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도 과연 이게 맞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패트리샤를 위해 제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혹 지금 저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있는 건 아닐지.
말을 내뱉는 그 찰나의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밀려왔다.
“제가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로렌스는 기어코 말을 뱉어버렸다.
제 손을 부여잡고 간절히 부탁하던 패트리샤의 그 연보랏빛 눈동자가 아직도 아른거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껏 겁먹은 그 목소리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고맙다며 손을 흔들던 그 모습 때문일까.
“패트, 패트리샤에게.”
“…….”
“패트리샤에게 파트너 신청을 하셨다고요?”
로렌스의 말에 헤라르일라 공작은 혼란스러운 듯 말까지 더듬었다.
“네.”
혼란스럽기로 따지면 로렌스도 헤라르일라 공작에게 뒤지지 않았지만, 그는 천천히 고개만 끄덕이었다.
“…왜, 소공작께서 왜?”
“…….”
로렌스는 그 질문에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도 아직 제가 왜 이런 말을 내뱉은 건지 스스로 이해되지 않았다.
패트리샤에게 그렇게 당해놓고, 얼마나 멍청하면 스스로 그녀에게 기회를 쥐여줄 수 있는지.
그러나 오늘 본 패트리샤의 눈빛은 평소의 정신 나간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요 몇 번 만났을 때의 패트리샤는 확실히 변한듯했다.
“필요해서요.”
어쨌거나 제겐 사실을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제 어머니 사진의 행방을 모른다던 패트리샤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파트너가 필요했습니다.”
그녀가 정말 변한 것인지, 그저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 * *
“공작님, 거래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헤라르일라 공작을 기다리고 있던 그의 보좌관이 게르하르트 저택에서 나오는 헤라르일라에게 물었다.
그러나 헤라르일라 공작은 물음에는 답이 없었고 어딘지 넋이 나간 듯 보였다.
“공작님?”
“당장,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야겠어.”
그리 말한 헤라르일라는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잠깐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전 그런 얘기는 들어 보지 못해서요. 그래서 그 아이는 뭐라고 했습니까?”
“….”
“패트리샤가 뭐라고 답했습니까?”
“생각해보겠다고 하더군요.”
“생각?”
“아무래도 급작스러웠나 봅니다. 다음 주에 한 번 더 찾아가 답을 듣기로 했습니다.”
로렌스가 그 말을 마치더니 시몬을 불러들였다.
“시간이 많지 않아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로렌스는 시몬이 가져온 서류를 뒤적거리며 뭔가 확인하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저희 호텔에선 이미 질 좋은 와인의 물량을 확보해서요. 다른 와인 거래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아….”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 한숨이었다.
그런 헤라르일라 공작에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보좌관이 더는 참지 못하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공작님,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나요?”
“…아직 모르는 일이지.”
“네?”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르는 일이라고.”
헤라르일라 공작의 말에 보좌관의 얼굴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거래에 관한 미팅을 마치고 나오면서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라니.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아직 어리긴 하나 한 번 한 말을 번복하는 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아직 모르는 일이라니.
“잘만 하면 와인 따위가 아니라 더 큰 걸 바랄 수도 있겠어.”
“…그게.”
“패트리샤를 내 방으로 부르게.”
헤라르일라 공작은 마차가 멈추자마자 직접 문을 열고 내렸다.
그렇게 다급해 보이는 헤라르일라 공작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당장!”
“예, 알겠습니다.”
어딘지 화가 난 듯한 공작의 모습에 보좌관은 그제야 깨달았다.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으며 헤라르일라 공작은 아직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걸.
공작의 화를 감당해야 할 패트리샤 공녀가 불쌍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제가 공작의 화를 받아내고 싶지도 않았다.
보좌관은 서둘러 집사에게 헤라르일라 공작의 명을 전했다.
* * *
똑똑.
“공녀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저절로 어깨가 흠칫 떨려왔다.
집사가 왜 나를.
분명 헤라르일라 공작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이곳까지 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당당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러나 집사의 그 말에 애써 지어낸 표정은 단번에 구겨지고 말았다.
“아버지께서 절 찾으신다고요?”
“네. 지금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왜요?”
그러나 집사는 더는 해줄 말이 없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헤라르일라 공작이 화가 났을 때, 집사는 이런 반응을 보였다.
“화나신 것 같았나요?”
“모르겠습니다.”
“하아….”
집사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니.’
그가 하는 답이 얼마나 무성의한 것인지 헤라르일라 공작의 화난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 것이었다.
헤라르일라 공작은 제 화를 숨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공작은 화났을 때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만큼 붉어지고 그보다 더 흥분하면 콧구멍까지 벌렁거리곤 했다.
그런 공작을 두고 화났는지 모르겠다는 집사의 말은 그저 이 상황에 별로 끼고 싶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패트리샤에게 성심껏 답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고.
“네. 지금 갈게요.”
“그럼.”
집사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문을 닫았다.
탁.
문이 닫히고 참았던 한숨을 뱉던 그때, 벌컥 문이 다시 열렸다.
“아가씨! 집사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엠마가 한껏 걱정되는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공작님이 모든 걸 알게 된 거죠? 그렇죠?”
그녀는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내 손목을 부여잡았다.
노크도 없이 방에 쳐들어오더니 이젠 함부로 덥석 몸을 잡기까지.
엠마는 지금 제 행동이 무례하다는 걸 깨닫지 못한듯했다.
“그러게, 게르하르트 공작저는 왜 가셔서.”
그래.
공녀인 나도 이렇게 두려운데 시녀인 엠마는 얼마나 더 무섭겠는가.
하여 그녀의 무례쯤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려 했다.
“어차피 공녀님께서 아무리 애를 써도 게르하르트 소공작님은 공녀님께 눈곱만치도 관심 없다고요! 제가 소공작님이었다면 진작에!”
“엠마.”
정말 이해해주려 했건만, 조금만 더 놔두면 면전에 대고 욕이라도 할 듯해 그녀를 멈춰 세웠다.
“좀 진정해.”
“흑, 흐윽.”
엠마는 기어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마 들키지는 않았을 거야.”
공작저에서 혼자 도망친 거면 몰라도 로렌스가 도움을 주었다.
이 소설의 최강자 로렌스가 도와주었다.
이 소설의 최강자 로렌스가 도와주었으니, 공작에게 들켰을 리 없었다.
“그럼 왜 공작님께서 공녀님을 찾으시는 건데요? 게르하르트 공작저에 다녀오신 후에 말이에요!”
“그러게.”
“흑, 흐윽!”
엠마의 울음소리가 다시 한번 커졌다.
아무래도 억울한 모양이었다.
“엠마. 이제 아버지께 가 봐야 해. 신세 한탄은 그쯤 해둬.”
나 때문에 저까지 불똥 튈까 억울한 모양이었다.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고 싶은 모양인데. 내가 이 저택을 빠져나갈 때 아버지가 모르게끔 하는 것이 네 일이었어. 공작의 일정 정도는 네가 알고 있었어야지.”
이제 와 서로의 탓을 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았다.
“내가 지금 널 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 뭐가 억울하다고 그렇게 질질 짜고 있니?”
엠마가 뭘 두려워하는 건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혼나러 가는 건 결국 나였다.
나도 심경이 복잡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 와중에 엠마를 먼저 달래줄 만큼 이타적이지는 못했기에 말이 조금 사납게 나갔다.
“만에 하나 아버지가 알게 됐다고 해도 넌 모르는 일인 거야.”
“…네?”
“내가 저택을 빠져나간 거. 넌 모르는 일이었다고. 다 나 혼자 한 일이니까 만에 하나 네게 물어보면 모르는 척해.”
“…공녀님?”
“뭐 내가 말 안 했어도 그렇게 답할 생각이었니?”
그제야 엠마의 눈물이 차츰 멈춰 들었다.
“원하는 답은 들었잖아. 그만 나가.”
엠마는 날 힐긋거리며 몇 번 머뭇거리더니 후다닥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내가 혹여나 마음이 바뀌어 말을 바꾸기라도 할까 걱정되는 듯 빠른 움직임이었다.
“하아….”
놀라울 만치 이기적인 엠마의 행동에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쯧.”
엠마에게 호의를 베푼 건 그녀가 우는 모습이 불쌍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이 저택에서 내가 부릴 수 있는 몇 없는 사람이었고, 그런 엠마가 날 도와준 게 들킨다면 결국 내 돈을 받아먹었던 모두가 들킬 테니 그런 것뿐이다.
들킨다면 그들은 두 다리 멀쩡히 걸어 나가지 못할 것이다.
만약 나 때문에 그렇게 두들겨 맞고 쫓겨난다면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젠장.
내가 엠마에게 호의를 베푼 건 단지 그 때문이었다.
* * *
똑똑.
“들어오거라.”
헤라르일라 공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종이 문을 열어주었다.
“후우.”
나는 짧게 숨을 가다듬고는 집무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늦었구나.”
“집사에게 말을 전해 듣는 대로 바로 왔습니다.”
나는 공작의 얼굴을 바라보다 작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의 얼굴은 그다지 새빨갛지 않았고 그의 콧구멍도 심하게 벌렁거리지 않았다.
공작은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날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거슬리긴 했지만.
“왜 부르신 거죠?”
그걸 제외하면 아직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공작은 아무래도 내가 게르하르트 공작저에 다녀온 사실은 모르는 듯했다.
“…내게 숨기는 게 있지?”
“……예?”
숨기는 게 있다니.
“왜 내게 말하지 않은 거지?”
“…….”
그가 날 집요하게 훑어보던 시선을 거뒀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