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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10화 (10/67)

10

로렌스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마음을 의지해왔던 유일한 물건이었다.

게르하르트 공작으로부터 차가운 눈초리를 받거나 그에게 모진 일을 당할 때면, 목걸이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외롭고 힘든 날에 로렌스는 그녀의 목걸이를 보며 버텨왔다.

만약 어머니가 살아있었더라면 이토록 외롭지는 않았을 텐데.

저도 사랑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하며 버텨왔다.

물론 그런 감정은 이제는 다 지난날의 일이었지만 로렌스에게 어머니의 목걸이는 여전히 소중하고 애틋한 물건이었다.

“하아…”

로렌스는 한숨을 내쉬며 착잡한 마음을 억눌렀다.

* * *

시간이 한참 흘러 창밖으로 어스름이 드리웠다.

불빛으로 방 안이 환해졌고 어둠 깔린 창밖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창밖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음에도 로렌스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두 번 다시 눈에 띄지 말라는 제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패트리샤의 모습이 또다시 떠올랐다.

그녀는 정말 두 번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듯했고 조금의 미련도 없어 보였다.

“……”

그러나 그녀가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패트리샤에게 시달린 것만 몇 년째인데.’

하지만 이번의 방문은 약 한 달 만이었다.

한 달 만에 찾아와서는 별다른 말 없이 정말 사과만 했다.

‘이제 정신을 차린 건가?’

더는 패트리샤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기대감 때문일까?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뭐 나야 좋지.’

소공작은 고개를 저어내더니 아쉬운 것 없다는 듯 창밖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책상 가장 밑 서랍을 열어 어머니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로켓을 다시금 열어보는 건. 한 3년쯤 만의 일이었다.

“하?”

로켓을 연 로렌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붉은 입술이 비뚜름히 올라갔다.

로켓 안에 있어야 할 아름다운 여인의 사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럼 그렇지!”

로렌스가 목걸이를 제 품 안 주머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패트리샤가 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는지 감이 왔다.

‘내가 직접 저를 찾아가게 만들려고.’

이따위로 사람을 갖고 노는 그녀의 무례에 어이가 없었다.

아마 인간이 어느 선까지 참을 수 있는지 테스트해보는 듯했다.

그러나 로렌스는 그녀의 장난에 놀아 나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평소와 달리 같잖게 머리를 굴리는 게 짜증만 날 뿐.

* * *

소공작은 바로 그다음 날 헤라르일라 공작저로 향했다.

미리 방문하겠다는 언질도 양해도 없는 무례한 방문이었다. 패트리샤가 매번 그러했듯이.

“당장 내놔.”

그녀와 더는 무슨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그저 빨리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패트리샤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순진한 눈망울로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꼭 제가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한다는 듯.

“이봐, 지금이게 장난 같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같은 일을 벌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그녀가 남자였다면 당장에 한 대 후려갈겼을지도 몰랐다.

미칠 만큼 화가 나고 짜증이 올라왔으나 저보다 훨씬 작고 약해 보이는 패트리샤에 이를 꽉 깨물고 참을 뿐이었다.

“근데…. 정말 뭘 갖고 오라는 건지…”

패트리샤가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눈 가득 억울함과 두려움이 보였다.

“진짜 모르는 건가?”

패트리샤에게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왠지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네! 전 아니에요! 진심이에요!”

그렇게 외치는 패트리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그녀는 억울한 듯 울먹이었다.

처음 보는 패트리샤의 모습에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흔들렸다.

아니, 제가 패트리샤의 눈물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패트리샤는 자신 앞에서 툭하면 눈물을 흘렸으니.

그러나 지금은 왠지 정말 우는듯했다.

창피하단 듯 서둘러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특히 그래 보였다.

일부러 보란 듯 눈물을 뚝뚝 떨구는 평소와 달랐다.

로렌스는 왠지 사과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패트리샤는 조금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제게 볼일은 끝난 듯하니 이만 가볼게요.”

패트리샤가 새침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이대로 떠나 두 번다시는 저를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한 달 만에 본 패트리샤는 확실히 변해있었다.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어쩌면 어머니의 사진이 없어진 일과 패트리샤는 정말 무관할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정말 변한 것인지 알아내야만 했다.

* * *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하아.”

드디어 로렌스 게르하르트로부터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했건만 예상처럼 일이 흘러가지 않았다.

그만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꽥꽥거리며 소리치는 모르간에 쉬기조차 쉽지 않을 듯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접실에서 허겁지겁 도망쳤던 모르간이 날 찾아왔다.

내 의사는 조금도 배려해주지 않고 제 마음대로.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게르하르트 소공작이 찾아온 거냔 말이야!”

“…”

“어서 답해!”

모르간은 단단히 화가 난 듯 소리를 높였고 그 쨍한 목소리에 절로 눈가가 찌푸려졌다.

‘화를 낼 때 얼굴이 붉어지는 건 유전인가 보군.’

“귀먹었어?”

모르간은 제 얼굴을 거의 내 코앞까지 들이밀며 소리쳤고 그 덕에 그의 침이 후드득 얼굴 위로 떨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꺼지라며 욕이라도 내뱉고 싶었지만, 이 이상의 분쟁은 사절이었다.

“소공작님이 말하지 말랬어.”

“…소공작이?”

거칠게 그의 침을 닦아내며 말하자 그가 할 말을 잃은 듯 차게 혀를 찼다.

‘모르간한테는 말 안 했나 보네.’

그래도 로렌스가 모르간에게 내 만행에 대해선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만약 로렌스가 모르간에게 내가 그의 목걸이를 훔쳐 갔다 말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곤욕스러웠을 테지.

남자주인공이라고 입은 꽤 무거운 것 같았다.

‘조금 고맙네.’

하긴 그도 패트리샤의 피해자일 뿐이었지.

어찌 보면 우린 동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모르간이 그만 나가주길 기다렸지만, 그는 아직도 확인할 게 남은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말하지 말라 했다고?”

“그랬다니까.”

물론 거짓이었다.

로렌스는 제 할 말만 하고 가버렸으니. 하지만 난 당당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하!”

모르간이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뱉었다.

소공작이 말하지 말라 당부까지 한 걸 캐물을 수는 없고, 궁금하긴 하니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

얼굴은 시뻘게져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하는 모르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가나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긴 했으나 오늘은 너무 힘들었기에 그가 빨리 포기하고 나가주길 바랐다.

‘평소 같았다면 눈길 한번 주지 않았을 거면서, 왜 갑자기 참견이람.’

“아버지께도 그렇게 말해 보시지 그래?”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만 나가.”

모르간은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화가 난 듯 헤라르일라 공작을 들먹였고 나는 나가라며 문을 가리켰다.

갑작스러운 모르간의 참견은 부담스럽고 귀찮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가 날 걱정해서 이리 행동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제게 불똥이 튈까 봐, 아니면 소공작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쩔쩔매던 게 분해 내게 분풀이하는 걸지도.

그의 의도가 어찌 됐든 간에 그와는 더 이상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

그러나 나가달란 내 부탁에도 모르간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는 듯했다.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것 같던 모르간의 얼굴은 내 예상을 깨고 더 진한 색이 되었다.

그의 얼굴에 자리한 죽은 깨가 보이지 않을 만큼.

“명령? 이, 이게!”

“쉿.”

“…?”

“교양 없이 소리 좀 지르지 마.”

모르간이 금방이라도 다시 소리칠 듯 목소리를 높이길래 서둘러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그게 모르간의 신경을 더 건드린 듯했다.

“하! 네가 교양을 논하는 건가? 내게? 너와 나는 근본부터 달라!”

다시 한번 흥분한 그의 입에서 침이 후드득 튀어나왔다.

‘아, 더럽게 진짜.’

나는 모르간의 침을 피해 상체를 뒤로 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모르간은 제 분풀이를 다 하고 나서야 방을 나갈 듯했기에 그저 기다리기로 했다.

“감히 너처럼 천박한 계집이!”

“걈히 녀텨렴 쳔뱌캰 게디비”

그저 가만히 그의 분풀이를 들어주겠다 다짐했건만, 통제할 새 없이 입이 움직였다.

“뭐? 뭐라고 말한 거지?”

“응?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그가 분한 듯 씩씩거렸다.

“이 집안에 네 편이 있는 것 같아? 주제 파악 똑바로 해! 지금 당장이라도 길바닥으로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그가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런 웃음이 저리도 잘 어울리다니. 조금은 놀라웠다.

“알겠어.”

“뭐?”

“주제 파악한다고.”

마음 같아서는 그의 얼굴이 터지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그냥 알겠다고 답하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와 더는 말싸움 하고 싶지 않았기에.

소공작을 만난 후로 너무 힘들었고, 그의 말처럼 이 집에서 나는 눈엣가시였다.

주제 파악을 해야 하긴 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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