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이가 먹을 만한 거 좀 가져와.”
“…알겠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시녀의 눈빛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렸다.
그녀는 내가 선행을 베푸는 모습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
하지만 시녀는 제 일에 충실하기로 했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방문을 닫았다.
그녀가 방문을 닫는 소리를 끝으로 방안에는 어색한 정적이 맴돌았다.
“…….”
“음, 흙 좀 닦고 있으면 먹을게 올 거야.”
조금 전 시녀가 가져온 대야와 물수건을 아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어…”
“흙 닦아야지.”
여전히 어쩔 줄 몰라 망설이는 아이의 손에 물수건을 쥐여주며 말했다.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수건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그 손길이 어수룩했다.
“줘 봐. 내가 해줄게.”
“아니, 제가 할게요!”
“그냥 해줄게.”
아이는 익숙지 않은 듯 스스로 하겠다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아무래도 내가 해주는 것이 나을 듯했다.
분명 호의를 베풀고 있음에도 패트리샤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인지 아이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화 안 낼게.”
“….”
“무서워하지 마.”
“….”
그제야 아이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고 이내 그가 내게 제 몸을 맡겼다.
가끔 힐끔거리며 나를 곁눈질하기도 했지만 나는 부러 아이를 바라보지 않았다.
왠지 눈이 마주치면 또다시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고개를 숙일 것 같아서, 더는 아이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똑똑.
시녀는 금세 아이가 먹을 음식을 가지고 왔다.
고소한 냄새에 아이가 시녀의 손에 들린 그릇을 빤히 바라보았다.
꿀꺽거리며 침을 삼키는 아이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혹여나 그를 놀라게 할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흠흠, 아무도 안 들어올 테니 편하게 먹고 있어.”
아이의 손에 스푼을 쥐여주자 아이가 나와 음식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혼자 먹고 있을 수 있지?”
“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끄덕이는 고갯짓에 따라 그의 주황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 모습이 기특해 머리를 쓰다듬으니 결 좋은 머리칼이 기분 좋게 손에 감기었다.
부드럽네.
아이의 머릿결에 내심 감탄을 흘리며 방을 나왔다.
채도 높은 아이의 주황 머리칼은 꼭 노을로 물든 하늘 같았다.
‘주황색 머리칼이 흔했었나?’
붉은빛을 띠는 머리칼이나 밝은 갈색 머리칼은 봤어도 이리 채도 높은 주황색 머리칼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
뭔가 놓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찝찝하지?
아마 아직 손보지 못한 그 무뢰한들 때문이겠지.
“집사님. 뒷마당으로 가면 두 명의 남자들이 있을 거예요. 응접실로 데려오세요.”
전투의지를 다진 나는 복도에서 만난 집사에게 그리 말하고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 * *
어떻게 하면 악독하게 복수해 줄 수 있을지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만약 진짜 패트리샤였다면 뜨거운 찻물을 부어버렸겠지.
아니면, 채찍을 휘두르거나.
…그건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까지 할 자신은 없었다.
21세기 현대사회를 살아 온 사람으로서 아무리 화가 나도 선은 지켜야 했다.
똑똑.
집사가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공녀님, 데리고 왔습니다.”
“들어와.”
나는 부러 고개를 떳떳이 쳐들고는 문을 노려보았다.
‘기세에서 지면 안 돼.’
어디선가 싸움은 기세가 구 할이라는 말을 들은 것도 같았다.
문이 열리고 집사 뒤에 숨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 둘이 보였다.
‘하! 이제 와 무섭긴 한가 보지?’
나는 형형한 분위기를 내뿜으려 눈을 더욱 치켜떴다.
“우리 가문에서 일하는 이들인가?”
“예, 마구간 지기들입니다.”
내 물음에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잘라.”
거만하게 꼰 다리를 까딱거리며 최대한 아니꼽다는 듯 말했다.
부디 그들에게는 어색해 보이지 않길 바라며.
“자르라고요?”
놀란 듯한 집사의 물음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때엔 돈이 제일 무서운 법이었으니.
아니, 거의 모든 때에.
“공녀님,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집사가 남자들을 바라보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구간 지기가 아닌 양아치를 고용한 것 같아서.”
이것저것 따지고 싶었지만, 막상 그들을 마주하니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혼이 난다고 해도 그들의 성격이 변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반성할 이들이었다면 그런 잘못은 저지르지도 않았을 테니.
“오늘 내로 쫓아내.”
물론 헤라르일라 공작가에서 쫓겨난다고 당장 굶어 죽는 것은 아니었지만 추천서도 받지 못하고 쫓겨난다면 앞으로 귀족가의 저택에서 일하긴 힘들 테지.
“고, 공녀님. 죄송합니다!”
“심기를 거슬러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이렇게 쫓겨난다면 굶어 죽고 말 거에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집사 뒤에서 조용히 눈치만 보던 이들이 그제야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
“넌 네 고통만 급한가 보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제 사정을 봐달라 애원하는 그들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그 자그만 아이에겐 그토록 가혹했던 네 다리가, 이젠 자비를 베풀어달라 무릎 꿇으면.”
“….”
“내가 그리해야 하나?”
이기적인 남자의 모습에 헛웃음만 나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뭔가 억울한 듯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녀석이, 열심히 일하지 않고 멀뚱거리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그랬습니다!”
“그 자식은 항상 뺀질거리며 돈만 축내는 놈입니다. 그놈 때문에 일은 저희가 다했습니다!”
“맞습니다. 물론 때린 건 잘못했지만,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이 전까진 절대 때리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소리를 높이며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마구간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저희를 무시하곤 했습니다. 그도 저희와 같은 마구간지기일 뿐이면서 말입니다!”
“무시했다고?”
그들이 아이를 때린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을듯해 상체를 숙이며 되물었다.
“예, 얼굴 좀 반반하게 생겼다고 저희를 무시하는 게 너무 얄미워서 그랬습니다!”
마구간 지기는 저들의 얘기에 반응하는 내 모습에 흥분한 듯 입을 열었다.
“풋맨이 될 자기와 저희는 다르다는 듯 항상!”
“됐어.”
더는 들을 필요도 없는 듯해 손을 들어 남자의 말을 끊었다.
일을 안 해 때렸다더니, 이제야 이들이 왜 아이를 때렸는지 그 진짜 이유를 알 듯했다.
“지금껏 거짓 하나 없이 진실만 얘기했나?”
“당연합니다!”
남자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집사. 아이의 몸에 오래된 멍이 있었어. 또 누가 아이를 때린 건지 찾아와.”
“예, 알겠습니다.”
마구간 지기들에게서 시선을 뗀 나는 가만히 서 있는 집사를 향해 말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인 집사가 방을 나가고 문이 닫히자 마구간 지기들의 얼굴이 희게 질려가고 있었다.
“곧 진실이 밝혀질 테니, 너무 억울해하지 마.”
그들의 표정을 보니 이미 진실이 무엇인지 대충 감이 왔지만, 집사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저…. 공녀님….”
“그만, 조용히 있고 싶어.”
더는 이들의 얘기를 들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거짓을 고한 게 아니라면 무서워할 것 없어. 안 그래?”
“……”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 설마 내가 고문이라도.”
“공녀님! 죄송합니다!”
나는 마구간 지기의 비명 섞인 외침에 말을 다 맺지 못하였다.
“살고 싶어서… 살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남자는 머리를 깊이 조아리며 제 죄를 자백했다.
“사실 그 녀석을 때린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전에도 그랬었습니다.”
“왜?”
“….”
내 물음에 남자는 쉬이 답을 하지 못했다.
“반반한 얼굴 하나로… 쉽게 살아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마 아까 남자가 지껄이던 풋맨과 관련된 이야기일 테지.
하지만 본인의 입으로 정확한 이유를 들어보고 싶었다.
“그런 반반한 애들은 풋맨이 되기 쉽고, 풋맨이 되면 힘들이지 않고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게 부러워서 그랬습니다.”
“하!”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이유로 아이를 괴롭혔단 말이었다.
같잖은 질투심 때문에.
똑똑, 응접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공녀님, 그 아이를 가르치는 일은 두 마구간 지기의 소관으로 아이는 다른 이들과 접점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감히 거짓까지 고하다니. 집사, 이유가 더 필요한가요?”
“아닙니다. 말씀하신 대로 내쫓겠습니다.”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답했다.
“공녀님!!”
더는 집사조차 제 편을 들어주지 않자 마구간 지기들이 절박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제 와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아이가 영양실조라더군요. 나을 동안은 제가 데리고 있을게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2층 빈방을 그에게 내주도록 하겠습니다.”
“네, 근데 아이 이름은 뭐죠?”
어쨌거나 며칠은 함께 지내야 할 사이에 이름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을 듯했다.
“카를로스입니다.”
“…?”
집사의 말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네? 그 아이의 이름이….”
“카를로스입니다.”
어버버 거리는 나를 대신해 집사가 말을 맺어주었다.
“…….”
카를로스라니, 그 아이의 이름이 카를로스라고?
그제야 그 찝찝했던 기분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공녀님?”
“하, 말도 안 돼.”
제국 최고의 기사 카를로스가 조금 전 눈이 퉁퉁 부은 그 작은 아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