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어차피 모르간과 싸운다 해도 내 편은 없을 듯했으니 그와 맘잡고 싸운다 해도 내 손해겠지.
게다가 쫓겨나고 싶지는 않았다.
나가도 내 발로 직접 나가고 싶었다.
“쯧, 진작에 그럴 것이지.”
모르간은 순순히 알겠다 수긍하는 내 모습에 놀란 듯 흠칫하더니 이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 비열한 웃음이 한층 더 진해졌다.
“다음에 또 걸리면 그땐 가만 안 둬, 패트리샤.”
모르간은 내 반응이 맘에 든 듯, 싸움에서 이긴 사람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만족스럽게 방을 나갔다.
탁!
“하아….”
모르간이 한바탕 난동을 부리고 나가자 진이 쭉 빠졌다.
“진짜 다들 나한테 왜 이래?”
뒤늦게 한껏 우는 소리 해봤지만, 그래봤자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내일 게르하르트를 만나러 가려면 사진을 찾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텐데, 지친 몸이 의자 위에 녹아내렸다.
‘…목걸이를 돌려주는 게 아니었어.’
소설 속 패트리샤는 제가 주운 로렌스의 목걸이를 하고 당당하게 무도회에 참가했다.
아마 그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였겠지.
그리고 그녀의 뜻대로 로렌스의 관심을 원 없이 받았다.
로렌스는 분을 내며 헤라르일라 공작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 일로 인해 패트리샤는 몇 달간 수도원에서 지내야 했다.
왠지 갖고 있다간 나도 수도원에 가게 될 것 같아 돌려줬는데.
쯧. 사실 그 목걸이가 로렌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에 돌려준 거였는데, 잘 못 생각한 것 같았다.
순전한 호의였는데.
그 결과로 매주 한 번씩 로렌스를 만나야 한다니.
“하아…”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사진을 무슨 수로 찾아내냔 말이야.
“불가능이잖아!”
깊은 한숨이 나왔다. 사진을 찾지 못하게 된다면…. 그의 분노를 다시 한번 겪어야 했다.
‘어머니의 유품.’
로렌스 게르하르트에겐 중요한 물건일 테지.
그가 화내는 건 정말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모든 문제는.
“패트리샤.”
패트리샤였다.
“하, 다 내 잘못이지.”
다시 한번 방을 뒤집어엎어야 할 듯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팔을 걷어붙였다.
* * *
“찾았나?”
“아니요.”
나를 보자마자 그리 묻는 소공작에게 한껏 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제 종일 방안을 다 뒤졌건만 사진은 찾을 수 없었다.
“…”
“……”
단 하나의 목표 때문에 만난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왠지모를 죄책감도 커져 갔기에 조용히 입을 열어 사과를 뱉었다.
“죄송해요.”
“……”
아무 말 없는 로렌스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우리가 담소를 나눌 사이도 아닐뿐더러 집으로 빨리 돌아가야 내 도망을 들킬 확률이 낮았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나는 근신 처분을 받았기에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방에서 나오는 것조차 눈치 보이는 때였으니.
“앉아.”
엉덩이가 소파에서 2센티미터쯤 들렸을 때 로렌스가 그리 말했다.
누가 들어도 명령이었지만 그에게 구태여 따지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엉덩이를 소파에 붙이고 온순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차나 마시고 가.”
그가 내 앞에 놓인 찻잔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제보다는 확연히 누그러졌지만, 그렇다고 온기가 담긴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 딱딱했다.
‘별로 마시고 싶지는 않은데.’
솔직히 로렌스와 있는 시간은 불편했고 괜히 먹다 체할듯해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별것도 아닌 걸로 소공작과 싸우고 싶지 않았기에 서둘러 차를 들이마셨다.
“그럼 가보겠….”
“이봐, 넌 예의도 없나?”
서둘러 만남을 끝내고 싶었기에 다시금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이는데, 로렌스의 차게 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응접실을 들어오던 그때보다 로렌스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뭔가가 또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가 아직 한참이나 남은 제 찻잔을 가리켰다.
“아….”
저가 차를 다 마실 때까지 앉아 있으란 얘기였다.
손님으로서 집주인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 예의가 아니긴 했다.
“아, 저랑 같이 있는 게 불편하실까 봐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솔직히 로렌스가 이런 예를 따지는 성격인 줄 몰랐지만, 어찌 됐건 내 잘못이었으니 인정하고 사과했다.
상황상 나는 슈퍼 을이었기에.
입을 다물고 그가 다 먹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가 뜻밖에도 말을 걸었다.
“내가 왜 불편해한다는 거지?”
로렌스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어….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맞아.”
로렌스는 사람 무안할 정도로 단번에 긍정했다.
“그런데?”
“싫어하는 사람과 있으면 불편하니까요.”
더 설명을 바라는 듯한 로렌스에 내가 다시 입을 열었고 내 대답에 이내 로렌스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그러니까 네가 나를 배려해준다는 거군?”
나를 무시하는 듯한 웃음을 짓던 로렌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
“그동안은 매일같이 찾아와 귀찮게 했으면서 이제 와 나를 배려해준다고? 그럼 내가…”
“응? 제가 매일 찾아왔다고요?”
왠지 싸한 기분에 그의 말을 끊고 서둘러 다시 물었다.
가까스로 화를 참고 있는 듯하던 로렌스가 다시금 살기를 흘렸다.
“왜 이젠 없던 일로 하고 싶나?”
“매일 찾아왔다니, 그럴 리가 없는데….”
소공작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그는 화가 난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
패트리샤가 스토커 짓을 한다는 짧은 문장은 있었지만, 소설에서 세세하게 패트리샤의 만행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해봤자 연회나 무도회에서만 집적대는 줄 알았는데?’
로렌스의 말처럼 패트리샤가 정말 매일 이곳에 찾아왔을까?
하긴 로맨스 소설에서 구구절절 악녀의 스토킹 내용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겠지.
로렌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지려 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내 보석들. 내 금은보화들이 모두 어디로 간 것인지 조금씩 감이 오기 시작했다.
진한 낭패감에 한탄을 내뱉고 싶었다.
“하아, 정말 제가 매일 이곳에 찾아왔나요?”
“매일같이 찾아와 귀찮게 하는 것도 모자라 같잖은 약물까지 먹이려 하더니, 이제 와 모른 체한다고?”
그의 붉은 눈과 마주하자 절로 어깨가 떨렸다.
나를 원망하는 듯한 그의 눈에 순간 멍해져 할 말을 잃었다.
뭐야? 그 눈빛은?
순간이었지만 로렌스는 버림받은 사람의 눈을 하고 있었다.
“이제 없던 일로 하고 싶은가?”
“네? 그게 아니라….”
솔직히 말해 로렌스의 말처럼 없던 일로 하고 싶었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건 억울하고 힘들었기에.
그러나 슬퍼 보이는 로렌스 게르하르트의 눈을 보니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참 편하게 사네. 패트리샤.”
로렌스의 슬픈 눈은 곧 차게 식었다.
그는 경멸하듯 나를 쳐다보더니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버렸다.
결국 또다시 게르하르트 공작저 응접실에 나 홀로 남게 되었다.
“하아. 또 일이 어떻게 되는 거야….”
갑작스레 방을 나가버린 로렌스가 무슨 기분일지, 무슨 생각인지. 그 표정은 뭐였는지. 도저히 알 수 없어 머리가 아팠다.
왠지 일이 또다시 꼬여가는 듯했다.
“하아…”
소공작의 화도 문제지만 마음속엔 이미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내 보석들. 내 자금들. 내 밑천인데!!’
패트리샤가 헤라르일라 공작이 모르게 매일같이 로렌스를 보러왔다면, 그 보석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는 명확한 일이었다.
아마 모두 사용인들의 입을 막기 위해 쓰였겠지.
멍청한 패트리샤.
그녀가 행한 일 중 내게 이득 되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로렌스를 만나러 와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그의 심기를 거스르기 위해 보석들을 다 퍼주다니.
어쩌면 방 안 비밀공간에 보석들을 숨겨두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영화에서처럼 조금 들뜬 마루 밑이라던가, 벽 속의 공간이라던가.
그렇게 믿고 싶었는데.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는데.
“젠장.”
헤라르일라 공작저에서 하루빨리 나가 살려 했건만.
이제 불가능했다.
* * *
더는 나빠질 수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감히 또! 몰래 집을 나가?”
게르하르트 공작저에서 돌아오니, 헤라르일라 공작이 나를 찾았다.
“이 모자란 놈! 앞으로 네게 주는 돈은 없을 테니 그리 알아라!”
“네?”
공작의 말에 나는 입을 떡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멍청한 것!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나가거라!”
그렇게 한순간에 용돈까지 끊겨버렸다.
젠장.
이곳에서 돈을 모아 나가려 했건만, 돈이 끊기다니… 완전 낭패였다.
‘그럼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모든 희망을 잃고 공작의 집무실, 그 집무실 앞 복도를 서성이었다.
다시 들어가서 용서를 구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
아직 살만한지 자존심이 남아 공작에게 비굴하게 자비를 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아….”
어이가 없네.
분명 내가 나갔다는 걸 알게 된 사용인들이 냅다 일러바쳤으리라.
왜냐?
이번엔 내가 그들에게 돈을 쥐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그동안 패트리샤한테 받아먹은 게 있으면 이번 한 번쯤은 넘어가 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정 없이.’
아무리 생각해도 서비스 정신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인간들이었다.
패트리샤는 열일곱.
적어도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품위유지비를 받아왔겠지.
그렇다면 사용인들이 뒷돈을 챙긴 지도 십 년이 넘었다는 말이었다.
“……”
다들 한몫 두둑이 챙겼겠군.
그러니 패트리샤의 성정이 극성맞아도 지금껏 견뎠던 거였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