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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소공작님께서 만나고 싶지 않으시면 돌려보낼까요?”
“….”
보좌관은 패트리샤를 귀찮아하는 듯한 로렌스에 조심스레 물었다.
“그냥 내버려 둬.”
그를 배려한 물음이었음에도 로렌스는 괜히 끼어들지 말라는 듯 보좌관을 노려보았다.
“나가서 네 할 일이나 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보좌관은 사나운 경고에 그제야 방에서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흐음.”
시몬이 나가고 나자 패트리샤가 가든 말든 아무 상관 없다는 듯 행동하던 로렌스의 시선이 움직였다.
로렌스의 시선은 오래도록 패트리샤가 보이는 창밖에 머물렀다.
그는 십 분마다 한 번씩 창밖을 확인했다.
마치 패트리샤가 가버릴까 걱정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걱정된다면 직접 내려가서 만날 만도 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시간이 지날수록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진해질 뿐이었다.
그건 단지 패트리샤가 무더위 속에서 힘들어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동안 찾아오지 않아 신경 쓰이게 했던 그녀를 골탕 먹였기 때문도 아니었다.
치기 어린 마음.
그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테고 깨닫지도 못할 테지만, 치기 어린 마음이었다.
한 달 동안 패트리샤가 모습을 보이지 않자 로렌스는 점점 그녀가 신경 쓰였다.
오늘은 왜 오지 않는 것인지, 오늘도 안 오는 것인지.
그러나 로렌스는 매번 패트리샤에 관한 고민이 깊어지기 전에 항상 생각을 지워냈다.
제가 그녀에게 얼마나 당했었는데, 미친 게 아니고서야 뭐 때문에 그녀를 보고 싶어 한단 말인가.
짜증 날만큼 신경이 쓰였지만,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체했다.
자신이 패트리샤를 신경 쓴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기에.
그러다 보좌관이 그녀의 얘기를 꺼냈을 땐, 맞장구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드디어 패트리샤 영애께서 소공작님께 마음을 뗀 게 아닐까요?’
시몬이 이렇게 말했을 땐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나빴다.
로렌스는 이 기분의 원인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제 보좌관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동안 패트리샤가 제게 얼마나 집착하는지를 봐놓고도 말도 안 되는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게 너무 멍청해 짜증이 났다.
그래서 로렌스는 지금 기분이 좋았다.
제 보좌관의 멍청한 얘기가 틀렸다는 걸 저 밖에 앉은 패트리샤가 증명해주니 말이다.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이 더운 날 무엇 때문에 저리 앉아있느냔 말이었다.
패트리샤가 저를 좋아하지 않을 리 없었다.
* * *
“오래 기다리셨나요?”
로렌스의 물음에 패트리샤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조금은 화가 난 듯한, 그럼에도 제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아니에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소공작님.”
패트리샤가 예를 갖춰 사과 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그녀의 사과에 로렌스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뭐야? 왜 이래?’
언제 그녀가 갑작스럽지 않게 찾아왔던 적이 있었던가?
그의 기억에 의하면 그녀의 모든 방문은 늘 갑작스러웠다.
이제 와 사과를 하며 격식을 차려봤자, 로렌스는 그런 패트리샤가 웃길 뿐이었다.
“응접실에 드디어 자리가 났나요?”
긴 시간 더위 속에서 기다렸던 것에 화가 났는지 패트리샤가 언짢은 제 기분을 돌려 표현했다.
왜인지 오랜만에 본 그녀는 예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제 감정을 다 드러내지 않는 모습도, 되지도 않게 돌려 표현하는 모습도 이전과는 달랐다.
저를 바라보는 눈조차 조금 달라진 듯했다.
‘오늘은 좀 차분하네.’
전과 달리 패트리샤의 연보랏빛 눈동자는 들떠 보이지 않고 꽤 차분해 보였다.
로렌스의 시선이 패트리샤에게 오래도록 머물렀다.
잘게 떨리는 그의 붉은 눈은 어딘지 복잡해 보였다.
로렌스는 패트리샤가 저를 찾아온 것이 내심 반가웠다.
시몬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체했지만 사실 로렌스도 그녀가 찾아오지 않아 신경 쓰였으니.
정말 어디 아픈 건 아닐지. 헤라르일라 공작저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그러나 로렌스는 제 걱정이 쓸데없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국 내에서 벌어지는 일 중 게르하르트 공작가가 모르는 일은 무엇도 없었기에.
로렌스는 패트리샤가 아픈 것도 아니고 헤라르일라 공작가에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님을 알았다.
그러니 걱정은커녕 신경 쓸 필요도 없었는데, 한편으로 아무 이유도 없이 패트리샤가 절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맘이 걸렸다.
하지만 그 고민도 오늘부로 끝이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다시 나타났으니.
다시 패트리샤가 돌아왔으니 더는 그녀에게 궁금할 게 없을 줄 알았는데.
황혼 때의 밀밭을 연상케 하는 그녀의 결 좋은 백 금발도, 새초롬히 올라간 눈꼬리도, 연보라색의 눈동자도, 앳된 아이 특유의 볼살도, 모두 제가 알던 패트리샤가 맞았다.
그러나 그녀는 평소와 달랐다.
저를 대하는 패트리샤의 태도는 어딘지 어색했다.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하는 듯, 시선이 마주칠 때면 서둘러 피해버리는 그녀의 행동이 거슬렸다.
한 달 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다.
평소 같았다면 조금을 참지 못하고 쫑알대며 소란을 피웠을 텐데, 응접실까지 가는 길목에서 그녀는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더위를 먹었나?’
너무 오래 바깥에 앉혀놓은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한 달 만에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아니, 왜 한 달 동안 오지 않았던 것인지 궁금했다.
“돌려 드릴 게 있어서요.”
패트리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어쩌면 그녀가 평소와 달랐던 이유일지도 몰랐다.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는 그녀의 손 또한 조금씩 떨렸다.
로렌스는 과연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궁금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리도 긴장한 것인지. 패트리샤는 마치 제가 화낼까 두려운 듯 행동했다.
평소와 달리 눈치 보며 행동하는 패트리샤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로렌스는 그녀의 말에 놀라지 않을 자신 있었다.
그녀에게 당해온 세월이 있는데, 웬만한 것으론 더는 놀라지도 않았다.
‘뭔진 몰라도.’
웬만하면 조용히 넘어가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눅 들어 보이는 패트리샤의 모습을 보는 게 썩 편치만은 않았기에.
“하! 이걸 왜 네가 가지고 있지?”
그러나 패트리샤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본 순간, 화가 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패트리샤가 돌려준다던 물건은 제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제가 가진 유일한 어머니의 물건이었고 어머니가 제게 남겨준 유일한 물건이었다.
몇 년 전 이걸 찾으려 모든 공작저를 뒤집어엎었었다.
결국 찾지 못했던 그게 지금 패트리샤의 손에 있었다.
‘뭐 이런 여자가 있지?’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자의 모습에 기가 찼다.
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 그렇게 행동한단 말인가?
허구한 날 만나러 왔으면서 그동안은 모른 체하다 이제 와 목걸이를 돌려주는 여자의 심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와 미안하다 사과하는 패트리샤의 모습이 이 이상 가식적일 수 없었다.
“패트리샤 헤라르일라. 두 번 다신 내 눈에 띄지 마.”
이런 여자를 생각하고 있던 시간이 아까웠고, 저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져 견딜 수 없었다.
* * *
“왜 벌써 오십니까?”
서재에서 소공작을 기다리고 있었던 보좌관이 제 예상보다 금세 돌아오는 로렌스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애는 벌써….”
“내 앞에서 두 번 다시 패트리샤에 대해 말하지 마.”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만행을 다 알리고 싶었다.
그렇게 두 번 다신 사교계에 발도 못 붙이게 하고 싶었으나 심호흡을 하며 가까스로 참아냈다.
“예, 알겠습니다.”
보좌관은 로렌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조용히 대답했다.
“괜찮으십니까?”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이토록 분을 내는 모습은 정말 처음이었다.
무표정하고 무감정한 그가 이토록 화를 내는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혼자 있고 싶으니 나가.”
“…예, 나가보겠습니다.”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로렌스의 말에 보좌관은 더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렇게 다시 홀로 남은 로렌스는 책상 가장 아래 서랍을 열어 패트리샤에게 받아 낸 목걸이를 넣었다.
“어이가 없군.”
은색 체인과 로켓을 잠시 바라보던 소공작은 이내 서랍의 문을 닫아버렸다.
로렌스는 1년 동안 이 목걸이를 찾기 위해 온 공작저를 다 뒤졌다.
그렇게 열심히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목걸이는 엉뚱한 이의 손에 있었다.
“하아.”
로렌스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듯 그는 한동안 눈가를 찌푸렸다.
이내 그의 호흡이 차분히 가라앉기는 했으나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소피아르 게르하르트.
목걸이의 주인이었던 이자, 제 어머니였다.
소피아르.
원래도 몸이 허약했던 그녀는 로렌스를 낳다 목숨을 잃었다.
그랬기에 로렌스는 단 한 번도 제 어머니를 보지 못했고 그의 기억 속에 어머니의 모습은 단 한 줌도 없었다.
그랬음에도 어머니가 남겨준 목걸이는 그에게 남다른 의미였다.
로렌스가 소중하게 여기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