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1화 (1/67)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1

오후의 태양이 뜨겁게 작열하는 여름날에 그늘 한 점 없는 정원에 앉아 있기란 꽤 고역이었다.

“후우….”

한 두어 시간쯤,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오래 기다렸나요?”

더위에 지쳐 분수대로 뛰어들지 말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그때, 드디어 기다리던 그가 왔다.

“아니에요.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소공작님.”

나는 욱하는 마음을 참아내며 손수건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이미 한 시간 전쯤 축축하게 젖어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손수건이었지만, 급한 대로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땀을 많이 흘리셨군요.”

남자가, 그러니까 로렌스 게르하르트 소공작이 말했다.

그는 땀에 흠뻑 젖은 내 모습에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아니.

놀란 척하는 거겠지.

“날씨가 상당히 더워서요.”

“날씨가 꽤 덥네요. 이럴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요.”

그가 천연덕스럽게 실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1년 중 가장 더운 8월, 이 한여름에 날씨가 이럴 줄 몰랐다니.

그럼 눈이라도 올 줄 알았단 말인가?

아주 뻔뻔한 모습에 화가 나려 했지만 지은 잘못이 있기에 애써 웃어 보였다.

실은 내가 지은 잘못도 아니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안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그가 사람 좋은 척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응접실에 드디어 자리가 났나 보군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순간적으로 비아냥거리는 말이 나가버렸다.

아차 싶었지만, 이렇게 된 거 그가 조금이라도 내게 미안해하길 바랐다.

그러나 소공작은 조금의 미안한 기색도 없이 뻔뻔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가시죠.”

남자는 조금의 배려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혼자서 걸어가는 뒷모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얄미워 보였다.

“후우….”

저 남자가 나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대충 느낌이 왔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눈앞은 깜깜했고 가슴은 답답해져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거죠?”

“아….”

로렌스는 내가 응접실의 소파에 미처 앉기도 전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조금의 예도 지켜주지 않는 그의 모습에 작은 한탄이 흘러나왔다.

이런 대우에도 화 한번 내보지 못하고 이토록 비굴하게 굴어야 한다는 게 분통했지만, 어쩌겠는가.

“돌려드릴 게 있어서요.”

“…무엇을?”

소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허튼짓하지 말라는 경고의 눈이었다.

허공에서 그의 붉은 눈과 시선이 잠깐 부딪혔다.

아마 내 눈은 볼품없이 흔들리었을 테지.

분명 소공작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는데 더럽게 무서웠다.

젠장.

차라리 바깥의 그 무더위가 나았던 것 같기도 했다.

“…….”

이걸 꺼내면 그가 날 어떻게 볼까?

어서 말하라는 듯한 소공작의 태도에 하는 수 없이 가방 속으로 손을 넣었다.

내 체온보다 조금 차가운 금속에 손끝에서부터 서늘함이 올라왔다.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렸지만 하는 수 없이 그것을 꺼내었다.

“죄송해요, 진작에 드렸어야 했는데.”

작은 로켓을 쥐고 있는 손이 볼품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걸 왜….”

내 손에서 조금 흘러내린 목걸이만 보고도 이것이 무엇인지 눈치챈 듯, 로렌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그러게요, 이걸 왜 제가….

할 수만 있다면 주야장천 변명을 늘어놓고 싶었으나, 그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걸 왜 네가 가지고 있는 거지?”

그가 내 손에서 목걸이를 채갔다.

싸늘하게 식은 그의 목소리는 나에 대한 깊은 증오를 드러냈고 이제 더는 조금의 가식조차 없었다.

소공작의 말투에서 그가 지금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

분명 너무 더웠는데,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아마 응접실은 마도구를 이용해 실내 온도를 시원하게 유지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무섭게 노려보는 로렌스때문에 한기를 느끼는 중이었다.

“이걸 왜 네가 가지고 있는 거냐고.”

“소공작님께서 떨어뜨리신 걸 제가 주웠어요.”

“하!”

그의 입이 삐뚜름해졌다.

“너는 주운 물건을 1년 동안이나 갖고 있나? 주인이 누군지 뻔히 알고 있음에도?”

그가 화를 참으려 애쓰는 듯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그러게요. 미친 거죠.’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소공작의 화를 돋우기만 할 뿐이라는 걸 알았기에 말을 삼켜냈다.

이미 기사 작위를 받은 로렌스를 자극해봤자 내게 좋지 못했다.

“….”

어쩌면 침묵만이 살길이었다.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한껏 턱을 깊이 당기고 고개를 숙였다.

그 후 양손을 조심스레 맞잡고는 가만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신병잔가?”

“……”

“이젠 하다 하다!”

“죄송합니다.”

나를 향한 깊은 증오가 섞인 그의 목소리에 몸이 떨렸다.

“하! 죄송? 이게 또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군.”

“……”

“패트리샤 헤라르일라. 경고하는데 두 번 다신 내 눈에 띄지 마.”

그는 더는 나와 같이 있고 싶지도 않은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낮게 경고했다.

사교계가 얼마나 좁은데, 눈에 띄지 말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의 말에 착실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탁!

“하아….”

응접실의 문이 닫히고서야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패트리샤 헤라르일라. 그게 내 이름이다.

한 달 전에 빙의한 소설 속 악녀의 이름이기도 했고.

패트리샤는 <기적의 사랑>이란 소설 속에서 남주와 여주를 부지런히 방해하고 괴롭히다 죽임당하는 악녀였다.

쯧, 하필 빙의를 해도 별 거지 같은 역으로….

이왕 빙의할 거라면 모두에게 사랑받는 귀족 영애나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모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악역으로 빙의할 것이지.

“하아…”

패트리샤는 사랑받지도 무엇하나 제 마음대로 할 수도 없었으니 그 둘 다 아니었다.

내가 한 달 동안 패트리샤로 살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패트리샤가 꽤 불쌍한 악녀라는 거였다.

자고로 양판소 소설의 악녀라고 한다면 가문 빵빵한 집안에서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는, 자신밖에 모르는 망나니 아니던가.

하지만 패트리샤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충분히 먹고살 만한 재력과 명성을 가진 헤라르일라 공작가의 자재였지만, 가문의 눈엣가시였기에 그 모든 것을 누릴 수는 없었다.

헤라르일라는 대대로 학자를 배출하는 명망 깊은 가문이었다.

그러나 패트리샤는 헤라르일라답지 않게 배움이 늦었다.

다섯 살이 되기 전에 글을 떼는 것이 일반적인 헤라르일라에서 패트리샤는 아홉이 되어서야 겨우 글을 떼었다.

그 때문일까?

패트리샤가 가족 중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가.

패트리샤의 세 오빠는 모두 패트리샤를 무시했다.

겪어본 바로는 패트리샤와 조금이라도 말을 섞는다면 저들도 멍청해질까 두려워하는 듯했다.

또 패트리샤의 아버지인, 이제는 내가 아버지라 불러야 하는 그 양반은 틈만 나면 내게 면박을 줬다.

“패트리샤. 네가 감히 무슨 티파티에 가겠다는 거냐?”

“….”

“가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루는 티파티에 초대받았길래, 가겠다고 했더니 노발대발하며 성을 냈다.

“더는 가문의 명성에 먹칠할 생각 말고, 방에 처박혀있거라!”

그는 내가 티파티에 나가 다른 이들과 말을 섞을까 봐 불안해했다.

내 무식함. 아니, 패트리샤의 무식함이 들통날까 두려운 듯 화를 내며 나를 집 안에 가둬두려고 했다.

덕분에 패트리샤는 오직 아버지와 함께할 때만 사교계에 얼굴을 내비칠 수 있었다.

그는 아무래도 패트리샤의 모든 행동을 감시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듯했다.

이런 가족의 따돌림을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건만, 패트리샤는 사용인들에게까지 무시당했다.

가주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형제들에게조차 무시당하는 패트리샤를 누가 두려워하고 공경해주겠는가. 그들에게 패트리샤는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하지만 명색의 악녀 패트리샤도 그저 당하고만 있을 성격은 아니었다.

패트리샤는 악녀의 근본인 강약약강을 누구보다 잘 실천했고 그렇게 제 시녀와 하녀, 시종에게 패악질을 부렸다.

맘에 들지 않는다면 고함은 기본이요, 필요하다면 처벌까지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제 입맛에 맞게 시종들을 길들여 놓았지만, 덕분에 악녀라는 타이틀을 얻어야만 했다.

게다가 이 일로 인해 더욱 헤라르일라 공작 눈 밖에 나게 됐다.

머리가 부족한 것도 모자라 교양 없이 소리를 빽빽 지르고, 조금만 맘에 들지 않으면 행패를 부리는 아이가 제 자식이라는 게 지독히도 싫은 모양이었다.

내가 보기엔 헤라르일라 공작도, 그러니까 내 아버지란 작자도 그리 교양있어 보이진 않았는데.

하여튼 악녀 패트리샤는 여느 양판소 소설의 악녀와 달리 가족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음….

그래, 그녀가 불쌍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가장 불쌍한 이는 나였다.

그 어떤 인생의 낙도 없이 몇 년 후에 죽을 운명인, 패트리샤로 빙의한 내가 제일 불쌍했다.

지금 패트리샤의 나이가 열일곱이니, 죽음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본격적인 소설은 남주의 성인식 후 그가 공작이 되고 나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뤘다.

그가 나보다 한 살 많으니, 소설대로라면 대략 2년 후쯤에 나는 죽을 운명이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