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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는 시녀의 도움을 받으며 젖은 머리칼을 말리고 있었다.
물에 젖은 그의 주황 머리칼은 전보다 더 진해진 듯했다.
“저 머리칼이 흔한 색은 아니겠지?”
“붉은색은 많이 봤지만, 주황 머리칼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카를로스란 이름은?”
“…네?”
중얼거리는 혼잣말에 시녀가 곧바로 대답을 주었다.
그녀는 내 사소한 행동도 놓치지 않으려 긴장하고 있었다.
아마 패트리샤에게 많이 당했기 때문인듯했다.
“하아…. 아니야.”
깨끗해진 아이의 피부는 더욱 새하얬다.
얻어맞아 퉁퉁 부은 눈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얼굴도 반반하게 생긴듯했다.
잘생긴 외모에 주황색 머리칼, 게다가 카를로스라는 이름까지.
이 정도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원작에서 패트리샤와 지독한 악연으로 엮인 카를로스가, 내가 그렇게 찾아다녔던 그가 지금 저 아이라는 것을.
소설 속 카를로스는 게르하르트 공작가의 기사 단장이었다.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로렌스의 명이라면 무조건 수행해내는 충직하고 유능한 기사였다.
원작에서 패트리샤를 죽였던 이이기도 했고.
“하아….”
소설 속에서 카를로스가 패트리샤를 싫어하고 괴롭히는 이유는 패트리샤가 로렌스의 스토커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개인적인 악연이 있기 때문이었다.
카를로스는 게르하르트의 기사단장이 되기 전 헤라르일라 공작가에서 지냈고, 당연한 절차처럼 패트리샤의 패악질을 당했다.
소설에는 카를로스가 어떤 치욕을 당했는지까진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깊은 증오로 미루어 볼 때 어지간한 일은 아닌 듯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패트리샤와 카를로스는 서로 만나기만 하면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패트리샤는 카를로스죽이기 위해 매번 암살단을 보냈고 카를로스는 패트리샤의 목숨이 위험할 때 모른 체하며 도와주지 않았다.
물론 카를로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를 죽이려는 이를 누가 구해주고 싶겠는가.
이제 그 패트리샤가 나라는 게 문제지.
나는 카를로스와 악연을 맺고 싶지 않았다.
내겐 헤라르일라 가문의 힘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반면 카를로스는 제국 최고의 기사인데.
그와 악연을 맺어 내게 득 될 게 뭐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일단 카를로스와 만나 화해의 제스처를 취해볼 생각으로 헤라르일라 기사단을 샅샅이 뒤졌다.
당연히 나는 카를로스가 헤라르일라 공작가의 기사 중 한 명이라 생각했다.
그랬지만 기사단에선 카를로스라는 이름도 주황 머리를 가진 이도 찾을 수 없었다.
기사단원들에게 물어도 카를로스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젠장.
그래서 성급하게 결론내렸다. ‘카를로스가 아직 헤라르일라 공작저에 들어오지 않았다’라는.
그랬는데, 그가 어린 하인이었다니.
뜻밖의… 행운이긴 한데.
카를로스를 찾은 게 기쁘긴 했으나. 아직 걱정이 더 컸다.
“저, 카를로스.”
“네?”
아이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저. 혹시 우리가 이 전에도 대화했던 적이 있었나…요. 있었니?”
“아니요, 공녀님과 얘기해보는 건 처음이에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아이의 모습에 희망의 빛이 보였다.
“어…혹시 내가 널 괴롭히거나….”
그럼에도 확실히 해 두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 말없이 괴롭혔을지 모르는 일이니.
카를로스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래, 다행이다.”
다행이다. 아직 카를로스는 건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근데. 넌 몇 살이야?”
소설에서 카를로스의 나이를 가르쳐 준 적은 없었지만, 이리 어릴 줄은 몰랐다.
그럼 몇 살 때 기사 작위를 받은 거지?
“전 14살이에요.”
“뭐?!”
채 10살도 안 돼 보이는 작은 체구에 14살이라니.
내 놀란 모습을 본 카를로스가 얼굴을 붉혔다.
아마 남들보다 작은 제 체구가 콤플렉스인 듯했다.
“아, 기분 나쁘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
“걱정하지 마, 나중에 엄청나게 클 테니까.”
“…정말 그럴까요?”
“그럼!”
확신에 가득 찬 내 대답에 카를로스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눈은 퉁퉁 부었지만 그럼에도 웃는 모습은 한없이 맑고 귀여웠다.
“먹고 싶은 건 다 말해!”
이때까지 패트리샤의 눈에 띄지 않고 잘 숨어지내 준 카를로스가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게다가 카를로스에게 잘 보여놓는다면 언젠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아이를 상대로 순수하지 못한 마음을 가진 게 미안하긴 했으나,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생존 본능이니.
똑똑.
“공녀님, 집사 알버트입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집사에, 방 안 사람들이 조용히 문만 바라보았다.
나를 왜 찾지?
집사가 나를 찾을 때는 매번 그 이유, 단 한 가지의 이유 때문이었다.
공작의 부름.
공작이 좋은 의도로 나를 부를 리 없는데.
문을 열자 매사 차분하던 집사가 웬일인지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공녀님….”
집사는 그답지 않게 말을 쉽게 잊지 못하였다.
아마 방금 있었던 마구간 지기의 해고를 공작에게 다 보고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저 때문에 불려가 혼날 내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편히 말해요.”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어쨌거나 가주에게 보고하는 것은 집사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
공작이 조용히 지내라고 한 시점에서 일을 냈으니,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로렌스 게르하르트 소공작님이 오셨습니다.”
“…에? 네?!”
그러나 집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공작님께서 공녀님과 만나고 싶어 하시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집사는 내 의사를 묻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사뭇 심각해 보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당황한 듯한 집사의 모습을 보아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미리 언질을 주고 온 것은 아닌 듯했다.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왜?
그와는 바로 어제 보지 않았던가.
쌀쌀맞고 무섭게 화를 내던 로렌스의 모습에 두 번다시는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아닌 패트리샤를 향한 화라 생각해도, 나를 싫어하는 이와 만나는 건 껄끄러웠다.
두 번 다시 눈에 띄지 말라더니.
내게는 눈에 띄지 말라고 경고했으면서 예의도 없이 갑작스럽게 방문한 그가 맘에 들지 않았다.
물론 나도 어제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찾아간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두 시간 동안 뙤약볕에서 그를 기다리지 않았던가.
“바로 갈게요.”
마음 같아선 그도 일광욕을 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었으나.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괜히 버티다간….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까 지금 가는 거야.’
그가 무서워 바로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이 없어서라며, 멋없는 행동에 합리화를 했다.
로렌스가 왜 나를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와 차 나 한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소공작님께서 왜 나를 찾으시지?”
“…그것까진 저도 모르겠습니다.”
집사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운을 떼봤지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그저 소공작이 왠지 화가 난 것 같다는 추측 정도?
* * *
응접실의 문을 여니, 문을 등지고 앉아 있는 소공작과 열린 문을 간절히 바라보는 첫째 오라버니가 보였다.
오늘 아침 식사 시간에 봤을 때보다 그의 얼굴이 조금 수척해진 듯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모르간은 살려달라는 듯한 감정과 원수를 보는듯한 눈빛이 뒤섞인 오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중적인 감정을 담고 있는 그의 표정에 마음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물론 로렌스로부터 나오는 살기도 그 불안감을 키우는데 한몫했고.
아니 살기를 흘리면 어쩌자는 거야?
로렌스가 살기를 흘렸다.
일부러 흘리는 게 아닌, 참고 참다가 흘러넘치는 듯한 그런 살기였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모르간은 금방이라도 질식해버릴 듯 새하얗게 질려서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패…패트리샤.”
이대로 문을 닫고 조용히 퇴장하고 싶었지만, 친절히 이름을 불러주는 모르간 덕분에 얌전히 그들을 향해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패트리샤가 왔으니, 저, 저는 이만 나가보죠.”
듬직하신 첫째 오라버니께선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혹여라도 내가 그를 붙잡을까 발걸음을 빨리하는 그의 뒷모습이 야속하기만 했다.
마음 같아선 그라도 옆에 붙잡아 두고 싶었지만, 발까지 헛디뎌가며 도망치는 그 모습에 측은지심이 생겨 로렌스의 화는 혼자 감내하기로 했다.
“소공작님, 절 찾으셨다고요.”
“….”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모르간이 떠나간, 빈자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천천히 자리에 앉으니 그제야 그의 붉은 눈을 볼 수 있었다.
분노로 인해 뜨겁게 타오르는 검붉은 그의 눈에 손이 떨렸다.
모르간이 흘리던 식은땀이 지독하게 이해됐다.
그의 눈은 이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섬뜩했다.
그가 한참을 노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장 내놔.”
“네?”
한 음절 한 음절 씹어 내뱉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금방이라도 죽일 듯 노려보는 그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
가능하다면 다 내주고 싶었지만, 무엇을 내놓으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아…”
“…”
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본 그는 기가 찬다는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한층 진해졌고 그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봐, 지금 이게 장난 같나?”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깊이 잠겨있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