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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13화 (13/67)

13

눈부신 오후의 햇살이 테라스의 바닥재에 부딪히며 자잘하게 부서졌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조금 흩날렸고 바람이 싣고 오는 그 풀 냄새에 콧노래가 나왔다.

짹, 째재잭.

이름 모를 새소리까지, 오늘은 정말 완벽한 날이었다.

그래.

이곳에 온 후 오늘보다 더 완벽한 날은 결코 없었다고 장담했다.

“엠마.”

“예?”

“한잔 더 가져다줄래?”

빈 잔을 턱짓하자 엠마가 서둘러 잔을 챙겨 들었다.

그 행동이 얼마나 빠른지.

엠마가 이토록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전에는 왜 몰랐을까?

“다녀올게요, 아가씨.”

엠마는 방을 나설 때도 인사를 잊지 않았다.

이틀.

그들을 내 방에 불러 모은 지도 오늘로 이틀째였다.

이틀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 숨통을 트여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날 내 방에 모였던 사용인들은 이제 날 보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원래 같았다면 눈이 직접적으로 마주치지 않은 이상 은근슬쩍 못 본 척 무시했을 텐데.

이 저택 내에 대화를 나눌 이도 몇 생겼다.

“공녀님.”

“쿠키는 입에 좀 맞니?”

“네.”

특히, 카를로스는 내 말 상대가 톡톡히 되어 주었다.

카를로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주황 머리칼도 작게 흔들렸다.

“다행이네.”

의원이 가져다준 멍을 빼는 약이 효과가 좋았는지 벌써 멍 자국이 많이 옅어졌다.

“한데 공녀님, 제게 왜 이런 것들을 내주시는 거예요?”

아이가 한껏 경계하는 눈초리로 날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쿠키를 두 손으로 꼭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란.

오동통한 하얀 손과 붉은 입술에 묻은 부스러기가 너무 귀여워 웃음이 흘러나오려 했다.

“의원이 그랬잖아. 먹는 거 신경 쓰라고.”

카를로스가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내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싫어?”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하지만, 너와… 아, 카를로스라 불러도 될까?”

아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스. 너와 친해지고 싶어서.”

“공녀님이 저 와요?”

“응. 사실 난 친구가 별로 없거든. 그래서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

“친구? 저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요?”

카를로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응. 그래 줄 수 있을까?”

“하지만 제가 감히 어떻게….”

카를로스는 내 부탁이 어려운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전 할 수 없어요.”

“그래? 아쉽다.”

한참 고민하듯 인상을 쓰던 카를로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거절이었다.

“그럼 앞으로 이 쿠키들은 누구와 먹어야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다음 주쯤엔 아이스크림도 같이 나눠 먹고 싶고. 가을이 오면 단풍 구경도 가고 싶고. 겨울엔 함께 눈놀이한 후 돌아와 초콜릿 우유를 나눠 먹고 싶은데.”

“…….”

“역시 안될까?”

아이의 굳게 닫힌 입술이 조금씩 움찔거렸고 그럴 때마다 통통한 볼살도 조금씩 떨려왔다.

‘귀여워.’

생전 본적 없던 귀여움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한껏 진지해 보이는 카를로스의 눈빛에 입을 꾹 다물었다.

카를로스의 긴 속눈썹이 느리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혹시 내가 싫어? 그렇다면 하는 수….”

“아뇨! 싫지 않아요!”

고맙게도 카를로스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뭐 카를로스가 싫다고 대답한다 해도 포기하지는 않았겠지만.

“싫은 건 절대 아니에요. 단지, 제가 어떻게….”

“내가 싫진 않다는 거지?”

“네.”

“그럼 우린 이제 친구지?”

“…네.”

“그래, 좋아.”

나는 쿠키가 담긴 그릇을 카를로스 쪽으로 조금 더 밀며 밝게 웃었다.

“많이 먹어. 친구.”

제국 최고의 기사가 될 그와 친해진다면.

내 목숨을 앗아갈 그와 친해진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감사해요.”

아이가 눈을 곱게 접고 환히 웃었다.

그 순수한 웃음을 보고 있으니 불순한 의도로 친목을 맺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웃음에 순간적으로 마음이 불편해진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똑똑.

“아가씨, 음료 가져왔습니다.”

그때 엠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마워.”

나는 적절한 타이밍에 돌아와 준 엠마에게 고맙다 말했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저 엠마.”

“네?”

“혹시 조그만 사진 못 봤어? 한 이 정도 크기의 사진 말이야.”

로켓에 들어갈 만한 크기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만들어 엠마에게 물었다.

혹시 보지 않았을까? 하고.

아무리 온 방을 다 뒤집어도 로켓에 들어있었을 만한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패트리샤의 방에서 사진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못 봤습니다.”

“그래?”

엠마가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그녀에 하는 수 없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정말 슬픈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소공자 어머니의 사진은 찾을 수 없을 듯했다.

“혹시라도 찾게 된다면 꼭 내게 가져와.”

“네, 알겠습니다.”

엠마는 그 대답을 하고는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하아….”

진짜 페르리샤는 게르하르트 공작부인의 사진을 어떻게 한 걸까.

아무래도 그 작은 사진을 찾아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만약 그렇다면 언제까지 로렌스를 찾아가야 하는 걸까?

그가 이제 그만 와도 된다고 할 때까지?

아마 그가 그 사진을 포기할 때까지 찾아가야겠지.

아무래도 로렌스와의 관계성을 바꾸기는 그른 듯했다.

그 사진을 찾아가도 용서해줄지 말지 일 텐데.

“저 공녀님, 무슨 고민 있으세요? 표정이 안 좋으세요.”

“어? 아냐.”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카를로스에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과자 좀 더 먹어.”

사진을 어떻게 해야 찾아낼 수 있을지 그 걱정에 답답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작게 웃어 보였다.

* * *

“공녀님,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주세요.”

게르하르트 사용인의 안내를 따라 다시 그 응접실로 들어왔다. 약 일주일만의 방문이었다.

“그럼 차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네.”

탁.

그렇게 문이 닫히고 나는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지만 그 사진은 역시 찾지 못했다.

차라리 보석이라면 더 찾기 쉬웠을 텐데.

찢기기도 손상되기도 버리기도 쉬운 사진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하아….”

그 작은 사진을 찾아내야 한다는 이 상황이 막막하고 답답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로렌스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패트리샤에게 당연한 걸 요구하는 거니.

“이게 노력으로 될 문제면 이렇게 막막하진 않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그 사진을 찾아내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애꿎은 머리칼만 연신 쓸어넘겼다.

그래도 이 답답한 상황 속, 한가지 빛이 있다면 더는 외출하느라 공작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엠마가 알아서 다 도와주니 말이지.

그래, 그것 하나는 확실히 편해졌다.

똑똑.

그렇게 하등 쓸모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들어왔다.

“소공작님,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나는 서둘러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왠지 그의 표정이 더 안 좋아 보였다.

무척이나 화가 난 듯한 얼굴을 한 로렌스는 인사는 받아주지도 않고 그대로 내 앞자리에 앉아버렸다.

덕분에 어색하게 서 있던 나는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는 척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

아무 말 없이 노려만 보는 로렌스에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너무 미안해 눈도 마주칠 수 없다는 듯.

그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 반성 중이라는 것을 티 내며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미안한 앉아 있었다.

“하?”

그러나 그 모습조차 로렌스에겐 화가 되는 듯했다.

“사진은 못 찾았어요. 죄송해요.”

“…….”

로렌스의 침묵에 나는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바빴나 봐?”

그렇게 점점 내려가던 턱이 거의 쇄골에 닿기 직전에 그가 입을 열었다.

“네?”

“일주일 만에 찾아왔잖아. 많이 바빴나 봐.”

고개를 들어 본 로렌스는 뭔가 기분이 단단히 꼬인 듯했다.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 행동이 무척 아니꼬운 듯했다.

‘아니, 어느 부분이?’

나는 서둘러 그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바빴나 봐? 일주일 만에 찾아왔잖아. 많이 바빴나 봐.’

내가 바쁜 게 싫었던 걸까?

내가 바빠서 제 사진을 똑바로 찾지 않았을까 봐?

“아니요.”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진짜 바쁘지 않았기도 했고. 그의 사진을 건성으로 찾은 건 아니었으니 조금 억울했다.

열심히 찾아봤는데도 못 찾은 거였지, 대충 찾은 건 정말 아니었다.

“바쁘지 않았어요. 전혀요.”

“하?”

그러나 로렌스는 왠지 더 화가 나 보였다.

그의 입매에선 이젠 비웃음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대체 왜 화가 난 거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가 왜 화가 난 건지 조금도 감이 오지 않았다.

“저, 소공작님.”

나는 부디 그의 화가, 그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리기를 바라며 상자를 건넸다.

“이건 케이크예요.”

나는 유명 베이커리의 케이크 상자를 그에게 내밀었다.

부디 그의 화가 조금은 풀리기를 바라며.

예로부터 그런 말이 있지 않았나.

먹을 걸 나눠주는 사람 중 나쁜 사람은 없다고.

부디 그가 나를 조금만 좋게 봐주길 바랐다.

“…….”

그러나 내 바람과 달리 로렌스는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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