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엠마.”
시녀가 방문 앞, 그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눈이 사나운 그 시녀, 엠마였다.
“공녀님, 공작님을 뵙고 오시는 길이신가 봐요.”
“…어. 맞아.”
엠마가 샐쭉 웃음 지었다.
“그러게 왜 저 몰래 나가셨어요. 언질이라도 주시지.”
“하?”
이것 봐라?
당당하게 삥 뜯네?
너무 황당해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이건 비단 당당한 엠마의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악녀라는 패트리샤의 캐릭터 성에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시녀에게 돈을 뜯기는 공녀라니, 그것도 신분제 사회에서.…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호구가 어디 있어? 이 호구가 악녀라고?
‘아니, 다른 악녀들은 적어도 남 눈치 안 보고, 제 마음껏 행동하던데.’
이젠 하다 하다 사용인들의 눈치까지 살펴야 할 참이었다.
“공녀님, 다음부턴 제게 말씀하세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요.”
“…”
“도와드릴게요.”
엠마가 선심 쓰듯 싱긋 웃었다.
“하아….”
답답한 마음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고.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려던 엠마의 시선이 다시 내게 고정되었다.
“엠마, 나도 그러고야 싶지.”
“……”
“근데 이젠 돈이 없어.”
엠마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근데 더 큰 일인 건, 당장 다음 주도 나가야 한다는 거야.”
“돈이 없으시다면서요? 돈이 없으면 나갈 수 없죠.”
“…그러게.”
나는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듯 시선을 떨궜다.
“……”
“그래서, 나 그냥 아버지께 다 말하려고!”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고개를 들었다.
“네?”
“아니, 그렇잖아! 아버지는 내가 나가서 사고 칠까 봐 이곳에서 못 나가게 하는 건데. 지난날 동안 난 단 한 번도 사고 친 적 없잖아. 그러니까 아버지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거지.”
“……”
“그동안 내 행실을 알려드리면 아버지도 날 좀 믿고 자유를 주시지 않을까?”
엠마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져갔다.
“물론 너희들이야 뒷돈을 받고 주인의 명을 어겼으니 잘릴지도 모르겠다.”
“…공녀님?”
“흠, 근데 이 바닥이 신뢰를 바탕으로 사람을 뽑는데 다른 가문에서 너희를 고용해 주긴 할까? 괜한 소문이 돌아 일도 못 구하는 거 아니야?”
“……”
“아니, 내가 쥐여준 돈이면 일 안 해도 살만하려나?”
그럴 리가.
엠마가 살만했더라면 지금까지 이곳에 붙어있을 리 없었다.
그 돈을 모아 떠났겠지.
엠마가 나를 아니꼬워하면서도 계속 이 저택에 머무는 건 내가 그녀에게 준 돈을 이미 모두 써버렸기 때문일 테지.
쉽게 번 돈은 쉽게 쓰는 법이다.
“공, 공녀님….”
“아, 어쩌면 아버지가 화가 나셔서 너희를 벌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래도 몇 대 맞기밖에 더 하겠니?”
“잠시만요!”
엠마가 덥석, 내 손을 부여잡았다.
그러다 저도 놀랐는지 이내 손을 놓아 버렸다.
그렇게 싫어하는 내 몸에 손을 댈 만큼 엠마는 많이 당황한 듯 보였다.
“생각해보니 그러실 필요 없는 것 같아요. 공작님께 말씀하실 필요 없는 것 같아요.”
“왜?”
“제가 계속 도와드리면 되니깐요.”
“하, 엠마. 난 이제 돈이 없다니까?”
말귀를 못 알아먹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미간을 찌푸리자 엠마가 크게 고개를 저었다.
“상, 상관없어요! 공녀님은 편하실 대로 하시면 됩니다! 돈은 안 주셔도 돼요!”
“…그래?”
“그럼요!”
“하지만 갑자기 네가 왜?”
“그야….”
엠마의 눈동자가 도르륵. 움직였다.
“공녀님을 돕는 게 제 즐거움이니 그렇죠!”
“그동안 내 덕을 크게 봤으니?”
“그럼요! 그간 공녀님의 덕을 크게 봤으니 이제 제가 갚아야죠.”
엠마는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그저 제 행동에 책임을 질 뿐이었다.
이런 건 확실히 해둬야 했다.
혹 나중에 엠마가 날 도와줬다고 오해하지 않게, 괜한 말 퍼뜨리고 다니지 않게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엠마는 내 말에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람이라면 응당 은혜를 갚아야지.”
“당연하죠!”
엠마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 말고도 내 덕을 본 이들이 많지 않았니?”
“……”
“다들 불러와.”
엠마는 조금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으나 이내 성실히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오래 기다리는 건 딱 질색이야. 서둘러.”
매번 빈둥거리며 거드름 피우던 엠마라곤 믿지 못할 만큼, 복도를 가로지르는 그녀의 걸음이 재빨랐다.
* * *
엠마가 그새 그들에게 뭔가 언질을 준 것인지는 몰라도, 내 방에 모인 이들은 조금 기죽은 듯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누구 눈치냐면.
바로 내 눈치!
‘그래, 이게 바로 악녀지.’
사용인들에게도 구박받고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게 아닌, 남의 약점을 잡고 마구 뒤흔드는 것! 이게 바로 악녀였다.
나는 두려운 듯한 그들의 시선을 즐기며 어슬렁어슬렁 방을 돌아다녔다.
“…..”
저벅, 저벅.
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들려오는 소리라곤 작은 숨소리와 내 발걸음 소리. 그뿐이었다.
“너희가 다야?”
“네!”
“저희가 답니다!”
“네, 공녀님!”
그들은 평소와 달리 빠릿빠릿 대답했다.
그에 아주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지만 애써 입 안 살을 깨물며 공녀의 권위를 지켰다.
스물.
내 방 안에 모인 이들은 스무 명 정도 되는 듯했다.
시녀부터 시종, 하인부터 마부까지.
‘이러니 패트리샤가 돈이 없지.’
“엠마에게 대충 들은 눈치네?”
몇몇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여전히 눈치를 살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그간 내 은혜로 너희가 배를 채웠잖아.”
“….”
“그럼 너희도 그 은혜를 갚아야지. 안 그래?”
그들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은혜는커녕. 내 잘못을 아버지께 냉큼 일러바치기나 하고.”
“….”
“실망했어.”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너희 때문에 아버지께 크게 혼났잖아. 이제 품위유지비도 안 주신다는 거 있지? 근데 난 혼자는 못 죽어. 분명 너희도 같이 잘못했으니 같이 벌을 받아야지. 안 그래?”
사용인들의 얼굴은 이제 죽상이 되어갔다.
바보 같은 사람들.
그 많은 돈을 정말 다 써버린 듯했다.
이 방 안에 모인 이들 모두가 말이다.
“하지만 내가 특별히 마지막 기회를 줄게.”
패트리샤가 이미 써버린 돈이야 아깝지만 하는 수 없었다.
그렇다고 화가나 사용인들을 자른다 해서 내 돈이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니었기에.
그랬기에 이왕 손에 넣은 이들의 약점.
잘 써보련다.
“그리 어려운 건 아니야.”
참아보려 애를 써도 절로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악녀.
“그저 앞으로 하루에 한 번씩 내 칭찬을 아버지께 흘리면 돼. 이왕 흘리는 거 주변 동료들에게도 흘리고 말이야.”
꽤 재미있지 않은가?
“기한은 딱 한 달이야.”
난 이제 더 이상 이 저택에서 왕따가 아니었다.
벌써 내 친구들이, 친구는 아닌가?
아무튼 내게 호의를 가진 이들이 스물이나 되지 않는가?
“그 안에 아버지의 마음을 바꿔놔. 내가 다시 품위유지비를 받을 수 있게 말이야.”
“…하지만, 공녀님. 어떻게….”
“하! 내가 그런 것까지 알려 줘야 해?”
답답하게 방법까지 묻는 이들에 기분이 언짢아지려 했지만, 이왕 호의를 베푸는 거 선심을 조금 더 쓰기로 했다.
“예를 들면, 공녀님이 어려운 제 형편을 알고 후원을 해주셨어요! 라든가.”
“….”
“공녀님처럼 친절하고 상냥하신 분을 모실 수 있게 되다니, 평생의 영광이에요. 라거나.”
눈이 마주친 시종 하나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러더니 이해했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전 헤라르일라 공작저에서 일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라든가. 많잖아?”
그들은 석연치 않은 듯 보였으나 하는 수 없다는 듯 성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열심히 머리 굴려 봐. 은혜 갚으려면 그 정도 노력과 열정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공작은 매번 모든 일에 내가 문제라고 말했다. 게다가 사용인들은 나를 싫어했고.
그런 사용인들이 틈만 나면 공작에게 내 잘못을 일러 대니, 공작은 제 말이 맞았다고 으스대며 더욱 나를 문제아로 낙인찍었다.
하지만 사용인들이 다 내 칭찬을 한다면?
평판이 좋아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한 가지 더, 너희는 앞으로 1년 동안 이곳을 관두면 안 돼.”
비싼 값을 지불하고 얻은 내 사람들인데.
나보다 이곳을 먼저 떠나버리면 안 되지.
“어쨌든 한 달 안에 유의미한 결과가 없으면 나도 너희 잘못을 고할 수밖에 없어.”
모아놓은 돈도 없는데 이곳에서 잘린다면.
몰래 뒷돈을 받고 명을 어긴 게 소문나 신의를 잃어버린다면.
불명예스러운 건 부차적인 문제였고, 다른 귀족가에서 더는 일할 수 없게 되겠지.
“그럼, 피곤하니. 이만 다들 나가봐.”
그들은 평소보다 더욱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공녀님 편히 쉬십시오.”
“감사합니다.”
문을 나서는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비장해 보였다.
저들도 이제 알았겠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말이다.
탁.
문이 닫히고 사람들로 가득하던 방은 이내 한산해졌다.
“풉, 하하하!”
혼자가 되자 간신히 참아 낸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만족스럽네.’
사실 내게 이 헤라르일라 저택에서 산다는 건 그 자체로 벌이었다.
그 누구와도 말할 수 없으니, 아주 심심해 좀이 쑤셨고 외로워 정신병이 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이젠 친구가 20명이나 생기지 않았는가?
비록 큰돈이 없어진 건 아직도 슬픈 일이었다.
이 거지 같은 곳에서 돈을 모으기까지 1년이나 더 버텨야 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 이곳 생활도 조금은 더 윤택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잘만 하면 패트리샤의 악명이 조금은 사그라질지도?
그러니 아주 불만족스러운 소비는 아니었다.
“아하하!”
이곳에 온 뒤, 오늘은 내게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그래, 이제 내가 할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사용인들의 말이 하나하나 모일 때까지.
‘사람 셋이 모이면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고 했던가?’
내 입꼬리는 도통 내려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몇 마리의 호랑이를 만들 수 있을지 그 상상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크크큭.”
어째 내 웃음소리가 꽤 사악하게 들려왔다.
그래, 이게 악녀지.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