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7화 (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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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 같냐고?

나는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맘 같아서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도 나오지 않을 만큼 무서웠다.

누가 장난을 살기까지 흘리면서 쳐.

어떤 천치가 오더라도 지금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그가 뭘 내놓으라고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당장 갖고 와.”

짧은 명령이 떨어졌다.

로렌스는 화를 삭이려 애를 쓰고 있었다.

여기서 이 이상 그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본 소설이 시작되기도 전에 생을 마감해야 할 듯했다.

본능적으로 복종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착실하게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명령에 따르면서도, 이유 모를 그의 화를 받아내면서도 비참하다든지 참담하단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큰 두려움 앞에서 억울이고 나발이고 목숨이 먼저였다.

이대로 방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다면 상황이 더욱 끔찍해질 것 같았다.

“근데…. 정말 뭘 갖고 오라는 건지…”

“뭐?”

최대한 조심스럽고 공손한 말투로 되물었음에도 로렌스는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날 노려봤다.

‘뭐 이런 얘가 있지?’ 하는 표정이었다.

“하아, 사진 가져오라고.”

로렌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게 큰 인정을 베풀어준다는 듯 천천히 말했다.

아니, 갑자기 왜 나한테서 사진을 찾아?

그러나 그의 크나큰 배려에도 도통 그가 찾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앞뒤 상황설명도 없이 무턱대고 사진을 내놓으라니.

하지만 그렇다고 로렌스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저 그가 알려준 단서를 가지고 열심히 추리해 볼 수밖에.

“제…사진이요?”

최대한 머리를 굴려 답한 것이었으나 로렌스의 성에는 차지 않은듯했다.

헛소리에 짜증 난다는 듯 그가 눈가를 찌푸렸다.

로렌스의 붉은 눈에 깊은 증오가 어렸다.

“게르하르트 공작부인, 내 어머니 사진.”

로렌스에게서 다시금 진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더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들은 체했다.

헤라르일라 공작저가 언제부터 필름 현상소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가져오라면 가져와야지.

“근데, 어디서 가져올까요?”

“하!”

물어보면서도 이 상황이 참 무안하게 느껴졌다.

아니, 처음부터 대화의 요점이 살짝 엇나간 듯했다.

게다가 서늘한 표정으로 웃는 로렌스의 모습을 보아하니 그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듯했다.

쾅.

로렌스가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그가 앉아 있던 소파가 뒤로 넘어가며 큰 소음을 만들었다.

“아직도 나를 가지고 놀고 싶은 건가?”

“네? 가지고 논다니 절대 아니에요!”

“그럼 이게 뭐 하자는 거지?”

자리에서 일어난 로렌스가 증오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로렌스가 그저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인데 그의 기세에 다리가 떨렸다.

내가 그를 가지고 논다니.

“…아니.”

억울해!

억울하고 두려워 순간 눈물이 났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와 사진을 내놓으라 화를 내는데,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패트리샤가 그에게 잘못한 게 하도 많아 혹 그중 하나와 연관된 일일까 따질 수조차 없었다.

나를 향한 그의 증오가 너무 오래되고 깊은 것이라 풀 방법도 없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이곳에 온 뒤로 억울하지 않았던 날들은 단 하루도 없었다.

이유 모를 사람들의 증오에도 아버지란 작자의 경멸과 형제들의 멸시에도. 억울하고 속상했지만, 그저 참았다.

그랬는데도 이 거지 같은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도통 보이지 않았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곳에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냐고!

엮이기 싫단 말이야.

소공작과 엮이기 싫었다.

단 일분일초도.

나도 당신과 엮이기 싫단 말이야.

나를 싫어하는 이들은 헤라르일라 공작저의 가족들로도 충분했다.

로렌스에게까지 시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

로렌스는 억울하다고 말하는 나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에 대한 불신으로 그의 얼굴은 한껏 찌푸려졌다.

“아니, 아니. 죄송해요. 그냥 혼자서 알아볼게요!”

다가오는 로렌스가 부담스러워 뒷걸음질 치려고 했으나 다리가 걸려 다시 소파에 주저앉게 됐다.

도망칠 곳도 없는데 로렌스가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나를 지독히 싫어하는, 나를 증오하는 그가 인상을 쓰며 다가오니 아주 무서웠다.

“……”

가까이 다가온 로렌스가 불현듯 그의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뭐야? 갑자기 뭐야?’

서부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그 장면이었다. 총을 꺼내기 직전에 그것.

이 세계에 총이 있었나?

“악!”

거기까지 생각이 마친 순간, 도망치기엔 이미 늦었단 생각에 재빨리 눈을 꽉 감았다.

…시간이 한참 지난 듯했지만, 여전히 그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아 천천히 눈을 뜨자.

“이봐, 지금 뭐 하는 거지?”

“네?”

로렌스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저의가 명확한 비웃음이었다.

나는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은색 목걸이와 로렌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안에 있던 사진, 네가 건든 거 아닌가?”

그의 말에 활짝 열린 로켓 안을 바라보았다.

내가 어제 그에게 돌려주었던 그 목걸이였다.

원래라면 뭔가 들어있어야 할 로켓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네! 전 아니에요!”

그가 찾던 사진이라는 것이, 로켓 안에 들어있던 그의 어머니 사진이었나보다.

드디어 그가 뭣 때문에 그리 성을 냈는지 알게 되자 속이 시원하다기보다 더 억울해졌다.

진작 말해줄 것이지는.

그러나 그대로 말했다가는 큰일 날 것 같은 본능적인 느낌에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으며 최대한 선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흐음.”

하지만 내 대답에도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훑어보았다.

“진심이에요!”

그제야 로렌스가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서 시선을 거두며 목걸이를 다시 품 안에 넣었다.

‘총이라도 꺼내는 줄 알고 식겁했네. 아니 목걸이를 왜 품 안에서 꺼내는 건데?’

물론 목걸이를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든 안주머니에서 꺼내든 그의 자유였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서둘러 눈가에 맺힌 눈물을 거칠게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게 볼일은 끝난 듯하니 이만 가볼게요.”

의도했던 것보다 목소리가 싸늘하게 나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로렌스는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내 앞에서 비켜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가만히 날 내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예?”

그의 입가에 심술궂은 미소가 걸렸다.

왠지 일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냐고.”

진실이 어찌 됐든 상관없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그의 모습에 할 말이 없어졌다.

“이 목걸이를 너 말고 건든 사람이 있나?”

“…아니요.”

“그럼 목걸이가 네 손에 있을 때 사진이 없어졌다는 건데, 이게 우연인가?”

“…”

로렌스의 물음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정황상 널 의심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네, 당연해요.”

로켓에서 사진을 훔친 사람을 찾아야 한다면 제일 먼저 날 의심하는 게 당연했다.

억울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사실 나도 패트리샤가 그 사진에 손대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저 그러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을 뿐.

풀죽은 목소리로 순순히 로렌스의 말을 인정하자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난 아니라며 길길이 날뛸 줄 알았나 보다.

“…그런데 넌 아니라며.”

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답답하고 화가 나는 듯 로렌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 일의 책임은 너에게 있으니 네가 찾아내.”

“…알겠어요.”

로렌스는 더는 나와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별말 없이 그러겠다 대답했다.

엄지만 한 로켓 안에 들어갈 작은 사진을 어디서 찾아내라는 건지 막막했지만, 착실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패트리샤가 진짜로 사진을 숨겼을까.’

나는 그가 말한 사진은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지만, 패트리샤가 어찌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가 버렸을지, 숨겼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마음에 자꾸만 패트리샤가 걸렸다.

그녀라면 왠지 로렌스 어머니의 사진을 훔쳤거나 버렸을 수도 있을 듯했다. 정신 나간 스토커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저 내 업보라 생각해야지.

“내일 1시쯤 게르하르트 공작저로 와.”

“네?”

반성하듯 숙였던 고개가 그의 한마디에 꺾어질 듯 들렸다.

왜요? 라는 물음이 차마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입 안에서 맴돌았다.

“사진 찾는다며.”

그가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 말했다.

“그런데요?”

“앞으로 한 주에 한 번씩 찾아와서 보고해.”

“네…. 네?”

당연한 사실을 설명해주는 듯한 소공작의 말투에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사진을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 보고하라고요?”

“어.”

뭔가 부당한 것 같았으나,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의 태도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러자 그는 목적을 다 이뤘다는 듯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이젠 저 등짝까지 얄미운 듯했다.

“저…. 소공작님.”

모든 기를 다 빨려 혼자 있고 싶었다.

그를 부르고 싶지 않았는데, 그가 어서 가줬으면 했지만, 미련 가득 묻은 목소리로 그를 불러세웠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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