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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3화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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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누가 보면 내가 가문의 돈을 들고 달아나려 하다 잡힌 줄 알겠네.

“예,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작의 말에 동조했다.

나도 그만 내 방에 처박혀있고 싶었다.

부디 그가 그만 나를 보내주실 간절히 바랐다.

“반성은 하는 게냐?”

“…네? 당연하죠.”

갑작스러운 공작의 물음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었다.

“고개는 빳빳이 들고 귀찮다는 듯 쳐다보며 반성한다? 지금 장난치는 게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혼내면서 바라는 것도 참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서둘러 그가 바란 대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

고개 숙이는 게 오늘 하루만 몇 번째인지.

불쌍한 내 신세에 한숨이 나오려 했지만, 괜한 트집 잡힐까 그조차 뱉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덜떨어진 놈.”

공작의 목소리에서 깊은 경멸이 느껴졌다.

툭 내뱉은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나를 한심하고 쓸모없는 사람이라 낙인찍었다.

아니, 하란 대로 해도 잔소리하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슬프게도 난 돈이 없었다.

“네가 내 자식이란 게 수치스러울 뿐이다. 내게 단 하나의 흠이 있다면 그게 바로 너란 말이야!”

공작의 성난 목소리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흠, 그는 패트리샤를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의 흠이 그거 하나뿐이라 생각한다는 게 어이없었지만, 지금까지 봐온 헤라르일라 공작의 거만하고 오만한 모습을 보면 자기 객관화가 어려운 듯했다.

“…”

“고개를 끄덕여? 지금 장난치는 게냐?”

“장난이라뇨, 절대 아니에요. 게다가 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어요!”

사실 끄덕인 듯도 했지만, 최대한 억울해 보이는 눈을 하고 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잔소리가 여기서 더 길어진다면 정말 짜증 날 것 같았다.

“하, 그만 나가거라!”

공작은 완전히 질려버려 더는 나와 말 섞기도 싫다는 듯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공작의 행동에 어이없었지만, 어쨌거나 내가 기다리던 말이었다.

나도 그만 나가고 싶었으니.

쾅!

그가 맘을 바꿀까 재빠르게 방에서 빠져나와 있는 힘껏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문이 두껍고 무거워 원하는 만큼 큰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소리에 놀랐을 공작을 생각하니 이 정도도 꽤 만족스러웠다.

다다다다.

작은 반항을 마친 나는 혹여나 공작이 화를 내며 따라 나올까 싶어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 * *

“빨리 돈을 모아 이 거지 같은 집을 떠나야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하는데 가문의 수치이자 고귀하신 헤라르일라 공작님의 단 하나뿐인 흠 취급이라니.

“에이씨, 보석들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패트리샤 방의 서랍이란 서랍은 모두 뒤져보았다.

그렇게 뒤진 결과 번쩍번쩍 빛나는 함도 하나 찾아냈다.

“하아….”

그리고 그 안에는 반지부터 귀걸이 목걸이 팔찌 브로치까지 모든 종류의 장신구가 단 하나씩 들어있었다.

반지도 목걸이도 귀걸이도 모두 다 하나씩.

‘어떻게 이게 끝이지?’

커다란 함은 텅텅 비어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대체 다 어디 간 거야?”

나는 서른 번째 똑같은 서랍을 뒤지며 사라진 장신구들을 찾아 나섰지만, 당연하지만 이번에도 실패였다.

만약 패트리샤가 검소한 사람이었더라면 함이 텅텅 빈 이 상황을 이해라도 할 수 있었겠지.

그러나 패트리샤는 전혀 검소하지 않았다.

패트리샤의 드레스 방만 2개가 넘었다.

그렇다고 헤라르일라 공작이 패트리샤에게 돈을 적게 내주는 것도 아니었다.

품위유지비로 평민이 일 년 동안 일해야 얻을 수 있는 돈을 분기마다 내주었으니.

근데 그 돈이 다 어디 간 거냐고!!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보석이 이것만 있진 않았을 것이다.

‘보석이 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누가 훔쳐 갔나? 아니면 자기만 아는 비밀장소에다 숨겨놓은 거 아니야?’

“아가씨, 왜 그러세요?”

“깜짝이야, 언제 들어온 거야?”

갑작스러운 시녀의 등장에 나는 움켜쥐고 있던 머리칼을 고이 놓아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크했는데 못 들으셨나요?”

눈이 찢어져 인상이 조금 사나운 시녀가 제 잘못은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었다.

“아, 못 들었어. 뭐 잃어버린 것 좀 찾느라 바빴거든.”

적대감 섞인 시녀의 말투도 이제 꽤 익숙해진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그녀를 떠보았다.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지 뭐야?”

“뭘 찾으시는데요?”

그러나 시녀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하긴. 그녀가 내 것, 그러니까 패트리샤의 것에 손댔다면 이렇게 당당하지는 못하겠지.

“혹시 누가 내 방에 들어왔니?”

시녀의 물음에 나는 답하지 않고 질문을 바꿔 다시 물었다.

그녀에게 보석들을 찾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어쨌거나 그녀는 헤라르일라 공작의 사람이 아니던가.

“전혀요.”

시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어 보였지만 그녀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차게 식은 그 눈빛은 뭔가 아니꼽다는 듯 날 위아래로 훑어 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봐.”

나는 작게 손짓하며 그녀를 쫓아내었다.

왠지 비웃는 듯한 시녀의 표정에 더는 그녀와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하루치 무시와 경멸은 이미 충분히 당했다.

“하아….”

별것 하지 않았는데도 몸이 무겁게 늘어졌다.

시녀를 쫓아내고 혼자 남은 나는 침대에 그대로 몸을 뉘었다.

“왜 보석도 없어….”

자유와 한 발짝 멀어진 듯했다.

“드레스는 팔아도 값이 안 나온단 말이야.”

방 안에 있는 옷장을 가득 채운 쓸모없는 드레스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서러워졌다.

어떻게 된 게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쓸모없는 드레스, 그게 마치 내 처지 같았다.

“…아니, 아니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모든 건 공작의 잘못이지. 자기 딸한테 흠이라느니 덜떨어졌다느니 그게 할 소리야?”

생각해보니 아주 못돼먹은 부친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말에 나는 조금 짜증이 날 뿐이지만, 그간의 패트리샤에게는 큰 상처였겠지.

제 부모에게 그런 말을 들으며 살아왔을 패트리샤를 생각하자 그녀가 조금 가여웠다.

“그래, 로렌스 게르하르트한테는 진 잘못이 있다 쳐!”

로렌스의 화는 이해할 수 있는 화였다.

그러나 헤라르일라 공작의 화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싶지도 않았다.

공작의 얼굴을 떠올리자 열이나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건 아니지!”

마음대로 바깥에 나간 게 그리 큰 죄인가?

못 나가게 하는 놈이 이상한 거지.

침대에서 내려 온 난 억울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고자 책상 앞에 앉아 깨끗한 새 종이를 꺼내 들었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런 말이 있었지.

나는 펜을 들고 원수를 축복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행운이 찾아가길 바라며.

이 편지는 도우라이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한 해에 한 바퀴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4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이 편지를 포함해서 28통을 행운이 필요한 당신의 친구에게 보내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글씨가 빽빽이 채워진 종이를 보자 기대감으로 마음이 들떴다.

과연 공작이 이 편지를 받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좋아, 좋아!”

부친께 행운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효심이 전혀 없진 않은 것 같군.

마음 깊은 곳에 있던 효심을 확인해서일까?

편지를 봉투에 담아 밀봉하는 내내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 * *

평소 같았다면 시녀가 깨우러 올 때까지 침대 위에서 뒤척거렸을 나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지금쯤 공작이 편지를 받았을까?

무료했던 삶에 찾아온 간만의 즐거움에 심장이 기분 좋게 콩닥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어나가 공작의 반응을 살피고 싶었지만, 오늘은 특히 조심해야 했다.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한다면 범인이 나라는 것을 눈치챌지도 모르니.

그러니 아침 식사 시간까지 가만히 기다려야 했다.

“…아침 식사까지 한 시간.”

꽤 긴 시간을 버티기 위해 책을 펼쳐 들었다.

“……”

그러나 채 십 분도 읽지 못하고 나는 다시 책을 덮었다.

“더럽게 재미없네.”

요 며칠 책을 읽어도 더는 재미있지 않았다.

“하아….”

헤라르일라 공작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패트리샤는 공작저의 시녀 중 친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

패트리샤를 무서워하는 시녀들은 최소한의 예를 갖춰 날 대우해주긴 했으나 누구도 나와 긴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가족과 친한 것도 아니었으니.

패트리샤는 공작저에서 친하다 할만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래, 패트리샤는 공작저의 왕따였다.

나는 이곳에 온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책만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유일하게 무료함을 달래는 방법이었지만 책도 그만 질려버렸다.

더는 글자를 가까이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심심해.”

내가 헤라르일라 공작저에서 탈출하기 위해 모든 사용인의 동선과 일하는 시간을 파악할 수 있었던 이유도 보석을 찾는답시고 똑같은 서랍을 서른 번이나 헤집은 이유도 모두 시간이 남아돌았기 때문이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 것보다는 보석을 찾아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서른 번 서랍을 헤집는 게 더 재미있을 정도로 삶이 무료했다.

사교계에도 못 나가고 집에서는 왕따고.

“에휴…. 누가 나가 살라고 돈 좀 주면 좋겠다.”

나는 언제 끝날지 모를 이 거지 같은 생활에 착잡함을 느끼고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결국 오늘도 시녀가 오기 전까지 멍하니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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