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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아침 식사 시간.
평소보다 조금 늦은 헤라르일라 공작이 식탁에 앉자마자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붉은 얼굴과 이마에 툭 튀어나온 힘줄이 그의 심경을 알려주었다.
“아버지, 무슨 일 있으십니까?”
헤라르일라 공작가의 첫째 모르간 헤라르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평소와 다른 공작의 모습에 둘째, 바버 헤라르일라와 셋째, 밀럼 헤라르일라까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물론 나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공작을 바라보았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탁!
그가 다시금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힘껏 내리친 듯했지만, 공작의 얇은 팔은 큰 타격을 만들지 못했다.
“후…. 됐다. 식사나 하자.”
술술 다 말할 듯했던 헤라르일라 공작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는 식기를 들었다.
갑작스럽게 입을 닫아버린 공작에 그의 세 아들들은 눈을 깜빡이며 헤라르일라 공작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 모두 제 아버지가 왜 그러는 것인지 무척 궁금한 듯했다.
나도 공작이 왜 갑자기 말을 멈춘 것인지 궁금했다.
그 편지를 그냥 무시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 때를 대비해놓긴 하였지만.
한바탕 난리 칠 줄 알았는데, 잠잠한 공작을 보고 있으니 조금 아쉬웠다.
물론 곧 터질 듯 시뻘게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분을 참는 모습도 웃기긴 하였지만.
* * *
공작이 편지를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려면, 그에게 불행을 가져다주어야 했다.
그게 설령 우연이라 해도 혹시 하는 마음에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를 불안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이미 성공이었다.
그 이후에는 편지를 쓰지 말라고 말려도 본인 스스로 쓰게 될 테니.
다칠 정도의 위험은 아니지만 기묘하다고 느낄만한 일.
내가 심심함을 견디다 못해 정신이 나간 것인지 공작을 향한 복수심 때문인지 이제 알 수 없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마구간에 가 공작이 아끼는 백마를 풀어주기로 했다.
처음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쩐지 평소보다 발걸음이 빨라졌고 콧노래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퍽!
들려오는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이 멍청한 새끼가!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나 보지?”
“그 잘난 얼굴, 어디 한번 망가뜨려 줄까?”
마구간은 저택의 뒷마당에 있었다.
헤라르일라 공작의 마당은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고 뒷마당에는 마구간과 창고뿐이었다.
뒷마당을 이용하는 이들은 사용인들밖에 없을 텐데.
그곳에서 발길질 소리와 낮은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뒷마당에서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들킨다면 백마를 풀어준 이로 의심받을 텐데.’
사람들의 말소리에 나중에 다시 오기로 하고 뒤돌아 가려는데, 다시금 발길질 소리와 함께 모욕적인 말들이 들려왔다.
“이딴 일도 똑바로 못하는 걸 보니, 네 부모가 널 왜 버렸는지도 알만하군.”
“쓰레기 같은 놈.”
“죄송합니다. 다, 다음부턴 잘할게요.”
울먹이는 목소리가 자비를 애원했다.
그러나 애처로운 목소리에도 발길질은 끊이지 않았다.
“……”
뒷마당에서 얼쩡거리던 걸 사용인들에게 들킨다면 백마가 도망쳤을 때 의심 사기 쉬울 텐데.
백마를 풀어주는 건 무린 것 같네.
아쉽긴 했지만, 공작을 위한 선물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어나갔다.
“이봐, 그만하지?”
나는 위풍당당하게 걸으며 턱을 한껏 치들어 보였다.
그래, 내가 무시당하긴 하지만 헤라르일라 공녀였다!
그간 체면 없이 게르하르트 소공작과 헤라르일라 공작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던 지난날이 스쳐 갔다.
드디어 신분제 사회에서 공녀의 위엄을 보여줄 수 있는 건가?
그들에게 주의를 줘야겠다 생각하며 위엄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건만.
“이곳이 언제부터 동네 싸움터……?”
땅바닥에 누워 있는 이의 모습에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미친놈들.”
공녀로서 품위와 권위를 보여주려 했건만 내 입에선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의도했던 품위와는 조금 거리가 먼.
그러나 바닥에 쓰러진 작은 아이를 보면 내가 아닌 누구라도 그리했겠지.
채 10살도 되지 않은 듯한 작은 남자아이가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아이를 때린 사내는 20살쯤 되어 보였고. 게다가 두 명이었다.
“아가야, 괜찮니?”
흙을 온몸으로 뒤집어쓴 아이는 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저…. 공녀님. 그게 아니라!”
저보다 훨씬 작은 아이를 피떡으로 만들어놓고 변명하듯 입을 연 무뢰한들의 얼굴에서 낭패감이 엿보였다.
“입 다물어.”
죄책감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표정에 지금 당장 끝장을 보고 싶었으나,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기에 나는 조심스레 아이를 안아 들었다.
“너희. 여기서 기다려.”
그들에게 그리 말하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전, 괜찮아요.”
작은 아이는 괜찮다며 내려달라고 중얼거렸지만, 너무 가벼운 아이의 무게에 내려놓기도 무서워 조심스레 아이를 고쳐 안고 방으로 향하는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공녀님?”
“문 좀.”
방문 앞에 서 있던 시녀가 놀란 듯 나와 내 품에 안겨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경악 어린 시녀의 표정을 보니 이 아이를 내가 때렸다고 여기는 듯했다.
패트리샤가 어떠한 인생을 살아왔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는 반응이었다.
“문 좀 열어줘.”
내가 문을 턱짓하자 그제야 시녀가 문을 열어주었다.
“주치의를 데려와.”
나는 아이를 침대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공녀님, 저는 정말 괜찮…”
“너는 우선 가만히 앉아 있어.”
억지로 일어나려 애쓰는 아이의 이마를 살짝 누르자 아이가 몸에서 힘을 뺐다.
“물수건도 가져다줘. 빨리.”
“아, 네. 네!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아직도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는 시녀를 재촉하자 그녀가 아차 싶은 듯 서둘러 방을 나갔다.
시녀가 나가고 방에 나와 아이만 남게 되자 아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때문에 침대가 더러워질 거에요.”
“이미 더러워졌으니 그냥 있어.”
아이는 차마 일어나지도 못하고 불편한 듯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많이 아파?”
“아니에요, 전 괜찮….”
아이는 차마 말을 다 있지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그는 아프지 않다고 말했지만, 눈은 퉁퉁 부은 채 코피까지 흘리는 모습으로 아프지 않다고 말하면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곧 의원이 올 거야.”
“…”
“자, 코 막아.”
흙이 묻어 지저분한 아이의 작은 손이 내게서 티슈를 받아 갔다.
아이는 작은 손을 꼬물거리며 제 코를 틀어막았다.
내 손도 큰 편은 아니었는데, 아이의 손은 내 것보다 훨씬 작았다.
이렇게 작은 아이를 두들겨 패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자식들은 뭐야?”
“그… 그분들은….”
벌컥.
아이가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방문이 열리고 주치의가 들어왔다.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시녀가 빨리 가보라고 한 것인지 그의 숨이 약간 흐트러져있었다.
“전 괜찮죠.”
“그럼….”
그제야 의원의 시선이 내 침대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로 향했다.
흙이 온몸에 묻어 있는 꼬질꼬질한 아이를 확인한 의원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빨리 진찰해요.”
아이가 이리 다쳤는데 걱정보다도 경멸하는 눈으로 아이를 쳐다보는 의원에 어이가 없었다.
뛰어온 듯한 모습에 조금 감동하였는데, 순식간에 정이 떨어져 목소리가 생각보다 차갑게 나왔다.
“…예, 알겠습니다.”
의원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아이의 몸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셔츠를 벗은 아이의 하얀 몸은 뼈가 다 보일 정도로 빼빼 말라 있었고, 몸의 군데군데 보라색과 노란색으로 물들어있었다.
“미친놈들.”
조금 전 보았던 두 사내 때문이라 생각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그들은 틈이 날 때마다 아이를 때린 듯했다.
세상 어딜 가나 이런 놈들이 꼭 있었다.
이런 놈들은 똑같이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이래 봬도 내가 악녀 패트리샤라고.
그건 더 이상 나빠질 평판이 없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 아주 잘 못 걸린 거지.
“저, 공녀님.”
진찰은 끝났는지 의원이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부러진 곳은 없습니다.”
“다행이네.”
다행이라 말하면서도 그간 아파했을 아이를 생각하니, 인상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아이는 제 몸에 난 상처보다도 지금의 상황이 더 두려운 듯했다.
그는 어깨를 한껏 움츠린 채 의원과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제 몸에 난 상처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아이의 표정에 마음이 답답했다.
“진찰해보니 영양실조도 있는 듯하지만, 앞으로 먹을 것에 조금만 신경 쓰면 금방 괜찮아 질듯합니다.”
“응, 알겠어.”
저리 삐쩍 말랐으니.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듯했다.
“그럼 진찰은 끝났으니 그만 가보겠습니다.”
“잠깐, 멍을 빼는 약은 없나?”
“음…약은 있지만.”
의원이 아이를 힐끔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드리겠습니다.”
약을 꺼내면서도 인상을 쓰는 그의 표정을 보니 조금 탐탁지 않은 듯했다.
“왜 그러지?”
“귀한 약을….”
의원은 말끝을 흐렸지만, 그가 하려던 말은 이미 정확히 전달됐다.
그러니까 한낱 하인에게 쓰기엔 아깝다는 뜻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약이나 줘.”
“아, 알겠습니다.”
나는 턱짓으로 그를 내쫓았다.
쯧, 누가 보면 제 돈인 줄 알겠네.
탁.
직업정신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의원에 기분이 나빴지만 여기서 화를 내면 아이가 더 놀랄 듯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고는 최대한 선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밥은 먹었니?”
“아, 아뇨.”
눈이 마주치자 아이가 놀란 듯 서둘러 고개를 내렸다.
한껏 기가 죽은 듯한 아이의 태도와 풀이 죽어 보이는 그의 작은 머리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설렁줄을 당겨 시녀를 불렀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