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뭐 하는 거지?”
“네?”
“내가 케이크 싫어하는 거 모르나?”
“…싫어하신다고요?”
‘젠장.’
케이크를 싫어한다니.
디저트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들어 본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케이크를 싫어한다니.
어쩐지 성격이 거지 같더…
“네가 그걸 몰랐을 리는 없고. 이건 또 뭐 하자는 거지?”
“아니, 몰랐어요.”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가 케이크를 싫어하는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러나 내 대답에 로렌스의 얼굴은 더욱 구겨졌다.
“됐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가 날 노려보았다.
“앞으로 딱 일주일. 그 안에 사진을 못 찾아내면 더는 나도 못 봐줘.”
“…….”
“그간 네가 나에게 했던 만행들. 나도 얘기할 수밖에 없어.”
로렌스가 마지막 경고하듯 으르렁거렸다.
“아니면 지금 말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그 말을 마친 로렌스는 시계를 흘긋 바라보았다.
“곧 헤라르일라 공작이 올 시간이니 말이야.”
“…..네?”
로렌스의 말에 순간 앉아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헤라르일라 공작이 온다고요?”
나는 휙 하니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봤다.
“언제요? 언제 온대요?”
곧 있으면 세시였다.
만에 하나 이곳에서 헤라르일라 공작을 마주친다면 일이 아주 복잡해지는데….
“……”
공작은 내가 사람들을 만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공작에게 외출을 들켰던 그 날엔 수도 광장을 구경했다고 말했기에 그나마 그 정도로 끝난 것이었다.
한데 게르하르트 공작저에서 그를 만나게 된다면.
“공작님이, 그러니까 아버지가 언제 온대요?”
“세시.”
젠장.
나는 응접실의 문을 향해 뛰어가다 급하게 몸을 틀어 창문을 향해 뛰었다.
“미쳤나 봐.”
헤라르일라의 마차가 게르하르트 공작저 앞에 멈춰 섰고 곧이어 헤라르일라 공작이 내렸다.
“왜 그래?”
어느샌가 소공작이 옆으로 다가와 같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 만나기로 하셨어요?”
“뭐?”
“제가 여기 있는 거 들키면 안 되거든요.”
“뭐야, 왜 이래?”
덥석 로렌스의 손을 붙잡자 그가 살짝 제 손을 몸쪽으로 당겼다.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네?”
“….”
“앞으로 정말 소공작님이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그러니까 한 번만 도와주세요.”
“….”
“제발요. 제가 여기 있는 걸 들키면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당황한 듯 로렌스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나는 그가 내 손을 뿌리치기라도 할까 봐 더욱 힘껏 그를 붙잡았다.
이곳에서 헤라르일라 공작저까지 들키지 않게 가기란 로렌스의 도움 없인 불가능했다.
“제발요.”
“…….”
“안 들키게만 해주면 되는 거지?”
“네!”
잠깐의 침묵 끝, 로렌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도와주겠다 말했다.
“잠깐 기다려.”
로렌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날 혼자 남겨두고 응접실 문을 나섰다.
“하아….”
생각보다 로렌스는 쉽게 도와주겠다 말했다.
뭘 어떻게 도와주려는 건진 몰라도.
“…….”
나는 혹시 모를 일은 대비해 응접실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서둘러 창가로 다가가 다리를 올렸다.
그 커튼 뒤에 숨어있는 게 좋을 듯해서.
“패트리샤, 뭐 하는 거지?”
그러나 몸을 반쯤 올렸을 때 놀라 다가온 로렌스에 의해 다시 들려 내려졌다.
“위험하게 뭐 하는 거야?”
“아니, 만에 하나 숨어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뭐?”
그가 창문을 바라보더니 작게 고개를 저었다.
“밖까지 데려다줄게. 가자.”
“공작, 그러니까 아버지는요?”
“잠시 기다려달라 말을 전했어.”
“…….”
“가자.”
로렌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걸 들키면 안 된다는 거야?”
“아…. 제가 지금 외출 금지거든요.”
“외출 금지?”
로렌스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몰래 온 거야?”
“네.”
“언제부터?”
“…처음부터?”
“처음부터라니, 무슨 소리야?”
로렌스는 중앙계단이 아닌 사용인들만 사용하는 서쪽 계단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버지가 제가 집 바깥으로 나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세요. 근데 저번에 저택을 나갔다가 들켰거든요.”
“…….”
“근데 또 들키면.”
로렌스가 천천히 걸음을 멈췄기에 나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고개만 빼내 그의 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앞을 바라봤다.
“음?”
그러나 로렌스의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왜 멈춘 거지?’
“소공작님, 왜….”
로렌스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그럼 그래서 못 온 거야?”
“네?”
“그동안 말이야. 이번에도 일주일 만에 왔잖아.”
“…네.”
나는 로렌스가 하는 말의 뜻이 뭔지 잠시 고민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시간을 더 지체하다가는 들킬 것만 같았기에.
“저, 빨리 가는 게.”
내가 재촉하듯 그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리자 로렌스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였구나.”
로렌스가 뭐라 말을 하는 듯했지만, 그 작은 목소리는 내게까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걸음걸이가 왠지 모르게 부드러워진 것만 같았다.
“저, 혹시 눈치채지는 못했겠죠?”
“걱정하지 마.”
로렌스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네가 타고 온 건 헤라르일라 공작저의 마차도 아니잖아.”
“그래도….”
내가 불안한 듯 뒤를 흘긋거리자 그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있는 방은 창문이 없어.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
나는 로렌스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제야 마차 계단을 올랐다.
“저기!”
내 불음에 마차 문을 닫으려던 로렌스가 잠시 행동을 멈췄다.
“정말 감사해요.”
“…됐어.”
“사진은….”
“사람들에게 말하지는 않을게.”
로렌스가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은 쑥스러운 듯.
“다음 주에 봐.”
탁.
그가 마차 문을 닫고 작게 마차를 두드리자 이내 마부가 서둘러 말을 몰았다.
어째서인지 로렌스는 가만히 서서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었다.
* * *
“소공작님!”
시몬이 현관을 통해 들어오는 로렌스를 발견하고 그를 불렀다.
“공녀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
“왜 헤라르일라 공작님께 공녀님 얘기를 하지 말라고 하신 건데요?”
시몬은 그가 왜 헤라르일라 공작을 제2 응접실에서 기다리게 한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더불어 그에게 패트리샤의 얘기도 못 꺼내게 하고.
“공녀님은요?”
패트리샤 헤라르일라는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소공작님!”
시간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로렌스가 헤라르일라 공작을 기다리게 하면서까지, 대체 지금 뭘 하고 오는 길이란 말인가.
시몬이 조금 목소리를 높이자 로렌스가 걸음을 멈춰 섰다.
“아, 죄송합….”
순간 시몬은 제가 선을 넘었음을 깨닫고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갔어.”
“…네?”
“패트리샤는 갔다고.”
그러나 로렌스는 어쩐지 시몬의 실수에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패트리샤가 갔다는 로렌스의 답이 시몬의 궁금증을 온전히 해결해주지는 못했지만, 시몬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고 작게 고개만 끄덕거렸다.
* * *
“헤라르일라 공작님, 기다리게 해 죄송합니다.”
로렌스의 말에 헤라르일라 공작이 천천히 응접실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자신을 제2 응접실로 안내한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른 응접실이 지금 공사 중이라 불가피하게 이곳으로 모시게 됐습니다.”
로렌스가 그런 공작의 마음을 눈치채고 이유를 덧붙이자 그제야 헤라르일라 공작이 얼굴에 연한 미소를 띠었다.
“공사 중이라니, 하는 수 없군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게르하르트 공작님을 뵌 지도 꽤 됐는데 그간 별 탈 없으신가요?”
“네, 건강하십니다. 아버지껜 제가 공작님의 안부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렌스가 작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이만하면 서로 예는 차렸다.
더 이상 헤라르일라 공작과 나눌 시시콜콜한 얘기도 없었을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듯 로렌스가 차를 들이켰다.
“한데 지난주에 공작저에 방문하셨다고요?”
로렌스가 찻잔을 내려놓고 시몬을 부르려던 그때 헤라르일라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헤라르일라 공작의 말에 패트리샤가 울던 그 날을 떠올린 로렌스가 옅은 신음을 흘렸다.
“패트리샤를 찾았다던데. 그 아이는 왜 찾으신 겁니까?”
헤라르일라 공작은 그 작은 눈으로 로렌스를 집요하게 살폈다.
“혹 그 아이가 소공작님께 뭔가 실수라도….”
“…아닙니다.”
로렌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걸 들키면 안 돼요.’
제 손을 부여잡고 그렇게 부탁하던 패트리샤의 애타는 얼굴이 떠올라 로렌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저 이곳에 있는 것도 들킬까 봐 그렇게 겁먹었던 패트리샤였다.
한데 그간 있었던 그녀의 잘못을 얘기한다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럼 그 아이는 왜 찾으신 겁니까?”
“…….”
헤라르일라 공작의 물음에 로렌스가 잠시 머뭇거렸다.
제가 패트리샤를 찾아갔던 이유.
패트리샤에게 피해가 가지 않고, 헤라르일라 공작이 의심하지 않을 만한 합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로렌스는 작게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부탁할 게 있어서 찾아갔습니다.”
“부탁? 패트리샤에게요?”
로렌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소공작이 그 아이에게 무슨 부탁을….”
헤라르일라 공작은 한껏 경계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이번에 열리는 별빛 무도회에.”
“…….”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로렌스가 다시 한번 숨을 들이마시며 마저 말을 이었다.
“부탁했습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