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의무병의 환생-255화 (2부 완결) (255/255)

의무병의 환생 255화

[2부 에필로그]

수십 년만 지나도 멸망하고, 새로이 생겨나는 것이 나라라는 존재.

그런 마당에 이 대륙에선 테라스라는 이름이 500년이 넘게 이어져왔다.

설령 그 크기가 절반 이상 축소되었다 한들, 테라스 제국은 여전히 그 이름과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였으니.

"형님,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하지만 올해에도 찾아온 건국기념일은, 이번 세대를 이어받은 황족의 입장에선 마냥 좋게 여길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황성의 복도를 거니는 황실의 일원, 테세우스 테라스가 앞서 나아가는 황제를 불러세웠다.

황제임과 동시에 자신의 형이 된 자.

그리고 계승식이 오기 전 제 아비를 살해해 황위를 찬탈한 반란자이자 혁명가…….

"괜찮냐니, 무엇이 말이지?"

그런 남자가 자신의 동생이자, 제 2계승자를 돌아보며 조용히 물었다.

"후계자 싸움에서 치열하게 겨루었던 너에게 뒤를 맡긴 것을 말한 것이냐?"

아무리 제1계승자라 한들, 그 신변에 지장이 생기거나 계승권을 포기하면 권한이 다른 이에게 돌아가는 법.

당연히 테세우스 역시 황실의 일원으로서 권력을 탐했고, 그렇기에 알랭과 이제까지 수도 없이 마찰을 일으켜왔었다.

황제의 자리에 앉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치열하게 싸웠던 몸.

하지만 지금에 와서 알랭은 테세우스만을 유일한 호위로 둔 채, 황성에 자리한 연설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허리춤에 매어진 칼이 제 배후를 얼마든지 노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라면 나를 처리하고 네가 대신 그 자리에 올라도 될 것이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너를 원망하는 사람도 없겠지."

"……확실히 예전 같았으면 노렸겠지만."

스윽, 제 허리춤에 매어진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 테세우스.

그마저도 실소와 함께 가라앉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나라를 이어받아 봐야 개고생만 할 게 뻔하겠죠."

비록 그 현장엔 존재하지 않았지만, 황실의 일원들 역시 키르슈타인에서의 진상은 이미 전해들은 상태다.

불로불사의 힘을 탐내어 이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고자 한 것……. 그건 그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들조차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하지만 그 이후, 카이네스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건 알랭을 제외한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 제국 영토의 3할은 반란군에 넘어갔고, 이후 제국 내의 지도자들이 하나둘씩 독립을 희망하여 기존의 절반 채 남지 않았으니까.

"죄다 뿔뿔이 흩어진 마당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언제 배신을 할지도 알 수 없으니……. 이제 와서 황제 자리에 앉는 건 욕받이가 되겠다 자처하는 것밖에 더 되겠습니까?"

차라리 망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350년 전 이 대륙을 져버리고 도망쳤던 황제처럼.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친형은 그런 비꼬임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우직하게 복도를 거닐고 있었으니.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든 것이 나이거늘, 어찌 그 책임을 저버리고 도망칠 수 있단 말이냐?"

투철하다면 투철할까.

그로부터 가파른 벽을 느낀 테세우스가, 이내 실낱같은 야망마저 져버리며 그를 향해 물었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각오는 충분히 알았지만, 정녕 지금의 그에겐 망조가 깃든 나라를 이끌 능력이 존재할까?

설령 현 상황의 최선을 이룩한다 한들, 단 한 번의 실패조차도 지금의 그에겐 뼈아프게 다가올 것이다.

대륙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없는 만큼 은폐 역시도 쉽지 않을 터.

그 누구라도 역사에 기록될 그의 존재가, 이 나라의 수치로 여겨지리라 예상할 정도다.

하지만 그런 우려를 읽어낸 남자의 입가에 그려진 건 자신감에 찬 미소 뿐.

"테세우스. 아마 너를 포함한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고작 몇 년 사이에 영토의 반을 잃은 이 나라에 더 이상 미래는 없을 거라고."

"……형님은 다르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에 대한 답을 대신해 한 가지 문제를 내보도록 하마."

문제라니, 연설을 앞둔 마당에 제 동생과 태평하게 잡담이라도 나누려는 것일까?

"한 원정대가 배를 탑승한다고 쳐보자꾸나."

아니, 그 또한 스스로의 긴장을 사그라트리기 위한 걸지도 모르지.

잠자코 서있자, 곧 알랭이 테세우스에게 질문을 시작하였다.

"고된 항해에서 그 배는 여러모로 많은 부분이 손상될 테고, 당연히 그 배를 탑승한 사람들은 낡거나 망가진 부분들의 판자를 하나둘씩 뜯어내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하겠지."

"네, 그래야만 배를 계속 이끌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배를 수십 년……. 그를 넘어 백 년이 넘게 항해를 한다 쳐보자."

"……백 년?"

"그래, 각 부품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시간마저도 아득히 지나버린 시간……. 그 시간 동안 계속해서 배의 부품을 갈아끼웠다면, 어느 순간부턴 본래 배가 가진 원형조차도 남지 않게 되겠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발걸음을 멈추는 알랭.

복도의 끝에서는 그를 환영하듯 태양빛이, 그리고 그 너머의 웅성거림이 들려오고 있다.

이제 곧이다. 그것을 마주한 알랭이 다시금 제 동생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그 배는 처음과 같은 배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건……."

말꼬리를 흐리며 턱을 괴는 테세우스.

이후 고민을 길게 이어가는 그가, 자신이 내린 결론을 제 형에게 들려주었다.

"같은 배라고 보기 어렵겠죠. 애초에 부품이 전부 갈아치워졌다면,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상태가 되었을 테니까요."

애초에 배의 수명이란 게 수십 년을 넘지 못하는 법이지 않은가?

그런 배를 탈 수 있을 정도로 계속 부품을 갈아치운다면, 사실상 새로운 배를 만드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수명이 있기 마련이지."

서로가 수명이 다르다 할지라도 결국 모두가 사라지는 순간은 찾아온다.

그렇게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처음과는 다른 새로운 것들.

그에 대한 생각은 알랭 역시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 배의 부품이 모두 갈아치워졌다면, 그 배에 붙여진 이름도 처음과 달라질까?"

"그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만약 이름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 배가 만들어졌을 때부터 가진 의미는 이후에 탑승한 이들에게 계승된다는 의미겠지."

시간이 갈수록 변화는 필연적이다.

파괴와 재구축.

그 두 가지의 과정이 순환을 이루고, 그로부터 남은 잔해조차도 어느덧 초기의 형태가 전혀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래, 알랭이 생각하는 나라란 배와 같은 것이다.

낡은 부품을 교체하다 보면 많은 부분이 달라질 수도 있다.

어쩌면 처음에 유지하고자 했던 모든 것이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근간을, 처음 지어졌던 이름과 사명을 잃지 않는다면, 그 배는 목적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설령 처음의 형태가 전혀 남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의미만은 계속해서 계승되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그 과정이 의미 없다곤 할 수 없다.

망해가는 나라라고 한들, 그런 나라조차도 내버린다면 후세엔 이 나라에 대한 것조차 남겨지지 않게 될 테니까.

"그럼, 지금 이 순간 또한 변화의 일환이라는 겁니까?"

낡은 부분을 져버리고, 새로운 배를 고치기 위한?

"아니."

그 물음에 알랭이 부정을 하며, 이내 복도 끝에 자리한 테라스를 향해 발을 들였다.

"이제야 겨우 출항할 수 있게 된 거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수용한 나머지, 애초에 출항조차도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선박에서 썩어갈 뿐인 배.

그 배에 필요치 않은 부품들을 떨쳐내고 나서야, 비로소 이 나라는 새로운 시대로 항해할 준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 지금 제 앞에 펼쳐진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건국기념일에 맞춰 새로이 중축된 황성.

그 기념을 환영하고자 찾아온 이들은, 고작 한 사람의 눈으로 마주하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존재하고 있었다.

빽빽이 세워진 건물과 그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

얼굴 하나하나 새기기 어려울 정도로 가득 채워진 이들의 사이엔, 정말로 다양한 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평민과 귀족, 학자와 신자, 그리고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와 장교…….

그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이곳에 와서, 새로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를 향한 환호를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엔 아우성을 내지를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현 제국에 불만을 가진 이들은 이미 독립을 한 지 오래고, 그에 엄두를 내지 못해 남은 이들은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며 결속을 다지고 있으니.

'많구나, 참으로.'

대륙의 절반이 사라졌다고 한들, 한낱 인간에 불과한 황제의 눈에조차 이곳에 모인 이들은 터무니없이 많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만 해도 과분히 느껴지거늘, 어째서 제 선조들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포용하려 했던 것일까?

'그래, 결국엔 모두가 각자의 길이 존재하는 법.'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동조가 아닌 협력을 요구하며 타협점을 찾아간다.

진정 조화로 나아가는 길이란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 나라는 지금에 와서야 그 시작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파괴된 전부가 아닌 온전한 절반을.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이 아닌, 자신의 손에 쥘 수 있을 만큼만 거머쥠으로써.

"들어라, 민중들이어!! 나 알랙산드로 테라스가, 이 영광의 순간을 함께하는 모두를 진심으로 환영하겠다!!"

거짓된 평화가 아닌 진실 된 혼돈 속에서 이상을 추구한다.

그것이 결실을 맺는 순간은, 역사상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한 업적으로써 이 땅에 기리 남게 되리라.

* * *

그리고 같은 시각.

제국의 국경선을 넘어선 셰인은, 마침내 그 앞에 자리해있는 거대한 공사현장을 마주하게 되었다.

라인하르트 영지를 벗어난 후 1년. 제국 각지를 돌아다닌 끝에 추천장을 따라 도착하게 된 장소.

"여기가 질리언이 말했던 알피스 아카데미인가."

제국과 연합국. 둘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휴전 중에도 자잘한 분쟁은 계속 이어졌고, 지금에 와선 무력이 아닌 정치적인 견제가 쉴 새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

그런 마당에 휴전선의 위에 세워진 학교는, 이전에 벌어진 전쟁의 참극을 방지하고자 하는 이유에서 세워진 것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평화의 상징을 보며 최소한의 선을 지키고.

더욱 나아가, 훗날의 평화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진짜 인생이란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네. 나 같은 망나니도 선생이 될 기회가 오는 걸 보면."

그곳을 보며 감흥을 느끼는 것도 잠시.

문득 정문의 너머에서부터 한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입고 있는 것은 검은 수녀복.

그 양식은 제국의 국교인 유일교의 것과 같으나, 주변에 감도는 미미한 검은 기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길함을 자아내고 있다.

"셰인. 맞으시죠?"

하지만 정작 셰인이 그녀를 향해 느낀 건 적대감이 아닌 반가움이었다.

베일 밑으로 길게 늘어진 분홍머리와 앳된 얼굴.

세실과 대조될 정도로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여인은, 셰인의 기억에 어렴풋하게나마 존재하는 자였다.

그래, 분명 알고 있는 자다.

그저 오랜 시간 이별을 했기에 잊고 있었을 뿐.

"5년만인가?"

"6년만이에요."

"……벌써 그렇게 지났나?"

"네, 벌써 그렇게 됐네요."

싱긋, 미소를 지은 여인.

그 미소를 마주한 셰인 역시 마찬가지로 그녀를 환대해주었다.

"오랜만이야. 베르디."

베르디 하트리스.

자신의 삶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여인.

6년의 시간이 지나 20대 중반에 들어선 그녀 역시, 셰인과 마찬가지로 어른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색이 감도는 두 눈엔 반가움이 느껴지니.

그 모습을 본 누구도, 처음 그녀를 마주했을 때의 어두움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블레이즈에서 돌아온 후엔 라인하르트에 신세를 졌다고 들었는데……. 내가 있을 때엔 어디에 가 있었던 거야?"

"저는 공식적으로는 제국 사람이니까요."

라이덴발트가 독립을 선언한 후엔 제국으로 돌아갔단 의미다.

그곳에 귀의하는 것도 선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괜찮았던 거야?"

"네, 저를 도와주는 사람들도 많았으니까요."

그리 말하고 가슴께에 손을 올리는 베르디.

가슴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은, 자신이 복귀하였던 제국에서 겪어온 일들에 대한 회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교단은 3년 전과는 전혀 달라졌으니까요."

3년 전, 교황의 사망과 제국의 분단 이후에도 교단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의 존재를 의심하는 이들로 인해 교단의 권한은 축소되고, 정치적인 간섭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거기에 더해 같은 교간원들끼리도 분쟁이 일어나고, 끝내 교단원 중 상당수가 대거 이탈하여 종교를 기반으로 한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물론 근간이 근간이기에 제국에서 교단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현 제국은 더 이상 교국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그런 만큼 베르디도 무난히 지낼 수 있었으리라.

설령 그녀가 다루는 힘이 신앙을 뒤틀어 만들었을지라도, 문화적인 다양성이 보장된 현 시대엔 그녀는 마냥 불경하다고 볼 수 없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세인도 이 학교의 선생님이 되신 건가요?"

신경이 쓰이는 건 그녀가 왜 이 학교에 왔는지.

마찬가지로 그에 대해 신경을 쓰는 베르디의 물음에, 셰인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베르디 너도?"

"아카데미니까 치료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필요하겠지만……. 공교롭게도 타국 사람들은 교단에 대한 의식이 좋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그들의 뜻을 따르지 않되, 그들과 마찬가지로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자신이 교단을 대표하여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비록 그녀가 섬기는 건 신이 아니지만.

그 이상만은 정식 신자들에 필적한 수준이었으니.

"분명, 이 학교에도 저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겠죠?"

그리고 그 힘을 각성한 계기를 마련한 건 다름 아닌 제 앞에 있는 남자.

그라면 분명 자신과 같은 사연을 가진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리라.

우연찮게 만난 과거의 연으로부터, 베르디는 그러한 신뢰를 느끼고 있었다.

"……뭐가 됐건 앞으로는 동료가 된 건가."

그런 믿음 역시 자신이 이루어낸 일 중 하나일까.

그런 생각에 멋쩍게 웃음을 지은 셰인이, 곧 베르디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여러모로 부족한 몸이지만, 앞으로 잘 부탁할게."

"저야말로."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화답을 하는 두 사람.

그렇게 유대를 나눈 두 명이, 아카데미의 정문을 지나 그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제국의 분단, 그 뒤를 이어 찾아온 전란의 시대.

그런 불온한 평화 속에서 화합을 위해 만들어진 휴전선 위의 아카데미에선, 구시대의 의지를 이은 계승자가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갈 준비를 취하고 있었다.

의사이자 군인이며, 기적을 알아가는 신자로서.

그리고 이제는…….

이제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이 되어.

[의무병의 환생 2부 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