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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다시 내게 등을 돌리는 그의 얼굴에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찾게 되면 그때 돌려드리러 가면 안 되나요? 굳이 보고를….”
사진을 찾는 거야 해야 할 일이지만, 그에게 보고까지 할 필요는 뭐란 말인가.
솔직히 말해 그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해야 해.”
자비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 소공작은 미련 없이 방을 나가버렸다.
제가 쓰러뜨린 소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 더럽게 무겁네.”
힘겹게 소파를 원래대로 세워놓고 그 위에 주저앉았다.
“하, 이게 뭐야.”
진짜 억울했다.
나는 그 로켓은 열어보지도 않았다.
그냥 그대로 돌려줬을 뿐인데 이젠 본 적도 없는 사진을 찾아내야 했다.
“하아…”
하지만 로렌스의 입장도 백번 천번 이해가 갔다.
그로선 1년 만에 돌려받은 목걸이에서 가장 중요한 사진이 사라진 거니, 화가 날 만도 했다.
로켓 안을 열었을 때 텅텅 빈 안을 보고 화가 났겠지.
어머니 사진.
어머니 사진이라면 로렌스에겐 정말 소중한 것일 테다.
그래, 그러니까 보기 싫은 날 매주 볼 생각까지 하는 걸 테고.
사실 게르하르트와는 그날로 끝인 줄 알았는다.
그런데 이렇게 엮이다니….
앞으로 그 사진을 찾으려 고생하는 내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게다가 찾지 못한다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이익!”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애꿎은 머리만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차라리 목걸이를 돌려주지 말걸.
돌려주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괜히 돌려줬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 *
한 달 전, 게르하르트 공작저 도서관.
커다란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 아래,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여느 날처럼 턱을 괸 채 책을 훑어보고 있었다.
사락사락.
이른 새벽녘처럼 조용하고 고요한 그곳에선 간간이 책을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가정교사가 내준 경제학 숙제를 위해 관련 책을 읽는 중이었다.
로렌스는 장작 네 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음에도 조금의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에게서는 힘든 기색도 지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처음 의자에 앉았을 때처럼 지독히도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지루한 건지, 귀찮은 건지.
로렌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그의 기분을 쉬이 짐작해 낼 수 없었다.
“오늘로 한 달째입니다.”
“…뭐가?”
보좌관 시몬이 길었던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혼잣말인 듯 중얼거리는 시몬의 작은 목소리에 로렌스가 책에서 시선을 떼며 물었다.
“패트리샤 영애께서 공작저에 오지 않으신지 오늘로 한 달째입니다.”
시몬의 그 말에 무표정했던 소공작의 표정이 깨졌다.
그의 얼굴 위로 언짢음이 드러났다.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는 거지?”
로렌스는 패트리샤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그녀에 대한 어떤 얘기도 듣고 싶지 않았다.
질책하는 듯한 소공작의 말투에 보좌관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니, 매일같이 오시던 분이 갑작스레 발길을 끊으니까. 뭔가 허전해서요.”
“허전하긴.”
“….”
“귀찮은 게 사라져 좋기만 한데?”
로렌스는 시몬의 말이 우습다는 듯 가볍게 혀를 찼다.
‘바보 같은 소리.’
그 여자가 찾아오지 않는다고 허전해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개운할 뿐이었다.
“그러십니까?”
“당연하지.”
소공작의 확답에 보좌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저와 달리 패트리샤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소공작의 태도에 조금 무안해진 시몬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이젠 패트리샤 영애께서 소공작님께 마음을 뗀 게 아닐까요?”
소공작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라 생각한 시몬은 눈을 빛냈다.
패트리샤가 앞으로도 쭉 게르하르트 공작저로 찾아오지 않는다면 더는 그녀에게 당하지 않아도 되니 소공작이 좋아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시몬의 바람과 달리 소공작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하! 그 패트리샤가?”
로렌스는 어이없다는 듯 제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시몬이 정말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제가 그동안 어떤 일을 당해왔는지 옆에서 지켜봐 왔으면서, 어떻게 저리 말할 수 있는지 어이가 없었다.
패트리샤.
그녀의 만행을 다 나열하기란 불가능할 정도였다.
약속도 잡지 않고 매일같이 찾아오는 건 기본이요, 걸핏하면 잘만 들고 있던 차를 쏟아 옷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발을 헛디딘 체하며 품에 안겨 귀찮게 했다.
그도 모자라 달리는 말이나 마차 앞으로 뛰어들기까지.
이렇게 실수를 가장해 귀찮게 구는 것도 화가 나는데, 이 여자는 정도를 몰랐다.
사교계에 나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더니 이젠 하다 하다 같잖은 묘약으로 저를 미혹시키려 애를 쓰는 그녀를 볼 때면 정말 짜증이 났다.
이렇게 그녀에게 당한 게 벌써 7년째였다.
‘패트리샤가 더는 날 좋아하지 않는다니.’
그 패트리샤가 더는 절 좋아하지 않는다니.
“말도 안 되지.”
로렌스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 패트리샤가 그럴 리 없었다.
로렌스는 우스운 얘기를 들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어디 아프신 게 아닐까요?”
한동안 조용히 침묵하던 보좌관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시몬의 목소리에 책장을 넘기던 로렌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아까부터 왜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해대는 거지?”
패트리샤가 아프든 말든 그게 저들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로렌스 게르하르트의 목소리에 불쾌감이 역력했다.
“아, 죄송합니다.”
자신이 게르하르트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을 알아챈 시몬이 서둘러 죄송하다 말했다.
하지만 이내 어딘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근데 자꾸 신경 쓰입니다.”
“….”
“처음엔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더는 영애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지만, 매일같이 얼굴을 비추던 이가 보이지 않으니 궁금해 미치겠습니다.”
“….”
정말 답답하다는 듯 시몬이 하소연했다.
“소공작님?”
조용히 시몬의 말을 듣고 있던 로렌스의 붉은 눈동자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잘게 떨렸다.
“….”
“….”
허공에서 멍하니 둘의 시선이 닿았다.
로렌스는 말없이 시몬을 바라보았다.
“공작령의 세금문서정리로 바쁜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군. 사흘 내로 광산 수출현황도 정리해와.”
“예? 아닙니다! 세금만으로도 이미 충분….”
“나가.”
로렌스는 더는 시몬과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저으며 문을 가리켰다.
시몬은 ‘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소공작의 단호한 태도에 입을 닫고 방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탁.
사각, 사각.
소공작 홀로 남은 도서관에서 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꿍꿍이인 건지 모르겠군.”
로렌스가 책 모퉁이에 쓰인 패트리샤의 이름에 줄을 쫙쫙 그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제가 쓴 패트리샤의 이름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줄을 그었다.
“쯧, 괜한 소릴 해대서는.”
로렌스는 시몬의 헛소리에 짧게 혀를 차고는 다시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 * *
“소공작님, 드디어 패트리샤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다급하게 들어온 보좌관은 흐트러진 호흡을 정리하기도 전에 서둘러 패트리샤의 얘기를 전했다.
한 달 하고도 며칠만이었다.
보좌관의 얘기를 들은 로렌스의 얼굴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로렌스의 표정은 마치 제 말이 맞아 기뻐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로렌스의 표정은 원래 그 특유의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진정 좀 하지?”
“아, 예.”
로렌스는 흥분한 보좌관을 보고 한심하단 듯 말했다.
만에 하나 누가 이 상황을 본다면 저들이 패트리샤의 방문을 간절히 기다려온 줄 알 것이었다.
로렌스의 질책에 보좌관이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영애는 어떻게 할까요?”
“미리 연락하고 온 건가?”
“아닙니다.”
“그럼 당연히 기다려야겠지.”
로렌스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투로 시몬에게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시몬이 이만 나가려는 듯 몸을 돌렸을 때.
“잠깐.”
로렌스가 낮은 목소리로 시몬을 붙잡았다.
로렌스가 서재에 난 창을 통해 정원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날이 좋으니 정원의 분수대 앞으로 안내하는 것도 좋겠군.”
그리 말하는 로렌스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예?”
“못 들었나?”
“아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몬은 이 더운 날씨에 정원의 한 가운데에 영애를 앉힐 수 없어 되물었으나, 한번 한 말을 번복하지 않는 로렌스였기에 고개를 끄덕이었다.
보좌관이 나간 방 안. 홀로 남은 로렌스는 노래를 작게 흥얼거렸다.
보기 드문, 아니. 거의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제 서재의 창밖으로 패트리샤의 뒷모습이 보였다.
로렌스의 입가에 그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짙은 미소가 걸렸다.
답지 않게 심술을 부리고 있었음에도 로렌스는 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소공작님, 벌써 한 시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로렌스가 창밖을 흘긋 바라보더니 감정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패트리샤는 더운 듯 연신 손수건으로 제 얼굴을 닦아냈다.
“영애께서 너무 힘드실 듯해.”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날의 더위에 보좌관은 패트리샤가 걱정됐다.
“가고 싶으면 가겠지.”
그러나 로렌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