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병의 환생 254화
여성과의 관계는 그다지 적은 편은 아니었다.
슬럼가에 있을 적에도, 그리고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도.
망나니나 다름없던 시절엔, 제 속에 가득한 응어리를 떨쳐내고자 뭐든 해야만 했으니까.
그런 만큼 대부분은 몸뿐인 관계. 그마저도 의학을 전공으로 둔 후엔 거리를 두고 살았지만, 그때의 감각은 그 기억을 이어받은 이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괜찮아?"
처음의 입맞춤 후에 이어지는 물음.
입을 떼놓기 무섭게 거친 숨을 내뱉은 세실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제 멱을 움켜쥐기 시작했다.
제 입맞춤이 꽤나 부담되었던 것일까?
이해 못 할 반응은 아니었다.
키스는 서로의 입을 맞추는 것…….
그 이상의 단계가 있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그녀에게 있어, 지금의 키스는 너무나도 자극적이었으니까.
"셰인은, 경험이 있으신 건가요?"
"……아니, 전혀."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꽤 능숙하신 것 같네요."
"……공부했으니까."
"공부, 인가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거짓말은…….
애초에 이 또한 누군가에게 빌려온 기억이라 한다면, 카일 페터슨은 몰라도 셰인 골드리안은 제 정조를 이 순간까지 지켜왔다 할 수 있을 테니까.
"못 믿으면 어쩔 수 없지만……. 읍!"
그런 편한 변명에 자학마저 느꼈건만, 정작 세실은 개의치 않고 셰인의 입에 제 입술을 맞붙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를 놓지 않으려는 듯 옷자락을 움켜쥐다, 이내 더욱이 고개에 힘을 실어 넣기까지.
"……믿어요."
그렇게 입술을 떼어놓은 세실이, 침대에 눕혀진 셰인의 위에 서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두운 방 내부에 내리쬐는 달빛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반라의 여인.
손에 어린 힘은 결코 적지 않으면서도 수줍게 떨려오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곧으면서도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이미,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는걸요."
의심이 아닌 수줍음에 의한 것이다.
그의 겉도, 그리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내면도 모두 사랑하겠다 몇 번이고 다짐해왔으니.
"나도 마찬가지야."
"좋아해요."
"나도 좋아해."
"당신을 좋아해요."
"…나도."
서로의 솔직한 마음을 번복하며, 이윽고 서로의 손이 각자의 옷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얇은 천의 너머로 느껴지는 거친 손길. 그 끝에 드러난 속살 역시도 다부지기 그지없다.
몸을 움츠리던 세실이 제 가슴께를 양팔로 감추며, 셰인을 힘겨이 돌아보았다.
"이런 몸은, 싫으신가요?"
여려 보이는 얼굴과 달리 단련된 육체.
그 누구라도 제대로 된 귀족 아가씨라곤 생각하지 못할 몸이었으니.
"……싫어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 또한 자신을 향한 마음을 표현한 결과물.
셰인 역시도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해 줄 수 있다 다짐을 한 상태였다.
지금의 수줍음도, 그 손끝에 나 있는 상처 역시도.
"네, 저도……."
그렇게 상처 입은 손이, 제 몸에 나있는 상흔들을 하나둘씩 쓸어 넘기기 시작하였다.
"셰인의 몸이 마냥 싫지는 않아요."
오랜 시간에 걸친 사투에 전신을 도배한 상처들.
신성력이 있다곤 하지만, 결국엔 자국이 남게 된 상처들도 적지 않다.
앞으로의 삶에 평생 남게 될 상처들.
"하지만, 앞으로 더 늘어가겠죠. 이 몸에 있는 상처도."
그것을 마주한 순간 걱정은 더 커져 갔지만, 그럼에도 마냥 그를 말리려들 순 없었다.
"그리고 더 강해지겠지."
그 상처가 늘어나고, 그 모든 것을 버텨낼수록 자신은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
이제까지의 경험이 그걸 증명하고 있으니까.
"고마워 세실. 이런 나를 기다려줘서."
스윽, 몸을 끌어안는 세실.
셰인 역시 그 몸을 자상히 쓰다듬어주며 대답했다.
"앞으로도 기다릴 거예요. 그러니까……."
"그래, 오늘 밤만은."
그렇게 다시 입을 맞추고.
"……오늘 밤만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자."
그 후로 아무런 말없이, 두 사람은 서로의 삶에 처음으로 찾아온 황홀한 순간을 만끽해갔다.
그와 같은 순간이 다시 찾아오는 건 머나먼 훗날일 것을 알기에.
이 순간을 잊지 않고자 더욱이 정열적으로.
* * *
동이 트기에 이른 시각.
희미한 빛만이 커튼의 사이로 비춰볼 무렵 깨어난 셰인이, 한때의 잔향만이 남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제 옷을 하나둘씩 챙겨 입었다.
그 손에 쥐어진 두터운 배낭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대로의 것.
처음부터 이곳에 길게 체류할 생각이 없었다는 의미였다.
"떠나시려는 겁니까?"
그런 자신을 바로 떠나보내는 것이 안타까워서일까?
현관에 서기 무섭게 자신을 불러 세우는 목소리에, 셰인이 발걸음을 멈추며 제 배후를 스윽 돌아보았다.
어쩐지 새벽 중에 경비병들이 보이질 않더라니.
"그래, 보고 싶은 얼굴은 다 봤으니까."
질리언 라인하르트.
이 성의 주인이자 이 나라의 국왕이 된 자를 향해, 셰인이 예의를 벗어던지며 대답을 하였다.
적어도 단 둘이 된 자리에서만은 자신이 상급자니까.
그렇게 연기를 하는 셰인을 보며 질리언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떠나가는 그를 잡으려 들진 않았다.
"앞으로는 어쩔 생각입니까?"
그저 물어볼 뿐이다.
휴전이라는 불안정한 형태로 유지되는 평화 속에서, 그는 과연 어떠한 길로 나아갈지.
"글쎄, 딱히 구체적인 계획은 안 세워뒀네."
"……계획도 없이 떠돌아다닐 생각입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내가 처음 이 시대에 온 후로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볼 필요가 있을 테니까."
모두가 이 세상의 추한 면을 알게 되었고, 그로부터 초래될 문제를 대비하고자 저마다 무기를 쥐고 있는 상태다.
그 또한 결속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곤 하지만 결국에는 익숙지 않은 일일 뿐.
200년의 시간에 걸쳐 유실된 것들이 많은 만큼, 이런 시대에 적응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게 될 것이다.
그로부터 생겨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뭐, 그렇게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필요로 하는 곳에 힘을 빌려주고……. 그 중에도 수련에도 매진해야겠지."
"수련, 입니까?"
"그래, 결국 최종적으로 이뤄야 할 건 그 아이의 곁에 서는 거니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매 순간을 정진해야만 한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는 순간 격차는 크게 벌어지고 말 테니…….
하지만 그런 무모한 이상일지언정, 도리어 그렇기에 그보다 격이 낮은 이상을 이루고자 하는 열정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질리언, 너는 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그리고 그런 무모함에 뛰어드는 건 제 앞에 있는 자 역시 마찬가지.
그 목적은 그저 제국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독립을 하여 제국의 외교를 보조하는 것으론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건 10년 사이에 변화한 영지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
그 점을 눈치 챈 셰인을 향해 질리언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당장은 무리지만……. 이 나라의 정세가 안정된다면 이후에는 공화정을 선포할 생각입니다."
"공화정?"
"알고 계십니까?"
"아, 뭐……. 알고 있지.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지향하겠다는 거지?"
200년 전, 제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전만 해도 그런 지도체제를 가진 나라도 여럿 존재하고 있었다.
특정한 가문이 통치하는 왕정사회나 나라 전체만을 위해 움직이는 군국주의, 혹은 사회주의와는 정 반대에 해당하는 사상.
국민 모두가 자체적인 정치적 간섭이 가능하며, 통치하는 자 역시 다수결에 따른 대표를 선출하여 입장을 대변하는 정도의 역할로만 그치게 된다.
각자의 개인을 존중하는 사회.
그 이상만은 분명 옳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정작 셰인은 그에 그다지 좋은 생각을 품지 못한 상태였다.
"많이 힘들 거야. 민주주의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근본이 없는 녀석들이 오르는 법이니까."
명예나 전통, 혹은 교리…….
그런 식으로 뿌리를 두지 않는 세력이란, 대체로 이익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법이다.
제대로 된 규율과 도덕적 선을 지키지 않는다면 욕망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것.
하물며 신뢰할 수 있는 출신도 없는 만큼 지도자를 선출하는 과정 역시 난잡하며, 최종적으로 나타난 후보 역시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닌 악과 악의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목장을 지켜낼 목동으로 두 마리의 늑대 중 하나를 고른다…….
셰인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 나라만큼은, 다른 곳과 달리 사회의 유지에 필요한 억압을 최소화시키고 싶으니까요."
그건 아마도 제국에서 살아온 질리언이 더 실감하는 바일 터.
그럼에도 그걸 추구하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셰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과업을 물려주지 않는 데엔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죠."
세실리아 라인하르트.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자, 이 세상에 둘 이상 없을 보물과도 같은 존재.
하지만 그녀가 추구하는 길은 정치가와는 거리가 먼 것이고, 그런 그녀에게 가문의 핏줄을 남긴다는 과도한 책임을 부과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제까지 소속된 곳에서 부여받은 사명과 책임은 모두 자신이 떠안고, 그 이후는 그 아이 본연의 자유에 맡기리라.
"다행이네. 당신이 그 아이의 아버지라서."
그런 책임을 짊어진 국왕이 한편으론 존경마저 느껴진다.
그에 만족스레 웃음을 지을 무렵, 질리언이 제 품에 들어있는 한 장의 쪽지를 셰인에게 내어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이건 뭐야?"
"앞으로 1년 후에 세워질 아카데미로의 추천장입니다."
아카데미.
흔히 고등교육을 위해 세워지는 시설이다.
대체로 귀족이나 재능있는 자, 혹은 고위 마법사의 혈통들이나 들어서는 장소.
"제국과 연합국. 두 세력간에 전쟁을 벌였던 전장의 중심지에 세워질 예정이죠."
"……휴전선 위에?"
"네, 휴전선 위에 아카데미를 세우고, 각국에 속해있는 아이들을 초청하여 그곳에서 수업을 받게 하는 겁니다."
각국의 아이들을…….
더욱 나아가 미래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을 지도하며, 그들을 평화의 상징으로 삼아 대륙의 갈등을 해소해나간다.
그것이 질리언이 현재 단계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각국이 협력하여 세운 교육기관이란, 한 나라의 체제를 뒤바꾸는 것보다는 현실적인 목적일 테니까.
"무리한 일을 하려고 하네."
물론 공존하지 못해 분단을 택한 시대다.
각국의 대표들을 모아 교육을 벌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 될 터.
"하지만 뜻이 맞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동참하겠죠."
그리 말하며 셰인의 손에 쥐어진 추천장을 응시하는 질리언.
그 후 눈을 감은 질리언이 제 숨을 다스리고, 이내 분위기를 바꾸며 제 입을 열었다.
"셰인 골드리안."
무거운 목소리.
그 근엄함을 마주한 순간 셰인은 자각했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대표이자, 아이헨발트의 의지를 이은 라이덴발트의 국왕으로서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겠네."
지금의 이 순간이 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최고의 인재'를 향해 제안을 건네는 상황이라는 걸.
"부디 이 나라의 대표로서, 그 아카데미의 교사로 나가주지 않겠는가?"
그렇게 목적을 제시해 준다.
시대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구시대의 망령에게, 그 의지를 이어받으며 대륙을 방황할 청년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자신이 가는 길에 새로운 선택지가 생겨난 순간.
그 길을 맞닥트린 셰인이, 곧 만족스레 웃으며 제 손에 쥔 쪽지를 품에 집어넣었다.
"이런 저라도 괜찮다면야. 얼마든지."
이 시대가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자신은 언제나 그 이상에 동참할 것이다.
그것만은 분명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작가 후기.]
다음 편, 2부의 에필로그와 장문의 후기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