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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사랑>은 여주인공 아르세르 로드리게즈가 망해가는 제 가문을 구하기 위해 수도로 올라오며 시작된다.
수도로 올라온 그녀는 여러 귀족을 찾아가 제 가문에 투자해달라고 도움을 청하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한다.
그러던 중 찾아간 헤라르일라 가에서 패트리샤에게 험한 꼴을 당하고 쫓겨난 아르세르는 모든 걸 포기하고 제 영지로 돌아가려다 마지막으로 게르하르트 가에 가 도움을 청하는데, 그 과정에서 로렌스의 동정심을 얻는다.
패트리샤에게 당해 엉망이 된 아르세르에 로렌스는 동질감을 느낀 것인지 한 가지 조건을 걸고 그녀의 가문에 투자를 약속한다.
패트리샤를 제게서 완전히 떨어뜨려 달라는 조건.
그 두 사람은 그렇게 인연을 맺고 서로 사랑하는 척 연기하며 계약 결혼한다.
계약 기간은 패트리샤가 로렌스에게서 완전히 떨어지고 아르세르 가문이 입지를 다질 때까지.
그러나 로맨스 소설에서 여주와 남주가 계약 기간이 끝났다고 그대로 헤어질 리가.
결국 진실한 사랑을 이룬 주인공들과 질투심에 악행을 일삼던 패트리샤의 죽음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완벽한 권선징악.
해피엔딩.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사랑을 이룬 주인공과 제 죗값을 치른 악당.
그러나 나는 그렇게 소설이 끝나도록 두고 볼 수 없었다.
아무리 사랑받지 못하고 녹록지 않은 인생이라 하더라도 죽음보다야 삶이 낫지 않겠는가?
내게 주어진 이런 거지 같은 운명에도 하나 정말 다행인 것은 나는 남주 로렌스 게르하르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로렌스 게르하르트, 그는 턱 빠지게 잘생겼다.
열여덟밖에 안 됐으면서 성인들보다 큰 키와 넓은 어깨. 검술로 만들어진 다부진 몸을 가진 로렌스는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소년이었음에도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흑발과 새하얀 눈처럼 빛나는 흰 피부.
새빨간 피처럼 붉은 눈동자와 입술은 그것만으로 다른 이들의 시선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백설 공주를 본 적은 없지만, 한가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백설 공주보다 더 미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취향 존중 따위는 조금도 해주지 않는 이기적인 얼굴의 소유자였다.
나는 로렌스 게르하르트를 보기 전까진 사람마다 각자가 좋아하는 이상형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렌스는 눈빛 한 번으로 모든 이들의 미적 기준을 부숴버렸다.
그러니 내 스스로가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남자에 빠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아주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이니.
난 절대 로렌스를 좋아하지 않을 거고 멍청하게 죽지 않을 거야!
어차피 남주, 여주의 사랑놀이에는 큰 관심 없었다.
그들을 방해하다 삶을 마감하기엔 아직 목숨이 아까웠으니.
게다가 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다.
조금 거창하지만, 건물주가 돼 평생 일하지 않고 먹고 노는 것. 나를 무시하는 가족들과 이 죽을 운명에서 도망쳐 만수무강하는 것.
그게 내 꿈이었다.
그러기 위해 우선 돈을 모아 패트리샤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이 가족에게서 벗어날 것이다.
뒤도 안 돌아보고!
나는 여주가 수도로 올라오기 전까지 모든 돈을 모아 이곳을 뜰 계획이다.
뭐, 만에 하나 내 부재로 인해 로렌스와 아르세르가 이어지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잠시 했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면 그들의 연이 거기까지인 것이겠지.
괜히 로렌스와 아르세르 주위에서 얼쩡거리다 그들과 조금이라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보다 내가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나는 죽음으로부터 멀리 도망칠 것이고 그러기 위해 오늘 이곳에 온 것이다.
패트리샤와 로렌스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서.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패트리샤가 주운 목걸이를 돌려주기 위해.
사실 주워서 일 년 동안이나 숨겼다면 주웠다기보단 훔쳤다는 표현이 더 맞는 듯했지만.
…물론 로켓 목걸이 말고도 로렌스에게 미안한 일이 많았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쨌거나 나도 피해자니.
앞으로는 그의 눈에 띄지 않을 테니 부디 그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날 용서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사죄의 의미로 한 여름날 두 시간 동안이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반성하지 않았던가.
땀으로 범벅된 내 모습에 꼴 좋다는 듯 비웃던 그의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나는 장작 두 시간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해 건조해진 목을 축이려 찻잔을 들었다.
“……”
그러나 이내 다시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기에.
로렌스 게르하르트.
미안했고!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 * *
“패트리샤, 몰래 어딜 갔다 오는 게냐!”
헤라르일라 공작저로 돌아오니, 이미 해는 지평선 너머로 빈쯤 모습을 감춘 후였다.
푸르렀던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드는 시간.
집무실의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에 방 안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고함을 지르느라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서인지.
아버…. 부친의 얼굴은 썩기 직전의 토마토처럼 검붉은색을 띠었다.
매일 책상 앞에 앉아 있느라 운동을 하지 못한 공작께서는 깡마른 몸을 갖고 계셨다.
근육이라곤 조금도 없는 헤라르일라 공작에겐 소리 지르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쯧, 성공할 줄 알았는데.’
허약한 몸으로 성을 내는 공작에 나는 죄송함이나 두려움이 아닌,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 저택을 빠져나가기 위해 장장 삼 일이나 준비한 은밀하고도 완벽한 계획이 들통났다는 게 무척이나 안타까울 뿐이었다.
저택 내 모든 사용인의 눈을 피해 달아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탈출은 사용인의 동선을 파악하는 치밀함과 순간의 판단력, 민첩함을 요구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무사히 빠져나갔지만, 게르하르트 공작저에서 꽤 시간을 허비했고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나머지 외출을 들켜버렸다.
“감히 네가 아비의 말을 거역하고 몰래 집을 나가?”
공작은 이마에 핏줄까지 세워가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공작의 말처럼 그의 말을 거역했음에도 죄송스럽다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가냘픈 공작에게 맞는다고 해도 별로 아플 것 같지 않았기에 크게 무섭지 않았다.
죄송하지 않은 이유는 내 효심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가 내게 내린 명이 너무 억지 같았기 때문이었다.
공작의 명은 굉장히 비상식적이었다.
그래, 나는 과도하게 통제받았다.
헤라르일라 공작은 패트리샤를 이 저택 안에 가둬두었다.
공작의 허락 없이 패트리샤는 마음대로 외출조차 할 수 없었고 그저 공작이 원하는 대로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했다.
이해할 수 없지만, 헤라르일라 공작은 내가 저택 바깥으로 나가는 걸 병적으로 싫어했다.
지금도 그는 내가 외출 좀 했다는 사실 때문에 목의 핏대를 터뜨릴 듯 고함치며 나를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죄송해요, 답답해서 잠시 바람 좀 쐬고 왔어요.”
나는 내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고 반성할 의지도 없었지만 죄송하다 답했다.
불같이 화가 난 공작을 오래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에.
공작은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는 것이 가장 적절한 조치였다.
내 외출이 발각된 것은 유감이었지만, 나는 이 일이 최대한 조용히 넘어갔으면 했다.
“어딜 가! 누구를 만났냐고 물었어!”
그러나 이미 화가 난 공작은 날 조용히 방으로 보내줄 것 같지 않았다.
“……”
게다가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해 날 곤란하게 만들었다.
나는 아직 이곳에 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성격장애를 앓고 있는 듯한 헤라르일라 공작의 정보력을 알지 못했고, 싸늘하고 차가운 소설의 남자주인공 로렌스 게르하르트의 아량이 어느 정도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거짓을 말해 순간의 상황을 모면하고 넘어갈 것인지, 진실을 말해 기어이 공작의 핏줄을 터뜨릴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그때.
“어딜 갔느냐고!”
“번화가에요.”
공작이 참을성 없이 다시금 소리를 질렀고 나는 서둘러 그의 말을 끊고 답했다.
“그저 수도의 번화가에 가 사람들을 구경하고 왔을 뿐이에요.”
게르하르트 공작저에 가기 전 수도의 번화가에 가긴 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저 진실의 일부를 얘기했을 뿐.
“누가 너더러 마음대로 나가도 좋다고 허락했지?”
그래도 내 대답이 꽤 마음에 든 듯 공작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작아졌다.
그는 더 이상 누구를 만났냐고 캐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화가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우리 가문의 명성에 얼마나 먹칠하려고!”
그러나 다시금 고함치는 공작에 내 착각은 금세 깨져버렸다.
아니, 내가 바깥 좀 나가는 게 뭐라고 가문의 명성까지 들먹인단 말인가?
집 좀 나간다고 사라질 명성이었으면 애초에 없었던 거 아냐?
한껏 진지하고 엄중한 목소리로 화를 내는 공작에 어이가 없었지만.
“…죄송해요.”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공작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고함을 듣는 건 이 정도로 족했으니.
게다가 마음 편해지자고 한마디 쏘아붙이다가 가진 것도 없이 집에서 쫓겨나고 싶지는 않았다.
“멍청한 계집, 그저 네 방에 처박혀있으란 말이야!”
그러나 죄송하단 그 말에도 공작은 삿대질까지 해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