친 손은, 그녀가 이제껏 보내온 세월이 녹록하지 않음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치열했을지도 모르지.
적어도 검에 한해선.
"……손을 좀 봐도 될까?"
걱정을 토로하는 셰인.
세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뒤를 따라 침대로 향하게 되었다.
그렇게 마주앉은 채로 진지한 눈으로 제 손을 살피는 셰인.
그 눈빛이 부담되는 한편, 그저 손을 잡은 것만으로 부끄러움이 밀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한 술렁임을 자각할수록 깨닫게 된다.
자신의 감정을.
그에게 가진 자신의 감정이, 분명 진실 되었다는 걸.
"열심히 했구나."
"……네."
어째서일까.
그저 한 마디의 말뿐임에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순간이야 이제까지도 여럿 있었지만……. 그저 참고 견뎌왔을 뿐이다.
자신이 울음을 터트리는 때는 오롯이 하나.
자신이 사모하는 자가 자신에게 승리를 쟁취하여, 서로의 관계를 영원히 이어가는 때로 결정했으니까.
"그래서 아쉬워요. 제가 열심히 할수록, 셰인과 맺어질 날은 계속해서 미뤄지게 될 테니까."
그 심정을 견뎌야 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셰인은 아직 이뤄야 할 일이 남은 거죠?"
침묵하는 셰인에게 조심스레 물어보는 세실.
그 물음에 어찌 답할까 고민하던 셰인이, 이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응."
차마 거짓으로라도 그렇지 않다 말할 순 없었다.
모두가 바라지 않던 전쟁은 시작되었고, 태자가 직접 제 손으로 제국의 최고지도층을 숙청했다 해도 '휴전협정'만을 겨우 이뤘을 뿐이다.
제대로 외교가 진행되는 건 라이덴발트처럼 제국에 우호적인 소수의 나라들뿐.
여전히 제국을 악으로써 여기며,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적대하는 세력은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
언제 다시 휴전이 깨지고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
그렇게 위태롭게 유지되는 평화 속에서, 현시대의 그릇됨을 보다 객관적으로 꾸짖을 수 있는 건 오롯이 자신뿐이다.
200년 전과 현대를 모두 경험한…….
고대인의 의지를 이어받은 자신만이.
"네, 그런 셰인을 존중하니까……."
그런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비록 그가 어떠한 이유로 그런 사명에 휘둘리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자신을 치료해준 그의 이상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제가 이기면, 당신은 그 자리에서 멈춰버릴 테니까. 저는 당신에게 질 수 없는 거예요."
그런 그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감내하기로 한 길이 아니던가.
"제가 당신으로 하여금 보았던 빛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주었으면 하니까."
그 길을 거니는 것 역시도 그를 향한 사랑의 표현인 만큼, 억지로라도 그를 이 땅에 잡아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래도……."
이제까지 서로의 목적을 이루는 데에만 해도 지쳤으니.
"그래도 오늘 하루만……."
그러한 나약함이 오래토록 만나고 싶던 이와 조우하며 드러나게 되고.
그 마음에 충실한 세실이, 이내 제 몸을 두르고 있는 가운을 걷어내며 셰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딱 하루라도 좋으니……. 저를 달래주시면 안 될까요?"
두근 두근.
손끝에 느껴지는 박동은, 이 순간 간격마저도 자신과 똑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